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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키예 3 - 셀주크 투르크의 침략 이전의 고대 시리아!
돌궐의 후예인 튀르크계 부족 오우즈족에 속한 족장 셀주크의 이름을 딴 셀주크 투르크는 10세기에
부족을 이끌고 남하해 중앙아시아의 트란스옥시아나에 정착했고.... 1040년경 이란땅으로 들어와
자리잡고는 당시 중앙아시아를 지배하던 사만왕조의 용병으로 시작해서는 힘을 길러 자립을 합니다.
이란 땅에서 사만왕조편에 서서 카라한 왕조를 물리친후 사만왕조도 무느뜨리고는 이라크와 시리아
및 아나톨리아를 지배하며 수니파 이슬람 세계를 통일했으니.... 1092년을 최전성기로 1157년
에 멸망한 제국인데, 투르크가 오기 전의 메소포타미아 특히 시리아에 대해 먼저 살펴 보기로 합니다.
BC 3천년경에 세계 최초로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에서 찬란한 문명이 일어나 도시 국가
들이 출현한 이래 BC 2330년 수메르 도시들을 멸하고는 아카드제국이 들어섰고 그후
바빌로니아가 들어섰으며 아시리아와 신바빌로니아를 거쳐 페르시아제국이 출현했습니다.
기원전 333년에 마카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대왕이 페르시아 제국을 쳐부수고 동방을 정복했고
대왕의 사후에 셀레우키스등 왕국을 거쳐 로마가 이 땅을 정복했고, 661년 이슬람 우마이야
왕조가 동로마를 몰아내고 차지했으며 1086년 셀주크 투르크의 투투쉬는 시리아로 들어옵니다.
시리아는 토질이 비옥한데다 서쪽으로 지중해와 접하고 동쪽으로 중동과 이어지는 교통의 요지라
지중해의 패권을 차지하려는 강국들이 1순위로 노리는 목표였으며,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가 교류를 하기 위해서는 시리아 - 팔레스티나(레반트) 를 통과해야 했으니.... 시리아 일대는
로마 제국 시대 부터 동로마 제국 초기 까지 제국의 재정과 세입을 책임지는 젖줄이기도 했습니다.
“시리아” 를 차지하기 위한 첫 전투는 “BC 1274년에 벌어졌으니 최초의 세계대전” 인데....
이집트군이 2만 5천이고 히타이트군은 4만 5천으로 “7만명의 대군” 이 동원 되었으며
터키에는 전투 후에 평화협정을 담은 점토판 문서가 있으니 “세계 최초로 철제 무기” 를
사용한 "히타이트 제국" 은 1834년에 “핫튜사” (앙카라 동부 보아즈칼레) 가 발견됩니다.
흔히 우리는 그리스의 시인 호머가 쓴 일리어드와 오딧세이가 하도 유명한지라 트로이전쟁을
최초의 세계대전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미케네등 그리스 도시 연합군이 “트로이”
를 공격한 것은 그 보다 80년 후인 “BC 1194년” 이고 또 동원 병력도 양측 모두 1만 내외로
“합계 2만” 정도로 추측되니...... 그럼 “카데시 전투는 최초의 세계대전” 으로 불릴만 합니다!
더욱이 이집트의 기록에서 보면 이집트는 “히타이트가 동맹국의 군대를 총동원” 했지만
자기들이 격파했다면서 적군은 3만에 가까운 히타이트 보병과 3,700여 대의 전차에
11,000명의 용병이라고 했으니...... 저 11,000명의 용병 중에는 “트로이의 이름인
윌루사” 와 호메로스가 트로이의 동맹국으로 언급한 “다르다니아” 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집크군은 람세스를 선두로 아문 부대는 오론테스강을 건너 카데시 요새를 향했고 두번째
라 부대는 오론테스강을 건너눈 중이고, 세트 부대와 프타 부대는 남쪽에 떨어져 있었는데
“오론테스강을 건너는 라 부대” 를 히타이트의 전차 부대가 급습하니 라 부대는“ 궤멸”
되었으며 히타이트군이 “아문 부대 후미를 공격” 하자 예상치 못한 공격을 받고 도주 합니다.
