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사익(宋思翊)
[생졸년] 1672년(현종 13)~1709년(숙종 35) / 향년 37세
[문과] 숙종(肅宗) 28년(1702) 임오(壬午) 별시(別試) 병과(丙科) 2위(05/13)
[생원] 숙종(肅宗) 25년(1699) 기묘(己卯) 식년시(式年試) (生員) 1등(一等) 2위(2/100)
본관은 진천(鎭川)이고 전주(全州) 출신으로 자(字)는 운거(雲擧)이고, 1672년(현종 13)에 태어나 1699년(숙종 25) 생원 및 진사에 아울러 합격하고, 1702년(壬午年,숙종 28) 별시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주요 관직으로는 좌랑(佐郞), 사록(司錄), 기묘원진(己卯員進)을 지냈으며, 아버지는 진천 왕궁면 출신 생원(生員) 화(華)이고, 외조부는 의성(義城)인 지평(持平)을 지낸 김정일(金鼎一)이며, 장인은 남원(南原)인 윤주(尹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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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랑 송공 묘갈명(佐郞宋公墓碣銘) - 도암(陶菴) 이재(李縡) 찬(撰)
내가 일찍이 사서를 햇빛에 말리기 위해 태백산(太白山)에 갈 적에 송사익(宋思翊) 운거(雲擧) 공이 그때 승정원 주서를 임시로 맡아 서문을 지어 전송하였는데, 그 문장이 크고 넓어서 흡족하였다. 그 후에 또 성 동쪽으로 공을 찾아가니 방 안에는 서적만 단출하였다. 함께 고금의 일을 한껏 논하다가 하루를 다보내고 돌아왔다.
공은 평소 성품이 개결하여 남의 집에 출입하는 일이 적었고 오직 간간이 나와 종유하였으니 서로 인정함이 깊고 독실하였다. 공이 세상을 떠난 지 9년이 되었을 때 그의 형 사헌부 장령 사윤(思胤)이 내게 말하기를,
“공만큼 내 아우를 잘 아는 사람이 없으니, 그대의 한마디 말을 얻어 아우의 무덤을 빛내었으면 합니다.”
하였다.
나는 의리상 감히 사양할 수 없었다.
행장을 살펴보니, 진천 송씨(鎭川宋氏)는 성씨의 발원이 매우 먼데, 신라 때 아찬을 지낸 순공(舜恭)과 고려(高麗) 때 평장을 지낸 인(仁)이 족보에 보인다. 본조에 들어와서는 이조 참판 우(愚)가 가장 현달하였고 그 후로 진사 옥(沃)이 처음으로 전주(全州)에 살게 되면서 자손들이 마침내 세거지로 삼았다.
대대로 문장을 가업으로 삼아 조부 휘 시우(時雨)와 부친 휘 화(華)는 모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모친 의성 김씨(義城金氏)는 지서(地西)의 따님이고 외조부는 지평 김정일(金鼎一)이다. 공은 총명함이 남달라 말을 하자마자 글자를 이해하여 간간이 남을 놀래는 말을 하였으며, 구애됨이 없이 호방하여 진사공이 엄히 가르쳤다.
10세 때 경사(經史)에 통달하였고 장성해서는 제자백가를 섭렵하였는데 난해한 서적에 특장이 있었고 또 병법 읽기를 좋아하였다. 서울에서 유학할 적에 재능과 명성이 자자하여 귀족의 자제가 공과 교제하기를 청하였는데 그때마다 공은 달가워하지 않았다.
기묘년(己卯年,1699, 숙종 25) 생원ㆍ진사시에 합격하여 생원 가운데 2등을 차지했으며, 그해 겨울 형 장령공이 또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당시 부모님이 모두 살아계셔서 남들이 영화롭게 여겼다. 임오년(壬午年,1702) 정시(庭試)에서 5등을 차지하여 성균관에 분관되었고 학유와 학정을 거쳐 의정부 사록에 천거되어 제대로 자리에 올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박사로 옮기고 전적에 올랐다가 예조 좌랑으로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친상을 당하였다. 공은 이전의 상을 치르면서 지나친 슬픔으로 몸을 상하여 거의 죽을 지경이었는데, 이때에 더욱 공경스럽게 예를 다하느라 병이 다시 생겼다. 상복을 벗자마자 기축년(己丑年 ,1709) 12월 12일 병상에서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38세였다.
