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얼리즘 문학 속의 인간상
박완서 ‘그 가을의 사흘 동안’, ‘조그만 체험기’
문학과 인간탐구 윤리교육과 06211113 신지원
-그 가을의 사흘 동안
박완서.. 그의 소설 몇 편을 읽고 참 좋아진 작가이다. 이번 과제를 위해 20세기 한국소설을 쭉 훑어보다가 이름이 눈에 띄어 읽기 시작했다. 단편소설 하나하나마다 따져보면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지만 그 시대의 아픔으로 인해, 아니 꼭 그 시대라고 할 것까지야 없지만 각자 나름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이들이 있었다. 특히 그 중에서도 특히 기억에 남는 이는 ‘그 가을의 사흘 동안’의 주인공이다.
그녀는 오랜 소파 전문의로서의 생활을 끝마치기 사흘 전에서부터 지난날을 회상하기도 하며 하루하루를 새 생명을 받아 낼 기회를 꿈꾸며 카운트다운을 해나간다. 정식 의사로 활동하기 시작했을 때 그녀가 진료과목을 산부인과로 선택한 것은 자신과 같은 고통을 갖게 된 여자들을 그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처음의 그 목적은 의미를 잃어가고 소파전문의라는 그녀의 직업은 단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 되어가고 말았다. 인터넷에 한 글에 의하면 [그녀는 복수의 왜곡된 형태로 자신에게 낙태를 문의하러 온 여성들에 대해 조소를 나타내며 이 수술을 아무렇지 않게 허락함으로써 그녀는 ‘임신’이라는 것의 고유한 가치를 부정한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복수 대상의 부재라는 현실 안에서 조소라는 왜곡된 복수의 형상은 모순적이게도 진짜 복수의 대상이 속해있던 ‘남성’이라는 무리를 감싸주는 꼴이 되었다. 그녀는 임신은 별 것도 아니라는 자위적인 생각으로 소파를 해왔겠지만 이에 따라 ‘남성’이 한 일, 또는 한 짓을 증명할 수 있는 단서를 없애버리고 말았으며 태반을 먹게 한 것도 ‘남성’을 위한 여성의 미를 향한 추구를 인정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물론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녀’가 더 이상 고통 받는 여자들을 그 고통에서 구원하기 위함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자신의 환자들에게 조소를 보낸 것도, ‘임신’의 가치를 부정한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비록 자신의 상처로 얼룩진 임신 때문에 처음에는 그것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았을지 모르겠지만 처음은 위태로웠으나 나름대로 단란한 가정을 이룬 황 영감네 식구들을 부러워함으로써, 마지막 사흘 동안 새 생명에 대한 막연한 기대를 보임으로써, 그리고 자신과 같은 고통에 괴로워하는 소녀에게서 자신의 한을 또다시 느끼면서도 새 생명에 대한 간절함을 떨치지 못함으로써 그 누구보다 ‘임신’과 ‘새 생명’의 참 가치를 느꼈다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그녀가 [홀로 사는 여자보다는 더불어 사는 여자가 아름답다고, 더불어 살되 아들 딸 가리지 말고 둘만 낳는답시고 소파를 열두 번도 넘어 했으되 그래도 아들 딸이 서넛은 되는 여자가 훨씬 더 아름답다고, 그보다 더 아름다운 여자는 서방이 수없이 있으면서도 평생에 연애 한 번 해보기가 소원인 창녀고, 그보다 더 아름다운 여자는 도망간 창녀가 죽자 사자 연애하던 남자를 따라갔대서 찾지 않기로 마음먹은 산전수전 다 겪은 늙은 포주라고, 마치 고정관념을 허물어 거꾸로 쌓듯이 그렇게 생각했다.]라고 말한 부분에서 볼 때 그녀는 그 누구보다 자신의 환자들을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고 가족처럼 여긴다는 마음이 절실히 느껴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이 나 역시 몸을 파는 여자들에 대해 편견을 갖고 그들을 안 좋게 바라보아왔는데 이 부분을 읽을 때만큼은 그들도 사람이구나.. 그들도 사랑을 하고 연애를 하고 그러는 평범한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절실히 느끼며 ‘그녀’의 따뜻한 마음이 내 마음에 까지 전해져 오는 듯 했다.