히타이트군은 람세스 2세에게 달려들었으니, 람세스 2세는 “신(神 ?)” 이라도 된 양 혼자만의
“히타이트 군을 대학살하고 승리” 한 후에는 유유히 이집트군 부대에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집트 부조 한쪽 구석에는 “정체를 알수 없는 이집트측의 부대” 하나가 보이니
레스타인 지원부대이지 싶은데 전투는 결국 무승부로 끝났고 양국은 혼인동맹을 맺게 됩니다.
시리아는 이런 지리적 위치 때문에 정치적 독립과 별개로, 다마스쿠스나 안티오크 같은
수많은 고대 도시들이 발달했고, 동로마 제국 시절에는 '안티오키아 학파' 가 신학계
에서 명성을 얻기도 했는데..... 다마스쿠스는 BC 1100년경에는 이미 아람인들의
주요 도시 중 하나로 명성을 날렸으며 또한 우가리트 역시 유구한 역사를 지녔습니다.
알레포도 고대로 부터 유럽과 아나톨리아 중동을 연결하는 무역 핵심지로서 상업이 번영했으며
오스만 제국 시절만 하더라도 16~17세기에는 콘스탄티노플, 테살로니키, 이즈미르 다음가는
제국에서 4번째로 큰 도시로 오스만령 중동 영토에서 핵심지역이었으며 다른 아랍권과 다른
독자적 역사와 전통이 깊은 이집트를 제외하면 정치, 경제적 핵심지로서 알토란 같은 땅입니다.
시리아는 고대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일부로 고대 부터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으로서 인근의 이집트
문명의 영향도 받아왔으니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중간으로 시리아 동부를 중심으로 한
미탄니왕국등 독립국가들이 있었으나, 오랜기간 정치권 패권과는 거리가 있는 땅이었으나 이집트
신왕국, 히타이트, 아시리아제국, 신바빌로니아제국,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의 통치를 받았습니다.
이 지역의 주민들은 바알과 하다드를 숭배했으며 아람어를 사용하였는데 신아시리아 제국
에서 피지배 민족의 언어였던 아람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면서 아람어 사용 지역은 시리아
일대를 넘어 페니키아, 이스라엘 왕국 및 메소포타미아 전역으로 확대 되기 시작 했습니다.
알렉산드로스 3세가 페르시아를 정복한 후 알렉산드로스 제국-셀레우코스 제국 시대
를 거치며 안티오크가 건설되고, 그리스인들이 이주해오면서 이 지역은 급속히
헬레니즘화되기 시작했으니 이 지역은 셀레우코스 제국의 중심지로서 중동과
인접함과 동시에 중동에서 지중해로 진출하는 통로 역할을 하면서 번영을 구가합니다.
셀레우코스 왕조가 고대 로마 공화정에 정복당해 로마 영토로 편입되는데 로마제국 시대 부터
동로마제국 초창기에 이르는 기간 지리적 요인으로 로마제국에서 가장 부유한 속주이기도
했으며 고대 로마황제 중 엘라가발루스,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의 모계가 시리아의 에메사(홈스)
의 유력 가문 출신이기도 했고 서기 3세기 군인 황제 시대에는 팔미라 제국이 들어서기도 합니다.
1. 시리아의 중심 할랍(알레포)
세계 최고(最古)의 도시였지만 최근에 시리아 내전으로 파손되었고 복구가 진행중인 시리아 제2의 도시
인 할랍(알레포)은 아랍어로 '우유' 란 뜻인데, 기독교와 이슬람의 사도 아브라함(이브라힘)이 이곳을
지나던 중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가진 양의 젖을 짜서 나눠주었다는 일화로 유래되었다는
설과 하얀 대리석이 특산물이어서 아람어로 하얗다는 뜻의 할랍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알레포는 할랍의 이탈리아식 발음으로, 십자군 전쟁 때부터 서방에서 통용되었으니알레포는 모스크와
성당, 이슬람과 기독교가 공존하는 전형적인 레반트 지역 도시로 알레포는 명실상부한 시리아 북부
중심 도시로 시리아뿐만 아니라 레반트 지역 최대 규모의 도시로 알레포 주의 주도이며 2004년 기준
인구 213만명으로 80%는 수니파 무슬림이고 12%는 정교회,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등 기독교인 입니다.
