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밤의 사진편지 제1664호 (12/6/26/화)
'한사모' 카페 'romantic walking'으로 가시려면 아래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 |
제 247회 정동 ․ 광화문 대사관길 주말걷기 후기
글 : 이순애 (운영위원, soonae1211@naver.com) 사진 : 이창조 (홍보위원장, lc191@hanmail.net)
김동식.송군자, 홍수희.오기진 진풍길.소정자, 이창조.정광자, 박동진.방규명 김창석.김경진, 이경환.임명자, 김영신.윤정자, 함수곤.박현자,
심상석, 김성래, 고영수, 이봉구, 김용만. 이영균, 윤봉수 정전택. 임병춘, 이석용, 김성기,박화서. 신원영. 황금철
나병숙.이계순, 윤삼가, 최영자, 김정희, 김레아영자, 김소자, 임정순, 최경숙, 김소영 김영자, 김정옥, 엄명애, 김옥련, 이순애 (47명)
(이번부터는 김영신 사무국장님이 참가자 명단을 현장에서 정확하게 체크해서 저에게 이메일로 보내주어 제가 사진을 들여다보며 명단을 작성하고 참가인원을 맞추는 복잡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 쉽게 처리할 수 있게 개선되었습니다.
따라서 사진 속의 회원님 자리와 성함이 일치 하지는 않는 문제점은 있지만 저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절감할 수 있어 너무나 편하고 기분이 좋습니다.
좋은 아니디어를 내어 저의 작업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신 김영신 국장님의 관심과 배려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 함수곤
물빛이 얼크러져 반짝반짝 구르고 튕기는 여름 한낮의 오후를 기대했습니다. 100년 만의 가뭄으로 밀가루처럼 흩날리는 마른 흙 앞에 신음하는 산하가 안타까웠습니다.
주말걷기를 안내하는 다른 날 아침이면 눈 뜨자마자 혹시 비가 올까봐 마음을 졸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아침은 전혀 달랐지요.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는 없었지만 단비가 내리면 얼마나 좋을까를 상상했으니까요.
그러나 오늘은 33도를 웃도는 더운 날이었습니다. 110년 전 을사늑약을 당한 고종의 마음이 이렇게 타들어갔을 거란 생각에 더위쯤이야 얼마든지 견딜 수 있는 오기가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6월 24일(일) 오후 3시 30분 지하철 2 ․ 5호선 충정로역 3번 출구에 한사모 회원 47명이 모였습니다. 근대유산 1번지 정동길과 조선 이후 정치 외교문화의 구심점 광화문 지역 대사관길을 걷는 날입니다. 날씨가 더워서 부채 대용으로 책받침 하나씩을 나눠드렸습니다. 책받침에 오늘 걸을 충정로역에서 안국역까지의 지도와 각대사관과 성당에 관한 간략한 설명을 곁들였습니다.
서로 반가운 인사가 끝나고 3번 출구로 나와 뒷골목을 들어가니프랑스대사관이 보입니다. 김중업이 설계한 대사관 입구 한옥 지붕이 단아합니다. 한국정서와 프랑스 우아한 품위를 접목한 지붕이 공중에 떠있는 듯 부드럽고 날카롭되 안정되고 가뿐합니다. 초고속철도인 TGV사업을 시행한 패션문화 유행의 나라지요. 세련되고 우아하며 굴리는 뒷끝이 경쾌한 프랑스말은 프랑스의 가장 큰 자부심이랍니다.
상수도사업본부를 지나 건널목을 두 번이나 건너니 한국경제신문사 앞입니다. 약현성당으로 가는 중림시장은 새벽시장이 서는 좁은 인도로 이어져 있어요.
채소와 생필품을 파는 가게 상인들이 손님도 없는 한가한 오후를 즐기듯 우리를 쳐다봅니다. 약초가 많이 나 약현성당으로 이름 지어진 성당 입구에는 내일 6월 25일,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인 정진석 추기경님 뒤를 이어 취임하시는 염수정 대주교의 착좌 미사를 알리는 현수막이 걸려있습니다.
