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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부(靈符)에 대한 小考 (정암. 주선원)
01. 들어가는 말
02. “부적” “만다라” “영부”의 비교. 1), 2), 3)
03. 동학(천도) 경전과 사서(史書)에 나타난 영부 이야기
04. 수운 이후의 해월 최시형선생의 영부
05. 동학혁명시대의 혼란기 영부(물형부)의 왜곡
06. 동학 교리근대화 시기의 영부에 대한 이해. 1), 2)
07. 1910년대 천도교회 월보에 나타난 영부
08. 천도교 지도자들의 인물분석에 따른 영부접근
09. 오늘의 영부 상황
10. 영부의 부활과 동학(천도) 포덕의 문제점
11. 맺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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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는 말
동학은 1860년 4월 5일 수운 최제우 선생이 창명했다. 동학의 창명은 수운 선생이 ‘한울님’의 말씀(天語)을 들음과 한울님의 천령(天靈)이 강림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이것을 동학에서는 ‘안으로 강화의 가르침이 있다(內有降話之敎)는 것과 밖으로 접령하는 기운이 있다(外有接靈之氣)는 것으로 더불어 동학을 창명하는 결정적인 종교체험의 내용으로 본다. 또 이것을 약칭하여 강화(降話)와 강령(降靈)이라 부른다. 그리고 수운 최제우선생이 직접 저술한 <동경대전>과 <용담유사>에 이 강화와 강령의 장면을 묘사한 기록이 여러 곳에 나온다.
동학의 경전 동경대전 포덕문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선천개벽을 한 지 오만 년 동안) 내(한울님 자신) 또한 공(功, 힘써 일한 결실)이 없으므로 너(수운)를 세상에 내어 사람들에게 이 법을 가르치게 하니 의심치 말고 의심치 말라.”(吾亦無功故 生汝世間 敎人此法 勿疑勿疑)
“그러면 서학(西道, 그리스도교)으로써 세상 사람들을 가르치리까?”(西道以敎人乎) “(단호하게) 그렇지 않다. 나에게 영부(靈符)가 있는데 그 이름은 선약(仙藥)이요 그 형상은 태극(太極)이고 또 다른 형상은 궁궁(弓弓)이니 나의 이 영부를 받아서 세상 사람들을 질병에서 건지고, 나의 이 주문을 받아 세상 사람들을 가르쳐서 나(한울님)를 위하게 하면 너(수운)도 또한 장생하여 덕을 천하에 펴리라.”(不然 吾有靈符 其名仙藥 其形太極 又形弓弓 受我此符 濟人疾病 受我呪文 敎人爲我則 汝亦長生 布德天下矣)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강화가 일 방향적인 말씀의 향연이 아니라 주체(한울님)와 객체(수운 최제우) 사이의 문답 형식을 띠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수운 선생과 한울님 사이의 강화를 특히 ‘천사문답’(天師問答)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천사문답을 통해 수운선생은 한울님으로부터 ‘영부와 주문’ 두 가지를 받았고, 동학에서 바로 이 영부와 주문을 주고받는 일, 또는 가르치고 배우는 것을 수운의 심법이나 도법이라고 할 수 있다.
수운 선생은 그 후 이 영부를 수백 장 그려 내서 물에 타서 마셔 보고, 사람들의 병을 치료하는 데 사용하여 본 다음 효험이 있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를 나누어서 이치를 살폈다. 또한 주문은 ‘지기금지 원위대강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의 21자로 완비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외우도록 하였다. 이 두 가지가 동학의 기본적인 수도요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한때 세상 사람들에게 ‘혁명의 사상’이요 ‘변혁 운동을 위한 결사’라고 더 잘 알려졌던 동학의 실상은 ‘영부와 주문’ 즉, 보다 근본적인 물형부(物形符)와 송주(誦呪)의 가르침을 매개로 하고 있는 신앙결사체라는 점을 새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오늘날 괴이한 질병이나 기상이변 같은 악질(惡質)이 온 세상에 가득차고 물질만능주의의 득세와 가치관의 혼돈과 같은 무명(無明)의 시대상을 근본적으로 치유하고 또 밝고 새롭게 하는 데는 ‘영부와 주문’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필자가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그 가운데 잊혀져버린 ‘영부’다. 동학(천도교)에서 ‘주문’을 가르치고 외우는 일[이를 ‘주문 수련’이라고 한다]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오늘날까지 그 전통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으나, 수운심법의 우선순위 상 상위개념이라 할 수 있는 영부에 관한 것은 그 맥락이 거의 단절되다시피 하고, 간혹 수도 중에 개별적으로 영부를 체험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이를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시행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게 되었으며, 영부의 진면목을 가려내는 일도 쉽지 않게 되고 말았다.
이는 동학의 우주사적 가치 가운데 핵심적인 부분을 잃어버리게 되는 결과로서, 동학(천도교)교단은 물론이고 인류 사회 전체로서도 대단한 불행이 아닐 수 없다. 그리하여, 동학의 영부에 대한 이해와 관심을 높이는 데 일조하고자 필자가 그간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연구하고 고안(考案)한 내용의 일단을 소개하면서 문제 제기를 하는 것이다.
특히 본 연구의 발상은 초기 동학 발생 당시 조선민족의 종교적 심성에 요원의 불길을 붙여서 동학 창도 34년 만에 “포덕천하” “광제창생” “후천개벽”이라는 역사 변혁의식을 가지고 전무후무한 사회 혁명적 에너지를 방출시켰던 시천주 신앙이, 1세기의 역사가 흐르는 과정에서 동학의 종교 신앙적인 입장이 극히 쇠퇴함과 아울러 동학교세 확장의 원동력이 멈춰 서 버렸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현도(顯道)시대로 구분하는 천도교시대 백년을 거치면서 한울님 신앙과 인간의 이해, 그리고 그 양자의 관계성에서 어떤 본질적인 변화가 발생하지는 않았는가, 만약 그런 변질이 발생했다면 그것은 발전적 변천이었는가, 아니면 종교적 체험의 철학적· 합리적 교리화 과정이 신앙적 힘의 원천으로부터 본의 아니게 이탈 또는 약화를 초래하지는 않았는가 하는 의문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2. “부적” “만다라”와 “영부”의 비교
영부는 동학을 창명한 수운선생이 한울님으로부터 최초로 계시 받은 물형(지기가 약동하는 형상)을 평면의 백지에 그린 부도(符圖)로써, 2세 교조 해월 최시형선생에게 도통을 전수할 때 그 부도(영부)를 전수하였고, 그 후 주문수행과 더불어 또 하나의 제인질병(광제창생)과정의 수행으로서, 포덕천하의 양대 수행의 관건으로 제시된 동학의 심법이며, 한울님의 영(기운)을 형상화 한, 동학이라고 하는 특정 종교의 영적(靈蹟)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동학의 영부를 고래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민간신앙의 부적과 혼동하는 경우가 있을 터이므로, 먼저 부적이나 불교의 만다라 등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예나 지금이나 민간에서 통상적으로 사용되며 불리어지는 부적(符籍)이란, 지구상에 인간이 존재하고 문명이 형성된 순간부터 두려움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이 세상의 모든 문명 속에 존재하여 왔던 갖가지 형태의 주술도구이다. 그러다 인류사회에 유일신(唯一神)의 믿음이 생기면서부터는 차츰 미신으로 퇴색되어 왔으나, 아직까지도 미미하나마 민간신앙으로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며 그 자리를 대신하는 행운의 마스코트나 징크스 같은 것들까지도 총 망라하여 부적으로 분류하고 있다.
또 한 가지 더 비교연구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은 “만다라”를 살펴보는 것이다. “만다라”는 불교에서 종교의례를 거행할 때나 명상할 때 사용하는 상징적인 그림으로서 불교수행의 심리치료 방법으로 쓰이기도 한다.
⑴ 부적(符籍 . talisman)
출처 : 울산 제일일보 2012년6월12일
카페>보원 불교산악회 cafe.daum.net/bw.alpine...
