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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의 문화재, 쉼 없는 역사의 현장을 찾아....
<붓다뉴스> 김환대 2003안동하면 전탑의 고장이며 임하댐 주변의 잉어찜, 송화주, 간고등어, 헛제사밥 안동찜닭, 안동 식혜, 안동 소주 등이 먹거리의 고장이며 또한 하회마을과 도산서원, 병산서원 등 서원이 많은 유교 문화의 현장이기도 하다.
안동은 자주는 아니지만 틈틈이 찾는 곳으로 이번에는 발길이 그다지 잘 가지지 않는 곳을 찾아 나섰다. 행정면적이 넓다 보니 아직도 못 다 본 유적들이 너무나 많다.
이번에는 임하면 일대와 풍산읍 일대가 답사의 목적지가 되었다. 가는 길가에 우연히 도로변을 보니 문화재 안내간판이 보여 찾아갔다. 귀래정이었다. 예정에 없던 코스이나 지나가는 길에 있어 잠시 들렀다. 귀래정은 고성이씨 문중에서 관리하는 건물로 안동시 정상동에 있으며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17호로 지정되어 있었다.
귀래정은 고성이씨 안동 입향조 이증의 둘째 아들인 낙포 이굉이 지은 정자로 이굉은 25세에 진사, 40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지평, 상주 목사, 개성유수 등 직을 지내다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귀양을 가기도 한 인물이다. 중종 8년(1513) 벼슬에서 물러나 안동으로 퇴거하여 부성 건너편 낙동강이 합수되는 경승지에 정자를 짓고 도연명의 '귀거래사' 글 뜻과 너무나 흡사해 그것으로 정자의 명칭을 귀래정으로 삼았다 한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안동의 수 많은 정자 가운데 귀래정, 임청각, 군자정, 하회의 옥연정을 으뜸으로 꼽고 있다.
이 정자는 정면 4칸ㆍ옆면 2칸 규모의 T자형으로 된 팔작지붕 건물이다. 정면 4칸은 넓은 우물마루로 되어 있으며, 옆면은 온돌방으로 되어 있다. 기둥은 마루 주위에만 둥근기둥을 사용하였고, 그 외는 모두 네모기둥을 사용하였다. 이 건물은 창문에 중간설주가 남아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곳에는 이굉을 비롯해 농암 이현보, 송재 이우, 택당 이식, 백사 윤훤 선생 등 30여 명의 시판이 걸려 있다.
이제 본격적으로 임하면을 찾으면 임하면 금소동 행정구역상에는 금소리이나 지역내에서나 통상 명칭은 금소동이다. 이런 경우는 예천이나 다른 군 단위 지역들도 있다.
금소동은 대체로 예천 임씨와 울진 임씨의 입향으로 이루어진 마을로 알려져 있는데 마을에 걸려 있는 문패를 보니 모두 다 임씨였다.
임하에는 많은 유적지가 있다. 고택들을 비롯하여 탑들이 있는 곳이다. 이 곳 금소동 한 민가 내에 마멸이 심한 불상과 팔부중상들이 새겨진 탑이 있다고 하여 찾아 나섰다.
금소리 도로변에서 조금 더 가면 마을의 노인회관 경로당이 있다. 이곳에서 탑 있는 집을 물으면 쉽게 찾을 수 있다. 새마을 공판장으로 보이는 큰 건물이 있고 그 옆으로 돌아가면 담장안으로 어렴풋이 탑이 보인다. 비지정 문화재라 일반 서적에는 여기에 대한 내용은 전혀 찾아 볼 수 없고 다만 논문에 설명이 되어 있는 탑과 불상이다.
안동 금소동 560번지 일대에 있는 사지이다. 현재는 560번지 마당의 남쪽 구석에 위치한 석탑과 석불이 남아 있어 이곳이 절터임을 말해준다.
석탑은 전체적으로 파손이 심하며 현재는 흩어진 석탑재를 대강 맞추어 쌓아 올렸다. 상층기단 면석이 함부로 쌓여진 탑신에 기대에 있는데 전체의 규모와 형태를 정확하게 추정할 수 없다. 흩어진 석재로 보아 2중 기단의 삼층석탑으로 추정되는데 하층기단부는 매몰되어 시멘트로 쌓았다. 기단면석에는 사천왕상과 필부신중이 조각되어 있는데 6개만 현존한다.
