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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 國 時 代
吳 王 朝 世 家
吳(오) AD.222∼AD. 280 위치 중국 동남부. 베트남 성 孫(손)
代數 | 在位期間 | 位 | 諱 | 關係 | 首都 | 現地名 |
武烈皇帝(무열황제) | 孫堅(손견) | 建業(건업) | 江蘇省 南京 | |||
제 1대 | AD. 229∼AD. 252 | 大皇帝(대황제) | 孫權(손권) | 무열황제의 둘째 | 강소성 남경 | |
제 2대 | AD. 252∼AD. 258 | 廢皇帝(폐황제) | 孫亮(손량) | 대황제의 일곱째 | ||
제 3대 | AD. 258∼AD. 264 | 景皇帝(경황제) | 孫休(손휴) | 대황제의 여섯째 | ||
추존 | 昭獻皇帝(소헌황제) | 孫和(손화) | 대황제의 셋째 | |||
제 4대 | AD. 264∼AD. 280 | 末帝(말제) | 孫皓(손호) | 손화의 아들 |
손견(AD. 155∼AD. 191)
자는 文臺(문대)로서 吳郡 富春縣(오군 부춘현. 浙江省 杭州市 富陽區. 절강성 항주시 부양구)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회계군에서 許昌(허창)과 그 아들 허소가 반란을 일으키자 1천 명의 군사를 모아 양주의 건 군과 합류해 공을 세우자 당시 양주자사였던 臧旻(장민)이 손견의 공적을 조정에 알리자 손견은 염독현의 縣承(현승)에 임명되었다. 이후 우이 현승으로 또 下邳(하비) 현승으로 전임되었다. 황건적이 난을 일으켰 을때 朱儁(주준)의 추천으로 공을 세워 별부사마가 되었다. 영제(AD. 189년)가 붕어하자 董卓(동탁)이 전 횡을 저지르자 의병이 곳곳에서 거병하자 손견도 거병하였다. 형주자사인 王睿(왕예)는 평소 손견에게 무 례 했었기에 손견이 지나가면서 죽여버렸다. 손견은 袁術(원술)과 상견하였다. 원술의 추천으로 파로장군 대행으로 예주자사를 겸임케 하였다. 헌제 초평 3년(AD. 192년), 원술은 손견을 보내 荊州(형주)를 정벌 하며 劉表(유표)를 공격케 하였다. 유표는 黃祖(황조)를 출정시켰다. 손견은 황조를 격하게 추격하여 한수 를 건너 襄陽(양양)을 포위하였는데 單馬(단마)로 峴山(현산)을 지나다가 황조의 군사에게 사살되었다. 당 시 손견은 37세였다. 손견의 조카인 孫賁(손분. 손견의 형 孫羌 (손강의 아들)은 사졸을 거느리고 원술을 찾아갔다. 원술은 표문을 올려 손분을 예주자사에 임명하였다. 손견은 아들 넷을 두었는데 孫策(손책). 孫 權(손권). 孫翊(손익). 孫匡(손광)이다. 峴山(현산)--지금의 湖北省 襄樊市(호북성 양번시) 소재
손책(AD. 175∼AD. 200)
자는 伯符(백부)이다. 손견이 처음 의병을 일으킬 때 손책은 모친을 모시고 廬江郡 舒縣(여강군 서현)에 옮겨 살았다. 손책은 周瑜(주유)와 서로 벗이 되었는데, 손책과 주유는 同壻(동서)로 손책의 부인이 大橋 (대교)이고, 주유의 부인이 小橋(소교)라고 했다. 손책은 원술이 황제를 참칭하자 (건안 2년, AD. 197년), 손책은 사신을 보내 원술을 책망하며 관계를 단절하였다. 이에 조조는 표문을 올려 손책을 토역장군에 임명하고 吳侯(오후)에 봉했다. 조조 동생의 딸을 손책의 막내동생 孫匡(손광)에게 출가시켰고, 또 조조 의 아들 曹彰(조창)은 손책의 사촌 형인 孫賁(손분)의 딸과 결혼시켰다. 헌제 건안 25년(AD.200년). 조조 와 원소는 관도에서 서로 대치하였는데, 손책은 은밀히 許都(허도)를 기습 공격하여 한 황제를 영입하려 고 준비하던중 전임 오군태수 許貢(허공)의 빈객에게 살해되었다. 그 때 손책의 나이는 26세였다. 그전에 손책은 허공을 죽였는데, 허공의 막내아들과 빈객은 도망쳐 장강주변에 숨어 살았다. 손책은 단기로 외출 했다가 허공의 빈객과 조우했고, 자객은 손책에 큰 상처를 입혔고 손책은 그로 인해 사망했다. 손권이 황 제를 칭한 뒤, 손책에게 장사 환왕이라는 시호를 올렸고, 손책의 아들 孫紹(손소)를 오후에 봉했다가 작 위를 바꿔 상우후에 봉했다. 손소가 죽자, 아들 孫奉(손봉)이 작위를 계승했다. 孫皓(손호)가 재위할 때 손봉이 당연히 제위에 올라야 한다는 와언이 돌자 손봉을 처형하였다..