부적은 원시시대 바위나 동굴에 그림이나 문양을 그려서 주술적인 힘을 얻으려 한 것이 그 시초라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 부적의 기원으로 대표적인 예는 삼국유사에 전하는 '처용(處容)의 화상'을 들 수 있는데, 역귀(疫鬼)가 처용의 아내를 범하자 처용이 노래와 춤으로 감복시킨 후, 역귀가 처용의 화상이 그려져 있는 곳에는 절대로 들어가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하여 처용의 화상을 부적으로 사용한 것이다.
그 뒤 조선시대에는 이 부적이 보다 더 보편화되어 동의보감에도 아기를 낳을 때 순산하고 빨리 낳을 수 있도록 하는 허준의 소개가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그 기원이 1500년 이상 이어져 온 우리 전통문화의 한 부분으로서 샤머니즘을 기반으로 하는 신앙의 형태로 현재 국내에 알려진 것만도 약 70여 가지가 된다.
일반적으로 초자연적인 힘이나 어떤 신령적인 힘을 빌려서 소원을 성취하고자 하는 의도는 보통사람에게 누구나 있기 마련이다. 여기에는 주술과 부적이 상호 불가분의 관련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 의도를 조작적으로 하는 것을 주술이라 하고, 신령과 직접적인 통신수단으로서 자기의 염원을 이루어 달라는 마음의 그림을 부적이라 정의하는 학자들도 있다.
현재 우리나라 민간에는 무당이 쓰는 부적과 절에서 승려가 그리는 부적 등이 있는데, 그 기능과 사용 목적별로 나누어 보면 주력(呪力)으로 복(福)을 증가시키려 하거나 사(邪)나 액(厄)을 물리치려고 아픈 곳에 붙이거나 벽이나 문지방 등에 붙이고 혹은 몸에 지니는 주술도구가 있으며, 보통 종이 위에 알아 볼 수 없는 글씨나 그림 기호 등을 그린 것들이 많다.
또 이런 부적을 만들 때는 목욕재계를 하고 주문을 외우게 하며, 부적에 사용하는 색깔은 황색(金)이나 붉은색(朱)을 주로 사용하는데, 황색은 광명을 뜻하는 것으로 악귀가 가장 싫어하는 빛이라 하고, 주색은 중앙아시아 샤머니즘에서 특히 귀신을 쫓는 힘을 지닌 것으로 여겨지며, 적색은 생명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정화하는 힘을 지닌 것으로 여기고 있다.
특이한 것은 오늘날과 같은 과학문명의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는 아직도 신사(神社)에서 가져오는 각종 부적들이 생활화 되어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한 현상이기도 하다.
⑵ 만다라 (Mandala, 曼茶羅)
출처 : blog.daum.net/hdshin04/16158015 正法 傳門布敎師
만다라의 뜻은 산스크리트어로 둥근 원을 의미하는데, 불법의 모든 덕을 두루 갖춘 경지(산스크리트 어 ‘maṇḍala’의 음역어)로서 진리와 우주를 형상화한 그림을 의미하고, 현재는 불교미술의 하나로 자리잡고 있으며, 사원의 벽에 장식하여 장엄함을 나타내기도 한다.
또 힌두교와 탄트라 불교에서 종교의례를 거행할 때나 명상할 때 사용하는
상징적인 그림을 “만다라”라고 하기도 하는데, 여기서도 만다라는 기본적으로 우주를 상징한다. 즉 신들이 거(居)할 수 있는 신성한 장소이며, 우주의 힘이 응집되는 장소라고 믿는다. 이들은 색을 물들인 모래로 만다라를 그리기도 하며 보통 3박4일 이상 걸려서 여러 명의 승려들이 참여할 때, 고도의 집중력과 예술적 감각이 요구되기 때문에 만다라를 그리는 과정은 마치 명상하는 것과 같은 수행의 효과가 있다고 한다.
이렇게 집중을 하게 되면 의식이 점점 더 깊은 곳에 도달하게 되며,
그림을 다 그리고 나면 스승이 와서 모래로 그린 그림들을 모두 흐트려 버림으로써 모든 것이 공(空)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도 한다.
티벳 불교에서는 불국토를 형상화 하고, 깨달음의 마음 상태를 형상화 한 것이며, 오늘날의 만다라는 기본적으로 법당에 그려지고 수행자들에게 속세에 물들지 않은 청정한 공간을 제공하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이 때 인간(소우주)은 정신적으로 만다라에 '들어가' 그 중심을 향하여 전진하며, 유추에 의해서 흩어지고 다시 결합하는 우주 과정으로 인도 된다고 한다. 또 티벳 불교의 만다라는 기본적으로 2종류가 있어 우주의 2가지 다른 양상을 나타내고 있다. 하나에서 여럿을 향해 움직이는 '태장계'(胎藏界 garbha-dhātu)와 여럿에서 한 곳을 향해 움직이는 '금강계'(金剛界 vajra-dhātu)가 그것이다.
한국에서는 금강계와 태장계의 만다라는 유포되지 않았고, 석가모니가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한 성도상(成道相)을 묘사한 화엄변상도(華嚴變相圖)와 석가모니가 영산(靈山)에서 설법하는 장면을 묘사한 영산회상도(靈山會相圖)가 널리 제작되었는데, 이러한 만다라들은 한국 특유의 것으로서 화엄의 원리에 의한 통일의 의미를 담고 있다.
스위스의 심리학자 칼 융(Carl Gustay Jung 1875~1961)은 프로이드의 정신 분석학에 리비도(성본능)의 개념을 확충하여 이것을 인간의 심리적 에너지로 보면서 사람의 성격을 외향성과 내향성의 두 유형으로 구별하면서 그의 환자들이 그렸던 만다라와 비슷한 그림들을 연구하여 발표한 바 있는데, 융은 만다라를 자발적으로 만드는 것을 개체화 과정의 한 단계라고 했다. 이것이 융의 심리학 이론에서 중심적인 개념의 하나로 취해졌고, 이 단계는 의식적인 자아가 지금까지의 무의식적인 요소들을 결합하려는 노력을 의미한다고 했다.
근래에는 만다라가 미술 치료요법으로 쓰이기도 하는데, 만다라가 개인의 삶의 영역, 소우주 영역의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에, 명상적인 분위기에서 만다라를 그리는 것을 통해서 만다라 심리 치료를 하게 된다.
만다라 미술의 효과는, 자신에게 침잠하고 고요해진다는 것, 정신을 집중하고 동시에 이완을 할 수 있다는 것, 불안이 사라지고 긴장이 완화된다는 것, 경험한 것을 잘 통합한다거나 일체감을 형성한다는 것, 원만한 성격을 키우고 자아의 존중감 형성에 도움을 준다는 것, 소란하고 산만한 외부 세계를 떠날 수 있으며, 여유와 민감성을 가지고 한계를 받아들여 필요한 것을 수용하는 것을 배우는 것 등으로서, 심리적 측면에 장점이 많다고 한다.
⑶ 영부(靈符 )
국어사전에서는 영부(靈符)의 뜻을 형태 분석상의 명사로
지기(至氣)의 약동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동학의 천서(天書)를 이르는 말로서 1860년 4월 5일 수운 최제우의 종교 체험 과정에서 한울님으로부터 주문과 함께 받은 부도(符圖)로 풀이하고 있다.
일찍이 우리 민족의 상고 기록(古記)인 태백일사(太白逸史) 삼신오제본기(三神五帝本紀)에 소개되는 “대변경”(大辯經)에도 영부(靈符)에 대한 기록은 있다. 대변경은 대변설이라고도 하는데 조선조 세조 때 “수서목”(收書目)에 수록되어 있다. 이 “수서목”에 인용된 내용을 살펴보면 삼일신고(三一神誥)를 해석한 책으로 여겨지며, 그 대략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天一(천일)의 神 하느님께서는 아득하게 위에 계시나니
곧 精, 氣, 神의 三大와 身, 心, 氣의 三圓과 感(감정),息(호흡),觸(감각) 三一을 가지고 이를 靈符로 大降하여, 만만 백성에 크게 내리시니 일체는 애오라지 三神께서 만드신 바니라. 참과 거짓은 서로 이끌리어 세 가지 길로 갈라지므로 참되면 살고 거짓되면 망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과 사물은 삶을 바르게 하여 참된 하늘의 근원과 일치하여야 한다. 心氣身은 三房인데 房이란 이루고 이루는 근원이므로 氣는 心을 떠나지 않고 心은 氣를 떠나지 않아 항상 身속에 있는 것이다.”