물론 6.25에만 국한된 일은 아니고 6.25가 남긴 민족적 상처라면 흔히들 생각하는 가족의 이별, 민족 간의 전쟁은 아니지만 그녀가 한 외국인 남자에게 당한 일은 어쩌면 그 보다 더 큰 상처였을지 모르겠다. 인터넷의 한 글을 또 한 번 인용하자면 [실로 가을과 같은 여자였다. ‘그 가을의 사흘 동안’에서 주인공인 ‘나’는 가을과 같았다. 푸르른 잎들을 내 눈 밑의 다크써클과 같이 생기 빠진 어두운 색으로 만들고 기어이 떨어뜨리는 가을처럼 살아온 그녀였다.] 그렇다 그녀는 가을처럼 살아왔다. 하지만 ‘그녀’역시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이다. 아니 어쩌면 보통 사람들 보다 생명에 대한 애착이 강한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을 지도, 따스한 햇살이 비추는 가을처럼 살아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난 ‘그 가을의 사흘 동안’에서 본 지극히 평범하지만 가슴에 박힌 못으로 인해 평범하지만은 않은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던 ‘그녀’를 잊지 못할 것 같다.
-조그만 체험기
이 소설의 주인공 역시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남편 뒷바라지 열심히 하는 순진한 아줌마이다. 그녀는 남편의 연행 소식을 듣고 달려가 얼굴이라도 보려 수위에게 애원하는 순진한 모습을 보이다가도 수위에게 무시당하고 저자세로 나온 것을 후회하는 어리숙한 셈을 하기도 한다. 또한 그녀는 남편과 자신이 살아온 나이 백세에 가까운 데 빽 하나 없겠냐는 조금은 어쭙잖은 생각을 하기도 하고, 피의자의 가족들을 보며 경멸을 느끼다가도 빽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들에게 친숙함을 느끼고 나중에는 심지어 그들 사이에서야 편안함을 맛볼 수 있는 지경에 이르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너무 현실에 맞춰서 생각하고 느낀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아파 본 사람만이 아픔을 이해하듯이 어찌 보면 지극히 평범한 것이다. 주인공은 점점 현실을 깨달아 가면서 더 이상 남편의 결백함을 증명하려고도 심지어는 믿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주인공이 현실에 부딪히면서 현실과 타협하기도 하고 현실에 좌절하기도 하는 모습은 꼭 흰 천에 검은 물이 번져가는 듯한 모습을 보는 것 같기도 하지만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주인공이 자유를 논하는 부분에서 소박한 것에도 행복한 소시민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십오 일 후의 언도 공판에서 남편은 자유의 몸이 됐다. 그는 다시 아침에 나갔다 저녁에 돌아오게 됐고, 처음엔 그것만으로도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더니 차츰 시들해지면서 나는 다시 바가지를 긁게 되었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 생활의 평온이 돌아오니 다시 그전처럼 자유의 문제를 생각하는 밤까지도 돌아왔다. 어느 날이고 자유를 유보하고 있는 상황이 좋아져서 우리 앞에 자유의 성찬이 차려진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전 같으면 아마 가장 화려하고 볼품 있는 자유의 순서로 탐을 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이 있은 후로는 하고많은 자유가 아무리 번쩍거려도 우선 간장 종지처럼 작고 소박한 자유, 억울하지 않을 자유부터 골라잡고 볼 것 같다.] 인용이 다소 길었는지 모르겠지만 이 마지막 부분에서 평범한 인간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다. 평소 자신들이 누리는 것을 당연한 듯 여기다가도 그것을 잃고 나서야 소중함을 깨닫는.. 그러다가도 다시 되찾으면 또다시 소중함을 잊고 마는 인간의 모습. 이것이야 말로 작품속의 소시민들의 모습이자 곧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