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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놈의 앞잡이들
“전쟁터에 나가려면 지들이나 나가서 뒈지든 말든 하지. 지 세끼들은 빼돌리구 맨마당한 게 없는 사람 자식이여.”
“숫자를 채우려니 그렇다나 봐.”
“그렇다구 왜놈 앞잡이가 되는 것은 관심도 없는디 우리더러 전장에 나가서 치근대는지 몰라. 돌아오면 좋은 자리 준다구 한다던디.”
“지 새끼나 그라라구 햐. 나는 이대루 사는 게 좋은니깨.”
친구지만 왜놈 편인지, 우리 편인지 모른다. 왜놈 성으로 바꾼 것 보면 왜놈 편인 것 같고 말하는 걸 보면 우리 편인 것 같고 헷갈린다.
“말 바꾸기 하는 사람이 많아져서 어떤 말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대개가 양다리를 걸치고 있어서 언젠가는 나에게 해가 될 사람들이다.
”카멜레온 같은 인간들이 곳곳에 깔려 있어서 불안해 못 살겄어.”
“그놈들은 우리더러 청개구리 같은 놈이라구 한다던디.”
“전세가 바뀌어 봐. 우리를 왜놈에게 팔아먹은 놈들이 제일 앞줄에 서서 ‘대한민국 만세’ 하며 충성경쟁을 벌일 테니.”
“이런 놈들은 국가보단 권력을 틀어쥘 만한 사람 줄에 서서 충성경쟁을 벌일 거구먼.”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면서 왜놈 편에서 했던 것처럼 나쁜 짓만 골라서 할 거구. 소갈머리 없는 놈이 아는 게 있어야 뭘 하든지 하지.”
“우리에게는 논밭이 삶의 터전이라구. 전쟁터인 셈이지. 그놈들 눈을 피해 가며 일하지 않으면 당장 굶어 죽는디 어쩔 수 없잖아. 전쟁터에 나가 싸운다는 마음으로 일해야지.”
“기름이 없다며 피마자유까지 염출해가는 놈들이여. 나중에는 무엇을 요구할지 모른다구.”
“연명하려면 뭐라두 있어야 하는디 논밭에서 나오는 소출로는 턱도 없으니, 어떡하면 좋댜.”
“우리에게는 그 흔한 빽두 없잖아. 빽을 쓰려면 돈을 갖다 바쳐야 하는디 그 많은 돈을 어디서 나서. 속 편하게 주제에 맞게 살아. 모든 것 내려놓구 말이야.”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잖아. 우리는 가난을 먹고 사는 거여. 찔레순 하나 잘라서 지근지근 씹구 물 한 모금 들이마셔. 그리구 입에 한참을 머금으면서 씹는 시늉을 하다가 넘겨 봐. 배도 불러오구 정신두 맑아질 테니깨.”
“왜놈들이 이런 훈련을 시키구 있구먼.”
“그런 셈이지.”
진은 농부이다. 흙에서 나오는 것만을 먹고 산다. 산을 들춰가며 다녀야 잔디 뿌리라도 얻어걸린다. 잔디를 씹으면서 느끼는 달콤한 맛에 황홀함을 느낀다.
“나는 흙 파먹고 사는 인간이여.”
다들 사는 것이 그러니 초근목피로 연명하기도 쉽지 않다. 왜놈이 수탈해 가는 것이 많으니 산과 들에는 남아난 게 없다. 산은 이미 헐벗어 있다. 소나무 찾기가 쉽지 않다. 말이 쉬워 초근목피라는 말을 하지만, 풀과 나무가 제대로 나 있어야 초근목피라도 먹을 수 있다. 잔디도 뿌리째 뽑혀 나간 지 오래되었다. 풀뿌리로도 연명하기 쉽지 않다.
먹을 게 없어서 굶기를 밥 먹듯 한다. 옆구리를 만져보면 피골이 상접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얼굴에는 광대뼈가 툭 튀어나와 내가 나를 보아도 해골처럼 보인다. 그래도 심장이 뛰고 허파가 산소를 공급해 주고 있다는 것에 고마워하고 있다.