또한 비록 위작(僞作)의 시비는 있으나 구 한말(1911년) 계연수라는 사람이 古記를 수집하여 편찬하였다는 “환단고기”에서는 참전계경(參佺戒經)을 영부(靈符)라고 한다. 이 참전계는 단군세기에 자세히 나오므로 오늘날 단군을 모시고 단학수련을 하는 사람들은 이 참전계를 통하여 신령스러운 무한계의 하늘과 교통할 수 있다고 하면서 그 수행법의 큰 틀을 세 가지로 나누고, 작게는 아홉 가지로 나누어서 수련의 지침으로 삼고 있으나, 일정한 형상으로 표현되는 物形符로서의 부도(符圖)라는 의미와는 다른 것 같다.
그럼에도 한민족 상고사의 고기(古記)의 기록들을 전혀 무시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수운선생이 생존했을 당시만 해도 고려와 조선조의 실록에 소개되고 있었던 고기(古記)들이 아직 일본총독부에 의해서 총체적으로 수집 멸실 당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수운선생이 팔도주유를 하던 중에 그러한 자료들을 열람했을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운선생이 팔도주유를 끝낸 후 을묘년(1855년) 3월 울산 유곡동에서 사색을 하던 중 금강산 유점사에서 온 기이한 승려로부터 얻었다는 을묘천서(乙卯天書)라는 것도 이와 관련시켜 연구해 볼 여지가 있다 할 것이다.
수운선생이 을묘천서를 해독한 내용에 의하면, 이 천서는 유도(儒道)나 불도(佛道)의 문리(文理)에는 맞지 않았다고 하였으며, 단지 하늘에 기도드리는 가르침(祈天煉性) 등이 있었다는 점과 그리고 이 을묘천서 사건 직후부터 수운선생은 깊은 산에 들어가 돌로 삼층 단(天壇)을 쌓고 청수(정화수)를 받들어 하늘에 기도드리는 수행 전환을 하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근래 학자들 간에 간혹 오해되고 있듯이 을묘천서가 천주교의 “천주실의”나 “성경”은 아닌 것으로 보여지며, 오히려 고조선의 상고시대로부터 전해 내려왔다는 “천부경(天符經)”이라든지 최치원의 “난랑비 서(序)”에 소개되는 “현묘지도(玄妙之道)” 등에 대해서는 더욱 폭넓게 연구해 볼 여지가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또 한 가지 의문스러운 것은 450여 년 전인 조선조 중기 선조 때 천문지리 학자였던 격암 남사고(1509~1571)가 남겼다는 “격암비서(격암유록)”에는 “궁을영부”에 대한 기록이 너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렇지만 수백 년 후에 태어날 수운선생과 구미용담에 대해서 너무 노골적이고 명료하게 예언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신빙성이 떨어진다. 또한 현재 나돌고 있는 모든 “격암비서”들의 문장들을 전문 학자들이 고증하고 문헌학적으로 자상히 고찰하여 본 결과 그 상당부분이 20세기 초에 가필(加筆)된 위서(僞書)인 것으로 밝혀진 이상, 본 영부 연구에서는 참고자료에서 제외시키기로 했다.
어쨌든 오늘날 통상 말하는 부적과는 달리, 천부(天賦.天符)로서의 동학의 영부(靈符)라는 명칭은 동학을 창명한 수운선생이 한울님으로부터 최초로 받은 물형부(物形符)로서, 지기(至氣)가 약동하는 형상을 수운선생이 최초로 평면의 백지(韓紙)위에 그려냈던 동학(无極大道)의 부도(符圖)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당시의 동학교도들이 신앙생활 중에 수운 선생에게서 그 부도를 받아 불에 태워 그 재를 청수(淸水)와 함께 마셔왔던 것이 사실이고, 수운선생이 해월 최시형선생에게 도통을 전수할 때, 그 부도(符圖)를 전해 주고, 받았던 사실도 명백하다.
따라서 이 부도(符圖)는 해월선생시절 주문수련과 더불어서 별도로 치병과 마음공부의 한 분야로서 영부 익히는(습작) 공부로 전해 내려온 자료가 뚜렷이 존재한다. 이러한 내용은 수운 최제우선생이 직필한 경편들을 해월 최시형선생이 최초 동경대전으로 간행을 할 무렵, 동학의 정통연원과 도적(道蹟)을 밝히려고 동시에 펴냈던 “최선생문집도원기서”와 그 외 “천도교회사” “본교역사” 등에 자상히 기록되어 있으므로 다음 장에서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겠다.
3. 동학의 경전과 사서(史書)에 나타난 영부
동학의 영부에 대한 근원을 자세히 살펴보면, 동학천도의 창시자인 수운 최제우선생의 양대 직필저작인 <동경대전>과 <용담유사>에, 개벽시 국초일(開闢時 國初日, 1860년 4월 5일)과 그 후 7~8개월 동안 전개되는 상황을 묘사한 천사문답의 장면들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즉 한울님이 수운 선생에게 동학천도를 내려주려 하자 수운 선생이 그 경위를 몰라 두려워하고 또 의심하는 마음을 품으므로 한울님은 “의심치 말고 의심치 말라”고 외친다. 수운 선생이 우레 같은 소리에 놀라 정신 수습을 하고 있는데, 뒤이어 한울님으로부터 백지를 펴라는 분부가 있었고, 그 백지 위에 생전 보지 못했던 약동하는 물체 형상의 부(符)인 물형부(物形符))가 완연히 드러났다는 것이다.
<안심가>
“사월이라 초오일에 꿈일런가 잠일런가 천지가 아득해서 정신수습 못할러라. 공중에서 외는 소리 천지가 진동할 때 ... 그럭저럭 장등달야 백지 펴라 분부하네. 창황실색 할 길 없어 백지 펴고 붓을 드니 생전 못 본 물형부가 종이 위에 완연터라. 내 역시 정신없어 처자 불러 묻는 말이 이 웬일고 이 웬일고 저런 부(符) 더러 본가?”
이러한 갑작스런 상황에 처자들이 놀라서 통곡을 하는지라 (왜냐하면 수운 선생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한울님의 말씀이나 수운 선생에게 보이는 영부가 처자들에게는 들리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았으므로 처자들은 수운 선생의 말과 행위가 허공에 대하여 활갯짓을 하는 광인(狂人)의 행동으로밖에 비치지 않았다) 수운선생도 어찌 할 바를 몰라 하자, 한울님은 “지각없는 인생들아. 삼신산의 불사약을 사람마다 볼 수 있겠느냐? 지금 네(수운)게 보이는 형상을 그대로 그 백지에다가 다시 그려내서 불에 살라 냉수에 타서 마셔 보라.” 하였다. 이때 약동하는 입체 형상의 물형부를 수운 선생이 평면도로 그려낸 것이 동학(천도) 영부의 원형이요 시초인 것이다. 수운 선생이 바삐 한 장 그려내서 물에 타서 먹어 보니까 어떤 특별한 냄새나 맛은 없었으므로 이 맛을 특미(特味)라 표현하였다.
또한 수운 선생이 한울님으로부터 ‘영부’를 받아 마음 속 가득히 환희에 충만하여 이 부도를 직접 세상 사람들에게 시행하여 보는 과정과 그 상황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포덕문>
“이 영부를 다른 사람들의 질병에 사용하여 보았는데,
혹 낫기도 하고 낫지 않기도 하여, 그 까닭을 살펴보니,
정성스럽게 한울님을 위하는 사람은 하나같이 병이 나았고
천도(天道)와 천덕(天德)에 순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 효험이 없었다.”