廬江郡 舒縣(여강군 서현)--금 安徽省(안휘성) 중부 合肥市(합비시) 관할 廬江縣(여강현) 주유의 고향
許都(허도)--河南省 중앙부 許昌市(허창시), 조비는 허도를 허창으로 개칭
제 1대 대황제(AD. 182∼AD. 252)
손권의 자는 仲謨(중모)이며, 형인 손책이 여러군을 평정하자 손권은 15세에 吳郡 陽羨縣 縣長(양선현 현 장)이 되었다. 건안5년(AD. 200년), 손책이 죽으면서 손권에게 대사를 넘겨주었다. 조조는 표문을 올려 손권을 토로장군에 임명하고 會稽太守(회계태수)를 겸하며 吳郡(오군)에 주둔하라 하였다. 손권은 걸출한 인제를 모으며, 예를 갖춰 명사를 초빙하였으니 魯肅(노숙). 諸葛瑾(제갈근)등이 손권을 도왔다.
헌제 건안 9년(AD. 204년), 동생인 丹楊 太守 孫翊(단양태수 손익)이 부하들에게 피살되자 사촌 형인 孫 瑜(손유)가 단양 태수가 되었다 AD. 208년, 周瑜(주유)와 程普(정보)는 좌. 우도독이 되어 각각 1만의 군 사를 거느리고 유비와 함께 赤壁(적벽)에서 만나 조조의 군사를 대파하였다. 조조는 나머지 병선을 소각 한 뒤 군사를 이끌고 퇴각했는데 전염병으로 사졸의 절반이 죽었다. 건안 16년(AD. 211년), 손권은 東吳 (동오)의 치소를 秣陵(말능. 南京 남경)으로 옮겼다. 다음해에 AD. 212년에 석두산에 축성하고 말능을 建 業(건업. 동오가 멸망한 뒤에 AD. 282년. 建鄴(건업)으로 나중에는 建康(건강)으로 개명하였다.
건안 19년(AD. 514년), 손권은 廬江郡 皖城(여강군 완성)을 원정하여 함락시켰다. 曹魏(조위)의 여강 태 수인 朱光(주광) 및 참군인 董和(동화)와 남녀 수만 명을 사로잡았다. 건안 21년, 조조는 居巢(거소, 여강 군 거소현)에 주둔하면서 손권의 유수의 군영을 공격하였다. 이 해에 유비는 蜀郡(촉군)을 평정했다.
건안 22년(AD. 221년), 손권은 도위인 徐詳(서상)을 보내 귀항을 요청했고 조조는 사자를 보내 수호하면 서 양가의 결혼을 약속했다. 건안 24년(AD. 219년), 관우는 曹仁(조인)을 양양에서 포위하였고, 조조는 좌장군 于禁(우금)을 보내 조인을 구원케 하였으나 마침 漢水(한수)가 범람했고 관우는 수군을 거느리고 우금을 생포하고 보병과 기병 3만여 명을 체포하여 강능으로 압송하였다. 이에 손권은 내심 관우를 두려 워하여 조조에게 관우 토벌을 적극 돕겠다고 서신을 보냈다. 손권은 먼저 여몽을 보냈고, 여몽은 公安縣 (공안현)을 기습하여 촉장 傅士仁(부사인)을 생포하였다. 여몽의 군사가 남군에 도착하자 남군 태수인 麋 芳(미방)은 성을 들어 투항했다. 관우는 당양현으로 옮겨 서쪽의 麥城(맥성)을 지켰고 손권은 사자를 보내 관우의 투항을 권유했다. 12월 馬忠(마충)이 관우와 관우의 아들 關平(관평)을 생포했고 촉군 도독인 趙 累(조루) 등을 장향에서 생포하면서 마침내 형주를 차지했다.
건안 25년(AD. 220년), 조조가 죽었다. 위왕의 태자인 曹丕(조비)가 이어 승상과 위왕이 되어 연호를 연 강으로 개원하였다. 10월 위왕 조비가 칭제하면서 황초로 개원하였다. 황초 2년(AD. 221년) 유비가 촉에 서 칭제하였다. 손권은 公安(공안)에서 江夏郡 鄂縣(강하군 악현)으로 도읍하고 악현을 武昌(무창)으로 개 명하였다.