왼쪽으로 비스듬히 언덕길에 있는 기도동산을 오릅니다. 예수님이 사형선고를 받은 1처에서부터 무덤에 묻히기까지의 14처까지 모습이 보입니다. 이 청동조각상은 신자가 아닌 일반사람에게도 깊은 울림을 줍니다. 예수님은 기력이 떨어져 세 번 쓰러지셨더군요. 세상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못 박힌 사랑이 큰 바다라면 자신만의 작은 아픔은 졸졸 개울물이나 될까를 가늠해 보았지요.
1982년 산 능선에 뾰죽탑을 당당하게 드러낸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입니다. 고딕양식 붉은 벽돌이 한국교회 건축양식의 기본모델이 되었다지요. 언덕을 내려와 건널목을 건너 서소문공원으로 들어섭니다. 서소문은 한국 천주교회를 대표하는 순교성지입니다. 조선 후기 신유박해, 기해박해, 병인박해 거치며 많은 신자들이 처형되었지요. 한국 순교성인 103위(位) 가운데 44위 순교자 현양탑 앞에서 순교의 의미를 되새겨봅니다.
서소문 공원은 한양의 사형장이었는데 사람이 많이 다니는 이 곳에서 사형을 집행한 이유는 끔직한 광경을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 범죄를 예방할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랍니다. 요즘은 공원마다 밤에 무법천지가 되어 주폭의 횡포가 심하다는데 서울역이 가까운 이 곳도 노숙자들이 들어와 어지럽혀서 골치거리랍니다.
시청쪽으로 가려면 또 건널목을 두 번이나 건너야 합니다. 서울역에서 문산으로 가는 열차의 기적소리와 깃발로 수신호를 하는 직원들의 행동이 옛날 어릴적 소풍가던 기억을 떠올리게 합니다. 오늘은 유난히 건널목이 많아 시간이 더 걸리는군요.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에 들어서니 서늘한 기운이 감돌아 다행입니다. 배재학당은 서양식 신식교육기관으로 아펜젤러목사가 설립했지요. 1930년대 교실을 재현한 좁은 공간에는 칠판과 책걸상이 놓여있고 새까만 교복과 모자도 걸려있습니다. 명예의 전당에는 이승만 주시경 김소월등 이 학교 출신으로 근현대사에 획을 그은 분들의 흉상이 있습니다.
서울시립미술관 앞 회화나무 그늘아래 잠시 쉬어갑니다. 박화서표 인절미와 찬 음료수를 나눠먹으며 더위를 식힙니다.
한때 독일영사관과 독립신문사가 있었고 고종이 세운 귀족관립학교인 육영공원이 있던 자리입니다. 1980년대는 대법원이 있어 민주화 인사들이 재판을 받느라 오간 곳이기도 하지요.
육영공원과 배재학당에서 영어를 가르친 선교사 헐버트가 생각납니다. 영어와 한국어를 비교하며 한국어는 발음이 낭랑하고 말하기에 편리하여 대 대중연설을 하기에 더 좋다는 그의 한글사랑은 독립운동으로까지 발전합니다. 미국에 가서 을사늑약의 무효를 알리는 기자회견도 열었고 헤이그밀사 파견을 위해 고종을 도왔지요. 영어를 쉽고 실용적으로 가르쳐 영어대중화에 이바지했고 한글 사랑에 빠져 최초의 한글교과서를 쓰고 서양음계로 아리랑 악보를 만든 푸른 눈 한국인입니다. 헐버트 기념물을 이 근처에 세운다니 무언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일은 외로움도 쓸쓸함도 아니라는 걸 알게 합니다.
아래로 내려오니 퇴계 이황선생집터라는 표지석이 보입니다. 이곳은 서인들이 많이 살았다는데 동인이 퇴계가 살았다는 게 조금 의외지만 논 논쟁은 논쟁이고 토론과 화합을 바랐던 큰 그릇을 보는 듯해서 반갑습니다. 매화를 좋아해서 세상을 뜨는 마지막 아침에도 매화에 물을 주었느냐고 물었다는데 둘러보아도 매화나무 한 그루도 보이지 않는군요.