또 하층기단 면석이 상층기단 면석과 함께 세워져 있는데 여기에는 12지상으로 보이는 조각이 양각되어 있다.
탑신부로는 3개의 옥개석과 초층 탑신이 있는데 초층탑신 위에 2개의 옥개석을 겹쳐두고 그 위에 상륜부인 노반과 앙화가 하나의 돌로 놓여 있으며 옥개석을 겹쳐두고 그 위에 다시 작은 옥개석을 얹어 놓았다. 이 옥개석 윗면에는 지름 3cm 깊이 12.5cm의 찰주공이 있다. 현재 남아 있는 3개의 옥개석은 4단의 받침이 있다. 탑이 남아 있는 부분의 탑의 총 높이는 2.25m이며 건탑연대는 통일신라시대로 추정되며 탑의 원 위치는 남쪽에서 약 5m 떨어진 곳이라고 한다.
석불은 파손이 심한 상태의 석조여래좌상으로 탑과 나란히 있다. 연화대석위에 결가부좌한 자세로 있으며 대좌는 하대석 중대석 상대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좌의 하대석은 복판 8엽의 복연으로 땅속에 묻힌 채 있으며 복련 위에 2줄로 몰딩되어 있고, 그 위에 8각의 중대석이 놓여있다. 중대석 각면에 안상이 1좌씩 있으며 주형은 생략되어 있다. 상대석은 떨어져 나간 부분이 많으나 단판 앙련인 채 2줄로 나열되어 있다.
불상은 육계와 나발이 표현되어 있으며 상호는 마모가 심하다. 결가부좌한 왼쪽 무릎이 파손되었고 법의는 우견편단, 수인은 항마촉지인이다.
크기는 대좌의 높이 78.5cm 불상의 높이 65cm 머리높이 35cm 양무릎 사이는 75cm이다. 전체적인 조각수법으로 보아 신라하대로 추정한다. 현재 있는 곳이 원 위치라고 한다.
금소동 탑 지나서 조금 앞에 도로변에 보면 고건축물로 보이는 사당이 보인다. 가보니 葛庵李先生錦陽遺墟였다. 즉 갈암 이현일(葛庵 李玄逸 1627~1704) 선생의 우거지이다. 금양정사(錦陽精舍)를 세워 후학에게 강학하던 갈암금양강도지(葛庵錦陽講道址:경북기념물 116호)가 가까운 곳에 있으며, 영덕군 축산면 인양리에는 종택(경북기념물 제84호)이 있다. 선생의 관련 유적지는 영양군 등 경북 북부지역 일대에 있다.
다시 안동 시가지로 나와 송천동에 있는 송천동의 모감주나무(경상북도 기념물 50호)가 도로변에 위치해 있어 잠시 찾았다. 모감주나무 열매로 염주를 만들기 때문에 염주나무 또는 보리수라고 부른다. 수령 300년 정도로 추정되는 이 나무는 높이는 약 15m, 가슴높이의 지름은 37㎝이다. 석문 정영방(1577~1650)이 살아 있을 때 좋아하던 나무로, 선생이 죽은 후 그의 아들이 효종 2년(1651) 봄에 양양군 입암면 화당동 자양산에서 이곳으로 옮겨 심었다고 전해지며 나무 주위에는 고택 같은 건물이 있다.
이제 안동대학교로 갔다. 이 곳에는 어디서 옮겨 온 것들인지 도서관 앞 야외에 많은 석조물들이 있었다.
그 중 눈에 들어오는 한 쌍의 석사자상(경상북도 문화재자료 19호)이 있다. 안동향교 옛 터에 있던 것을 옮겨온 것으로, 원래의 자리는 알 수 없으며, 그 용도도 확실하지 않다.
『영가지』에 '안동향교의 대문좌우에 있다'라는 기록이 보이고, 옮겨올 당시 사자상 주변에 연꽃무늬의 받침대 등이 쌓여있어 사찰에서 쓰였던 것으로 짐작하기도 한다.