<안심가>
“진시황 한무제가 무엇없어 죽었는고...”
“금을 준들 바꿀소냐 은을 준들 바꿀소냐”
“좋을시고 좋을시고 이내신명 좋을시고”
“그 모르는 세상사람 한 장다고 두 장다고...”
“나도 또한 한울님께 분부 받아 그린 부(符)를
금수 같은 너희 몸에 불사약이 미칠소냐”
특별히 <동경대전>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 포덕(布德)이라는 두 글자가 나올 때마다 반드시 이 영부(靈符)와 주문(呪文)이 선행(先行)으로나 후행(後行)으로 결부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두 가지야말로 바로 한울님이 수운선생에게 주신 동학 무극대도의 심법(心法)이요, 이 심법의 실현을 위한 수행과 포덕을 행할 때는 반드시 이 “영부”와 “주문”이 필요하다는 간곡한 당부와 설명이 경전에 오롯이 담겨 있다.
그리고 수운선생이 8월 14일 해월선생에게 도통전수를 하실 때, “수심정기(守心正氣)”. “수명(受命)” “천명(天命)” 등을 書面과 口頭로 여러 차례 말씀하신 후, 영부의 부도(符圖)와 직필경전 필사본을 전달하시며, 훗날 이를 반드시 간행하여 布德의 기초로 삼을 것을 신신당부하였기 때문에 해월은 평생의 도바리 생활 속에서도 이것들을 “최 보따리” 속에 소중히 간직하셨다는 흔적이 동학천도교의 교사(敎史)에 어렵지 않게 드러나 있다.
★도원기서 윤석산주해 79면 : (8월13일의 자정을 지나 8월14일 도통전수의) 날이 훤하게 밝아오자 수운선생이 해월에게 수심정기 4자를 주고/ 말하기를 “일후로 병을 다스릴 때에는 이것을 쓰도록 하라” 하며 부도(符圖)를 주고 (日後用病以爲行之又賜符圖)/ 특히 붓을 잡아 수명(受命) 두 글자를 ....
★ 천도교회사 : 또한 8월14일에 수심정기 네 자를 최경상에게 수(授)하고 부도(符圖)로써 시(施)하고 수명(受命) 두 자를 서(書)하게 하고....
또 수운선생이 1862년(임술년) 9월29일 관에 체포되어 10월 5일 경에 석방된 다음 10월 14일에 각처의 도인들에게 통문(通文)을 보낸 일이 있었다. 계미판 동경대전에 실려있는 통문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도인들의 신변 안전을 위하여 다음과 같이 영부시행을 당분간 금지하는 내용으로 해석되므로 이 역시 동학의 영부에 대한 연구 자료로 참고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아동들에게 붓글씨 쓰는 서예를 가르치는 것이라면 혐의를 받을 까닭이 없고 일시 중단시킬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通文 (영부 시행을 당분간 금지시키는 통고문)
右 文爲 通諭事 當初敎人之意
病人勿藥自效 小兒得筆輔聰, 化善其中, 非世美之事耶. 已過數年 吾無禍生之疑, 不意 受辱於治賊之下者. 此何厄也 是所謂難禁者 惡言 不施者 善行. 若此不已則 無根說話 去益傋捏, 末流之禍 不知至於何境, 況此若是善道 同歸於 西夷之學, 切非羞恥之事耶. 何以參禮義之鄕 何以添吾家之業乎. 自此以後 雖親戚之病 勿爲敎人而 曾者傳道之人 窃査極멱 通于此意.
盡爲棄道 更無受辱之弊故 玆明數行書 布以示之 千萬幸甚.
알리려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애초에 사람들을 가르칠 뜻으로, 병든 사람이 약을 쓰지 않아도 저절로 낫게 하고, 어린이들도 필력을 얻어 총명하도록 도아서, 그 중에서 선풍도골이 나오게 하려는 것이니, (이 영부공부가) 어찌 이 세상의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
(그리하여) 이미 몇 해가 지났으므로, 우리에게 화근이 생기리라고는 의심할 바가 없었는데, 뜻밖에 도둑이나 다스리는 하급관리에게 욕된 일을 당하게 되니, 이 무슨 횡액이란 말인가, 이는 이른바 금하기 어려운 악담으로서, 선행을 베풀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
이와 같이 (영부공부를)그치지 않고 계속 나아가면, 근거 없는 뜬소문이 날이 갈수록 더욱 날조되어, 종래에 미치는 화근이 과연 어떤 지경까지 이를지 알 수가 없음이라, 하물며 이와 같은 정당한 도를 서학과 똑같이 취급을 하니, 참으로 수치스런 일이 아니겠으며, 어찌하여 향리의 예절과 의리에 참례하고, 어찌하여 나의 가문의 일까지 욕되게 하겠는가.
이제부터는 비록 친척의 질병이라도 사람을 가르치기 위하여 (영부를)쓰지 말고, 일찍이 도를 전한 사람들도 은밀히 찾아내어 이 뜻을 알리도록 하라.
(그리고 당분간은) 한울님을 마음속으로만 극진히 공경하고, 동학천도를 버린 것 같이 (행세를)하게 되면, 또다시 화근의 곤욕을 받는 폐단이 없을 것이므로 이에 몇 줄의 글을 밝혀서, 펴내 보이나니 매우 다행한 일이다.
동학의 영부에 대하여 구체적인 형상을 대강 떠오르게 하는 또 한 가지의 사료(史料)가 있다. 그것은 “한국근대사상총서 동학사상 자료집” 제3권에 소개된 시천교 역사이며, 여기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나에게 영부(靈符)가 있는데 이것은 불사(不死)의 선약(仙藥)으로써 그 형상은 태극과 궁을의 형상이다. 나의 이 영부를 받아 제인질병(濟人疾病)을 하고, 나의 이 주문을 받아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나를 위하게 한즉, 너도 또한 장생하여 무위화민포덕천하(無爲化民布德天下) 하리라. 백지를 가다듬어 펴라는 천명에 따라서 주(主=시천교에서는 수운선생을 濟世主의 主로 호칭)께서 백지를 받들어 펴고 잠시 기다리니, 밝고 밝은 무늬가 아롱거리며 종이표면(紙面)을 따라 나아가며 둥글게 일어나고 곡선방향으로 휘어지며 차곡 차곡 쌓여가는 물형(物形)을 이루었으니, 이것을 바로 영부라 이르는 것이다.”
(曰 不然 吾有靈符 濟人疾病 受我此呪 敎人爲我則 汝亦長生 無爲化民 布德天下矣 仍命舖硾紙 主乃奉紙 伺候之頃 有文瑩瑩 然從紙面 起圓 折方曲宛 成物形 是曰 靈符)
4. 수운 최제우선생 이후, 해월 최시형선생의 영부
1891년(포덕32년) 충청도 공주 신평리에서 여러 지방에서 모인 제자들이 해월선생에게 영부가 어떻게 된 것이냐고 질문했을 때, 해월선생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궁을영부는 우리 동학천도의 부도(符圖)다. 수운선생께서 득도 당시 세상 사람들이 다만 한울만 알고 한울이 곧 나의 마음인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을 근심하여 심령(心靈)이 약동불식(躍動不息)하는 형상을 符圖로 그려내신 것이다. 궁을은 우리도의 부도요 천지의 형체이니라 그러므로 동학천도의 영부란 성인(수운선생)이 받으셔서 이 영부로써 천도를 행하시고 이 영부로써 창생을 건져내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해월 최시형선생의 법설 “영부와 주문” 편에 말씀하기를 천지만물은 본래 한마음인데 이 천지의 마음은 신령하고 또 신령한 것이고 천지의 기운은 호호창창하여 천지에 가득차고 우주에 뻗쳐 있으므로, 이 궁을(弓乙)로 형상된 영부가 곧 동학 천도(무극대도)의 부도(符圖)이며 천지의 형체라고 도 하였다.