러시아대사관 앞입니다. 소련 붕괴 이후 국교가 정상화 되자 러시아측에서는 구러시아공사관 자리에 대사관을 짓겠다고 고집을 부렸지요. 그게 안 되자 굳이 정동위치를 고집하여 옛배재학교 운동장터에 대사관을 지었지요. 제2의 모스코바를 상징하는 콘크리트 건물로 러시아 자작나무와 붉은 화강석을 사용했답니다. 속을 모르는 사람을 크레물린 같다고 표현하듯이 보안에 철저해서 휴지 한 장도 밖으로 새나오지 않는답니다.
정동교회 계단에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커다란 느티나무 자락이 그늘을 만들어 우리 회원을 포근하게 감싸주었습니다. 김용만 고문님이 6월 27일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리는 한양대학교 오케스트라 정기연주회 프로그램을 설명하시며 꼭 필요한 회원님께 나눠주도록 대표님께 입장권을 전달하셨습니다.
손탁호텔에 대한 설명도 곁들여 주셨지요. 손탁호텔은 구한말 서울에서 가장 이름난 서양식 호텔이자 사교 공간이었어요. 고종과 명성황후의 측근으로 외교가의 중심인물이었던 프랑스 알자스 로렌 출신 독일인 앙투아네트 손탁이 호텔을 운영했지요. 반일친미세력의 대명사인 '정동구락부'의 회합장소로도 쓰였고 을사늑약을 배후에서 조종한 일본 전권대사 이토 히로부미가 머물기도 했지요. 그만큼 비운의 역사를 간직한 장소인데 1917년엔 이화학당으로 넘어가 기숙사로 사용했지요. '이화 100주년 기념관'으로 들어서는 주차장 근처자리랍니다.
정동교회는 아펜젤러 목사가 세운 최초의 서양식 개신교회로 항일운동의 거점이었지요. 목사님은 배재학당을 설립하고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여 한글을 손쉽게 사용하게 만든 일등공신입니다. 교회 안으로 들어서자 앞쪽에 커다란 파이프오르간이 우리를 맞아줍니다. 1918년 우리나라 최초로 설치됐으나 6.25전쟁 당시 부서져 2003년 복원한 거래요.
최초의 신여성 화가 나혜석이 처음으로 김우영과 서양식 결혼을 한 곳이니 그때도 파이프오르간 소리에 맞춰 입장을 했겠지요? 유관순 열사가 일본 헌병에 붙잡히기 전 파이프오르간 뒤에 숨어 있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바로밑 지하에서 삼일운동 선언문을 가리방으로 긁어 배포했다니 단순한 종교교회가 아니라 항일운동과 신교육이 이루어진 역사적인 장소임을 알 수 있지요?
길을 건너 정동극장 사이로 조금 걸어가면 중명전이 있습니다, 중명전 (수옥헌)은 경운궁의 황실도서관이었는데 경운궁이 불타는 바람에 고종이 거주한 후로 중명전이 되었지요.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한 치욕스런 현장입니다.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알리기 위해 헤이그 특사를 파견한 현장입니다. 예원학교 담장을 따라 캐나다대사관에 이릅니다. 비자면제에 합의하여 입국비자 없이도 상대국에 6개월까지 머물 수 있게 되어 여행하는 사람이 계속 늘어난대요. 캐나다 대사관 앞에는 520년 된 회화나무 한그루가 시멘트 기둥에 의지하여 서있습니다.
회화나무를 보존하기 위하여 대사관측에서 건물 앉음새를 그만큼 뒤로 물러내어 지었다니 배려 깊은 마음이 캐나다 인상을 더 좋게 만드는군요 건너편에 손탁호텔이 있던 자리인 이화여고 100주년 기념관과 옛 프랑스공사관 자리에 창덕여중 진입로가 보입니다.