몸을 앞으로 길게 뻗고 있으며 앞다리와 뒷다리가 똑같이 잘려있다. 이렇게 몸을 뻗은 자세의 사자조각은 통일신라시대부터 있어온 것으로 법주사쌍사자석등(국보 제5호)과 중흥산성쌍사자석등(국보 제103호)에서도 볼 수 있다.
전체적으로 조각솜씨가 사실적이고 간결하며 사자가 비만하게 표현되어 있는 점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 많은 석탑부재 및 불상 등 석조물들이 있다.
또 조금 떨어진 곳에는 안동지역 약 40여개의 서원 중 가장 먼저 창건된 역동서원이 있었다. 이 서원은 선조 3년(1570)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우탁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서원을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그 후 숙종 10년(1684)에 "역동"이라 사액되어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고종 5년(1868)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69년 현 위치에 복원하였다.
대개 서원의 명칭은 서원 건립 지역의 명칭이나 혹은 봉향되는 그 명현의 호를 사용하는 것이 통례인데 본 서원의 경우에는 지명이나 호와 관계없이 "역동"이라 붙여지고 있다.
이 서원에 위패를 모신 우탁(1261~1342) 선생은 단양인으로서 본명은 탁이며 자는 천장 또 는 탁부이다. 호는 단암 또는 백운당이며 세칭 역동선생이라 부른다. 대학 내에 있어서인지 관리 상태나 보존은 잘 되고 있는 듯 하였다.
이제 서후면 일대로 나선다. 금계리에 있는 의성김씨학봉종택(경상북도 기념물 112호)을 찾았다. 이 집은 조선 중기 문신 학봉 김성일(1538~1593) 선생의 종가이다.
김성일은 선조 1년(1568) 과거에 급제하여 정언과 수찬 나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경상도 초유사로 관군과 의병을 화합시켜 의병의 전투력 향상에 큰 공을 세웠다. 퇴계의 제자로 뛰어난 성리학자이기도 한 그의 학문은 이후 영남학파의 학문 전통에 큰 영향을 미쳤다.
가옥은 一자형 안채와 사당, 문간채, 풍뢰헌, 운장각으로 구성되어 있다. 운장각은 유물의 보관과 전시를 위하여 세운 것으로 선생의 유품과 문중에서 소장하고 있는 보물 905호인 학소장전적, 활자본류기타 수량 일괄(56종261책)을 비롯해 보물 906호 고문서류 및 기타 일괄(17종242점)이 보관되어 있었고, 이외에도 임금이 신하에게 내리는 명령서인 교지, 교서, 유서, 재산분배기록인 분재기 등 10,000여 점이나 되지만, 그 가운데 편지글과 제사에 쓰인 제문은 제외되었다. 지정된 문서를 보면 교서 1점(1592), 교지 및 첩지 59점(1564~1834), 첩 4점(1630~1678), 시권 7점(1564~1844) 등이다.
운장각은 이중의 문에 열쇠만 해도 7개나 되는 철통 철문으로 되어있고, 안에 또 하나의 문에는 잠금 장치가 있나 더 있었다. 특히 우리나라 최초의 안경이 이 곳에 보관되어 있었다. 평상시에는 개방을 안 해주는 걸로 알고 있으나 운 좋게 내부를 다 관람할 수 잇어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주변에 조금 더 가면 충효문이 있고 그 곳에 정충효각(旌忠孝閣)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변중일(邊中一: 1575(선조 8)~1660(현종 1).) 선생은 조선 중기의 학자로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가순(可純)이고 호는 간재(簡齋)이다. 성균생원 경장(慶長)의 아들이다.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어려서는 효경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한다.
어느 날 모친이 병환으로 위중하게 되자 꿩고기가 약이라는 의원의 말에 따라 눈 쌓인 온 산천을 헤메이고 헤메어도 얻지 못하였는데, 우연히 꿩이 집으로 날아들어와 이를 잡아 드리니 모친이 병이 나았다. 사람들은 그의 효심이 지극함을 하늘이 안 것이라 칭송이 자자했다. 1592년(선조 25) 18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났으나 조모님과 모친이 병환중이라 피난을 가지 못하고 시병(侍病)하였다. 어느날 조모를 헤치려는 왜병을 몸으로 막으며 대신 죽기를 자청하자 왜병이 그의 효심에 감복하여 깃발과 칼을 신표(信表)로 주고 물러났다.