한마디로 해월선생이 정의한 동학의 영부란, 후학들이 수도 중에 이것저것 제 마음대로 그려내는 것이 아니고, 성인이신 수운선생이 받으셔서 천도를 행하시고 창생을 건지시려고(聖人受之 以行天道 以濟蒼生) 이치에 맞게 기본형상을 갖추어서 전해준 부도(符圖)이므로, 후학들은 수운선생이 전해주신 부도를 습작하고 익히는 영부공부를 하여서 여합부절(如合符節)을 이루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 세상 사람들이 약으로써 병을 낫는 이치만 알지 말고 이 영부로써 마음을 다스려서 병을 낫는 이치도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마음을 다스리지 아니하고 약을 먹는 것은 한울님은 믿지 아니하고 다만 약만 믿는 것이라는 점도 강조하였다.
이어서 수운선생이 전해준 이 영부의 이치야말로 한울님이 선천개벽 후 오 만년 동안 노력은 하였으나 공을 이루지 못하다가 수운 최제우선생을 만나서 비로소 성공하게 된 한울님의 뜻이라고 하면서, 동학 천도에서 영부를 시험하여서 병을 낫게 하는 것은 영성(靈性)이 하는 바이므로 이 영부 익히는 공부로서 마음과 기운을 순히 화하면 약을 쓰지 않고도 한울님의 기운과 조화로 병이 저절로 낫게 하는 분명한 이치가 있다고도 하였다.
그리고 1880년(경진년)에 해월최시형 선생의 명으로 최초의 동학경전 동경대전을 목판 인쇄에 착수할 즈음, 동학의 도적(道跡)을 밝히고 연원의 정통을 밝히고자 강시원. 유시헌. 신시일 등에게 지시하여 동시에 집필했던 “최선생문집도원기서(崔先生文集道源記書)”와 오늘날 천도교에서 발행한 “백년약사”에도 적시되어 있듯이, 해월선생이 서기1874년 (포덕15년) 12월5일 태백산 49일 기도를 마치는 날, 강원도 갈래사의 적조암에서 강수 전성문 등과 함께 영부의 그림을 익히는데 “筆法”이 神에 통하여 붓을 들어 획을 내리면 용이 구름을 토하는 듯하고 붓이 이르는 곳에 풍우가 사해를 움직이는 듯하여, 그곳 암자의 철수좌라는 고승이 이를 곁에서 지켜보다가 합장배례하며 말하기를 “이것은 조화의 자취요 인작(人作)이 아닙니다”라고 감탄하는 기록이 있으며, 해월선생이 “대사(철수좌)께서도 부도를 아십니까?”하고 물으니, 철수좌가 대답하기를 “符圖에 조화가 붙은 것이 아니라 筆力에 神의 힘이 움직입니다. 소승이 비록 符圖에 대한 견식이 없으나 약간의 마음공부가 있는지라 조화의 자취를 마음으로 능히 증험할 수는 있습니다.” 운운... 하는 대목이 있으며, 천도교의 기관지였던 “천도교회 월보”에 연재한 “본교역사”에도 다음과 같은 기록이 선명하다.
태백산 적조암 칠칠기도 후 유인상과 전성문 두 사람은 먼저 떠나가고 해월신사 강수와 더불어 다시 수일을 머물러 (계시며) 영부 쓰시기를 익히시더니, 중(철수좌)이 자세히 보다가 가라대 이것이 참 조화의 자취로소이다. 이에 해월신사 가라사대 (그것을)어찌 아시오. 중(철수좌)이 가라대 조화가 부작에 나타났으니 소승의 식견이 비록 천박하오나 이 영부에 대하여 자연스럽게 마음을 깨닫는 증험이 있사오니 원컨대 존공께서는 이를 삼가 감추어 누설치 마시옵소서. 해월신사 그 말을 들으시고 범승이 아닌 줄 아시더라.
끝으로 중요한 것은 해월선생이 체포되어 재판을 받을 때 고등재판소 공소기록과 해월선생을 교수형에 처한, 사형선고문 내용에서 결정적인 교수형의 죄목이 영부(靈符)의 사용과 관련된 내용이 주가 된다는 것이다.
판결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시되어 있다. “각 도의 지방에 돌아다니며 선도로 병을 치료한다 하며 주문으로 신을 내린다고 칭할 뿐 아니라, 弓弓乙乙의 符圖로 인민을 선동 포교하였으므로 대명률의 제사법 위반(중국 명나라의 법률에 부도의 형상을 몰래 감추어 은닉하고 향을 불살라 무리를 모이게 한 후 밤에 모였다가 새벽에 흩어지는 등, 거짓 수행으로 선한 일을 하는 것처럼 인민을 미혹하게 선동한 두목에게는 목을 매달아 죽이라는 법률 조항)을 적용하여 교수형에 처한다”는 것이다.(律處絞何如云矣)
崔時亨等公訴上奏案
光武 二年 七月 十八日 起案
大臣 印 / 協辨 印 / 刑事局 刑事課 主任 印/ 刑事局長 印 刑事課長 印
上奏案 件
左開案을 謄送하오니 如何하올지 裁決하심을 仰함 (案 223 號)
議政府贊政法部大臣 臣 趙OO 謹
奏卽接 高等裁判所 質稟書 內開 由本所 檢事公訴
被告 崔時亨 案件審査 則 被告 崔時亨 所供內
丙寅年 分於杆城居 筆墨商 朴春瑞處 受東學 善道療病 呪文降神 列郡各道周遊遍行
以 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 十三字呪文 至氣今至願爲大降之 八字 降神文
東學文 第一編布德文 第二編東學論 第三編修德文 第四編不然其然文
弓弓乙乙之符 煽惑人民 締結徒黨 .....究其亂階孼根 由於 被告之 呪符惑衆
被告 崔時亨 照 大明律 祭祀編 禁止 師巫邪術條
一應 左道亂政之術 或 隱藏圖 像燒 香集衆 夜聚曉散 佯首善事
扇惑人民爲首者 律處絞何如云矣
崔時亨等 判決宣告書 (한글 번역본)
강원도 원주군 평민 피고 최시형 72세
경기도 여주군 평민 피고 황만기 39세
충청북도 옥천군 평민 피고 박윤대 53세
충청북도 영동군 평민 피고 송일회 33세
위 피고들의 안건을 검사의 공소 사유로 이를 심리하니, 피고 최시형은 병인년에 간성 거주자인 필묵상 박춘서에게 소위 동학을 받도록 하야 善道로 질병을 치료하며 주문으로 神을 내린다 칭하고, 여러 고을과 여러 도를((列郡各道) 두루두루 돌아다니며(周遊遍行)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라는 13자 주문과 “지기금지원위대강”이라는 8자의 신을 내리는 降神文과 동학 원문의 제1편인 포덕문, 제2편 동학론, 제3편 수덕문, 제4편 불연기연문과 궁궁을을의 부도(弓弓乙乙의 符圖)로 인민들을 미혹하게 부추기어(煽惑), 무리의 당을 체결하고(徒黨締結)......중략 .....
갑오년 봄에 이르러서는 피고의 도당인 전봉준과 손화중 등이 고부지방에서 무리의 깃털들을 울부짖어 모이게 하여(黨羽嘯聚) 관리를 죽이며(戕殺) 도읍을 진압하여 뒤집고 무너지게 하야(城鎭陷覆) 두 호남지역이 휩쓸려 싸라기처럼 문드러지는 지경에 이르니(糜爛波盪) 피고 최시형이 이를 지휘하여 시키거나 서로 화하여 응한 일은(指使和應) 없다하나, 어지러움의 계단과 꾸며진 그 뿌리를 캐어보면(亂階孽根을 究하면) 피고가 주문과 부도(呪文과 符圖)로 민중을 현혹한 것에 연유하는 것이요, .......중략 ......
