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땅바닥은 우리들의 교실이었다. 시대적 흐름과 선각자의 금당학교 창학 2/4
시대적 배경과 사류통찰(史流洞察)
금당초등학교 탐방; 금당초등학교의 역사를 찾아서
동명학교, 금당초등학교의 전신: 홍동면 금당리 백동마을 ‘동명학원’
우리나라 개화기에 교육의 중요성을 깨달은 선각자들은 전국 곳곳에 많은 학교를 설립하였다. 이 시기에 우리 홍성지역에서도 고을마다 크고 작은 학교가 생겨났다. 우리 홍성지역에는 개화기를 전후하여 팔명학교(八明學校)가 있었다고 한다. 명(明)자 돌림의 이름을 붙인 학교가 여덟 곳에 있었다고 해서 부르는 명칭이다. 팔명학교는 대부분 그 지역 초등학교로 발전되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암울했던 시절에 민족혼을 일깨우던 교육운동의 상징이기도 하다. 팔명학교는 홍성의 영명학교(永明學校), 갈산의 호명학교(湖明學校), 광천의 덕명학교(德明學校), 홍동의 동명학교(東明學校), 장곡의 홍명학교(洪明學校), 구항의 흥명학교(興明學校) 등이다. 이외에 결성에 보광학교(普光學校)도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풀무학교 창업자인 주옥로 선생님께서 팔명학교의 흔적을 찾아다닌 적이 있었다. 주옥로 선생님은 아쉽게도 팔명학교의 발자취를 모두 살펴보지 못하고 타계하셨다. 필자는 본교(금당초등학교) 교감으로 부임하여 학교 연혁지를 살펴보다가 반가운 기록 하나를 발견하였다. 팔명학교 중에서 홍동지역에 있었다는 동명학교(東明學校)가 바로 금당초등학교의 전신이라는 기록을 찾았기 때문이다.
다음은 금당초등학교 연혁지의 총설부분에 기록된 내용이다.
"본교는 탄압이 심하던 일제말기 입학난이 심하였고 식민지 교육이 한창이었으며 국민학교나마도 수가 적어 무산농촌아동들은 배움에 굶주리고 있었고, 이 고장은 지역적으로 궁벽져서 당시 초등 교육기관이 소재한 곳까지는 4㎞ 이상(홍동교 5㎞, 광시 신대교 4㎞, 장곡교 10㎞, 금마교 9㎞) 떨어져 있어, 혹시 통학생이 있다 하더라도 매우 곤란을 당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홍성군 홍동면 금당리 백동부락에 사는 노재혁(盧載赫)씨가 육영사업에 뜻을 두어 사재를 들여 초가 1동을 매입, 서기 1941년 2월 1일 3년제 금당강습소를 동부락 119번지에 설립하고 가난한 자녀들을 가르쳐 3년 후에는 12명의 졸업생을 배출시켰다. 동 부락은 장소가 매우 협소하고 교통 또한 불편하여 이를 더 확장시키기 위하여 서기 1943년 7월 10일 금당리 성당부락 665의 1번지로 교사를 신축 이전시키고 동명학원(東明學園)으로 개칭하였다. 당시 금마면 월암리에 있던 월암간이학교가 유지 못하고 있는 것을 인수받아 더욱 확장하게 되어 동년 10월 1일에 금당간이학교로 개칭하였다. 서기 1943년 7월 10일 교사 이전당시 동명학원 후원회를 조직하여 백동부락 구교사를 매각하고 부족액을 기채하여 금당리 성당부락에 교사를 신축하여 이전하고 운영 해오던 중, 서기 1945년 8월 15일 해방되어 정국의 혼란으로 부락 부담금의 징수부진으로 채무만 자꾸 늘어나나 보상할 도리가 없어, 설립자인 노재혁 씨는 경작답 2600평을 매각하여 채무를 청산하였다.분교장 설립 인가된지 10년 후인 서기 1954년 6월28일 금당국민학교로 승격 인가되어 노재혁 씨로부터 건물과 비품일체를 희사받고 동일자로 개교하고 현재 위치인 665번지로 교사를 신축하여 다시 이전하게 되었다."
