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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나라
민수기 33:50 - 34:29
50-56
50. 여리고 맞은편 요단 가 모압 평지에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51.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52. 그 땅 거민을 너희 앞에서 다 몰아내고 그 새긴 석상과 부어 만든 우상을 다 파멸하며 산당을 다 훼파하고
53. 그 땅을 취하여 거기 거하라 내가 그 땅을 너희 산업으로 너희에게 주었음이라
54. 너희의 가족을 따라서 그 땅을 제비뽑아 나눌 것이니 수가 많으면 많은 기업을 주고 적으면 적은 기업을 주되 각기 제비뽑힌 대로 그 소유가 될 것인즉 너희 열조의 지파를 따라 기업을 얻을 것이니라
55. 너희가 만일 그 땅 거민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지 아니하면 너희의 남겨 둔 자가 너희의 눈에 가시와 너희의 옆구리에 찌르는 것이 되어 너희 거하는 땅에서 너희를 괴롭게 할 것이요
56. 나는 그들에게 행하기로 생각한 것을 너희에게 행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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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1-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2.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때에 그 땅은 너희의 기업이 되리니 곧 가나안 사방 지경이라
3. 너희 남방은 에돔 곁에 접근한 신 광야니 너희 남편 경계는 동편으로 염해 끝에서 시작하여
4. 돌아서 아그랍빔 언덕 남편에 이르고 신을 지나 가데스 바네아 남방에 이르고 또 하살아달을 지나 아스몬에 이르고
5. 아스몬에서 돌아서 애굽 시내를 지나 바다까지 이르느니라
6. 서편 경계는 대해가 경계가 되나니 이는 너희의 서편 경계니라
7. 북편 경계는 이러하니 대해에서부터 호르 산까지 긋고
8. 호르 산에서 그어 하맛 어귀에 이르러 스닷에 미치고
9. 그 경계가 또 시브론을 지나 하살에난에 미치나니 이는 너희 북편 경계니라 10. 너희의 동편 경계는 하살에난에서 그어 스밤에 이르고
11. 그 경계가 또 스밤에서 리블라로 내려가서 아인 동편에 이르고 또 내려가서 긴네렛 동편 해변에 미치고
12. 그 경계가 또 요단으로 내려가서 염해에 미치나니 너희 땅의 사방 경계가 이러하니라
13.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가로되 이는 너희가 제비뽑아 얻을 땅이라 여호와께서 이것을 아홉 지파와 반 지파에게 주라고 명하셨나니
14. 이는 르우벤 자손의 지파와 갓 자손의 지파가 함께 그들의 종족대로 그 기업을 받았고 므낫세의 반 지파도 기업을 받았음이라
15. 이 두 지파와 반 지파가 여리고 맞은편 요단 건너편 곧 해돋는 편에서 그 기업을 받았느니라
16.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17. 너희에게 땅을 기업으로 나눌 자의 이름이 이러하니 제사장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니라
18. 너희가 또 기업의 땅을 나누기 위하여 매지파에 한 족장씩 택하라
19. 그 사람들의 이름은 이러하니 유다 지파에서는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요
20. 시므온 지파에서는 암미훗의 아들 스므엘이요
21. 베냐민 지파에서는 기슬론의 아들 엘리닷이요
22. 단 자손 지파의 족장 요글리의 아들 북기요
23. 요셉 자손 중 므낫세 자손 지파의 족장 에봇의 아들 한니엘이요
24. 에브라임 자손 지파의 족장 십단의 아들 그므엘이요
25. 스블론 자손 지파의 족장 바르낙의 아들 엘리사반이요
26. 잇사갈 자손 지파의 족장 앗산의 아들 발디엘이요
27. 아셀 자손 지파의 족장 슬로미의 아들 아히훗이요
28. 납달리 자손 지파의 족장 암미훗의 아들 브다헬이니라 하셨으니
29. 여호와께서 명하사 가나안 땅에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기업을 나누게 하신 자들이 이러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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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며 묵상하며 : 하나님의 나라((33:59-34:29)
이스라엘 백성들의 책임(50-56)
이스라엘 백성이 정착하게 될 가나안 땅은 우상이 가득한 땅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땅을 하나님을 섬기는 땅으로 바꾸어 나가야 합니다. 우상과 그 땅 거민을 몰아내고 하나님을 향한 섬김이 가득한 땅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만일 그 땅 거민을 몰아내지 못한다면 그로 인해 큰 해를 입게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죄악을 멀리하지 않고 우리 가운데 죄를 용납한다면 우리 역시 큰 어려움을 겪을 것입니다. 특이한 점은 이들이 땅을 분배하는 방법입니다. 이스라엘은 그 가족의 경제적인 기준이나 권력의 기준에 따라 땅을 나누지 못합니다. 오직 가족의 숫자에 따라 그들이 살게 될 땅의 많고 적음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까지 제비로 뽑기 때문에 분배로 인한 분쟁의 소지를 주지 않았습니다. 이는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참으로 합리적이며 공평한 방법입니다. 이스라엘은 이와 같이 세상과는 다른 원리로 움직이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에 의해 존속하는 공동체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이것이 교회와 성도의 시대적인 사명입니다.