이를 법에 비추어 피고 최시형은 대 명나라의 법률의 제사편 금지 사무사술조(大明律 祭祀編 禁止 師巫邪術條)에 입각, 이 모두는 그릇된 도가 올바른 도를 어지럽힐 계략으로 부도의 형상을 몰래 간직하여 은닉하고, 향을 불에 살라 무리를 모이게 하고, 밤에 모였다가 새벽에 흩어지는 등, 거짓수행으로 선한 일을 하는 것처럼 인민을 미혹하게 선동하는 우두머리에게 적용하는 법률에 따라 교수형(絞首刑)에 처하고 (一應 左道亂正之術 或 隱藏圖像燒香集聚 夜聚曉散佯修善事 煽惑 人民 爲首者律 로 絞에 處) ... 피고 황만기는 동 제사편 동 조율의 사술에 따르는 무리에게 적용하는 법률에 따라 일백 대의 볼기를 친 후(笞一百) 終身懲役에 처하고 ....하략...
고등재판소 검사 윤성보, 태명식// 검사시보 김낙헌 입회선고
고등재판소 재판장 : 조 병 직
판사 : 주 석 일, 조 병 갑
예비판사 : 권 재 운, 김 택
주 사 : 김 하 건
이 판결문은 해월 최시형선생이 1898년 4월 5일에 강원도 원주 송골에서 체포되어 경성으로 압송된 후, 광화문 경무청과 서소문 감옥 평리원 등에서 만 60여 일 동안의 혹독한 심문과 방증조사를 통해 받아낸 공소기록에 근거한 것이므로 재판관이 순전히 억지로 꿰어 맞춘 공소기록은 아닐 것이다.
또한 당시의 동학이 민중포덕을 행할 시에는 민간의 서민 대중들이 손쉽게 한약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을 때였을 터이므로, 수운에게서 전해 받은 영부(符圖)를 그려주어서 간직하게 하고, 병이 들면 그 영부를 불에 태워서 기도 시에 청수와 함께 마시도록 함으로써 물약자효를 증험해 보이며 포덕과 연비의 조직을 넓혀 나갔음이 당연했을 것으로 믿어진다.
이상의 기록들을 세심히 음미하면서, 동경대전 최종편인 “필법(筆法)” 편을 유심히 살펴보면 언뜻 납득이 되지 않는 면이 있다. 닦아서 필법을 이룬다는 “筆法”에, 그 이치가 한마음에 있다느니, 우리나라는 목국을 상징하니 삼절(三絶)을 잃지 말라느니, 수운선생이 이 땅에서 태어나서 무극대도(영부)를 이 땅에서 얻었는 고로, 작제(作制)할 때는 안팎이 없게 하라느니, 하는 말씀들은 그냥 통상의 백지에다 글자를 쓰는 필법으로 보기에는 어딘가 어색하다.
또 안심정기(安心正氣)하여 획을 시작하라느니, 만법(萬法)이 하나의 점(點)에 있다느니, 붓끝을 부드럽게 하라느니, 서형(斗)의 형상을 셈하여 먹을 가는 것이 옳다느니 (斗 = 書形 =書法이나 글 무늬의 형상), 종이는 두터운 것을 선택하라느니, 법(法=모형)이 (선의 굵기가)크고 작거나, (선과 선의 간격이) 넓거나 좁아서 (전체 모형이) 어긋나지 않게 하는데 있다느니, 위엄으로 시작하여 바르기를 주로 하라느니, 그렇게 하여야 그 형상이 태산의 층암과 같다느니, 하는 이러한 모든 내용의 뜻도 그냥 통상의 종이에다 글자를 쓰는 공부라기보다는, 붓으로써 수운선생이 전해준 영부 익히는 공부를 할 때, 심법(心法)상 유의해야 할 문건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여 보인다.
또한 비록 시천교서(侍天敎書)로 출간된 책이긴 하지만 해월선생의 수제자 3암 중의 한사람인 구암 김연국이 근찬(謹撰)을 하고 용암 김낙철 등이 번역저술을 하였으며, 당대의 저명화가 이당 김은호 화백이 저술자들에게 들은 대로 삽화를 그렸다는 “회상영적실기(繪像靈蹟實記)”를 보면 영부의 형상에 더 근접할 수 있다. 이 회상(繪像)에는 해월 최시형선생이 적조암 49일 기도를 마친 직후, 곧 이어서 별도로 몇 명의 제자들에게 직접 영부도 그리는 공부를 시키는 장면을 뚜렷하게 그려 놓았다.
그리고 이 회상의 뒷면 설명문에는 주문을 엄숙히 외우며 부지런히 궁을영부를 익히는 광경을 옆에서 지켜보던 철수좌가 읊어 말하기를 “산 깊고 고요한 적조암에 하얀 실 빛의 마음이 비춰들어 손에서는 진실로 참다운 符圖가 익혀져나가고, 입에서는 바늘처럼 경계하는 천어가 맑고 정결한 도량과 삼라의 숲속에 익혀드누나.” 하는 아래와 같은 감탄사를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과 삽화를 눈여겨보면 영부 익히는 공부가 분명히 별도로 있었다는 사실이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癸酉(1873년) 陰 10月 神師 率 姜洙 劉寅常 等, 數十人 入 太白山寂照庵
主僧 哲首座 歡迎禮待 遂設齊 虔禱 莊誦聖呪 勤肆 弓乙靈符 贊曰
山深菴寂 묘白 照心 手肄眞符 口談天箴 潔淨道場 森羅講林
僧哲 士賢 優遊 謳吟 (揷畵 :照菴講道圖)
계유년 (1873년) 10월 해월신사가 강수와 유인상 등, 수십 인을 거느리고 태백산 “적조암”에 들어가니, 암자의 주승 “철수좌”가 기다리다 환영을 하며 예를 갖추더라.
이리하여 제를 설하고 공경히 기도를 드린 후 엄숙히 주문을 외우며 부지런히 궁을영부를 익히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철수좌가) 도와 읊기를 산 깊고 고요한 적조암에 하얀 실 빛의 마음이 비춰들어 손으로는 진실로 참다운 符圖를 익히고, 입에서는 바늘처럼 경계하는 천어가 맑고 정결한 도량과 삼라의 숲속에 익혀든다.
(궁을영부도/ 회상 영적실기 14畵) (영부도 익히는 장면/ 회상 영적실기 35畵)
5. 동학혁명 시대의 혼란기에 영부의 왜곡
1894년(갑오년)의 동학혁명이 좌절되면서 일본군과 관의 무자비한 동학 토멸이 가장 극심했던 호남지방은 동학 심법계통의 정통 지도노선이 완전히 끊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갑오년과 을미년(1895년)의 동학도 궤멸의 혼란기에, 김개남장군의 휘하에서 종군 활동을 하던 강일순(강증산)은 청주전투가 실패한 후, 그를 따르는 무리가 피난하지 않고도 살아남을 수 있는 수단으로서는 일단 자기들은 동학당이 아니라는 것을 표방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래서 토속신앙인 미륵신앙이나 비결 참서 따위를 신봉하는 기인(奇人)행세를 하기 시작한 것 같다.
그리고 목숨을 유지하려거든 자신을 따라야 한다고 유인한 동학교도(김형렬,박공우 등)들과, 그 후 민족세력으로부터 테러의 대상으로 몰리게 된 일진회의 전라도 총대인 차경석과 회원 안내성 등을 유인하였다. 강일순은 바로 이들을 기반으로 전라도 모악산 기슭에서 동학의 수운심법 계통을 이탈하여 상제님의 천명에 실패한 수운선생 대신, 상제인 증산 자신이 직접 지상에 내려와 천지공사를 하노라는 독자노선을 표방하고 나섰다. 당시의 강일순은 남다른 영대(靈臺)를 지닌 사람으로서 비결서(秘訣書)나 참서(讖書), 정역(正易) 등에 탁월한 실력을 지닌 24세의 청년이었다. 그리고 당시 동학혁명군의 지도자 중에서 이런 비결이나 참서를 가장 선호하였던 사람은 김개남장군이었다.
