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 43 ( 전북 익산 달빛소리수목원 – 미륵사지 – 원광대학교 자연수목원)
황무지를 개척하고 손끝의 온기에 정성을 다하여 영혼까지 가지런히 쏟는 일, 그것이 이른 봄에 꽃씨를 심는 마음이다. 그곳에서 줄기가 엉키고 때로는 잎이 부딪히면서 화창한 봄날에 드디어 꽃을 피워내는 것이다. 우리는 화려하게 우거진 꽃과 잎의 조화를 감상하며 그때를 봄이라 한다. 그렇게 봄을 맞아 꽃 한 번 들여다보고 나면 어느새 가을이 아니던가? 바쁜 일상이 아니라도 창문 너머 가을이 스치는데 그냥 떠나보내기에는 아깝고 그지없이 아쉽다. 그래서 짧은 가을날 잠시 숨 돌려보는 오늘은 전라북도 익산에 있는 민간정원 달빛소리 수목원을 찾아 가을을 만나기로 한다. '민간정원'은 법인이나 단체 또는 개인이 가꿔온 정원을 국민이 함께 즐길 수 있도록 개방하는 정원으로 전국에 150여 개소가 운영되고 있다. 한편 전국 민간정원을 대상으로 산림청과 한국수목원 정원관리원이 선정한 ‘대한민국 아름다운 민간정원 30선’에는 전남에 10개소가 있어서 전국 최다를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전남에 있는 가까운 민간정원을 두고 멀리 익산까지 떠나는 까닭은 정원투어라기 보다는 거침없이 달릴 수 있는 고속도로 가을여행까지 즐겨보기 위하여 달빛소리 수목원을 택하여 출발하였다. 단풍의 절정기를 잘 파악하여 오롯이 단풍을 보는 맛도 있지만 가을의 정취 속에 홀로 우뚝 선 고목이랄지 끝없이 펼쳐진 은빛 억새밭과 불처럼 타오르는 핑크뮬리를 오밀조밀 만나보면 차라리 내가 가을인 냥 새삼 인생을 느껴보기도 한다. 그렇게 가을은 정갈하지 않아도 좋고 조금은 어수선하더라도 그 안에서 질서를 만날 수 있어서 좋다. 점심시간 쯤 달빛소리 수목원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보니 맞은편에 <달빛 짜장>집이 눈에 들어온다. 출발할 때는 이곳에 맛 집을 찾아 특별한 음식을 먹어보리라 생각했다가도 막상 현지에 도착하면 먹는 일에 찾고 찾아가는 시간이 아까워서 보통 익숙한 식사를 하곤 한다. 그러나 짜장면을 받아 마주하고 보니 평소에 밀가루를 피하자는 식단관리를 하다 보니 먹고 싶지만 참아왔던 식사이니 만큼 이 또한 얼마나 특별한 식사인가? 라는 생각이 든다. 마치 주택을 들어서는 듯한 입구에 입장료는 수목원 안에 위치한 카페에서 결재한다는 안내 표지판이 있어 카페부터 찾아 나서기로 한다. 카페로 가는 오르막길을 오르면 500년 넘은 당산나무가 주인보다 먼저 반기고 있다. 이는 황순원 소설 <소나기>를 모티브로 스토리텔링 하여 소나기나무라 하니 당연 눈길을 끄는 고목이다. 어쩌면 당산나무라는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은 설레임이 있었다. 수목원으로 들어서니 단정한 가을 꽃길과 구석구석 숨어있는 흥미로운 나무가 볼만하다. 구부러진 모퉁이를 돌아서면 딴 세상인 듯 진한 향기가 반기는 금목서 은목서 군락지에서는 한참을 킁킁거리고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늑한 정원에 소박하고 예쁘게 꾸며진 예식장이 있고 오늘 오후 시간에는 예식이 있는지 신부와 신랑, 그리고 하객들이 우르르 몰리는 진풍경까지 바라보면서 계절로 치면 가을 쯤 걸어오고 있는 인생에서 문득 봄 같았던 내 결혼식도 잠시 떠올려 본다. 한 시간여 동안 둘러보고 나오는 길에 입장하면서 들렀던 짜장면집 사장님을 마주쳤다. 그리고 직접 텃밭에 지어 놓으신 배추 한 포기를 쑥 뽑아 주신다. 올해처럼 채소 값이 비싼 시절에 누구라도 거침없이 쑥 뽑아 안겨주시기가 어려운데 여행 중 특별한 따뜻함을 안고 약 10km 떨어진 익산 미륵사지로 옮겨간다. 미륵사지로 가는 길은 특별히 은행나무가 많다. 