한산이씨 해산공파 시조 해산 이문영의 해산일고발문을 후손 대산 이상정이 기록하다. 2017.06.30
《해산일고》 발문 경신년(1740, 영조16) 〔海山逸稿跋 庚申〕
海山逸稿跋 庚申
해산일고발 병신
우리 5대조 승선(承宣) 부군은 타고난 자질이 호탕하고 행실과 재주가 일찍부터 뛰어났다.
我五代祖考承宣府君。天資豪逸。行藝夙茂。
아오대조고승선부군. 천자호일. 행예숙물
10세에 명성이 자자하였고 겨우 20세에 진사에 오르니 당시 함께 왕래하던 사대부들은 모두 부군이 조만간 현달하여 조정에서 이름을 떨칠 것으로 기대하였다.
十歲。聲譽藉甚。甫弱冠。升上庠。
십세. 성예 자심. 보약관. 승상상
當時大夫士所與往來者。
당시대부사소여왕내자
皆期以朝暮躋顯以揚於 王庭。
개기이조모제현이양어. 왕정
그런데 시대를 만난 것이 상서롭지 못하여 큰 난리를 만나는 바람에 영호(嶺湖)와 근기(近畿) 사이에 유리하여 숨어 살면서 전후로 몇 년 동안 온갖 고생을 다 겪고 근근이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而逢時不祥。遭罹大難。
이봉시부상. 조리대난
流離竄伏於嶺湖圻郊之間。
유리찬복어영호기교지간
首尾數載。備嘗艱險。
수미수재. 비상간험
僅全一生於九危之餘。
근전일생어구위지여
이제 수암(修巖) 유공(柳公)이 지은 〈임진록(壬辰錄)〉을 읽어 보니 가슴이 막히고 비통하여 글자 하나마다 눈물을 흘리게 된다. 아아,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今得修巖柳公所爲壬辰錄者而讀之。
금득수암류공소위임지녹자이독지
掩抑悲霣。一字數涕。
엄억비운. 일자수체
於乎尙忍言哉。
어호사인언재
부군이 처음 벼슬하여 조정에 들어갔을 때는 바로 온갖 어려움에 맞닥뜨린 즈음이어서 겨우 말단 관직에 거하였다가 금세 그만두고 돌아왔다.
府君筮仕立朝。
부군서사입조
正在搶難之餘。而纔占一命。
정재창난지여. 이재점일명
旋卽解歸。
선즉해귀
해산(海山)의 옛집으로 나아가 그곳에서 살고자 하였는데 몇 년도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就海山之舊庄而欲居焉。
취해안지구장이욕거언
則曾不幾時而已下世矣。
즉증부기시이이하세의
그 덕업과 행실로 후손들에게 전할 만한 것은 이미 증명할 바가 없고, 흩어지고 남은 원고에는 오직 약간의 시편만 겨우 남아 있는데, 이는 진실로 태산(泰山)이나 화산(華山)의 검불조차 될 수 없음을 안다.
其德業行治所以垂裕後昆者。
기덕업행치소이수욕후곤자
旣無所證嚮。
기무소증향
而獨有若干詩編僅存於殘朽爛脫之餘。
이독유약간시편근존어잔후난탈지여
固知不足以備岱華之芒忽。
고지부족이비대화지망홀
그러나 이제 남은 시문이나마 읽어 보면, 여운과 기절이 맑고 원대하며 뜻이 깨끗하고 담담하여 속되고 지저분한 누가 없다.
然今讀而咏之。韻節淸遠。
연금독이영지. 운절청원
意想冲澹。翛然無有辛葷塵滓之累。
의상충담. 소연무유신훈진재지누
또 종종 시대와 세상을 근심하며 영화를 버리고 한가함을 즐기는 뜻을 담고 있다. 후세 상론(尙論)하는 선비들이 이 글을 읽어 본다면 또한 혹 이를 통해 부군이 보존하던 바의 만의 하나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又往往雜以傷時悶世遺榮樂閒之意。
우왕왕잡이상시민세유영악한지의
使後世尙論之士得而誦焉。
사후세상논지사득이송언
亦或因此而知其所存之萬一也。
역혹인차이지기소존지만일야
이제 유사(遺事)를 주워 모으고 〈임진록〉을 살펴서 요약하였으며 또 만력 기축년(1589, 선조22)의 진사 방목(進士榜目)을 시편(詩篇)의 끝에 첨부해서 집안의 고사(故事)로 갖추어 놓는다.
今攟拾遺事。翻約壬錄。
금군습유사. 번약임록
又以萬曆己丑進士榜目。幷附于詩篇之末。
우이만력기축진사방목. 병부우시편지말
以備家世故事云爾。
이비가세고사운이
경신년(1740, 영조16) 2월 계유일에 5세손 상정이 절하고 삼가 쓴다.
二月癸酉。병신이월 계유
五世孫象靖。拜手謹書。
오세손 상정. 배수근서
해산공파 약와 이현정 후손 이대원 삼가 차운하다
첫댓글 '수암 류공'은 서애 류성룡 선생의 셋째 아드님인 류진으로, 바로 해산공 휘 문영 할아버지의 처남되는 분이었지요. 부친되는 서애 대감의 학문을 제대로 이은 서애학파의 적통으로 잘 알려져 있고, 부전자전--성격이 강직하고 청렴하여서 벼슬길에 나가서도 남의 눈치 전혀 안보며 옳고 그름의 시비를 분명히 밝혔던 목민관이었습니다. <임진록> 은 수암선생이 11살때 매형인 해산공과 큰 누이 풍산류씨 및 그 식솔을 따라 피난다니며 보고 느꼈던 생생한 체험담을 나중 어른이 된 한참후에 한글로 기록한 국문수기문학의 백미로 꼽히는 저서입니다. 하회 풍산류씨 중에서도 수암선생 후손들로부터 나중 현달하고 이름을 빛난 인물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혈연-학연면에서 후대에까지 소호문중과 여러곂으로 인연이 만들어 지면서 우리 선조님들과 인연이 상당히 깊던 분이셨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