魏 文帝(위 문제)가 제위에 오르자 손권은 특사를 보내 藩臣(번신)을 칭하였고 우금 등을 돌려보냈다. 위 문제는 손권의 아들 손등을 제후에 봉하려 했지만 손등이 어리다 사양했으며 토산물을 헌상하였고 손권 은 손등을 왕태자로 책립하였다. 황무 2년(AD. 223년), 4월 유비가 白帝城(백제성 重慶市 奉節縣. 중경 시 봉절현)에서 붕어했다. 황무 7년(AD. 228년), 손권은 아들 孫慮(손려)를 건창후에 봉했다. 황룡 원년 (AD. 229년), 손권은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황룡 원년(AD. 229년), 9월 도읍을 건업으로 옮겼다. 가화 원년(AD. 232년), 건창후인 손려(손권의 차남)가 죽었다. 적조 4년(AD. 241년), 태자인 孫登(손등 장남)이 죽었다. 적조 5년(AD. 242년), 孫和(손화, 손권의 3남)를 태자로 책봉했다. 적조 13년(AD. 250년), 태자 손화를 폐하고 吳興郡 故鄣縣(오흥군 고장현)에 옮겨 살게 하였다. 노왕인 孫覇(손패, 손권의 4남)를 사사 했다. 11월 孫亮(손량, 손권의 7남)을 태자로 책립했다. 태원 2년(AD. 252년), 이전 태자였던 손화를 남 양왕으로 책봉하여 장사군에 거처하게 하였다. 아들 손분은 제왕에 봉해 武昌(무창)을 다스리게 하였고. 아들 孫休(손휴, 6남)는 낭야왕으로 봉해 虎林(호림)에 나가있게 했다. 태원 2년(AD. 252년)여름 4월에 손권은 죽었는데 향년 71세였다. 虎林(호림)--금 安徽省(안휘성) 서남부 池州市(지주시)
제 2대 회계왕(AD. 243∼AD. 260)
손량의 자는 子明(자명)으로 손권의 막내 아들이다. 손권은 나이가 많았고, 손량은 가장 어렸기에 각별히 정을 더 주었다. 누나인 공주 孫魯班(손노반. 남편은 全琮. 전종)는 태자인 손화와 그 모자를 참소했다. 공주는 손권의 마음에 들여야 하기에 미리 손량과 연결 지으려고 자주 全尙(전상. 전종의 족자)의 딸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 적조 13년(AD. 250년), 태자인 孫和(손화)를 폐하고 孫亮(손량)을 태자로 책립하 고 전상의 딸 全惠解(전혜해)을 태자비로 삼았다. 태원 원년(AD. 251년), 손량의 생모인 潘氏(반씨)를 황 후로 책립했다. AD. 252년, 손권이 붕어하자 태자가 존위에 올랐다. 나라안 죄수를 사면하고 건흥으로 개원하였다. 諸葛恪(제갈각)이 황제의 태부가 되었고 손권의 사위 騰胤(등윤)은 위장군으로 상서사를 겸하 였다. 건흥 2년(AD. 253년), 전씨를 황후로 책립하고, 나라안 죄수를 사면하였다. 그해 제갈각은 군사를 거느리고 魏(위)나라 정벌에 나서서 新城(신성)을 포위하였지만 전염병이 크게 유행하여 병졸의 거의 절 반이 죽었다. 10월 제갈각은 군사를 거느리고 돌아왔다. 10월 무위장군인 孫峻(손준)은 전각에 복병을 두 어 제갈각을 살해했다. 나라의 죄수를 사면했고, 손준이 승상이 되었다. 오봉 원년(AD. 254년), 가을 吳 侯(오후)인 孫英(손영)이 손준을 제거하려 했지만 발각되자, 손영은 자살했다.
대평 2년(AD. 257년), 魏(위) 정동대장군인 제갈탄이 壽春城(수춘성)을 근거로 반란을 일으켰다. 대평 3 년(AD. 258년), 濟葛誕(제갈탄)이 文欽(문흠)을 죽였다. 3월에 위의 司馬昭(사마소)는 수춘성을 함락시켰 고, 제갈탄은 측근과 함께 전사하였다. 8월 황제 손량은 孫綝(손침)이 권력을 쥐고 방자하다 하여 태상인 全尙(전상. 전황우의 부친)과 장군 劉丞(유승)과 함께 손침을 제거할 모의를 했다. 9월 손침은 전상을 체 포했고, 동생을 보내 유승도 죽였다. 손침은 대신들을 소집하여 황제 손량을 회계왕으로 추방하니(AD. 258년) 그 때 손량은 16세였다.