하지만 알레포 전투 당시 반군이 지배하는 시가지 동부의 인구가 4만 명까지 줄어들었다는 추정도
있었으며, 2018년 인구는 180만 정도로 추정되고 위도가 대전시와 비슷하나 대륙 서안이라는
특징으로 겨울 평균기온은 제주도와 비슷하며 1986년 구시가지는 인간이 가장 오래전부터 살아
온 도시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되었지만 시리아는 2011년부터 내전으로 여행금지국가 입니다.
2. 아르미 왕국
살라딘이 축조했다는 알레포 성채와 도심의 우마이야 대사원, 9세기에 1만권의 장서를 소장했다
라고 전해지는 사이피야 도서관등 유구하고 유수한 문화재가 풍부한데 시타델을 제외하면
과거 도시 유적과 현재 시가지가 겹치기 때문에 고고학적 발굴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탓에 문헌 자료가 있기 전에는 언제부터 도시가 어떻게 발전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최소한 기원전 5천년경부터 거주지가 형성되었고 기원전 2500년 경의 엘바 문서에서 '할람'
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이니 알레포는 서아시아 문명의 발상지 자지라 및 수메르 (메소포타
미아)와 비교적 가까운 관계로 남쪽의 경쟁 도시인 다마스쿠스보다 먼저 도시 발전하였습니다.
할랍(알레포)의 첫 이름은 '할람' 이었고 셈계 아르미 왕국의 수도였으니 대부분의 메소포타미아
국가들처럼 아르미 왕국 역시 알레포 일대만을 지배하는 도시 국가였는데, 서남쪽으로 40km
떨어진 에블라와 친교와 경쟁을 반복하였고 기원전 2350년 경 에블라의 왕이 수메르의
키쉬와 연합해 아르미군을 격파하였고 스스로 '이그리쉬 할람' (할람을 물리친)을 칭했습니다.
에블라의 속국이던 아르미 왕국은 전자가 마리와 국운을 건 전쟁을 벌이던 틈에 반란을 일으켰지만
에블라의 재상 이비 스피쉬에게 수도가 함락되며 진압되었고 이비의 아들 엔지 말리크가 할람의
총독으로 봉해졌지만 몇년 지나지 않아 수메르를 평정한 아카드인들이 침공하였고 아르미와 에블라
모두 파괴되었는데 기원전 2290년 후 에블라 왕국은 복구되었지만 아르미 왕국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아카드인들이 메소포타미아 지배에 만족하며 돌아가자 도시는 재차 에블라 왕국(제2 왕국) 의
지배를 받았고 3세기간 지배가 이어졌으니 이 시기에 할랍에선 메소포타미아 신화의 폭풍의
신인 하다드 숭배가 번영하였으니 할람은 동시에 '하다드의 도시' 로도 일컬어지게 되었습니다.
한편 기원전 2154년에 구티인들의 침공으로 아카드 제국이 붕괴된 이후 수메르 제국(우르 제3 왕조)
이 메소포타미아의 패권을 장악하자 에블라 왕국도 복속하였으나 기원전 2004년 수메르제국 역시
붕괴되었고 비슷한 시기 에블라 역시 후르리인의 침공으로 2왕국이 멸망하고 3왕국으로 대체됩니다.
이러한 혼란기에 동부 셈 족의 일파인 아모리인이 나타났는데 이들 중 동쪽으로 향한 무리는
고 바빌로니아를 세웠고 서쪽으로 향한 무리는 얌하드를 세웠는데, 후자는 대가뭄
이후 쇠퇴하던 에블라로 부터 기원전 1800년경 할랍을 점령하고는 왕국의 수도로 삼았습니다.