선조가 의주로 몽진(蒙塵)하자 김성일(金誠一)이 초유사(招諭使)가 되어 의병을 모집하였다. 이때 그는 가산을 팔아 구입한 쌀 100섬(석)을 상주진(尙州鎭)으로 보내니 상주의 진장(鎭將) 김각(金覺)이 조정에 보고하였다.
그 뒤 김성일을 찾아 진주로 갔으나 김성일이 이미 전사한 뒤였으므로 곽재우(郭再祐) 휘하에 들어가 군무(軍務)에 종사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는 화왕성(火旺城)으로 달려가 박수춘(朴壽春)ㆍ성안의(成安義)ㆍ남사명(南士明)ㆍ유복기(柳復起)ㆍ정사성(鄭士誠) 등과 협력하여 대적(對敵)하였다.
광해군 때에는 선조가 국초에 나라로부터 하사받은 노비 30가구가 김해에서 살고 있음을 알고 추노(推奴)하려다가 그들의 무고를 입어 경옥(京獄)에 감금되었다. 인조반정으로 1623년 석방되었으며 노비 100가구를 하사받았다. 행의(行義)로 천거되어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아니하였으며, 뒤에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가자되었다.
1686년(숙종 12) 경상도안찰사가 그의 충효에 대한 행적을 조정에 알리니 특별히 정려를 명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충성과 효행을 기리기 위해 이 정충효각을 세웠다.
조금 더가면 도로변에서 한 고건축물이 보인다. 광풍정이다. 나중에 자료를 찾아보니 그리 이 곳을 소개한 책은 전혀 없다. 지역 내에서 발행되는 문화재 편람에도 잘 나오지 않았다.
광풍정(경상북도 문화재자료 322호)은 1630년대에 장흥효(1564~1633) 선생이 지은 정자로 300여 문인이 학문을 익히던 곳이다. 선생은 일찍부터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고향에 은거하면서 학문 연구에 몰두하여 영남학파 발전과 후배양성에 힘썼다.
처음에 김성일(金誠一)ㆍ유성룡(柳成龍)을 사사하고, 뒤에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문명이 높았다. 관계진출을 단념하고 후진의 교도에 전념하여 제자가 수백명에 달하였다. 특히, 역학(易學)을 깊이 연구하여 호방평(胡方平)의《역학계몽통석 易學啓蒙通釋》의 분배절기도(分配節氣圖)를 보고 오류된 것을 의심, 이를 고증, 연구하여 20년 만에 십이권도(十二圈圖)를 추연(推演)하였다.
12월을 배열하고 24절후를 분배하고, 또 원회운세(元會運世)와 세월일진(歲月日辰)의 수를 그 위에 더하여〈일원소장도 一元消長圖〉라 하였는데, 장현광(張顯光)이 이를 보고는 '참으로 전인이 발명하지 못한 것을 발명하였다.'라고 극찬하였다.
문하에 이휘일(李徽逸) 등 유학자가 있다. 1633년에 창릉참봉(昌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교지가 도착되기 전에 죽었다. 경광서원 존현사에 선생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현재 정자의 모습은 헌종 4년(1838)에 이 지역의 유림들이 고쳐 지은 것이다. 규모는 앞면 3칸ㆍ옆면 2칸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광풍정은 대각선으로 대칭된 공간 배치를 하여 특이한 평면구조를 이루며, 지형적인 환경 요인 뿐 아니라 기후 요인까지 적절히 받아들인 건축물로 건축사적 의의가 크다. 위로는 천등산 남쪽 거대한 자연 암석 아래에 제월대(霽月臺)라고 이름 붙인 정자가 있고, 그 표면에 능주목사 김진화가 남긴 '경당선생제월대'라는 휘호가 있다.
이제 서후면 교리 도로변에 관물당이란 문화재 안내간판이 보여 찾아갔다. 막상 갈림길에 표지판이 없어 몇 번을 주변을 맴돌다 결국 찾았다.