길을 걷다가 핑 돌아 넘어진다. 넘어진 김에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잠시 쉰다. 더 쉬고 싶어도 가야 할 길이 멀어 그럴 여가가 없다. 하루 할 일이 정해져 있으니 그걸로 일을 잠시 마무리한다. 손을 땅에 짚고 끙 소리를 내면서 일어선다. 밭머리를 잠시 둘러보고는 그 자리를 떠난다. 지게를 짊어지고 털레털레 걷는다. 이렇게 살아도 부끄럽지 않다.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산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걸 지키며 오늘 하루를 산 것에 자부심을 갖는다.
그럭저럭 지내다 보니 25살이 되었다. 결혼할 나이를 좀 넘겼다. 중매로 결혼한다.
보통학교라도 나온 친구는 펜대를 궁굴리는 일을 한다.
“이들의 삶은 내용까지는 잘 모르지만, 백성을 대하는 꼴이 고압적인 행동을 거리낌 없이 하는 것을 보니 그놈 그놈이구먼.”
“똥을 피한다는 것이 이 더러워서 피한다고 하더니 그렇게 되어가고 있구먼.”
나라를 빼앗긴 것도 자기들끼리 싸우고 백성의 피를 빨아먹기에 바빠하다가 이런 사달이 난 줄도 모른다.
“어떤 면에서는 왜놈보다 더 나쁜 놈이지. 나라가 있고 권력이 있는 것인디, 이놈들은 내가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는 식이니 나라가 제대로 되겄어.”
왜놈 일에 앞장섰던 놈들이 날뛰고 있었다. 이런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려고 하니 나라의 앞날이 암울해 보인다.
“반성이라는 것을 할 줄 모르는 것들이 나라의 지도자가 되겄다구 설치는 꼴하고는. 그간 어디에서 처박혀 있다가 남의 나라가 연합해서 해방 시켜주니 나타나서 애국 노릇을 하고 있는 건지.”
생각대로 나라 발전은 뒷전이다. 이념을 가지고 다툰다.
“왜놈이 수탈해 갈 때는 어디에서 숨어있다가 이제야 애국자인 척 포장하고 나타나서는 권력다툼을 벌이고 뇌물을 받는 짓을 하는 것을 보니 왜놈과 무어가 다르지. 어쩌면 왜놈보다 더 나쁜 놈이지.”
진이는 앞날을 비관적으로 보고 있다.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다니는 친구들을 볼 때면 생모 생각에 젖는다.
“그러구 저러구 엄마는 잘 지내나. 묘에 가두 아무 귀띔두 해 주지 않으니 궁금한디.”
울상이 된는 날이 많아진다.
“나두 친구보다 못난 게 게 없는디. 친엄마만 살아 있었어도 어떻게 해서라도 공부했으면 넥타이 매고 직장에 다닐 수 있을 텐디. 이게 내 팔잔가.”
이미 성인이 되어 장가까지 들었으니 이런 원망을 해봐도 아무 소용이 없다. 그걸 알면서도 아쉬움이 남는지 그걸 한탄하면서 운다.
“생각하면 할수록 내 엄마가 한없이 원망스럽지만 지금 와서 어쩌겄어.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는데, 모든 것은 세월이 해결해 줄거구먼.”
일이 생길 때마다 어렸을 적 일이 문득문득 생각난다. 이럴 때마다 눈물을 흘린다. 남에게는 실없는 눈물이지만 나에게는 의미 있는 눈물이다. 울먹이면서 일하다 보면 어려운 일도 힘 안 들이고 마칠 수 있다.
“엄마가 살아계신다고 해도 이런 힘든 일이야 없어지겄어. 시국이 이런 걸 어쩌겄어.”
이내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 생각을 접는다. 하던 일을 계속한다.
