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 양파 시배지
양파는 수선화과의 부추아과 부추속에 속한 식물로, 옛날 이집트 노동자들이 피라미드를 쌓을 때 힘을 기르기 위해 먹었다는 양파는 4천 년 이상 사람의 건강을 챙기며 요리에 이용이 되는 농산물로서 서아시아나 지중해 연안이 원산지라고 추정된다. 특히 양파는 이름이나 맛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나라의 파와 비슷하며, 오래 보관하면 위에서 파의 줄기가 자라기도 하여 서양에서 들어온 파라는 뜻으로 양파(서양의 파)라고 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양파 시배지는 창녕으로 알려져 있는데, 성기상 푸드웰 회장과 성기학 영원무역 회장 형제의 조부인 성낙안 선생이 일본에서 유학하면서 양파의 가치를 알아보고 가지고 들어와서 부친(성찬영)께 드렸고, 그것을 성찬영 선생이 1909년에 대지면 석 리에서 처음으로 양파 재배에 성공한 것이 우리나라 양파 농사의 시초였다. 성낙안 선생의 맏아들 성재경은 1953년부터 여러 해에 걸쳐 양파를 재배하면서 연구한 결과, 채종에 성공하여 일반 농가에 보리 대신 환금성이 높은 양파를 재배토록 권장해 농민들이 가난에서 벗어나도록 도왔다. 그래서 창녕이 전국 최고의 양파 주산지로 발돋움하였다. 이로 보아 성씨 고가는 지역의 부호로 가문의 번영만 생각한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베풀었음을 알 수 있었다.
동의보감에 자총(紫蔥: 자줏빛 자, 파 총=적양파)의 기록이 나온 것으로 봐서 16세기 후반에서 최소 17세기 초반부터 먹어온 것으로 기록되었으나, 우리나라에는 들어온 것은 20세기 초반인 것으로 보아 아마도 중국의 본초강목에서 말하던 호총(胡蔥 : 흉노족의 파)이 아닐까 의심이 된다. 우리나라에서 양파 하면 창녕과 무안을 꼽을 수 있다. 창녕은 단단하면서도 매콤한 단맛이 강한 양파, 무안은 무르면서도 단맛이 강한 양파로 구분된다. 창녕 양파는 다른 지역의 양파와는 달리 껍질을 까서 그냥 먹어도 그 맛과 향이 입안에 감돈다.
한편, 다른 자료에 의하면, 한국에서 재배된 역사는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으며, 미국 및 일본으로부터 수입된 모종을 구한말인 1906년 서울 뚝섬에 설치된 ‘원예모범장’에서 처음으로 기른 것이 시초라고 한다. 본격적인 재배는 1909년 창녕군 대지면 석 리에서 이루어졌고, 이후 일제강점기가 되면서부터 경상도 지방을 중심으로 재배가 확대되었으나, 한동안은 일본에서 수입해 먹는 양이 더 많았다. 1930년대에는 제주도까지 양파를 재배하게 되었고, 해방 후 국내 최초로 개발된 양파 품종은 1958년 개발된 '대관령 1호'이다.
*창녕 성씨 고가(我石軒)
우리나라 3대 명택(名宅)이라고 하면, 강릉의 선교장, 구례의 운조루, 창녕의 아석헌을 꼽는다. 창녕 대지면 석 리는 창녕 성씨 집성촌으로, ‘성씨 고가’는 지난 2004년 7월 1일 자로 경남 지방문화재자료 제355호로 지정됐으며, 1850년대 아석헌(我石軒) 성규호 선생이 유어면 회룡에서 이곳으로 이주하여 150여 년째 성씨 일가들이 세거지다. 이 자리에 성씨 고가의 기틀을 세운 성규호는 ㄷ자의 안채와 한일(一)자의 사랑채를 짓고 '나 또한 돌처럼 살리라'라는 뜻의 아호 아석(我石)을 당호로 삼고 1863년 병자년 기근 때에는 곳간을 열어 이웃에 양식을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흔히 창녕 사람들에게 옛날부터 ‘석 동 부잣집’으로 불린 성씨 고가는 외삼문 외에 내삼문이 따로 있으며, 한때 37개 동, 130칸의 대규모의 한옥이라, 집의 규모가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국전쟁 때 대부분 소실되었으나, 2,000년대 들어와 영원무역 성기학 회장이 대부분 복원했다.
성씨 고택은 크게 본가인 아석헌(차손 낙교의 양자인 유경댁), 구연정(증 장손인 윤경댁), 경근당(삼손의 낙안댁), 석운재(창영의 동생댁) 등 4개의 영역으로 나뉜다. 1855년 성규호가 이 집을 최초로 지은 후, 어두운 역사의 격랑을 넘으면서도 오늘날 이렇게 복원되어 건재할 수 있음은 이 집안 특유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과 집안 후손들의 조상에 대한 경건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외삼문과 내삼문 사이에는 행랑채가 여러 채 있고 내삼문을 들어서면 잘 가꿔진 소나무 사이로 안채가 모습을 드러낸다. 구연정 영역이다. 안채의 누마루 앞엔 S자 형태의 연못을 조성되었다. 이곳 터가 지네의 입에 해당하는 자리라서 지네가 좋아하는 지렁이를 형상화했다고 한다. 누마루에서 내려다보면 연못은 영락없는 한반도 모양. 그래서 '반도지(半島池)'라 한다.