3. 얌하드 왕국
얌하드 왕국 대에 이르러 아시리아, 바빌로니아에게 도시 알레포는 '할랍' 으로 기록되기 시작했으니
기존 에블라의 경쟁국이던 마리가 쇠퇴한 후 얌하드는 동쪽의 새로운 적수로 떠오른 고 아시리아
와 대립하였으니 아시리아가 카르케미쉬, 카트나(홈스) 등과 동맹하며 할랍을 남북으로
압박해오자 얌하드왕국은 같은 아모리 계열인 바빌로니아 및 에쉬누나와 동맹하여 이에 맞섭니다.
원교근공, 특히 얌하드의 야림림 1세와 함무라비 대왕 간의 동맹이 유명했고 그 영향인지 전자의
후계자 이름 역시 함무라비인데 얌하드왕국은 바빌로니아 버금가는 서아시아의 강대국으로서
시리아 대부분을 다스렸고 에블라, 마리, 우가리트 등이 번국이었으며 카르케미쉬와 카트나
도 결국 아시리아와의 동맹 대신에 얌하드와의 휴전을 택할 정도였는데 야림림 1세는
수메르 동부의 도시 데르에 15년간 군사 지원을 약속해 5백척의 함대를 주둔시켰다고도 합니다.
바빌로니아와 얌하드 간 군사 동맹은 기원전 1761년 함무라비 대왕이 후자의 속국인 마리를 침공해 파괴
하며 종식되었지만 양측 모두 군사적 충돌은 피하는 상황에서 경제적 교류는 지속되었고 함무라비 1세
증손자 니크메파 때(기원전 1675년)까지 얌하드는 조금씩 영토를 늘리며 번영하였으나 바빌로니아의
쇠퇴와 함께 북쪽 후루르인과 바다 민족의 선조격인 하비루인의 출현에 얌하드왕국은 위기를 겪게됩니다.
함무라비 2세와 야림림 3세의 즉위기에 함무라비 1세의 차남 야림림과 그 후손들에게 주어진
번국 알랄라카(안티오크 근교)의 군주 암미타쿰이 스스로 왕을 칭하는 등 내분도 일어났고
기원전 1620년경 히타이트 제국의 핫투실리 1세가 알랄라카와 카르케미쉬를 정복해 파괴
하니 얌하드는 해안으로 향하는 통로를 상실하게 되었으니 야림림 3세는 핫투실리 1세가
아나톨리아의 프리기아 원정하는 틈에 후르리인들의 도움으로 실지를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이듬해 핫투실리 1세는 아예 수도 할랍(알레포)으로 진격해왔고 이에 야림림 3세가 야심차게
준비한 1백의 전투마차를 포함한 얌하드 정예군은 아탈루르 산 전투에서 히타이트 철기군
에 대패하였으니 히타이트의 핫투실리 1세는 할랍 자체를 함락시키진 못했지만 그의 두
차례에 걸친 원정은 시리아 지방에 대한 얌하드왕국의 패권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했습니다.
얌하드 군주들은 대왕 칭호를 쓰지 않았으며 핫투실리 1세는 할랍 공성전도중 입은 부상으로 사망
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의 후계자인 아들 무르실리 1세는 친정을 시작하며 부왕의 복수를
천명하고 기원전 1600년경 얌하드를 침공해 결국 할랍을 함락하였으며 많은 포로들이 잡혔습니다.
히타이트 수도 하투샤로 끌려갔는데 이후 무르실리 1세가 바빌로니아 원정후 회군 중에 암살당하며
히타이트 제국이 분열된 틈에 얌하드의 사라 엘은 할랍을 되찾아 왕조를 이어나갈 수 있었습니다.
사라 엘은 '할랍의 왕' 만을 칭하였고 얌하드라는 이름은 이때부터 쓰지 않게 되었는데 후계자
인 아바 엘 2세는 알랄라카 등 기존 얌하드의 본토를 수복하고 하다드 신앙을 강조하며
단합과 중흥을 이끌었지만 히타이트의 분열과 얌하드의 쇠락을 틈타 후자의 동맹
이었던 후르리인들의 세력이 막강해졌고 이들은 미탄니 제국을 세워 자지라를 장악하였습니다.