마을의 가장 끝 자락에 위치한 관물당(경상북도 문화재자료 31호)은 조선 선조 2년(1569) 송암 권호문이 세워 학문을 가르치던 곳이다. 송암 권호문 선생은 퇴계 선생의 제자로 강호고사(江湖高士)로 알려져 있다. 이 곳은 지상 1m 높이의 기단 위에 자연석 주춧돌을 사용한 검소한 건물로 평면은 一자형이고 지붕은 T자형을 이루고 있다. 왼쪽 지붕은 맞배지붕이며, 오른쪽은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주변 마을에는 사육신 중 한 사람인 단계 하위지 선생의 학문과 충절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한 창열서원이 있다. 지정된 문화재는 아니나 잠시 찾아 둘러보았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창열사, 4칸의 숭열당, 3칸의 성안재, 2칸의 전사청, 3칸의 신문, 3 칸의 유의문 등이 있다. 사당인 창열사에는 단계 선생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고 강당인 숭열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3로 되어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장소로 사용된다. 성안재는 기숙사로 향사 및 원내의 행사시에 제관과 유림들이 기거한다. 신문은 사당의 대문으로 향 사시 제관의 출입문으로 사용되며, 유의문은 서원의 대문이다.
이제 서후면 성곡리에 있는 봉림사지삼층석탑(경상북도 문화재자료 69호)을 찾아 나섰다. 안내간판이 역시 막상 중요한 위치에는 없었다. 길을 물어 물어서 숲을 오르니 안동 장씨 소유의 정자인 봉림정사 앞에 탑이 아담하게 있다.
3층 석탑으로, 2중 기단위에 3층의 탑신을 올렸으며, 현재 탑신의 3층 지붕돌은 없어진 상태이다. 아래층 기단에는 안상(眼象)을 새겨 놓았고, 위층 기단에는 기둥 모양을 조각하였다. 탑신의 몸돌에도 기둥 모양을 조각하였으며, 특히 1층 몸돌에는 문 모양 안에 자물쇠 문양을 새겨 장식하였다. 지붕돌은 네 귀퉁이가 살짝 치켜올라 갔으며,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었다. 전체적으로 통일신라의 일반적인 석탑양식을 따르고 있어, 통일신라말 고려초기 석탑으로 추정된다.
주변에 문화재 안내간판은 있으나 글씨가 다 지워져 알아보지 못하며, 탑 옆에 사람이 살고 있는 민가가 있고, 봉림정사는 경당 장흥효 선생의 6세손 구봉에 이르러 이룩되었는다고 하는데 현재 관리가 잘 되고 있지 않은 듯 하였다.
처음 찾아가는 답사객들에게는 그리 찾기 쉬운 장소는 아닌 듯 하다. 들어오는 마을 입구에는 권태사신도비(경상북도 문화재자료 63호)가 있다고 하여 찾아가 보았다.
이 비는 안동 권씨의 시조인 태사 권행(權幸)을 기리고 있다.
비는 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올린 모습으로, 조선 현종 2년(1621) 권행의 24세손인 군수 권성원이 세웠다. 허나 뒤 늦게 돌아와서 안 알본 사실이나 입구에 있는 것이 구비라 한다. 즉 지정된 문화재는 신비로 능동재사 옆에 있는 것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것이라 한다. 보고 온 구비는 문화재로 지정된 것이 아니어서 시에서는 별도로 관리를 하지않아 잡풀 속에 있었다.
이제 풍산 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풍산읍 하리 1리에는 하리동모전삼층석탑(경상북도 유형문화재 107호)이 하리마을 한 민가의 돌담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3층 석탑으로, 이 지방에서는 보기드문 모전석탑이다. 이 탑은 벽돌로 쌓지는 않았으나 일부에서 전탑의 양식이 나타나고 있어 이렇게 불리우고 있다.
탑은 자연 암반 위로 3층의 탑신을 쌓아올린 모습으로 특히 지붕돌에서 전탑의 양식이 보인다. 즉 일반적인 석탑에서는 지붕돌 밑면에만 몇 단의 받침을 두는 것에 비해 이 탑은 지붕돌 윗면에도 층을 둔 것이다. 이는 벽돌의 특성상 층을 이루게 되는 전탑의 지붕돌 양식에서 그 모습만을 빌려와 본 뜬 것이다. 고려시대의 탑으로 추측된다.