“큰아버지는 왜놈들이 곡물을 탈취하려는 것을 막는다고 항거를 했다구 하지. 붙들려가서 온갖 고초를 당해 그 일로 해서 결국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다구. 그래서 내가 양자로 들어간 거구. 겉으로는 아부지와 같이 살지만 실상은 살림을 따로 난 거나 마찬가지이네.”
다 아는 가정사지만 친구들을 만나면 자신의 지금의 처지를 하소연하듯 늘어놓는다.
“아는 것이 있어야 편하게 제 밥벌이를 할 수 있지.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육체적으로 힘들기만 하지 당최 돈벌이가 돼야지. 풍년 들었다 흉년 들었다 하니, 하늘만 쳐다보고 있지. 봄 여름에는 하늘에 시커먼 구름이 끼면 비가 내리겄구먼, 하는 기대에 마음에 기쁘지. 가을 구름은 비가 내리면 아 되는디, 하는 생각에 가슴이 덜컹 내려앉지.”
농부의 마음은 자연을 품고 산다. 어떻게 하든 자연의 뜻을 거스르지 않으려 노력한다.
“산다는 것은 두려움 반 기쁨 반이 파도처럼 들쑥날쑥 파도처럼 파고 들지.”
이런 리듬이 깨지는 순간 파도는 산산조각이 난다. 모든 꿈이 사라진다. 빈털터리가 된다.
“이럴 땐 어떻게 하지. 아직 젊은디 빈 깡통을 차고 다닐 수두 없구. 깡통을 허리춤에 차고 다니면 뭣해. 가는 집마다 빈 깡통들인디. 이런 때를 대비해서 저축두 해 놓아야 하는디. 어디 사는 게 그런가. 위기를 넘기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쓰기에 바쁘지.”
허리춤을 졸라맨다. 지금은 배고프지만 내일은 좀 나아지겠지, 하는 희망을 갖고 싶어서다.
“우리는 가진 논밭도 없으니 입에 풀칠하기두 막막한디 돈을 꼬불쳐 놓을 게 없는디.”
“해방이 되어도 희망이 없으니, 언제 바닥에서 기어 나올 수 있을는지. 내일 내일 하면서 지내왔지만 그것두 한두 번이어야지. 이러다가는 정말 행복이 찾아와도 그게 행복인지 모르고 넘기는 거 아녀. 그게 좀 두렵네.”
“그놈이 그놈이지 뭐. 임금이라면 조상 대대로 이어받은 나라를 잃었으면 할복은 못 할망정 쪽발이한테 빌붙어서 빌빌거리고, 나라를 망친 신하라는 것들은 왜놈 졸개가 되어 수탈에 가담까지 하고 나섰다고도 하던디. 우리가 무얼 아나. 들리는 소문이 그렇지.”
“벼슬아치들이 더 문제더라구. 지는 뚫린 입이라고 일자 무식쟁이를 전장에 나가라고 떠들고 다녔다구 하던디. 지들은 호의호식한다면서 말이야.”
“그렇댜. 일본까지 건너가서 공부하려면 부자일 텐데, 자기 재산 지키기 위해서 어떤 놈은 착취하는 일에 앞장섰다며.”
“그렇다나 봐.”
“왜놈 말을 알아들으니 쪽발이들로서는 유능한 인재지. 우리에게는 착취에 앞장서는 나쁜 놈이지만.”
“그려. 그것도 젊은이들을 씨 말리고 싶어서 환장을 했지. 그 놈 또한 배운 놈들이래. 지 앞가림하기도 바쁜 사람 앞에 나타나서 위협적으로 말해서 겁을 집어먹도록 하지. 그 놈들은 그냥 끌어다가 쪽발이한테 진상하듯 바치지.”
“그러면 쪽발이 군인이 되는 거네.”
“끌고 가서 최전방에 보내어 총알받이로 삼는댜. 그걸 알면서 앞장서는 친 쪽발이 파가 있었다나 봐.”
“그려.”
젊은 사람만 보며 끌고 갔다. 왜놈 앞잡이만 보면 숨기 바빴다. 왜놈들은 거침이 없다. 맨 마당 것이 조선이었다. 조선을 식민지로 삼고는 중국 일부, 동남아를 다스리는 것으로 부족한지 미국까지 공격한다.