“김개남”은 그의 본명이 “김기범”이었는데 꿈에 신인으로부터 열 개(開), 남녁 남(南)이라는 두 글자를 손바닥에 받아 해몽을 받아본 결과 남조선에서 개벽을 할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하여 “김개남”으로 개명을 하였던 사람이다. 그리하여 손병희와 전봉준의 남북접이 힘을 합하여 북진(공주우금치 전투)을 합의하던 와중에도 비결의 가르침대로 남원에서 49일을 다 채우기 위해 남원성에서 진을 치고 있다가 너무 늦게 청주성으로 진격을 하여 대패(大敗)한 기록이 있다.
이런 전 후의 사정으로 미루어 볼 때 강증산이 김개남을 따라 종군을 하였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며, 동학혁명 당시 이런 남접을 중심으로 동학의 영부를 몸에 붙이면 총알도 비켜 나간다는 풍문에 따라 확실한 근거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수십 종의 궁을 부적들이 횡행하였던 것도 사실인 것 같다.
이처럼 강증산은 일단 동학경전을 기본으로 인용을 하였으되 차츰 그 내용을 왜곡 각색하거나 참서(讖書)적인 해석을 가미하였고, 동학의 시천주(侍天主) 주문(呪文)을 “시천지조화정(侍天地造化定)”, “신천지가가장세일월일월만사지(新天地家家長世日月日月萬事知)”, 등으로 이리저리 은폐하고 변질시키다가 결국에는 새로운 태을(太乙) 주문을 들여와서 외우게 했으며, 그가 새로 지어낸 12가지의 부적(12간지의 동물들을 연상하여 그려낸 부적)들을 물형부(物形符)라 칭하여 그의 유품인 “현무경(玄武經)”에 남겼다.
출처 : cafe.daum.net.tkdtodqkfk 상생바라기 玄武經 1面 午符 以詔章
그의 수제자들은 증산이 요절하기 전, 나 죽은 뒤에는 모든 것을 불태워 없애라는 증산의 유언을 듣지 않고 증산의 셋째 부인이었던 고수부인에 의해서 요행이 남겨진 “현무경”을 기초로 해서 고수부인을 교주로 옹립하고, 맨 처음 태을교를 만들었다가, 그 뒤 차경석은 보천교로, 김형렬은 미륵불교로 분파를 하여 일제 강점기의 비결바람과 함께 민중들을 혹세무민의 길로 인도하였다.
현무경은 주로 부적처럼 알 수 없는 그림에 짤막한 문구들이 곁들여져 있어서 문집이라기보다는 부적(符籍)모음 같은 인상을 준다. 또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이 문집을 백지 위에 진설하고 그 옆에는 물이 담긴 병과 작은 칼을 함께 설치하였다고 하는데, 이것은 증산이 타계한 후에 제자들이 그것을 발견하도록 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현무(玄武)는 오행철학에서 겨울과 북쪽과 재탄생의 봄을 위한 휴식의 시대를 의미하고, 동물로서는 거북을 상징하는데, 증산의 수제자였던 김형렬은 1915년 모악산 금강대의 백일기도 때에 신안(神眼)이 열려 영서(靈書)를 받았다고 주장한 다음부터는 강증산이 가르친 태을주(太乙呪)를 쓰지 않고, 원래 동학의 시천주(侍天主) 주문으로 수련을 하면서도, 유독 영부만은 현무경의 방법대로 자기 신도들의 생년 간지(生年支)에 해당하는 동물의 형상을 그려서 물형부(物形符)라 칭한 후, 이것을 매일 수십 장씩 그려서 그 동물과 각자의 성명을 새긴 인장을 찍어 불사르게 하였다.
그리고 그는 1916년에 괴질이 발생하여 전 세계의 인류가 전멸될 것이므로 이를 구제한다면서 삼백육십주 공사(三百六十州公事:전국 360郡에 그의 符圖를 땅에 묻는 일)를 행하며, 또한 강증산의 영체(靈體)가 머물러 있다는 금산사 미륵불에다 의미를 부여하고, 당시 금산사 주지인 곽법경(郭法境)과 합작하여 1918년 금산사 안에 미륵불교라는 교파를 세웠다. 이 때 미륵불교의 신도가 수천에 달했으나 일제에 의하여 해산된 다음, 용화계(龍華契) 미륵계(彌勒契)로 이어지다가 1970년 대한불교법상종(大韓佛敎法相宗)으로 문화공보부에 등록하게 된다.
이렇듯 동학혁명의 좌절기로부터 오늘날까지 호남지방에서 정통동학을 이탈하여 해괴(駭怪)하게 변종하여버린 증산계열의 부도(符圖)들은 수운 최제우선생의 심법에 따른 동학의 물형부(靈符)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할 것이다.
6. 동학의 교리 근대화 시기의 영부에 대한 이해
영부에 대한 저간의 사실이 이러함에도 오늘날 수운선생의 양대 심법(心法) 중에서도 그 우선순위가 먼저였던 영부 익히는 공부가 교리 근대화의 시기를 거치면서 단절되어 있거나, 그 영부의 원형마저 망각되어진 전후 사정에 대하여 그 원인이 어디서 기인하였는지 당시의 주변 사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여기에는 동학천도의 연원적 정통으로 공인받고 있는 천도교의 근세사를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동학천도는 창도 초기부터 동학혁명을 거쳐 일제 강점기까지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지 못한 채 끊임없이 가혹한 박해를 받고 있었다. 더구나 1904년(갑진)에 국내에 있는 교인들을 동원하여 진보회를 조직하고 대대적인 개화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는데, 그 진보회가 친일적인 일진회 속으로 휘말려 들어감으로써 동학의 3세종통인 의암 손병희선생은 동학의 앞날을 위해 중대한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드디어 1905년 12월에 의암 손병희선생이 동학천도를 천도교로 개명 공포하고, 그 다음해 1월에 귀국하여 교회조직과 교리의 근대화 작업으로 교세를 확장함과 동시에, 아직도 일진회 활동을 청산하지 못하는 이용구 송병준 이하 62명을 출교함으로써 교회의 정화작업도 진행하였다. 이리하여 천도교는 1910년까지 단 몇 년 만의 짧은 기간에 북한지역을 거점으로 300만 호에 달하는 거대한 종단으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1919년 3월 1일의 민족 독립운동을 위한 결정적인 몫을 하는 국내 제일의 종단으로 우뚝 섰다.
1) 교리 근대화 초기과정의 영부에 대한 이해
이렇게 갑자기 급성장한 천도교의 교세는 외형적인 성장의 기쁨 못지않게 내부적인 신앙교육의 깊이를 심화시키는 데 어려움도 많았을 것이다. 이는 당시 “대한매일신보” 등의 언론매체에서 천도교인들의 일부 전근대적이고 미신적인 신앙 행태를 비판하고 지적하는 내용이 빈번하게 보도된 것을 보아도 그 당시의 정황파악이 가능하다. 특히 의암 손병희선생이 철산에서 불의의 테러를 당하던 때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보도들이 그 절정에 이른다.
(大韓每日申報 4月 5日 社說 : 何其惑世誣民之易也 참조)
그 한 예로 전국적으로 산재한 교도들 가운데 명확한 심법계통의 신앙지도와 절차를 밟지 아니하고 수련 중 제멋대로 그려내거나 흉내를 낸 개인적인 符圖들을 함부로 내세우면서 영적(靈蹟) 교란을 일으키는 등, 물의를 일으키는 사례가 잦음으로 인해서, 당시 양한묵의 주도로 교리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던 천도교총부의 신진 개화파의 지도부로서는 이에 대한 수습책이 불가피했을 것이다. 그리고 영부공부 등의 수행의 잘못으로 인하여 세간의 웃음거리가 되는 것에 대한 신용(信用)주의보가 있었던 것도 하나의 큰 원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제1대 현기사장 김연국과 제2대 현기사장 이종구에 이어서 그동안 간간히 현기사장 서리(署理)로 들락날락하던 양한묵이 1907년 4월 4일에 정식으로 제3대 현기사장으로 취임된 후, 최초로 대도주 장(章) 명의의 종령 제8호(연속종령 66호 1907.5.16)로 전칙(轉飭)한 다음과 같은 내용에서 살펴볼 수 있다.