여기서 조금 마을로 들어가면 보물 553호 예안이씨충효당(禮安李氏忠孝堂)이 있다. 이 집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하다가 순국한 이홍인 부자의 충과 효가 얽혀있는 유서 깊은 집이다. 이홍인 공의 후손들이 사는 집으로서 명종 6년(1551)에 지은 것으로 보아 조선 중기 건축으로 추정되며 '충효당'이라 부른다.
안채와 사랑채가 맞붙어 있고 안동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ㅁ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내부의 중앙은 뜰로 꾸민 소박한 집으로 남쪽과 서쪽에 바깥으로 통하는 대문이 있다. 남문이 본래의 대문이지만 지금은 서문을 대문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서문 바깥에 평행하게 있던 바깥채를 철거한 뒤에 드나드는 문도 옮긴 것으로 보인다. 공간에 비하여 넓고 튼튼한 문틀을 하고 있으며 드나드는 문이 많아 흥미롭다.
서쪽에는 一자형이며, 팔작지붕을 가진 '쌍수당'이라는 별당이 있다. '쌍수당'이란 충과 효를 한 집안에서 다 갖추었다는 의미로, 이홍인이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나서 왜적과 싸우다 장렬하게 순국한 충의를 기리고 그 후손 한오의 지극한 효를 기리는 것이다.
그리고 마을로 더 들어가면 마을 끝자락 뒤편 얕은 고추밭에 또 하나의 하리동삼층석탑(경상북도 유형문화재 108호)이 있다. 이 탑은 땅 속에 묻힌 기단부 위로, 3층의 탑신을 올렸다. 탑신의 각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겼다. 두툼한 지붕돌은 밑면에 1층은 4단, 2ㆍ3층은 3단의 받침을 두었는데, 2ㆍ3층 몸돌 위에 지붕돌을 받치는 1단의 괴임을 만들어 겉에서 보면 지붕돌 받침이 4단처럼 보이게 하고 있어 독특한 표현이다.
고려시대에 세운 것으로 보이며 석탑의 구조가 이 지방 특유의 석탑양식을 갖추고 있어 석탑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하리를 나와 풍산읍 마애리를 찾았다. 마애리에는 마애석조비로자나불좌상(경상북도 유형문화재 17호)이 있다. 이 불상은 오랫동안 노천에 방치되어 얼굴 부분의 마멸이 심하다.
머리에는 육계가 낮게 솟아 있으며, 갸름한 얼굴은 이목구비가 정연하다. 신체는 균형을 이룬 단정한 모습인데, 가슴에 모아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 두 손은 작은 듯 하면서 단정한 신체와 잘 조화되어 있다. 양 어깨를 감싼 옷은 몸에 밀착되어 신체의 윤곽이 잘 드러나며, 배 부근에는 띠매듭이 표현되었고, 두 팔에 걸쳐 평행옷주름이 조각되어 있다.
8각형의 대좌는 상ㆍ중ㆍ하대와 지대석으로 이루어졌는데, 상대에는 연꽃이, 중대 각면에는 보살상이, 하대에는 아래로 향한 연꽃이 조각되어 있다. 또한 지대석 각 면에는 안상(眼象), 동물상 등이 도드라지게 표현되었다. 이 불상은 통일신라 후기에 유행한 양식이 보여 9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풍산읍 상리 2리 도로변에는 체화정(?華亭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200호)이 있다.
조선 효종 때 진사 만포 이민적이 세운 정자로 학문을 닦던 곳이다. 그 후 순조 때 국가에서 충신, 효자, 열녀를 기리기 위해 마을에 정문을 세우는 정려를 받은 이한오 선생이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효도하던 곳이기도 하다.
이 곳은 이민적 선생이 그의 형인 옥봉 이민정 선생과 함께 살면서 우애를 다지던 장소로 유명한데, 이로 보아 정자 앞 연못의 이름을 '체화지'라 지은 것으로 보인다. '체화'란 형제간의 화목과 우애를 상징하는 것으로 <시경>에서 그 의미를 따왔다. 연못에는 삼신산을 상징하는 세 개의 인공섬인 방장, 봉래, 영주가 있다.