“그렇게 나쁜 짓을 하던 왜놈들이 어떻게 되었기에 항복을 했댜. 천년만년 살 듯 하드니 말이야.”
“올라갈 때가 있으면 내리박히는 날이 있는 벱이지.”
“그것두 모르구 남을 해코지하고 죄를 짓더니 산신령이 노했나 보네. 그렇게 쉬이 물러갈 놈들이 아닌디 물러난 것을 보니.”
“내가 들었는디 진주만인가 어딘가 쳐들어가다가 핵폭탄 두 방 맞고 이거 안 되겠다 싶어서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나 봐.”
“그런디 반쪽만 해방이 되구, 남쪽에도, 북쪽에도 나라가 따로 세워진다나 뭐라나.”
“그러면 조선이라는 나라는 없어지는 거여.”
“그렇다나 봐.”
“양반이 상놈은 보기만 하면 그렇게도 괴롭히더니만 결국 망하는구먼.”
“그러면 옛날 임금도 별 볼 일 없게 되겠는디.”
“임금이 무능해서 궁궐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고 무슨 낯으로 임금입네 하고 나서겄어.”
“그러면 삼국시대는 아니지만 이국시대가 되겠는디.”
“그렇다나 봐. 그런디 말 조심햐. 함부로 말하다가는 순사한티 붙들려가거든. 그러면 고문한댜. 죄목이 애매하면 간첩으로 뒤집어 씌우는 모양이더라구. 왜놈이 하던 수법을 그대로 사용한다나 봐. 악독한 것들.”
“지금은 우리가 만나고 있는 사람이 어느 편인지 모르니 조심해야 햐.”
“어떤 놈이 나라를 잡구 뒤흔들어두 그놈이 그놈일 거야. 어떤 놈이든 돈이 필요하면 구실을 붙여서 마구 후려쳐 갈거거든. 하던 버릇이 어디로 가겄어.”
“그러다 나라가 망했는디 또 그러겄어.”
“설마가 사람잡는댜.”
“그런디 북쪽은 누구나 잘 사는 나라구 남쪽은 자유와 평등을 내세우는 나라가 생긴다구 하던디.”
“누구나 똑 같이 산다. 그렇게만 된다면 북쪽 나라가 더 좋겄는디.”
“우리 봐 농사를 지어서 관리들이 다 추렴해가는 거. 왜놈과 다를 게 뭐 있어.”
“우리에게 자유를 줘 봤자 엇다 써 먹는디. 먹고 살 것두 없는디 남의 집에 가서 굽신거려 가며 일해야 하는디. 무슨 얼어 죽을 자유여. 쌀 한 톨이라도 풀어주고 나서 하는 소리면 몰라두. 삶아 먹지도 못하는 자유를 주어 봤자 어디다 써 먹으라구.”
“사실 없는 사람과 있는 사람이 어떻게 평등하게 살 수 있어. 있는 놈들은 아직두 양반 상놈 따져 가며 우리 집 청지기이었는디 말두 안 듣네 하는 판인디.”
“이러다 편 갈라서 서로 옳다구 편 갈라서 싸우는 거 아녀. 그거 우리 특기잖아. 서로 헐뜯고 남의 상처를 후벼 파는 못된 놈들이 서로 갈라서면 무슨 짓이든 못하겄어.”
“뻔할 뻔이지. 그간 많이 지켜봤잖아.”