지혜로운 경영(34:1-29)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정착하게 될 가나안 땅의 경계를 정확하게 말씀해주셨습니다. 이 땅의 경계는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것과는 약간 차이가 있었지만 이것은 솔로몬 때에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자라가는 하나님의 나라의 개념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땅을 분배하는 것을 모세에게 맡기지 않으셨습니다. 각 지파의 대표들에게 이것을 맡기셨습니다. 조직과 경영적인 생각이 기독교적인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진 분들이 혹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합리적이며 성경은 공동체를 이끌어갈 때 경영적인 요소를 항상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이와 같은 조직적인 경영은 지혜입니다. 우리는 어차피 혼자서 모든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섬김과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공동체입니다. 나의 은사와 재능을 따라서 일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어떤 지혜가 필요한지 묵상해보도록 합시다.
일용할 양식/2003년 03월 27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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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회복 : 한국 교회의 자화상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 최근 CBS, 국민일보와 공동으로 만 20세 이상의 성인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한국교회를 신뢰한다’는 응답자는 18.4%인데 반해 ‘불신한다’는 비율은 무려 48.3%로 한국교회의 신뢰도를 점수로 환산하면 5점 만점에 2.55점으로 학점으로는 ‘C-‘에 해당하는 낮은 점수를 받았다. 다른 종교와 비교했을 때도 카톨릭교회에 대해서는 35.5%가, 불교는 31.1%가 ‘신뢰한다’고 응답한데 반해 개신교회는 18%만이 신뢰한다고 밝혀 세 종교기관 사이에서 가장 낮은 수치를 보였다.
한국교회가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가장 열심히 해야 할 활동과 관련해서는 응답자의 상당수가 봉사와 구제활동 (47.6%)을 꼽아 한국교회가 교회성장주의에서 벗어나 사회 봉사에 더욱 힘써야 함을 시사했다.
이번 조사의 책임연구원인 김병연 서울대 경제학교수는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조사는 개신교인들의 삶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조여주는 것’이라며 ‘개신교인들이 보다 윤리적인 삶을 살고 한국교회는 개 교회 주의에서 벗어나 세상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방법을 익혀야 한다’고 조언했다.
한국교회의 부끄러운 실상의 한 단면을 여실히 보여준 사례라 할 수 있다.
십자가의 피 끓는 사랑의 표출을 표방하며 사회의 약자들, 소외계층들, 병약한 자들 등을 찾아 어루만지며 보듬고 나누며 세우고 교육시키는 일에 상당한 책임을 감당해 왔노라 자화자찬했지만 결국 생색내기에 불과한 것이었다며 도매 급으로 싸잡아 손가락질을 받고 있는 것이 한국교회의 어그러진 자화상이다.
많은 수고와 헌신과 나눔의 실천적 모습이 있었다지마는 그러한 사명들을 가능케 한 십자가의 궁극적 사랑이 뒷전으로 밀려남으로 사회참여의 순수성을 분실한 채 집단이기주의만이 득세하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어느새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앞서기 보다는 오히려 그 예수님의 사랑으로 인한 우연과 요행과 안일을 통한 개교회의 이득 챙기기에만 몰두함으로 빚어진 사태이다. 즉 이웃과 사회에 다가가려는 실천적 노력과 헌신이 실재하였음에도 예수 그리스도 사랑의 표출의 부재가 오늘날 한국교계에 제 2의 종교개혁을 부르짖게 한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1900년대 초, 복음이 처음으로 전파되던 초창기 시절 전 국민의 2%도 안되던 적은 수의 크리스챤과 교회가 나머지 98%의 국민과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던 요인은 바로 꺼지지 않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에 근거한 헌신이었기 때문이었다. 무엇을 하든지, 왜 하든지, 어떻게 하든지, 누구에게 하든지 그 실천적 삶의 모습과 형편은 예수님의 사랑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참으로 의료, 교육, 문화, 사회 모든 계층을 아우르는 전 방위적 영향력의 바로미터는 십자가 대속의 사랑이었던 것이다.