건물구조는 앞면 3칸ㆍ옆면 3칸의 2층 건물로 팔작지붕으로 되어있다. 1층은 지면과 떨어져 있으며 온돌방 1칸을 만들었다. 현판 '담락체'의 글씨는 조선 제일의 화가였던 단원 김홍도가 썼다고 한다.
풍산하면 한지로 유명한데 마침 한지 체험장이 있어 찾아갔다. 이 곳에서 한지공장을 견학 하고 한지 만드는 과정을 직접 보았다. 이 곳에서는 한지를 직접 뜨기, 한지를 이용해서 그림 만들기 이밖에 한지공예, 탁본 등이 가능하여 체험 학습장으로 활용되며 입구에는 유교문화을 알 수 있는 유교문화 전시관도 있다.
이제 하회마을로 가기전 고건축물에서는 배 놓을 수 없는 찬사를 받고 있는 풍천면에 있는 병산서원(屛山書院 :사적 260호)을 찾았다. 아직도 가는 길은 그다지 좋지 않으나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이 서원은 서애 유성룡의 학문과 업적을 기리기 위한 곳으로, 안동에서 서남쪽으로 낙동강 상류가 굽이치는 곳에 화산(花山)을 등지고 자리하고 있다.
유성룡은 도학ㆍ글씨ㆍ문장ㆍ덕행으로 이름을 날렸을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때에도 성곽 수축ㆍ화기제작을 비롯하여 군비확충에 심여를 기울인 인물이다.
원래 풍악서당으로 풍산 유씨의 교육기관이었는데, 유성룡이 선조 5년(1572)에 이곳으로 옮겼다. 그 후 광해군 6년(1614)에 존덕사를 세워 그의 위패를 모시고, 1629년에 그의 셋째 아들 유진의 위패를 추가로 모셨다. 철종 14년(1863)에는 임금으로부터 '병산'이라는 이름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서원내 건물로는 위패를 모신 존덕사와 강당인 입교당, 유물을 보관하는 장판각, 기숙사였던 동ㆍ서재, 신문, 전사청, 만대루, 고직사가 있다. 넓은 만대루에 올라 보는 경치는 과연 일품이다. 여름에는 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휴식처이기도 하다. 현재(2003. 7. 16) 만대루는 지붕 기와교체작업 중으로 주위에 비개가 설치되어 있다.
이제 마지막으로 옥산사 마애여래좌상을 찾아간다. 봉정사 가는 길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북후면 장기리 도로변에 옥산사마애여래좌상을 알리는 입간판이 잘 설치되어 있고 이 일대는 학가산으로 연결되며 경치 또한 아주 좋으나 가는 길이 아직 그다지 좋지는 않다.
옥산사마애약사여래좌상(경상북도 유형문화재 181호)은 태고종 사찰인 옥산사 자연암벽뒤에 새겨진 불상으로, 이중으로 된 연꽃무늬 대좌위에 앉아 있다. 마애여래좌상을 중심으로 양옆에 보살이 있는 삼존불로 추정된다.
얼굴에는 미소를 띠고 있으며,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다.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를 감싼 옷을 입었고 앞가슴에는 치마의 띠매듭이 보인다. 오른손은 오른쪽 무릎 위에 올리고 왼손은 아랫배 부분에서 작은 약그릇을 받쳐들고 있다.
마애불에서는 드물게 삼존불 형식으로 만든 것으로 이런 유형의 불상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 곳에서 내려다 본 풍경은 과히 으뜸이다.
맞은편 언덕 위에는'영가지'에서 보이는 월천전탑이라고 하는 전탑지가 남아 있다. 길이 그다지 좋지 않은 듯 하여 멀리서 나마 바라보았다.
안동은 경북지역에서 경주 못지 않게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곳으로 불교문화와 유교문화를 동시에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찾아도 찾아도 아직도 못다 본 유적들이 많기에 늘 새로움과 설레임 찾아가는 재미가 있는 곳으로 앞으로 안동지역 답사는 계속될 것이다.
첫댓글 관세음보살_()_ 잘보고 갑니다....
잘 보고 갑니다 여여님.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