지금의 상황을 말하면서 잠시 쉬고는 뽕잎을 말린 것을 둘둘 말아서 부싯돌에 부시를 세게 쳐서 불을 일으킨다. 화가 난 열기와 함께한 불똥은 마른 쑥에 옮겨붙는다. 불이 확확 타오른다. 뽕잎에 불을 붙여서 들이킨다. 폐까지 파고 들어간 연기는 울화통이 터지는 마음을 조금씩 진정시켜 준다. 지금 급한 것은 논바닥에 엎드려 피, 동방사니, 올방개를 뽑아서 논바닥에 내려놓고 밟아서 흙에 묻어둔다. 뿌리가 뽑힌 데다 흙에 묻혀있으니 숨을 쉬지 못해 결국에는 죽어서 천연비료가 된다. 그러나 천수답의 풀은 뽑히지 않고 끊긴다. 이것이 도로 번져서 논바닥을 가득 채운다. 이것을 뽑아낼 방법이 없다. 여기에다 벼까지 시원찮으니 잡초를 뽑아내고 싶은 마음도 없어진다. 그래도 쌀 한 톨이 소중할 때이니 땀을 흘려가며 풀을 뽑는다.
“무능한 것들이 나라를 이 모양 이 꼴을 만들어 놓고 떵떵거리며 살고 있지. 있는 놈들 봐 남은 논바닥을 보며 죽을 고생을 하고 있는디 모시 바지저고리를 빳빳하게 풀을 먹여 다려 입고 들판을 휘젓고 돌아다니는 꼴 봐. 저런 걸 보면 못 사는 게 죄지 뭐. 누굴 탓하겄어.”
“그려, 세상이 바뀌어두 없는 사람만 개고생을 한다니깨.”
“해방이라두 되면 왜놈들 앞잡이는 어디로 갈까. 낯부끄러워서 숨어버리겠지 했잖아. 지금 봐. 장리쌀 주고는 떵떵거리고 살잖아.”
“왜놈들이 가진 땅을 내놓으면 우리한티 좀 돌아올 거 아녀.”
“아무래두 낫겄지만 공것 바라지마. 우리 같이 까막눈이나 뒷북치지 왜놈 앞잡이들이 이미 자기 것으로 만들어 놓았을 텐디.”
“두구 봐 왜놈이 떠나면 앞잡이들이 그 자리에 꿰차고 앉아 있을 테니. 그들은 서민을 벗겨 먹는 기술을 가지고 있거든.”
“아는 놈이 더 무섭다구 우리를 속속들이 알고 있으니 빠져나갈 구멍을 미리 틀어막아 놓을 거 아녀. 이게 더 큰 문제지.”
“그걸 독재라구 하지, 조선시대처럼 말이야. 임금 말 한마디면 그게 법이잖아. 지금은 그걸 왜놈이 하고 있을 뿐이야.”
사실 그랬다. 해방이 되었다고 해도 없는 사람 삶은 변한 게 하나도 없었다. 동네 일을 하는 사람을 위해서 필요하다며 추렴을 내라면서 가마니를 들고 다닌다. 벼를 두어 됫박씩 낸다. 면사무소는 비료를 외상으로 보급해 주고 대금은 가을에 거둬간다. 농민은 불이익을 받을까 봐서 관청에 잘 보이려 노력한다. 이런 일을 빌미로 농촌 사람은 자기들에게 매달리게 만드는 구조로 바꾸어간다. 공짜도 아닌 걸 가지고 비료공급이 적다며 특별히 봐서 더 준다며 은근히 매달리게 만든다. 눈꼴사나운 사람으로 바뀌어간다. 곳곳에는 건달들이 나타나서 저작거리를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는다.
“저놈 하는 꼴 좀 봐. 쪽발이한테 그리 아부하던 놈이 왜놈이 가고 없으니 건달이 되었는디. 게다짝을 질질 끄시고 꼬리를 살살 흔들어가며 다니던 놈이 주인이 없으니 자기가 주인인 줄 알고 설치는 것 봐. 하는 꼴, 참 볼만한디.”
“살쾡이 같은 놈이 없어져서 편할 줄 알았는디 생쥐 같은 놈이 나타나서 염장을 질러대잖아.”
“눈꼴사납지만 어쩌겄어. 비위를 맞춰줘야지. 여기서 짤리면 다른 곳에 가서 이런 일을 할 텐디. 주인은 이런 건달을 좋아하거든.”