공이 한번은〈몽유악루부(夢游岳樓賦)〉를 지었는데 사람들이 속세의 말이 아니라고 하였고, 병중에 또 “쥐새끼 하는 대로 내버려두네.〔鼠蟲任所使〕”라는 시구를 입으로 읊조렸으니 절필(絶筆)이 되었다. 절친한 벗에게 손수 편지를 보내 영결을 고하면서, 차고 있던 장도(粧刀)를 풀어서 벗에게 보냈다.
다시 집안사람들에게 부탁하기를,
“내가 죽거든 몸을 씻어서 반드시 깨끗하게 하여라.”
하였으니, 그 차분하고 침착함이 이와 같았다.
부인 남원 윤씨(南原尹氏)는 문효공(文孝公) 효손(孝孫)의 손녀이니 여사(女士)의 명성이 있었는데 공보다 3년 뒤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이 없어 종형의 아들 덕준(德駿)을 후사로 삼았다. 공은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으니 병든 진사공을 모실 적에 곁에서 약물을 올려드리고 뜻에 맞도록 힘썼다.
진사공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소활한 너도 이렇게 할 수 있구나.” 하였다. 모친을 모실 적에는 항상 어린아이처럼 놀면서 즐겁게 해드렸으며, 억지로 벼슬살이에 힘쓰면서도 차마 곁을 떠나지 못했는데 떠나게 되더라도 때를 넘기지 않고 돌아왔다. 또 형을 공경하여 매사에 반드시 형에게 여쭈며 말하기를, “한 집안에 두 어른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형제 사이에 평소 화락하게 지내면서도 간곡하게 선(善)을 권하는 붕우 사이의 도가 있었다. 강개하고 준열하여 불선(不善)을 보면 몸이 더럽혀질듯 여겼고, 남들과 교제할 적에는 신의를 중시하였으며, 여러 사람과 있을 때 재담을 잘 하였지만 여색을 입에 담지 않았다.
일찍이 지금 세상에는 눈을 둘 곳이 없고 오직 서적이 즐길 만하다고 말하였다. 태사공(太史公 사마천(司馬遷))의〈화식전(貨殖傳)〉을 각별히 애호하여 글을 쓸 때면 번번이 몇 번이고 암송하였다. 만년에는 잠자고 먹는 일을 잊을 정도로 주자(朱子)의 글을 좋아하였다.
의학, 복서, 풍수, 바둑, 장기, 활쏘기, 수학 등부터 자잘하고 천한 기예에 이르기까지 배우지 않고도 능하였지만 절대로 스스로 자부하는 법이 없었다. 공의 용모는 청한하고 수척하여 만나면 세상사를 초탈한 것처럼 보이지만 마음속은 고지식한 유자가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나는 공을 대충은 안다고 생각했는데도 오히려 공의 진면모를 다 알지 못했으니, 하물며 세상 사람 가운데 공을 모르는 자는 어떻겠는가. 그러나 공이 독실한 행실, 고결한 뜻, 넓은 학문을 지니고서도 벼슬길이 순탄하지 않고 수명 또한 길지 않았기에 세상에서 공을 위해 슬퍼하는 자들이 드물고 나만 홀로 깊이 슬퍼하니 공을 알지 못한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하니 장령공이 응당 내 글을 비루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마침내 이와 같이 그 대략을 서술하고, 또 소싯적 종유하던 즐거움을 말하여 내 느낌을 부친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옛날 인재의 / 在昔人材
창고는 호서 지방이었네 / 府庫維湖
근래엔 어찌 이리 쓸쓸한가 / 近何寥闊
하늘의 내려줌이 달라서가 아니라네 / 匪天降殊
어진 이를 세우되 부류를 따지지 않은 / 立賢無方
상나라가 아득하구나 / 邈哉有商
재능이 많았어도 / 雖才之豐
지위에서 펼치지 못함이 마땅하구나 / 宜位不揚
재능은 타고 났지만 운명에 가로막혔으니 / 旣賦而閼
또 누구를 탓하리오 / 又將尤誰
공을 알고 싶은 자는 / 欲知公者
이 명을 살필지어다 / 徵此銘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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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脚註]
[주01] 좌랑 송공 묘갈 :
저자가 송사익(宋思翊, 1672~1709)을 위해 쓴 묘갈문이다.
[주02] 어진 …… 아득하구나 :
《맹자》〈이루 하(離婁下)〉에 “탕왕(湯王)은 중도를 잡으시며, 어진 이를 세우되 일정한 방소가 없이 하셨다.[湯, 執中, 立賢無
方.]”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장유승 권진옥 이승용 (공역) |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