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태의 시를 읽을 때마다 느끼는 의미의 단절은 그의 시가 난해시로 불리어지는 가장 큰 이유다. 의미의 단절은 초현실주의 시에서도 느낄 수 있고, 추상화나 비논리화에서도 느낄 수 있으나 그가 그려내는 의미의 단절은 기상(奇想:conceit)이라는 시의 기법에 연유하는 것 같다. 기상은 형이상학파 시인들에게서 처음 사용되고 대중화된 방법이다. 기상은 어렵고 도전적이거나 매우 도발적인 은유 혹은 직유, 즉 매우 다르고 있음직하지 않은 사물들 사이의 유사성을 단정하려는 시인의 의도를 말한다. 매우 당돌하고 당혹스러운 연결로 사실상 의미의 단절을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과꽃이 무슨
기억처럼 피어 있지
누구나 기억처럼 세상에
왔다가 가지
조금 울다 가버리지
옛날같이 언제나 옛날에는
빈 하늘 한 장이 높이 걸려 있었지
「과꽃」전문
이 시는 과꽃의 형태, 빛깔, 향기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과꽃의 다른 경지를 보여준다. ‘기억처럼 피어 있는’, ‘조금 울다 가버리’는, ‘빈 하늘 한 장이 높이 걸려 있’는. 자기 세계에 한없이 집중돼 있는 김영태 시인의 과꽃. 그의 시들은 사실적으로 그린 풍경인데도 추상적인 아름다움이 느껴져, 몇 번이고 새롭게 곱씹을 맛이 난다. 절제가 풍요로 전환되어서 그럴 것이다.
그의 시가 우리의 가슴에 쉽사리 다가오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이미지를 중시하는 수법을 쓰고 있다는 점이다. 그가 즐겨 쓰는 이미지는 시각적 이미지와 청각적 이미지다. 그는 감각적 표현에 탁월한 재능을 보여주고 있다. 시는 언어로 표현하는 예술이다. 그는 의미에 초점을 두기보다 는 표현에 더 초점을 둔다. 그는 비유와 상징 및 이미지를 환기하는 언어적 울림의 효과를 섬세하게 탐구하고 있다.
그는 화가이면서 음악을 즐기고 연극에도 관계했다. 그의 작품은 미술의 시각적 기능과 음악의 청각적 기능을 아주 조화롭게 아우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미술의 기능을 나타내는 빛(色)과 음악의 기능을 나타내는 소리(音)가 자유롭게 어우러지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소리를 보고 빛을 듣는’ 표현 방법인 것이다.
김영태 시의 또 다른 특징은 풍자적이라는 점이다. 그는 현실을 풍자하고 비판한다. 그의 시니시즘(cynicism 사물을 냉소적으로 보는 태도)은 시 곳곳에서 발견된다. 현실을 풍자하고 비판하는 것은 이상과 현실의 양극단에서 그의 시가 위치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에게 있어 현실과 이상은 그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말살하거나 초극(超克 어려움을 이겨냄)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자기의 고유성을 유지하면서 상대방을 서로 보완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창조적인 양극성으로 작용하면서 이 시인의 본질을 특징짓고 있다.
김영태 시인은 1936년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1959년 《사상계》에 시가 추천되어 등단하였고, 시집으로는 『유태인이 사는 마을의 겨울』『바람이 센 날의 인상』『초개수첩』『객초』『북 호텔』『남몰래 흐르는 눈물』『그늘 반근』『누군가 다녀갔듯이』등이 있다. 한국시인협회상, 서울신문사 예술평론상, 허행초상 등을 수상하였다. 시, 음악, 무용 등의 아름다움 앞에서만 무릎 꿇었던 기사(騎士). 원치 않는 건 절대 하지 않고, 자기와 자기 둘레의 작은 것들을 소중히 여기며 살았던 김영태는 세련되고 우아한 시인이었다.
“김영태는 자신의 내면에서 꿈꾸고 있는 단어들을 끄집어내는 놀라운 몽상가다. 그의 시는 짧다. 단어에서 허식을 제거하고 단어의 에너지를 통째로 끌어냈기 때문이다. 이미지는 존재가 정성을 다하여 비의지에 자신을 내맡기는 순간에 포착된 의지이다. 이러한 비의지의 의지를 우리는 시선의 명상이라고 부를 수 있다. 시선의 명상이 삶의 지평선을 열어준다. 그리고 명상의 바탕은 연애감정이다. 본능의 역량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만이 이미지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시집 『누군가 다녀갔듯이』에 평론가 김인환이 붙인 해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