“당꼬쓰봉 입고 설쳐대는 놈 좀 봐. 이런 모습을 보면 옛날 생각이 난다니까. 더는 안 봤으면 좋겠는디 난 지금두 왜놈 앞잡이요, 하며 어슬렁거려대고 있는 꼴, 어쩐지 보기 싫은디.”
“그 사람은 그래두 그때가 인생 절정기였을 거야.”
모두가 무능한 통치자와 썩어 빠진 관리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나라를 망하게 하고 고통은 없는 사람과 젊은이들, 미래 세대에 에게 뒤집어씌워 놓는다. 이런 사람이 지도자로 있는 동안은 앞날이 노래진다. 희망이 없다. 한숨부터 나온다. 아무리 그래봤자 마음만 상한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가족의 호구를 책임져야 한다. 이런 일은 피한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국가 위기에 일, 중 어느 쪽에 줄을 설 것인가를 두고 파당을 지어 싸운다. 적을 코앞에 두고 상대방의 약점을 캐내어 음해한다. 이런 일에 정신이 팔린 사이에 나라까지 부패해졌다. 나라의 근간이 조금씩 부실해졌다. 적을 앞에 두고도 파당을 짓는 바람에 한번 제대로 맞붙어 싸워보지도 못하고 나라를 왜놈에게 바쳤다. 나라가 망한 것이다. 지금은 같은 친구이지만 이해득실에 따라 서로를 배신하고 친구의 등에 칼을 꽂을지도, 아니면 꽂힐지도 모른다. 나중에 보면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서 도와달라며 자기 밑에 들어와서 꼬봉노릇을 자청한다. 말을 듣지 않으면 옛날이야기를 끄집어내서 협박하기도 한다.
이런 상황을 한 번 경험하고 나면 세상에 믿을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자연히 말과 행동이 조심스러워진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도 세심하게 신경을 써야 한다. 말을 늘어놓느니 차라리 대접에 막걸리 한잔을 따라놓고 술잔과 대작하면서 대화를 나누는 것이 속이 한결 편하다. 남 봄에 헛소리 같이 들릴지 모르지만, 술잔에 그간 쌓인 스트레스를 쏟아붓는다. 아무 이득도 없는 말을 해서 상대방을 속 썩이게 할 필요도 없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왜 나왔을까. 아무리 말을 많이 했어도 알맹이가 없으면 아무 울림이 없다. 입을 현란하게 놀려 봐야 일구이언하면 진실을 의심받는다. 이런 말은 아무리 많이 해 봐도 속 빈 강정에 불과하다. 말만 번지르르하게 반복해 봐야 언행일치가 되지 않으면 그것은 말뿐인 사람으로 만든다.
“경솔하게 앞잡이 흉을 보다가 상대방이 앞잡이의 앞잡이일 수 있어. 저 친구가 네 친구이기도 하지만 상대방의 첩자인지 누가 알아. 내가 첩자여 하고 말하지 않으면 모르잖아.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곤욕을 치를 이유가 없잖아.”
“그래서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나온 거여. 말할 때도 어느 쪽에도 걸리지 않도록 경계선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면서 곡예를 하듯 애매모호하게 말할 때가 있어.”
“그렇다는 소리여, 안 그렇다는 소리여?”
애매모호하게 말한다. 답을 할 경우 한쪽 편에서 공격을 받을 수 있다. 이런 때는 답을 유보한다. 조금 바보가 되는 것이 나을 때가 있다.
“글쎄유. 잘 모르겄는디유.”
“너도 다 알면서 이방 곤란한 것을 왜 내 입으로 말하라는 거여. 이 사람 싸움 붙이려구 환장했구먼. 그런 것은 니가 판단해서 말하든지 말든지 햐.”
“예스를 해도 노를 해도 트집을 잡을 놈이 얼마나 많은디 말햐. 내가 멍청이인 줄 알구 그러는 거여.”