안채 바로 앞 큰 바위에 '석문동(石門洞)'이란 글귀가 음각되어 있는데, 석 동 또는 석 리의 지명 유래와 무관치 않다. 외부와 통하는 대문 쪽 입구와 마당에는 몇 개의 돌확(돌로 만든 절구)이 눈에 띈다. 남자용 돌확은 동글고, 여자용 돌확은 복숭아 모양으로 패여 있다. 이는 눈과 귀와 입을 씻어 마음의 청정함을 유지하라는 의미와 함께 청결한 신체 관리를 위한 실용성의 의미도 겸비하고 있다고 한다.
집 안 뒤쪽으로는 대나무 숲이 있는데, 대나무 숲길이 끝날 즈음에 경근당(敬勤堂)이 자리 잡고 있다. 성기상 푸드웰 회장과 성기학 영원무역 회장 형제의 생가다. 일제강점기 때 지어진 정면 6칸의 안채는 시멘트를 사용했고 대청마루 등에 유리 창문을 달아 근대에서 현대로의 변천상을 반영하고 있다. 경건당과 담장을 사이에 두고 석운재(石雲齋)가 자리하고 있으며 석운재와 담장을 사이에 두고 아석헌(我石軒)이 위치한다. 아석헌과 석운재 경계의 담 밑에 세월을 증언하듯 곧은 오동나무 한 그루가 서 있어 이 집의 내력을 말해주고 있다. 성기학 회장은 2,000년대 초반 성씨 고가를 수리하면서 전국 각지에서 고택들의 구조물을 사들여 그 부재들로 최대한 옛 모습을 복원하려고 애썼다고 한다.
성씨 고가는 예로부터 지역의 부호로 가문의 번영만 생각한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베풀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뿐만 아니라 지역의 사회사업에도 큰 노력을 기울였다고 전한다. 특히 개화기 때 몽매한 지역민들을 위한 교육 사업은 아직 근대적인 학교가 없던 시절 지역민들에게는 하나의 빛과 같은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이 가문의 가훈이나 법도와 무관하지 않으리라 짐작된다.
성규호의 장남 성찬영 슬하에는 낙문, 낙교, 낙안, 삼 형제가 있었다. 둘째인 낙교는 후손이 없자 낙문의 둘째 아들인 유경을 양자로 맞아 대를 잇게 했다. 그의 손자 낙안과 낙성, 증손 재경도 조부의 뜻을 좇아 호를 석민, 석운, 우석이라 하여 같은 길을 걸었다. 장손 낙문은 가산을 크게 일으켜 가택을 중심으로 반경 6㎞의 넓은 전답을 경영했다. 가문의 법도도 엄격했다. 적선을 가훈으로, 근검과 청렴을 가풍으로 삼았다.
석민 성낙안과 사촌 석운 성낙성(성찬영 동생의 아들)은 사회사업에 치중했다. 1920년 고가 앞 신작로 건너편에 신식학교(지양강습소)를 지어 교육에 열중했다. 성씨 고가 맞은편의 도로 옆에는 지금도 ‘지양강습소 공적비’가 있다. 이 비석은 1920년 일제강점기 때 당시 성씨 고가의 주인인 성낙안 선생이 사재를 털어 근대교육기관인 ‘지양강습소’를 설립해 후학을 가르친 것을 기념해서 세운 비석이다. 당시 지양강습소는 부녀자에게도 개방하여 세 명의 교사가 아홉 과목을 가르치며, 1924년까지 운영했으나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해산되고 지금은 ‘대지초등학교’로 바뀌었다.
지역민을 위한 이러한 선행은 증손 우석 성재경에게 이어져 1942년 면장 재임 시 춘궁기에 나라에서 주는 것이니 아무 부담 갖지 말고 받으라며 곳간을 열어 어려운 면민들에게 곡식을 나눠주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1953년 우리나라에 양파를 본격적으로 보급하면서 양파 씨받기와 재배기술을 확보하여 새마을 운동의 모델이라 할 수 있는 경화회라는 농민회를 조직하여 양파를 특작물로 하여 농가소득을 올리는 데 이바지했고, 1981년 별세하기 전에 그가 운영하던 협성농산주식을 경화회 조합원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우석 성재경의 맏아들 성기상은 아버지의 협성농산을 물러받아 지금의 푸드웰 회장이 되었고, 둘째인 성기학 회장은 생전 아버지의 뜻과 활동을 마음에 새겨 경화회 회관을 새로 지어 군민에게 기부하였으며,
첫댓글 우리 서울사대부고 후배 성기학씨 집안의 역사가 담긴 실화를 읽으면서 성씨 고가에서 우리 9회 동창 여행가서 하루 밤 자고 온 생각이 주마등 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