대사관오른쪽으로 노르웨이 ․ 뉴질랜드 ․ 네덜랜드 대사관 깃발이 펄럭입니다. 노르웨이는 1인당 국민소득 9만 5천 달러의 세계 2위 부자나라로 숲이 많아 미래 화석연료를 대체할 수 있는 생태조건이 완벽한 나라입니다. 대자연의 협주곡 피오르와 해가 지지 않는 백야를 체험하고 싶습니다. 뉴질랜드는 춥지도 덥지도 않고 땅은 넓고 먹을 건 풍부한 지상낙원이라고 불리는 소나 양이 사람보다 많은 나라랍니다. 네덜랜드는 어린이 행복지수 세계 1위, 교육 선진국, 간척지 개발사례와 선진기술을 보유하여 새만금 개발에 참여한답니다. 구러 시아공사관으로 들어서는 정동공원 계단에서 두 번째 단체사진을 찍었습니다.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고종이 세자와 일년간 피신해 살던 아관파천의 현장 구러시아공사관 코앞입니다.
정동에서 가장 높은 전망대이니 일대 경관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이 곳을 못 잊어 여기에 대사관을 짓고 싶어한 러시아의 속내를 짐작할 수 있지요? 르네상스식 3층 벽돌건물이었으나 한국전쟁 때 파손되고 망루와 1층 아취형 출입구만 남은 흰건물 입니다. 사방이 훤히 트인 저 꼭대기 망루에서 고종은 근대문물을 받아들이고 영세중립국을 만들기 위해 고심합니다.
고개를 돌리면 오른쪽 날렵한 건물이 한국교육과정평가원(원장 성태제)입니다. 함 대표님이 그 건물을 가리키며 저기가 바로 우리 한사모에 관심과 애정이 깊은 성태제 원장님이 근무하는 한국교육과정 평가원이라고 알려주셨습니다.
마침 불켜진 곳이 원장 집무실일지도 모르겠네요. 대학입시 등 업무 특성상 좋은 평가를 받기가 어려운 기관인데 성원장님 취임 후 국무총리실 산하 연구기관평가에서 우수기관으로 선정되었다는 쾌거를 한밤의 사진편지에서 전해 주셨지요.
더위도 걷기도 이제 막바지에 이르러 덕수초등학교에 닿습니다. 정 동 1번지 방송의 발상지인 경성방송국 자리입니다. 첫 방송터라는 글귀와 전파가 퍼지는 모습을 형상화한 유허비(遺墟碑)가 교정 스탠드에 남아있습니다 경성방송국은 KBS 중앙방송국으로 바뀌어 한국전쟁으로 폭파될 때까지 여기 있었어요.
옛 경기여고 자리에 섰습니다. 왕조 의 어진(초상화)을 모시고 다례를 올린 왕조의 정통성을 간직한 선원전터입니다. 운동장 한가운데 회화나무 한 그루가 세월을 말해줄 뿐입니다.
구세군건물을 지나니 미국대사관저 하비브하우스입니다, 70년대 대사관저를 다시 단장한 하비브미대사의 이름을 본 딴 이유가 있겠지요? 미국식건축양식이 아닌 주재국의 전통양식으로 건축한 한옥건물입니다.
못을 사용하지 않고 목재를 끼워 맞춘 현대와 전통이 어우러진 격조있는 건물이니 꼭 들어가 보고 싶군요. 가장 오래된 외국공관으로 옛 미국공사관 건물이 그대로 남아있답니다.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서 나와 배재학당 학생들의 호위를 받으며 덕수궁 인화문으로 들어가는 길을 따라 걸었습니다. 순종이 즉위하며 경운궁에서 바뀐 덕수궁의 대한문을 지납니다. 덕수궁은 4만평 넓은 공간이었지만 일제가 여기저기 팔아먹어 절반 이상 줄어든 데다가 큰불로 전각 대부분이 없어지는 등 영욕의 세월을 견딘 곳입니다.
덕수궁 돌담을 끼고 영국대사관까지 걸었습니다. 한영 수교 130주년인 되는 영국 런던에서는 올해 세계인의 잔치인 런던올림픽이 열리지요.
