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orgia O'Keeffe consistently battled against the Freudian interpretations of her flower series.
조지아 오키프는 꽃을 소재로 한 본인의 작품에 대한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적 견해와 평생을 싸웠다.
미국의 여성화가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fe)의 목탄 추상화 스페셜 연작 중 하나인 <드로잉 ⅩⅢ(1915)>그녀는 아모리 쇼가 열렸던 1913년 칸딘스키의 <예술에서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을 읽었고, 97세에도 끼고 지낼 정도로 심취했다.
뉴욕의 ‘아트스 튜던츠 리그’ 여름 미술 과정에서 아서 웨슬리 다우(Arthur Wesley Dow) 교수에게 영향을 받는다. 디자이너기도 한 그는 우타가와 히로시게와 가츠시카 호쿠사이 등의 독특하고 암울한 일본 판화 우키요에 매료되었다. 그래서 미술이란 자연을 그대로 모방하기보다는 선과 색채, 그리고 색조의 조화로운 구성을 통해 작가의 느낌을 표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작품은 두 사람의 영향으로 대담하게 간결한 구성을 택했다. 그리고 종이 위에 목탄의 농담만으로 작가의 풍부한 감성을 표현했다. 세 개의 부분으로 나뉜다. 오른편 구불구불한 선은 흐르는 강을 묘사한 듯. 1960년대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메마른 사막을 흐르는 강을 그린 <드로잉 Ⅳ(제목 그림 참조)>를 미리 보는 듯하다.
그렇다면, 그 옆으로 타원형 나무들이 열병식을 하고 자극적인 지그재그 선은 산맥이나 산봉우리로 생각해도 그럴듯하다. 강이 아니라 불꽃으로 여긴다면, 중앙은 마치 네 개의 둥근 조명을 연상할 수 있으며, 날카로운 선은 번개처럼 느낄 수도 있다. 어쨌든 자연의 숭고한 역동성이 느껴진다.
그녀는 추상적인 구상 작품으로 유명하다. 거대한 꽃 그림이 대표적이다.
Nobody sees a flower - really - it is so small it tak es time - we haven't time - and to see takes time, like to have a friend takes time.
아무도 꽃을 보지 않는다. 정말이다. 너무 작아서 알아보는 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시간이 없고, 무언가를 보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친구를 사귀는 것처럼.
그녀는 집안 형편 때문에 아트 스튜던트 리그 정물화상을 수상하여 뉴욕주에 있는 ‘리그 아웃도어 스쿨’의 장학금을 받았음에도 중도에 학업을 포기한다. 시카고 회사에서 상업미술가의 길을 걸었지만, 수입도 변변치 않은 가운데 시력까지 나빠져 화가로서의 꿈도 덩달아 사그라들었다.
텍사스로 이주하고 나서야 거대하고 강렬한 자연의 힘에 자극받아 다시 그림을 그릴 용기를 얻는다. 이때 원시적인 감동 때문인지 그녀는 남편이 죽고 뉴멕시코의 주도 산타페에서 정착한다. 그녀는 1915년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컬럼비아로 이사한 후에도 그때의 감동을 목탄으로 옮겼고, 이 작품이 그중 하나다.
그녀의 재능을 아끼던 예술대학 친구 애니타 폴리처가 1916년 초 오키프의 초기 드로잉을 사진작가 앨프리드 스티글리츠(Alfred Stieglitz)에게 보여준다. 드로잉에서 전달되는 자연의 힘을 느낀 스티글리츠는 자신이 운영하는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열어주었다. 뉴욕 5번가에 있던 ‘갤러리 291’에 전시된 그녀의 목탄 드로잉 열 점은 그의 인생 항로를 화가로 돌아서게 한다.
훗날 남편이 되는 사진작가 스티글리츠는 유럽의 근대 작품을 소개했던 미국 내 실력자였다. 1902년 ‘사진 분리파’를 창설하였으며, <샘>과 관련 뒤샹의 의도를 그의 잡지에 게재했다. 무엇보다도 1913년 2월, 뉴욕의 제69연대의 병기고에서 ‘아모리 쇼’를 기획하여 미국인에게 유럽의 현대미술을 소개했다. 세잔, 고흐와 표현주의, 야수파와 입체파의 미술을 처음으로 미국에서 공개한 획기적인 전람회였다.
그녀는 여성 화가로서 ‘최초’로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회고전을 열고, 자신의 이름을 딴 미술관을 갖게 되고, 경매에서 최고가를 기록한다. 이후 명성을 얻으며 탄탄대로를 걷는다. 그러나 그녀의 내면엔 자격지심이 도사리고 있었었다.
반면 세간에서는 남편보다 열여덟 살 어린 그녀를 ‘코르티잔’이라며 수군댔다. 1921년 스티글리츠가 작품 전시회를 하는데 사진 절반이 오키프의 모습이었으며, 그중 상당수가 누드였다. 그녀는 졸지에 미술가가 아니라 남편의 누드모델이자 뮤즈로 부각했다. 그녀는 ‘착한 요부(妖婦)’라는 시선이 불편했다.
신체적, 정신적으로 많은 고통이 있었다. 각설하고, 그녀의 새로운 돌파구는 뉴멕시코였다. 이곳에서 소와 야생동물의 뼈, 조개껍데기, 돌멩이, 나뭇조각 등을 주워 풍경과 병치하자 독특한 기하학적 세계가 나타났다. 자연을 그대로 재현했음에도, 한폭의 추상화로 나무랄 데 없었다. 비로소 오키프는 당당히 남편과 동지적 관계를 형성한다.
아픔과 실현을 극복하고 본디 자기자신의 원시성으로 돌아가 심연에서 올라오는 화가로서의 자존감과 능력을 과감하게 끌어올린 그녀의 작품 속에서 생이란 좌절과 절망 속에서도 기필코 소생과 일어섬을 경험하게 되는 살아있는 화가로 거듭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