제 3대 경황제(AD. 235∼264)
손휴의 자는 子烈(자열)인데 손권의 6번째 아들이다. 태원 2년(AD. 252년), 낭야왕이 되어 虎林(호림)에 머물렀다. 그러다가 손휴의 봉지를 丹楊郡(담양군)으로 옮겼으나 단양태수 李衡(이형)이 업무 관계로 괴롭 혀 명에 의거 회계왕이 되었다. 손량이 폐위되고 제위에 올랐다. 이 해는 魏 高貴鄕宮(위 고귀향군) 감로 3년(AD. 258년)이었고 촉한은 後主 景耀(후주 경요)원년이다. 대장군 손침을 丞相(승상)에 임명하여 荊州 牧(형주목)을 겸임하고 하고 食邑(식읍)을 5현으로 하였다. 이어 孫皓(손호)를 오정후에 손호의 동생 孫德 (손덕)을 전당후에 孫謙(손겸)을 영안후에 봉했다
황제 손휴는 손침이 역모를 꾀한다는 사실을 알고 은밀히 張布(장포)와 함께 계책을 마련하여 손침을 포 박하여 당일로 처형하였다. 장포가 공을 세워 중군 독군에 임명하고 또 장포의 동생 張恂(장순)을 교위 에 임명했다. 회계군에 폐제로 방출된 손량이 돌아와 황제가 된다는 아이들 노래가 있다는 궁인의 고발 이있어 손량을 후관후로 강등시켜 대지로 이주케 하였는데 가는 도중 孫亮(손량)이 자살하였다.
영안 5년(AD. 262년), 朱氏(주씨)를 황후로 책립했고, 황자 灣(만)을 태자로 책립하였다. 영안 7년(AD. 264년), 황제 손휴가 죽었는데 나이는 30세였다. 이후 태자 손만이 즉위했어야 했으나, 승상 濮陽興(복 양흥)과 張布(장포)가 짜고 그의 조카 손호를 즉위시켰다. 그러나 손호는 손휴의 아내 주부인을 핍박하 여 죽이고, 손휴의 네 아들을 오의 작은 성에 몰아넣고, 그 중에서 손만과 손공을 죽였다.
제 4대 말황제(AD. 242∼AD. 264)
손호의 자는 元宗(원종)이며, 孫權(손권)의 셋째아들이자 황태자였던 孫和(손화)의 아들이다. 孫休(손휴)가 죽으면서 孫皓(손호)를 오정후에 봉해 封國(봉국)에 부임케 했다. 그곳 서호의 백성인 景養(경양)은 손호 의 관상을 본 뒤에 응당 대귀할 것이라 했다. 손호는 속으로 기뻐했지만 티를 내지 않았다. 손휴가 죽을 때 蜀漢(촉한)나라는 멸망한지 얼마 되지 않았고, 交阯(교지)에서도 반란이 일어나 나라안이 두려워 떨면 서 현명한 군주를 기대하고 있었다. 좌전군이었던 萬彧(만욱)이 전에 조정현 현령이었고 손호와 서로 친 했는데 손호의 식견과 결단력을 칭송하면서 승상 澓陽興(복양흥)과 좌장군 張布(장포)에게 여러번 말했다. 승상과 좌장군은 손휴의 황후인 朱皇后(주황후)에게 손호을 후사로 정하겠다고 말했다. 이에 결국 손호 를 영입하니 그 때 23세였다. 魏 成熙(위 성희) 원년(AD. 264년)에 손호가 즉위하였다.
원흥 원년(AD. 264년), 손휴의 태자 灣(만)을 예장왕. 차자를 여남왕. 차자를 야왕. 차자를 진왕에 봉하고 황후로 滕氏(등씨)를 책립하였다. 손호는 포악하고 교만이 넘쳤으며, 주색을 좋아하여 상하 모두가 싫어 하였다. 복양흥과 장포역시 후회하였다. 어떤자가 이를 손호에게 고자질하자 복양흥과 장포를 죽여버렸 다. 7월 경황제의 황후 주씨를 핍박하여 황후가 죽고 난뒤 경황제의 네 아들을 모두 작은 성에 살게 했 는데 얼마 있다가 나이가 위인 두 아들을 죽여버렸다. 건형 원년 정월(AD. 269년). 황자인 孫瑾(손근)을 태자로 책립했고 두 아들을 誰陽王(수양왕)과 東平王(동평왕)에 봉했다. 천기 4년(AD. 280년), 薛瑩(설영) 과 胡沖(호충)의 방책에 의거 국서를 지닌 사자를 王濬(왕준). 사마주. 왕혼 등에게 항서를 보냈다.
손호는 온 가솔을 데리고 태강 원년(AD. 280년), 낙양에 도착했다. 진 무제 태강 5년(AD. 284년), 손호 는 낙양에서 죽었다.
사료 출처
曾先之(증선지)의 十八史略(십팔사략)과 西晉(서진)의 陳壽(진수)의 正史三國志(정사삼국지)와 인터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