그 생생한 성화 봉송 현장을 런던 한사모 정인자 특파원 부부가 전해주었지요. 영국하면 신사의 이미지와 해리포터가 생각나는데 요즘은 금융과 무역의 중심지로 역동적인 국가브랜드를 만들고 있답니다.
민주화운동의 성지라 불리는 서울교구 성공회성당을 돌아 광화문네거리를 거쳐 교보빌딩에 이릅니다. 빌딩 높이 글판이 보입니다. '내 유산으로는 징검다리같은 것으로 하고 싶어 모두를 건네주고 건네주는' 장석남 시인의 나의 유산은 이라는 시입니다. 옷깃을 여미고 자신을 돌아보게 하네요.
교보빌딩에는 핀란드와 오스트리아 깃발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핀란드는 OECD 회원대상 만15세 이상 국제학업성취도평가 PISA에서 해마다 일등을 하는 공교육 천국으로 불리는 만큼 세금도 많이 내야하지요. 오스트리아는 유럽 한가운데 위치하여 산이 많고 경치가 조음 2차대전 전에 독일에 합방되었다가 전후 독립한 역사적 사실을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보셨지요? 이제 미국대사관 앞입니다. 담은 철책으로 둘러있고 삼엄한 경비에 기가 죽습니다. 미국은 근세 이후 세계에 가장 많은 영향을 주는 나라이며 한국은 미국의 미래에 매우 중요한 아시아의 특별한 동반관계입니다.
한미 FTA는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활발한 양국의 경제 파트너십을 새로운 단계로 격상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요. 종로구청 왼쪽 아일랜드대사관이 리마빌딩 안에 숨어있습니다. 영국의 식민지였으나 종교가 다르고 산업 혁명 후 영국 대기업의 시장으로 변해 영국과 불편한 관계를 유지합니다. 막대한 부채 때문에 파산위기에 처하여 IMF 구제금융을 받고 있지만 잘 알려진 오스카와일드 예이츠 제임스조이스 등 문학인을 배출한 저력에 비추어 희망이 있는 나라로 인정해 주고 싶습니다. 일본대사관에 이르렀습니다. 의자에 위안부 소녀상이 앉아있습니다. 땅에 새겨진 평화비라는 동판이 무색하지만 옆에는 꽃다발 두 개가 놓여져있습니다.
겨울에 왔을 때는 누군가 목도리를 둘러 감싸주었고 어느때는 꽃다발이 놓여있어 외롭지 않았지요. 엊그제는 일본 극우 정치인 스즈키가 소녀상에 손가락질을 하며 반일의 상징을 빨리 철거해야 한다고 인터넷에 사진과 동영상을 올렸습니다. 타캐시마는 일본땅이라고 적힌 말뚝을 소녀상 옆에 묶어놓은 모습도 보이더군요. 일본 대사관 앞에 소녀상을 놓은 것에 대해 일본인이 그냥 있어서는 안된다’며 불평을 늘어놓았다니 일본은 우리와 가장 가깝고도 먼 나라입니다. 독도 영유권 대립이나 위안부 문제 등이 앙금으로 남아있는 건 역사적 반성을 하지 않는 일본 태도 때문일까요? 아직도 국력이 약해서일까요?
이제 마지막 폴란드대사관입니다. 유럽 동쪽 폴란드는 오랜 세월 독일과 러시아 유럽 틈바구니에서 속에서도 언어와 문화 그리고 전통을 지켜 온 생명력이 강한 국민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쇼팽, 퀴리부인, 교황 바오로 2세,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가 폴란드 사람이라는 게 새삼스레 떠오릅니다. 그런데 공사관과 대사관은 어떻게 다를까 궁금하시지요? 지금이야 수교를 하면 상대국에 대사관을 주재시키는 것이 당연하지만 개화기에는 그렇지 못했지요.