기원전 1524년, 미탄니 제국의 파르샤타타르는 내란을 획책하여 할랍을 점령하니 마지막 국왕 일림
일리마 1세는 살해되었고 아들 이드리미는 하비루에 망명하였다가 7년후 알랄라카를 되찾습니다.
이드리미는 알랑라카를 점령하고 이후로 미탄니 제국에 맞서던 이드리미는, 기원전 1510년 협상
을 통해 미탄니에 복속하는 대신 할랍의 지배권을 얻을 수 있었지만 수도는 알랄라카로 제한
되었고 '할랍의 왕' 칭호도 금지됐으니 왕가는 이어졌지만 얌하드왕국은 완전히 멸망한 것입니다.
4. 알랄라카 왕국
얌하드왕국의 후신이라 할수있는 알랄라카 왕국 하에서 할랍(알레포)은 불안한 시기를 이어갔으니
종주국인 미탄니 제국은 파르샤타타르의 아들 샤우쉬타타르 때에 아시리아를 복속시킵니다.
이후 미탄니 제국은 전성기를 누렸고 이는 후자의 아들 아르타마타 1세와 손자 슈타르나
2세 때까지 이어졌으며 점차 세력을 회복해가던 히타이트에 맞서기 위해 아르타마타
1세는 분쟁지이던 가나안을 이집트에 넘겨주고 파라오 투트모스 4세와 동맹을 체결합니다.
히타이트의 투달리야 2세는 미탄니와의 대결에 앞서 그 속국인 알랄라카 왕국을 습격하는 것으로
제국의 부활을 알렸으며 그의 아들인 수필룰리우마 1세가 아시리아 및 바빌로니아와 동맹하고
미탄니 제국군을 격파하고 수도 와슈칸니를 포위하였는데 그후 수필룰리우마 1세는 기원전
1330년경에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할랍(알레포)을 점령하고 차남 텔레피누를 그 왕으로 봉합니다.
할랍 번왕국은 텔레피누에서 시작하여 3대간 이어졌는데 기원전 1200년경 바다 민족의 침공
으로 단절되었다가 새로운 히타이트계 왕국인 팔리스탄이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한편
바다 민족의 침공과 히타이트 제국의 붕괴후 아람 인들이 시리아 지방에 유입되었는데
팔리스탄은 이에 맞섰고 일각의 주장에는 이스라엘 왕국의 다윗 왕과 연합했다고도 합니다.
한편 팔리스탄과 팔레스타인의 어원인 골리앗의 필리시테(블레셋)인 사이의 연관성이 제기되기도
하나 별 근거는 없으며, 기원전 900년경 팔리스탄은 바다 민족 계열의 하마와 히타이트
계열의 파틴, 아람 계열의 비트 아구시 등으로 분열되는데 할랍은 이들 중 후자에 속하였습니다.
다만 중심지는 아니었고 할랍에서 북쪽으로 20km 떨어진 아르파드가 수도였으며 초대 군주인.....
아구시는 아시리아 제국의 아슈르나시르팔 2세가 쳐들어오자 복속하고 조공하여 파괴를 면합니다.
이후 아시리아의 샬마네세르 3세 대인 기원전 830년경에 비트 아구시의 군주 아라무는 그에게 완전히
복속하였으나 그의 아들인 아타르슈므키 1세는 아르메니아의 우라르투왕국 등 아시리아의 적국들과
동맹하여 독립을 꾀하였는데.... 아시리아의 아다드니라리 3세가 진격해오자 재차 그에 복속하였습니다.
기원전 8세기 중반 우라르투 왕국은 7대국왕 사르두리 2세의 지휘하에 자지라 북부와 시리아 일부를
장악할만큼 강성해졌는데, 동시에 아시리아는 아다드니라리 3세 사후 내전으로 약해져 있었습니다.
