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어머니도 나처럼 딸만 둘인 가정에 차녀로 태어났고 나도 역시 그렇게 태어났다.
우리 외할머니께서는 자녀를 많이 출산하셨지만 그 중에 딸만 둘 키우시는데 성공을 하셨다. 그래서 차녀인 우리 어머니를 시집보낼 때 아들 겸 사위 겸 데릴사위로 맞아들였다.
우리 어머니는 노부모를 모시고 살면서 부모님의 애처로운 모습에 늘 마음 아파하시던 중 하루는 보은교회에서 어 전도사-그는 친정어머님을 모시고 사는 독신녀 여전도사-이었다. 그분이 십리 길 되는 시골마을 대비에 오셔서 전도지를 주시면서
“예수 믿으면 슬픔, 탄식, 근심, 걱정 없는 하늘나라 천국에 갑니다.”
라고 이야기하고 가셨단다. 어머니는 전도지를 받아 읽으며 그가 남기고 간 말을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렇다! 저 불쌍하신 우리 부모님! 이 세상에서는 아들도 없이 걱정만 하고 고생하고 사셨는데 사(死)후엔 근심 걱정 없는 아름다운 천국에 가서 살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다가 십리나 되는 보은교회를 다니기로 결심을 하고 새 출발을 하셨단다.
이때는 기독교핍박이 심한 일정치하였고 첫아기가 막 발자국을 띠는 세 살 배기였다. 내가 어렸을 때 찬송가를 넘기다 보면 가끔 까만 페이지가 넘어갔다. 왜 그러냐고 어머니께 여쭤보면 그것은 일본사람이 못 부르게 지워 놓은 것이라고 했다.
어머니는 이웃집에 사는 꽃 새댁 친구에게 전도를 해서 5리 길 되는 시골 노티교회를 함께 다니셨다. 그러던 중 아기 엄마들이기 때문에 추운 때는 바람을 거슬러 노티교회까지 가기가 힘들어지면서 밤이면 최영수님-그분은 자녀가 없이 두 양주가 외롭게 사시는 연세 높으신 분-이 우리 집으로 오셔서 예배인도를 하셨다. 그러다가 최영수님이 연로하셔서 세상을 떠나실 때 어머니는 마지막 임종도 딸처럼 지켜보셨고 늘 그 분을 애석해 하시다가 몇 년 후에 묘소에 비석까지 해 세우셨다.
노티교회로 다니기가 거리 상 불편해 예배당 건물을 헐어다 우리 대비마을로 옮겨왔다. 이때 보은교회에서 오신 김대천 전도사님은 어머니와, 어머니 친구, 세 가정이 모여서 가족적인 분위기로 예배를 드리며 재미있게 교회가 조금씩 성장해가고 있었다.
그러나 김대천 전도사님은 지나친 생활고로 군청 산림계에 취업을 하셨다.
그래서 지방에 있는 다른 교회에 교역자님들이 먼저 자기 교회에서 예배인도를 하고 그 다음 우리 교회를 오셨다.
그때 교역자님들 여러분-거현교회에 계시던 백낙성 목사님, 종곡교회에 계시던 이병렬 장로님, 월용교회에 게시던 신성대 장로님-이 우리교회를 거쳐 가셨다. 이 분들은 모두 수 십리를 걸어서 우리교회를 다니시고. 후에는 모두 목사님이 되셨다. 작은 농촌교회에서 우리 어머니는, 오시는 교역자님들마다 식사와 숙소를 제공하셨다.
겨울이면 교회에 무쇠난로가 하나있지만 땔감도 변변치 않아 연기만 나 맵기만 하고 너무 추웠다. 그래서 교인들이 예배만 마치면 우리 집으로 와 따뜻한 방에서 몸도 녹이고 따끈한 김치죽으로 추위를 풀고 가셨다.
성탄절이면 새벽 송가기 전에 칼국수나 식혜를 뜨겁게 끓여서 먹여 보내고 낮에는 큰 가마솥에 네 꼭지 시루를 앉히고 시루떡을 만들고 김칫국을 끓여서 주일학생까지 다 배불리 먹이면서 즐거운 성탄절을 보냈다. 우리 어머니는 오로지 교회에만 정을 붙이고 충성을 다 하다 보니 어린 딸이 어느 틈새에 끼여서 무엇을 어떻게 먹고 크고 있는지 다소 소홀했던 것을 이제야 깨닫게 됐다. 그래서 뼈도 약하고 키도 엄마만큼도 못 크고 너무 유약해서 어머니의 애물단지로 걱정을 많이 끼쳐드렸다.
우리 어머니는 베뢰아 교회에 자주장사 루디아를 연상케 했다. 왜냐하면 보따리 비단 장사를 하신 것이며, 교회를 찾아오시는 손님이나 교역자님들을 우리 집에서 친히 모셨던 일들이다.
목사님을 모실 때 아버지는 아들을 얻겠다고 다른 여자를 맞아들여 딴살림을 차리고 있으면서 어머니에게 많은 억지소리를 하셨다.
“목사가 네 서방이냐? 목사는 무엇으로 먹여 살리느냐?”
이때 어머니는 ‘교회에서 성미를 줘서 하는 것이라’고 대답하지만 사실은 교인이 몇 안 돼 성미 몇 되박 나오는 때였다.
어머니가 전도한 친구(최집사님)의 아들이 경제적으로 너무 어려운 환경에서 신학교를 다닐 때 집에 오면 교통비를 하라며 주머니에다 돈을 넣어주시던 일,
형부가 신학교에 다닐 때 경제 문제로 한 학기 쉬겠다고 하는 것을, 공부는 때가 있는 것이라며 기어코 등록금을 마련해 공부를 계속하게 했었다.
작은 시골 교회에서는 교인도 적지만 주일학교 교사를 할 만한 사람은 더 더욱 부족했다. 초창기에는 우리 어머니, 기태(현 의림교회 목사) 어머니가 교회하교 교사였지만 나중엔 그분들에게 배운 우리가 교회 학교 교사가 되었다.
어머니는 내가 시집 올 때 함께 오셔서 아이들도 길러주시며 둘째 사위가 목사가 되기까지 희생적으로 도와 주셨다.
주의 종을 잘 받들던 어머니의 신앙생활은 두 사위가 목사가 되고 선지자의 가족이 되어 그 상을 받아 누리며 행복해 하시다가 74세의 연세로 고통 없이 평안히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2009 11. 30.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