일제 강점기 때 민족의 정체성이 문드러질 대로 문드러졌다. 독립군과 친일파가 갈라져서 싸웠다. 그 여파가 아직도 가시지 않았다. 패를 갈라서 싸우는 버릇이 그대로 남아 있다. 남의 나라에 의해서 해방이 되고 나니 강대국의 공과에 따라 나라가 갈라졌다. 조선의 땅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사람의 마음은 황폐해질대로 황폐해졌다.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쥐구멍에도 볕 들 날이 있다는디. 우리나라가 언젠가는 부강해질 날이 온다는 것을 포기할 수 없지.”
강대국을 등에 업고 나라가 세워지기는 했지만 제 버릇 개 주는 식으로 되어거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국민을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새로운 세계로 이끌고 나갈 생각은 뒷전으로 밀쳐놓고 권력다툼을 벌인다. 북쪽과 남쪽으로 언제 같은 조선이었냐며 이미 갈라섰다.
“하는 꼬락서니를 보니 쥐구멍에도 볕 들 날이 올 거라는 말은 하나의 희망사항이여.”
해방되고 남북이 갈라섰다. 국민에게 비전을 주지 못하는 나라, 북에 적이 있는데 남쪽은 서로 권력을 잡겠다고 정쟁을 일삼는다. 정쟁하다 망해놓고 또 정쟁을 벌인다. 나라를 망하게 하려고 작정한 사람처럼 보인다. 북이 있는데도 국가이념을 두고도 싸운다. 어떻게 하면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그런 계획이나 희망을 주지 못하는 나라가 되었다. 국민은 헐벗고 있는데 국부 타령이나 하고 있다. 결국 4.19로 독재정권이 넘어졌다. 어떻게 하면 국민이 잘 살 수 있을까는 뒷전으로 밀쳐놓고 또 싸우다가 5.16을 맞이 했다. 국방과 경제발전을 들고 일어섰다. 그렇게 해나갔다.
동네 곳곳에는 불량배들이 설쳐대고 있다. 경찰은 손을 놓고 있다. 경찰다운 경찰이 아녔다. 지서는 칠일 세력이었을지도 모르는 토호 세력의 편을 들어주기에 바빴다. 사회 부조리한 현상을 잡을 생각은 하지 않고 본인들이 부조리에 앞장을 섰다. 범인을 잡아놓고는 뇌물을 받고 풀어준다. 일제 강점기 때 순사나 공무원 버릇이 되살아났다. 급행료가 생겨났다. 그보다도 서민의 마음을 짓밟는 것은 어떤 구실이라도 붙여서 먼 길을 오라 가라 한다, 잘못한 것을 찾아내서 벌을 주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호적등본 하나 떼려 해도 줄을 무어같이 서야 한다. 그것도 권련 한 갑이라도 찔러주어야 좀 일찍 처리해 준다.
여기에다 흙 파먹고 사는 사람은 해방 전이나 후나 생활은 그게 그거였다. 무엇을 들여다보려 해도 서류들이 한문투성이이다. 호적등본을 봐도 무어가 무언지 모른다. 글자를 모르니 흰색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자라는 정도로, 서류에 무어가 적혀있는지 아예 볼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나 일자무식이어요, 말하기에는 자존심이 좀 상하잖아. 그래서 눈에 다래끼가 났다고 하며 다닌 적도 있지. 그래서 까막눈의 부끄러움을 조금이라도 덮으려고 엄청 노력했다구.”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면서 눈물을 훔친다. 징는 친구가 서당 선생이어서 옆에서 주워들은 게 있어 생활 한자는 알고 있었다. 친구들은 말한다.
“그렇게 되고 싶지 않으면 공부해야 하는디,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구 그게 안 되드라구. 또 알아봐야 골치만 아프지, 쓸데가 없더라구. 그렇게 세월을 보내고 나니 나도 모르게 까막눈이 되었더라구.”
“여자들은 학교를 보내지 않았지. 눈을 뻔히 뜨고도 자기가 탈 버스가 와도 내가 타야 하는 버스인지 알아보지 못하잖아. 하는 수 없잖아. 길 가는 사람이라도 붙들고 일일이 물어야지 어쩌겄어. 눈뜬 장님이 되었으니 얼마나 답답하겄어. 그게 한으로 남드라구. ”
“자식을 공부시키려 애를 쓰는 것도 내가 못 배워 한이 된 것을 풀려고 하는 거여”
“그렇구 말구지.”