선각자 노재혁 선생과 금당국민학교의 초석
금당초등학교 전신인 동명학원을 설립한 노재혁 선생님은, 1919년에 금당교회를 설립한 분이기도 하다. 동명학원 역시 처음에는 금당교회 부설로 시작했다고 한다. 필자는 동명학원에 관한 내용을 더욱 자세히 알아보고 싶었다. 때마침 조상 산소의 벌초를 위해 고향에 내려온 노재혁선생님의 장손자인 노승무 씨에게 자세한 고증을 부탁했다. 노승무 씨는 동명학원과 노재혁 선생님의 발자취에 대하여 자세한 고증자료를 보내주었다. 이 자료에 의하면, 노재혁 선생님은 1901년 12월 16일에 홍성군 홍동면 금당리 119번지에서 출생하였고, 1989년 3월 10일에 향년 89세로 타계했다. 1907년부터 십여 년간 한학을 공부했으며, 1936년에는 금당리 백동(등굴이라고도 함)에 금당 강습소를 설립(3년제)하고 학생교육에 전념하였다. 선생님은 1919년에 등골교회를 직접 창립 했는데, 처음에는 교회 부설로 학당을 만들어 운영하였다. 그러다가 1936년에 교회부설에서 독립하여 정식으로 교실 세 칸을 짓고 동명학원을 세웠다. 당시 학생은 한 학년에 15명 정도였는데, 학생들의 지역적인 분포는 홍동면과 광시면과 장곡면 출신들이 각각 3분의 1씩 되었다. 당시에 동명학원의 비품이었던 시계와 올갠 등에는 동명학원이란 이름이 또렷하게 새겨져 있다. 당시 학생들은 동명학원이라는 이름 대신에 금당강습소라는 이름을 많이 사용했다고 증언한다. 이와 같은 증언내용으로 봐서 노재혁 선생님이 신앙적 의미와 함께 ‘홍성의 동쪽을 밝히는 학원’이라는 뜻으로 동명학원이란 이름을 내걸었으나, 금당강습소라는 학교명을 함께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1942년에 학교를 등굴마을에서 현재 금당초등학교가 있는 삼거리로 이전하였다. 노재혁 선생님이 삼거리로 학교를 이전하기 위해서 땅을 산 기록이 1940년으로 되어있는 것으로 보아서, 이때부터 학교이전작업을 시작한 것으로 추측된다. 처음에는 학교교실 세칸으로 시작하여 연차적으로 한칸씩 늘려서 여섯 칸이 되었다. 1943년에는 금당간이학교로 개명하였다. 금당간이학교는 4년제였으며, 간이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홍동 소학교로 편입하기도 했다. 1944년에는 학교운영권이 공립학교인 홍동소학교 금당분교(6년제)로 이전되었다. 이외에 노재혁 선생님의 약력을 살펴보면, 1918년에 기독교에 입신하였고,1920년에 청년회를 조직하여 사회계몽운동을 시작하였다. 1921년에는 교회를 등골마을에서 금바위로 이전하였다. 1925년에 경성성경학교(서울신학전신) 속성반에(겨울 여름 농한기 수업)입학하여 공부했다. 1935년 까지 기독교 복음을 전도하면서 10년동안 농한기마다 성경학교에 다녔다. 이외에 삽교, 신곡, 영리, 횡계 등에 복음을 전도하며 8개 교회를 창립하였다. 종교와 교육을 통해서 지역민의 혼을 깨우치는데 평생을 바친 선각자의 흔적이 기록으로 남아있었음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노재혁 선생님의 산소는 금당교회와 금당초등학교가 있는 바로 뒤편 산아래에 있다. 처음 금당강습소가 자리잡았던 바로 그 자리이다. 아마도 자신이 직접 세웠던 학교와 교회와 후학들이 자랑스럽게 커가는 모습을 흐뭇하게 내려다보면서 누워계실 것이다.(글: 김정헌/동화작가, 금당초등학교 교감)
출처: 금당초등학교 탐방; 금당초등학교의 역사를 찾아서, 2012.08.01.
금당초등학교*동문휴게실 https://cafe.daum.net/kumdangi/EvsN/2
첫댓글 심교수 의초등학교가 역사가 깊고 설립자까지 알아보았어요 AI의 협조를 얻어 농촌 학교인 나의모교 충북 양강초등하교를 알아 보았더니 내가 25회 졸업생이니 역사가 꽤 오래 되였더군요 .충청북도 영동군 양강면 묘동리에 위치한 양강초등학교는 1930년 4월 15일에 개교하여 약 100년에 가까운 역사와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공립 초등학교입니다. 농촌 지역의 급격한 인구 감소 속에서도, 지역 사회의 중심 교육기관으로서 굳건히 자리를 지키며 오랜 발자취를 남겨왔습니다.양강초등학교의 주요 유래와 역사적 변천 과정을 정리해 드립니다.1. 양강공립보통학교로의 출발 (일제 강점기)일제 강점기였던 1930년 4월 15일, '양강공립보통학교'로 문을 열었습니다.1932년 3월: 당시 보통학교 체제에 따라 4년제 과정의 제1회 졸업식을 치렀습니다.1938년 4월: 일제의 교육령 개정에 발맞추어 양강공립심상소학교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1941년 4월: 황국신민화 정책의 영향으로 전국의 소학교 명칭이 변경될 때 양강공립국민학교로 개칭되었습니다
충북 영동 양강공립국민학교, 명문이네요. 역시 뭔가 다른 것 같았습니다. 어느 학교든지 교가 마다 있었던 "~ ~ ~ 산 정기를 받아 . . . " 추억 여행을 함께 해주시니 이 또한 즐거움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