역시 가을단풍이라면 은행나무가 으뜸이다. 마치 쏟아지는 황금이든지 백열전구를 켜 놓은 듯 환하게 밝히고 있는 노란 은행나무가로수는 그야말로 무르익은 가을이다. 네비를 따라 차분하게 방향을 잡아 가고 있는 내 마음까지 어쩔 줄 모르게 하고 있다. 미륵사지는 삼국시대에 창건된 백제 최대의 사찰이며 무왕과 선화공주의 설화로 유명한 미륵사의 사찰 터이다. 국보로 지정된 동양 최대 석탑인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 보물로 지정된 익산 미륵사지 당간지주가 있다. 도착해 보니 돌도 나이를 먹는 것인지 서탑은 63%가 원래의 석재를 그대로 사용했다는데 전체 9층 중 6층까지만 남아 있어 절반이 부서진 모습이다. 하지만 오래된 석재의 질감과 무게에서 풍기는 멋스러움이 돋보인다. 두 개의 탑 앞에 조성한 연못 주변까지 넓은 잔디밭이어서 하늘을 배경으로 선 탑이 더욱 도드라진다. 연못에 비친 반영이 짙은 햇살도 아랑곳하지 않고 똑똑하게 서로를 마주하고 있다. 삼각대를 세우고 포토명당에 들락날락 결코 혼자가 아닌 나와의 동행이 마냥 신나고 즐겁다. 오늘 내리는 가을햇살이 어찌 이토록 따사로운지 햇살 아래 살짝살짝 이는 가을바람 그리고 화려하게 펼쳐진 미륵사지의 넓은 잔디밭 위에 홀로 우뚝 선 내가 정말 사랑스럽다. 나를 사랑하는 만큼 달려와 나를 아끼는 만큼 계절을 즐기고 있는 오늘이 그지없이 소중한 것이다. 9월과 10월에는 한 달 동안 미륵사지 미디어아트 야간 빛 축제가 있었다하니 그야말로 어마어마 했었겠다는 생각을 해보면서 해는 짧고 둘러보아야 할 곳이 너무 많은 익산에서 약 15km떨어진 원광대학교 자연수목원으로 향하기로 한다. 식물원을 찾는 좋은 이유는 어느 계절에 와도 무엇이라도 피어 있다는 것이다. 평소에는 있는 줄도 몰랐던 나무와 꽃들이 제철이 되면 꽃이든 잎이든 세상을 환히 밝히고 나온다는 것이다. 이곳은 특별히 대학 캠퍼스라서인지 숲속에 야외에서 강의를 진행할 수 있도록 되어 있어서 소규모의 행사를 해도 좋을 듯한 분위기였다. 잘 다듬어진 회양목 가운데에 조각상은 물론이며 어느 때 들어와도 젖어 있는 계절에 흠씬 빠져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뿐만 아니라 대학 캠퍼스이다 보니 주변에 많은 젊은 친구들의 움직임으로 그 안에 내가 있다는 것도 우선 젊다. 그들의 정서에 머무름이 잠시 활력이 되기도 하다. 그러는 가운데 드문드문 호박빛으로 지고 있는 은행잎이거나 옴싹옴싹 구절초 드러누운 솔밭에 내 그림자는 점점 길어지고 있었다. 메타세콰이어 줄지어 선 긴 풍경에 섰다가 앉았다가 이 순간의 자유함을 허실 없이 담아가야 할 카메라는 나보다 더 바쁘다. 오늘은 시간 타박하지 않고 마치 지척이 내 집인 냥 한없이 놀고 싶은 욕심이건만 막상 어두워지니 조급해진다. 사실은 이곳에 입장하여 30분도 둘러보지 못했다. 떠나자니 너무 아쉽지만 어느 날 다시 한 번 찾으리라는 마음으로 오늘의 일정을 접기로 한다. 그리고 익산 온천랜드에서 하루 동안 익산에서 보듬었던 피로를 풀고 둥지를 향해 또 다시 서해안 고속도로를 달린다. 온종일 참 좋은 도시 익산에서 담아온 아름다운 것들이 긴 여운으로 남을 것 같다.
* 달빛소리수목원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춘포면 천서길 149 * 익산 미륵사지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32-2 * 원광대학교 자연식물원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익산대로 460 (우)54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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