국력이 미치지 못하여 상대국에 대사를 주재시키지 못하고 대사보다 낮은 직급인 공사나 영사를 두니 상대국도 이에 대응하여 공사관이나 영사관을 설치하는 것이 보통이었지요. 그런데 왜 정동에 공사관이 많아 공사관 거리라고 불렸을까요? 도성 가까이 빈터가 많은데다가 인천으로 이어진 양화진 진입로였기 때문이지요. 외교공관을 특정지역에 모이게 하여 백성들 눈에 덜 뜨이려 하려는 목적도 있었고 덕수궁 가까이 외교공관이 있으면 일본의 위협에도 쉽게 대처할 수 있으리라는 계산도 있었겠지요.
감고당길을 따라 안국동 별궁식당에 도착했습니다. 이경환 감사님 덕에 문을 열지 않는 일요일에 우리만을 위해 특별한 장소를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묵무침과 해물파전에 이어 청국장이 구수합니다. 건배사는 ‘내 유산으로는 한사모의 징검다리 하고 싶어’ 로 하였습니다. 제가 ‘내 유산으로는’ 하고 제창하면 회원들이 ‘한사모의 징검다리로 하고 싶어’라고 받아주셨습니다. 광화문 글판에서 본 장석남 시인의 시에서 따온 겁니다. 한사모 회원 모두를 건네주고 건네주는 행복이 막걸리잔마다 넘쳐납니다.
사실 더운 날씨는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남한산성에서의 삼전도 조약, 약현성당의 기도동산 가는 길, 예수님이 쓰러지는 장면, 서소문에서 순교하신 신자들, 세계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민족자존을 지키려했던 약소국의 설움을 생각하면 말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견디고 견뎌 이제 세계 열 번 안에 드는 경제대국이 되었습니다. 어제 우리나라는 인구 5000만명으로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 20-50클럽에 가입하였습니다.
세계에서 일본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영국에 이어 일곱 번째입니다. 그러나 2030년부터 인구가 줄어들고 생산성이 떨어진다고 하니 안심하기는 이르답니다. . 20-50클럽 가입국은 모두 30-50(소득 3만달러, 인구 5000만명)클럽에 들어갔는데 이걸 유지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요? 얼마전 대표님은 선진국 신드롬에서 이 내용을 잘 짚어주셨습니다. 첫째 성실하고 유능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 시간과 신용을 목숨처럼 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세째, 자기관리(자기 이미지를 좋게)를 잘해야 합니다. 네째, 자기분야의 최고가 되어야 합니다. 다섯째 관계가 좋아야 합니다.
이 다섯가지를 증명이라도 하듯 나병숙 회원님이 걷기 안내 운영위원들이 수고한다며 자청하여 후식으로 커다란 수박값을 후원하셨습니다. 그 정도야 운영위원들이 부담할 수 있지만 서로를 위하는 따스한 숨결에 모두 마음이 넉넉했습니다.
대표님은 며칠전 빛나라에서 개강한 컴퓨터 교실에 참여했던 회원님들께 소감을 물으셨습니다.
이계순님은 다들 컴맹인줄 아는데 신청 안하면 안 될 것 같아 고민했는데 이경환 감사님의 수업 덕택에 6개월 걸릴 내용을 두 시간 만에 배워 제일 먼저 댓글을 다는 숙제를 일등으로 했노라고 자랑하셨습니다.
정광자님은 남편 메일을 들여다보던 기계치였는데 댓글까지 척척 달게 되었으니 누구라도 주저하지 말고 배워도 된다고 자신감을 심어주셨습니다.
최영자님은 교육장소인 빛나라를 찾느라 고생한 이야기를 실감나게 들려주셨지요. 소하초․중․고에서 차를 내리면 바로 찾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대요. 햇빛을 싫어하는데도 40분을 헤매며 근처 공원까지 가서 아이들이나 아주머니에게 물어도 아는 사람이 없어 애를 태우셨다는군요. 마침 새로 바꾼 스마트폰으로 114에 문의하고 전화번호를 찾아 연락이 되고 마중 나온 이영균 위원장님이 여기요 여기 하고 손을 흔들는 모습이 얼마나 반가웠는지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웃음꽃이 피었습니다.