이에 비트 아구시의 마지막 군주 마티일루는 재차 우라르투에 복속하였지만 기원전 745년 아시리아
를 재통합한 티글라스틸레세르 3세는 즉위 2년만에 응징에 나서 비트 아구시의 수도 아르파드를
포위하자 우라르투 대왕 사르두리 2세와 카르케미쉬 등 신히타이트 연맹 원군이 모두 패퇴했음에도!
그럼에도 계속 저항하던 아르파드는 3년 공성전후 기원전 740년에 함락되었으니 티글라스 틸레세르
3세는 도시의 파괴와 더불어 주민들을 학살하고는 자신의 환관 중에 한명을 총독으로 봉합니다.
아르파드의 파괴와 함께 일대의 중심지가 된 할랍(알레포)은 한세기 반동안 아시리아 제국의 지배를 받았
는데 기원전 609년, 아시리아-이집트 연합군과 메디아-칼데아 연합군 간의 메기도 전투 및 하란
공방전이 후자의 승리로 귀결되며 아시리아 제국은 20년간의 대전쟁 끝에 멸망했고 할랍은 아시리아
의 마지막 근거지였던 카르케미쉬와 가까워 비교적 나중에 신바빌로니아(칼데아)령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
5. 그리스~로마 시대
다만 그 지배는 오래가지 못하였고 70여년 후인 기원전 539년에 아케메네스 제국(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왕이 바빌론을 정복하자 할랍(알레포) 역시 자동으로 병합된 것으로 보인느데 별다른 언급 없이
아람어로 '강 건너편' 이란 뜻의 에베르-나리 사트리프(총독령)에 소속되어 있던 할랍은 기원전 333
년 이수스 전투 후 알렉산드로스 3세에게 점령되며 그리스 문명권 하에서 새로운 시대를 맞게 됩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사후 디아도코이의 일원인 셀레우코스 1세는 할랍을 그리스식 도시로 개조하고
본국 마케도니아의 도시 베로이아의 이름을 붙였으니 베로이아는 기원전 240년 셀레우코스
왕조의 중심지가 수메르의 셀레우키아에서 시리아의 안티오크로 이전되며 그 배후 도시로 발전합니다.
다른 그리스 문명권 도시들처럼 불라이라고 부르는 귀족들의 평의회에 의해 자치를 누리며 평화롭게
지내던 베로이아는 기원전 88년 아르메니아 왕국의 티그라네스 대왕에게 일시적으로 점령되었고
마침내 기원전 64년 로마 폼페이우스가 셀레우코스 조를 멸할 때에 로마령 시리아 속주로 편입됩니다.
약 3세기간의 팍스 로마나 기간 동안 로마 총독은 그리스어를 쓰는 귀족층이나 아람어를 쓰는 평민들에게
세금을 제외하면 별 간섭을 하지 않았고 로마 제국의 유럽 지역이 침체기를 겪던 5세기에도 여긴 인구
증가가 지속되었다고 하는데 시리아 주에서 베로이아(알레포)는 안티오크 다음으로 큰 도시였다고 합니다.
그러던 3세기 무렵부터 베로이아(알레포) 는 이웃 안티오크와 함께 크리스트교가 주를 이루었으니
첫번째로 베로이아 주교인 320년경의 성 에우스타시오스는 324년 안티오크의 주교가 됩니다.
성 에우타시오스는 니케아 공의회에 참가해서 아리우스파를 비판하였지만, 그는 330년 안티오크
총회에서 아리우스주의에 호의적인 사제들에게 간통 혐의로 폐위되니 안티오크 시민들이
봉기하려고 했으나...... 에우스타시오스는 폭력을 만류하고 수도원으로 은퇴하는 모범을 보입니다.
시민들은 아리우스파 주교 멜레티오스에 반발하여 니케아주의 주교를 선출해 대립하였는데 반세기 이상
이어졌으며(멜레티오스 분열) 432년 베로이아에선 주교 아카시오스의 주관 하에 성 키릴로스(치릴로)
와 그에 반대하는 동방주교들간 회의가 열리기도 했으며 5세기부터 시리아는 단성론이 대세가 되었
으니 518년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칼케돈주의를 거부한 베로이아(알레포) 주교를 추방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