“나두 내 새끼들만큼은 눈뜬장님으로 만들고 싶지 않아서 공부를 시키는 거여.”
이 말이 끝나자마자 또 물어야 한다.
“학상, 저 버스 논산 시장 가는 거 맞지유?”
버스 안에서도 묻는다.
“야, 논산역 지나서 내리면 시장이구먼유.”
“고마워, 학상.”
그렇게 물어물어 장에도 가고 친정집에도 간다. 그것도 가끔 오니 한 번 놓치면 몇 시에 오는지도, 지금 몇 시인 줄도 모르니 무작정 기다려야 한다.
“운전수 양반, 새다리 가는 거 맞지유.”
시집올 때는 다리가 없었다. 시집오고 10년이 지났을까 했는데 다리 하나가 생겼다. 사람들은 다리가 새로 생기니 그걸 새다리라고 부르고 있다. 버스가 휙휙 지나가니 어디가 어디인지 모른다. 변했다고 해보아야 길 주변에 없던 초가삼간이 새롭게 단장하고 있을 뿐이다.
글자를 모르니 답답한 게 한둘이 아니다. 돈 계산과 더하기 빼기 정도는 두 손가락과 발가락을 동원해서 어렵사리 하지만 조금 복잡한 것은 계산 자체가 쉽지 않다. 그런데 친구 중에 한학을 한 사람이 있다.
“학교에 다니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다들 돈 내고 공부하는 데 방해가 될까 봐 그 집 문밖에서 속으로 따라 했지. 하늘 천 따지 감을 현 누루 황하면서 말하고 듣고 땅바닥에 쓰면서 외웠지.”
그렇게 어느 정도의 글자는 깨우쳤다. 쓰는 것은 서툴러도 써 놓은 것을 읽을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글자를 깨우쳐야 속지 않고 살 수 있어.”
진의 각오는 대단했다. 동생은 학교에서 배우고 있는데 형이 모르면 동생이 깔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진은 나무막대기로 땅바닥에 글을 써가면서 공부했다. 많이 알면 좋겠지만 최소한 서류 정도는 읽고 쓸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자기 이름 주소는 한문으로 쓸 줄 알아 한다며 가르쳐 준다.
“언문만 알고 있으면 격을 좀 낮추어 보거든. 신문두 한문이 섞여 나오잖아. 신문을 읽으려면 한문을 알아야 햐. 한문을 조금씩 알아가다 보면 그 속에 뜻이 담겨 있지. 언문은 한문에서 온 것이 많거든. 낱말 풀이를 하려면 한문을 알고 있어야 쉬워. 필요한 것부터 공부하면 실생활에 쓸 수 있어서 좋지. 흥미두 있구. 사회에서 쓰지도 않는 것만 잔뜩 배워 와 봐야 계약서 하나 읽지도 쓰지도 못하면 헛거라니깨.”
그러면서 오래된 신문지 하나를 꺼내서 한문이 뒤섞인 사설을 읽는다. 모르는 글자가 나오면 옥편을 찾아서 음과 훈을 단다.
“길거리 간판에 나온 한자 하나 읽지 못해서 쩔쩔매면 안 되잖아.”
이게 그때 진의 이야기이다.
“고등가 다닌다고 잔뜩 멋만 들어서 시답기만 하지, 신문하나 술술 읽어 내려가지 못하면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모를 거 아녀. 답답하기두 하구. 공부는 돈만 내고 핵교에 다닌다구 제대로 배워지는 것이 아녀. 우리 같은 무식쟁이도 읽는 신문이나 계약서조차 읽지 못하면 헛 똑똑 이가 되는 거여.”
같은 내용을 반복하다 보면, 알고 있는 한자를 생활에 반복해서 활용하다보면 외워진다. 관심도 간다. 그러면 더 공부하게 된다. 이게 진의 공부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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