정전택님은 자녀에게 컴퓨터를 가르쳐 달라면 짜증이 날 때도 있어 답답했는데 내 손으로 하는 기회를 주셔서 고맙고 한사모가 좋은 모임이라는 걸 다시 느끼셨답니다.
조금만 노력하면 어렵지 않게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으니 행복하시지요?
다음 주 걷기를 안내하실 김창석 위원님께 한사모 깃발을 인계했습니다. 248회 주말걷기는 하얏트 호텔 건너편 남산을 걷는답니다. 옛중동고 자리 이색 목은 선생 영당 옆 호젓한 곳에서 명상을 하고 싶었는데 시간이 부족하여 생략한 것이 못내 아쉬웠습니다.
그래도 팽팽한 긴장 속에서 격동의 현장을 걸으며 역사란 과거완료가 아닌 현재진행형임을 깨달은 것으로 명상을 대신했다고 위로해도 될까요? 윤종영고문님이 참석하셨으면 더 유익하고 귀중한 이야기를 들려주셨을 텐데 집안 행사 때문에 참석을 못하신 것도 섭섭했습니다. 더운날 함께 걸으신 회원님들 고맙습니다.
<오늘의 유머>
보스턴 브리검영대학병원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하버드대 교수가 약값 10만 달러(1억원이 넘지요)를 떼먹은 사건이 발생한 겁니다 한 동양계 교수가 약을 주문했는데 감언이설에 속은 병원직원이 달랑 명함 한 장만 받아놓고 약을 내줬답니다 병원장이 즉시 그 교수에게 전화를 했겠지요? 그런데 그 교수는 벌써 페루로 줄행랑을 쳤다는군요. 가난한 사람을 치료하러 떠나버린 걸 안 병원장 뭐라고 했을까요? “로빈후드가 따로 없네요. 감동입니다.” 그 교수의 이름은 자랑스런 세계은행 김용 총재
|
|
첫댓글 정다운 거리,마음의 거리,서울의 지성들이 모이는 곳,구한 말 가슴 아팠던 역사와 개화기 신문화가 그대로 묻어 있는 곳, 그 곳을 소녀같은 안내자가 역사를 전공한듯 해박한 역사 지식과 손수 정성껏 만든 자료와 열정으로 우리를 그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게 합니다.그 당시 열강에 휘둘려야만 했던 선조들의 가엾은 이야기가 우리를 일순간 공연히 슬프고도 우울하게 만들기도합니다 그 많은 대사관 앞을 지나가면서 대사들과 만나 악수는 못했지만 많은 나라와 외교관계를 맺고 있는 현재가 가슴 뿌듯했습니다..유서깊고도 아름답고 조용한 예술의 거리를 안내하신 이순애 위원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정동 & 광화문 대사관길 3탄!!! 정말 대단했습니다. 어쩜 그리 공부를 많이 하여 술술 설명를 잘하시던지 감탄이 절로 나왔습니다.무심코 지나던 길이 그리도 숨겨진 내용이 이리 많은지도 처음 알았습니다. 더위에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많이 보고 느낀 훌륭한 주말걷기였습니다.
능소화 능소화 Y 2012.06.28 12:40수정 | 답글 | 삭제 많은 회원님들 격려 고맙습니다. 한사모가 아니었으면 아직도 흑백세상을 살고 있을 텐데 영롱한 무지개 빛깔로 세상을 살아가도록 도와주셨습니다.
한사모가 걷기에 좋은 장소와 자료를 챙겨주신 윤봉수 차장님, 꼭 후기를 읽고 격려하고 함께 정동길 답사까지 해주신 성북교육청
이은숙 평생교육건강과장님,오탈자를 고쳐주고 컴퓨터에서 필요한 자료를 잘 찾아주신 용산도서관 구숙영선생님께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한밤의 사진편지에 실려있는 능소화님의 글을 여기에 옮겨 싣습니다. 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