교회는 마르지 않는 ‘영혼의 고귀한 쉼터’로 방황하며 목말라하는 영혼들을 해갈시키고 급변하며 요동치는 사회질서와 정서에 어느 누구나 믿고 의지할 수 있는 평안의 ‘안식처’였으며 사회의 각종 부조리와 앞장서 대처하여 정화하며 개혁하고 건전한 사회상과 민족성을 고취시키는 올바른 ‘윤리 운동의 본거지’로서의 청지기 사명을 잘 감당하였다.
또한 성도는 강력한 회심 운동의 여파로 사회 전반에 전천후적 변화의 불을 지피는 ‘아궁이’였으며 정직과 공의를 삶의 현장에다 그대로 옮겨 심는 ‘양심의 파수꾼’이었고 사회적 혼란기에 구별된 자들로서 신실하게 사명을 감당한 사회 지탱의 ‘버팀목’이요 사회의 ‘마지막 보루’였다.
이처럼 당시 2% 미만의 지극히 작은 수의 교회와 성도였지만 시대적 사명을 앞장서 감당할 수 있었던 원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품고 그 사랑을 구심점으로 한 사심 없는 헌신이었기 때문이었다. 즉, In Jesus(예수 안에서), By Jesus(예수에 의한), For Jesus(예수를 위한) 사역이었으며, 궁극적으로 ‘Full of Jesus’(예수로 충만)로 사회참여에 상당한 역할을 감당했었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오늘의 한국교회와 성도의 형편은 어떠한가?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과 가르침은 분실 된지 오래고 십자가의 궁극적 사랑마저 자취를 감추며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며 느슨해져 가는 것이 부정 못할 현실은 아닌지? 병든 사회와 문화를 정화하며 선도하기는커녕 오히려 시대적 조류에 파묻히거나 편승하여 사회 문화의 부조리를 조장하거나 방관함으로 복음에 역행하는 부끄러운 삶을 연명하고 있지는 않는지? 객관적이며 합리적이고 냉철한 자문자답의 시간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다. 문제의 심각성에 공감하고 적극적인 대안마련과 제시를 통해 ‘In and Out’(안과 밖)을 일신하여 교회부흥의 재도약으로 삼는 결단이 한국교회에 시급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뿌리깊은 교회의 집단이기주의를 시급히 청산해야 한다. 또한 각개 전투 식 개교회의 무분별한 생색내기 사회참여에 과감하게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의 실종으로 인해 사회의 덕은커녕 사회의 짐 덩어리로 전락해 버린 교회의 참 모습을 회복하는데 모든 노력을 기울어야 할 것이다.
한 알의 밀알이 반드시 죽어야 다시 소생하는 것처럼 교회와 성도는 내면의 모든 찌꺼기들을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걸러내고 말씀 앞에 온전히 죽을 때 존귀하신 하나님께서는 새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시어 시대의 사명을 감당케 하실 것이다. 너와 내가 죽지 못하고 교회가 죽지 못함으로 사랑의 출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또 다시 십자가에 못질하는 죄를 되풀이 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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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하며 적용하며
1. 내가 속한 공동체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있습니까?
2. 내가 속한 공동체가 어느 정도 자라가고 있는지 살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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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신하며 간구하며
하늘에 계신 우리들의 아버지 하나님!
하나님의 창조세계에서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하늘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 속에서 함께 도우며 살아가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특히 궁핍한 처지에 있는 이들을 돌아보며 그들의 필요를 채워줄 것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주심도 감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간곡히 부탁하신 '가난한 자', '고아와 과부'를 비롯한 이웃의 궁핍에 관심을 갖고 나누지 못하고 더 화려하고 더 위대한 것만을 추구했던 우리의 어리석음을 고백합니다.
이제 이 땅의 교회들이 하늘 아버지의 마음을 품게 하소서.
아버지의 그 거룩한 뜻을 받들어 이웃의 궁핍에 관심을 가지고 구체적으로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그리고 그 궁핍의 원인을 제거하는 일과 그들이 살아가기에 너무도 열악한 사회적인 구조를 개선해 갈 수 있도록 교회에 지혜와 힘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