“우리 천도교 진리의 명의(名義)가 밝게 드러나서 우주 만족(萬族)이 감응하는 취향이 모두 다 같은 초록빛의 봄처럼 흔연한 기쁨이 되어 행복이 되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겠으나, 다만 필요로 하는 수심법의 견고치 못함이 항상 걱정되는 것은 그 올바른 요점(과녁)을 알지 못함일세, 이에 다음 4가지의 가장 요긴한 것(領)을 게재하여 더욱 힘써 그 믿음을 지키도록 하니, 마음이 본원이 되게 하고 몸은 드러난 자취가 되게 하여서 이 뜻에 미치는 부담이 없도록 할 것이다.
첫째 믿음(신용)이 내 마음의 영부가 되는 것이니, 믿음을 행하는 데 있어서 “마음을 속이지 말고 한울을 속이지 말고 사람을 속이지 말라 (勿 欺心 欺天 欺人하라 信爲自心靈符니라)”
(宗令八號: “吾敎의 眞理名義가 昭然並著하야 宇宙萬族의 感應 趨向이 欣欣然 若萬綠同春이라 其爲幸福이 不容歧說이나 但要守心法이 常患不篤하야 莫知其正的일세 玆揭四領하야 益勉其信守호니 心爲本原하며 身爲著迹하야 無負此至意어다. 一曰 信用이니 勿 欺心 欺天 欺人하라 信爲自心靈符니라)”
살피건대 천도교 대고천하 이후, 전기(1905년~1912년)의 교리 근대화 작업은 거의 모두가 지강 양한묵에 의해서 주도되었고, 후기(1919년~1940년)의 교리 근대화 작업은 야뢰 이돈화에 의해서 주도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선 전기에는 양한묵이 일본에서 보고 듣고 읽은 것이 이 시기의 새로운 교리 전개에 거의 결정적인 몫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양한묵이 일본으로 건너간 해가 1898년이므로 예컨대 “천(天)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고 사람 밑에 사람을 만들지 않는다”라는 구절로 시작되는 저서를 낸 명치의 계몽사상가 후쿠자와(福澤諭吉)도 아직 살아 있을 때였다.
그는 이 시기에 왕성한 집필 활동을 하였는데, 1907년 천도교중앙총부의 이름으로 발행된 “동경연의(東經演義)” “대종정의(大宗正義)” “성훈연의(聖訓演義)” 등 대략 열 가지 정도의 저서가 거의 모두 천도교의 교리서(敎書)로 채택되어서 교리강습소나 사범강습소의 교재로 활용되었다. 그러나 이들 교리서 어느 한 군데도 영부에 대한 기록은 없다. 그가 일본에서 얻어 들은 관념철학의 영향으로 인하여 천도교의 교리를 철학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그가 천도교의 사상적 요지를 인내천으로 규정한 “대종정의”의 다음과 같은 내용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신앙은 하늘이 하늘을 만나는 것이고 철학은 사람이 하늘을 보는 것이며 제도는 사람이 사람을 보는 것이니 이 세 가지에 하나라도 빠지면 미목부재( 美木不材)라... 信仰과 哲學과 制度를 三區에 分하여 人心傾向의 準的地를 정하니 신앙은 人이 天에 粘着하여 其身의 自由를 忘하며 哲學은 性의 本來天과 身의 衆生相을 兩段 分定하여 性身久暫의 別로 性界榮譽는 三光同壽를 期하며 身界利益은 百年一夢으로 認하는 大旨義를 揭明하며 制度는....”
지강(芝江) 양한묵은 본래 전라도 화순 사람으로 일찍이 5세에 천자문을 능통하였고, 8세에 양사제(養士齊)에 취학하여 유학(儒學)의 진수를 해득한 다음, 이미 15세에 유가(儒家)의 모든 서적을 완전히 섭렵하였다 하고, 18세 에는 널리 불서(佛經)와 선서(仙書) 천주학의 성경까지 열독(閱讀)을 한 후, 심지어는 고신도(古神道)의 음양술(陰陽術)과 복술(卜術)까지도 모두 통독을 했던 박학하고 천재적인 문장가였다고 한다.
그 후 그는 25세(1886년)에 광주의 무등산 증심사(證心寺)에 출가하여 불성이론에 통달하였고, 33세 때에는 탁지부 주사에 임명되어 3년간 근무하다가 광무 원년인 1897년에 직을 사임하고 세계 정세와 새로운 문명을 견학하기 위하여 청나라를 거쳐 일본으로 망명한 당대의 신진 명문학자였는데, 그가 일본에서 의암선생과 조우(遭遇)한 내용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양한묵이 41세이던 1902년 봄에 일본의 고도(古都) 나라(奈良)에서 의암 손병희선생과 “동심결맹(同心結盟)”을 할 때, 그 내용이 <“笑笑(손병희)는 터를 잡고 양한묵은 집을 짓는다”>
이리하여 그는 귀국 직후인 1906년 2월 27일부로 의암 손병희선생으로부터 천도교 교리 편찬원으로 임명된다. 물론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구 동학의 원로인 보수파 김연국, 박인호, 그리고 문명 개화파로 분류되는 권동진, 오세창 등 5명이 동시에 교리 편찬원으로 임명되었지만, 사실상 교리편찬과 관련하여 양한묵 이외의 다른 이름이 전혀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서 양한묵 독주 체제의 교리 근대화 작업이 진행되었음이 분명한 것 같다.
<지강문집 P311 (도서출판 예원)참조)>
이러한 양한묵은 일본에서 신학문에 접하고 있던 1902년 봄에 천도교에 입교한 후 불과 5년 만에 천도교의 대도주(大道主) 다음의 서열인 제3대 현기사장으로 급 승진하면서, 동학의 근대종교화를 위한 천도교 교리서의 방대한 저술활동을 전개하고 주도한 대표적인 사람으로서, 당시까지 구 동학시절 원로들에 의해 잔존하고 있었던 알쏭달쏭한 영부(靈符) 익히는 공부 같은 것은 교리 근대화 작업의 정립에 큰 부담이기도 했을 것이다.
2). 양한묵의 실권 이후의 영부에 관한 이해
천도교 총부 설립 초기인 1906년에서 1909년 사이 의암 손병희선생의 절대적인 후광을 배경으로 한 그의 거침없는 저술활동은 춘암 박인호선생의 대도주 체제가 들어선 이후로, 서서히 교회 보수지도층들의 저항에 부딪힌 것 같다. 왜냐하면 1910년부터 그와 함께 활동을 하던 권동진, 오세창, 윤구영, 홍병기, 권병덕, 이병호, 임순호, 이종훈, 오지영, 나용환 등 다른 모든 인물들이 여전히 교회 중추세력으로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양한묵만이 1909년 현기사장에서 1910년 법도사로, 다시 진리관장으로, 1911년 1월에 무임소 직무도사를 끝으로 해서 아무런 행정직임에 기용되지 못하고 겉돌기 시작한 것에 대한 의문은 아직도 숙제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초기의 천도교 총부가 손병희대도주를 수반으로 그 산하에 개화파 세력인 양한묵. 권동진. 오세창 등의 해외파와, 일진회 세력인 이용구. 송병준 등의 정치파, 그리고 구 동학세력인 김연국. 박인호. 권병덕. 김낙철 등의 수구파, 이 3세력이 항상 갈등관계에 놓여 있었다는 오지영의 증언을 무시할 수 없는 이유가 된다. 어쨌든 양한묵은 이 때 손병희선생의 권유로 일단 낙향하였다가 1919년 3.1운동거사 준비 때 재등장하여 33인의 한 사람으로 경성감옥에서 옥사를 한 유일한 사람이다.
이처럼 양한묵의 천재적인 글 솜씨에도 불구하고 그의 급진적인 교리근대화 작업에 대한 문제점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은, 동학의 교리근대화 시기에 천도교 교리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는 “무체법경”이 유불선3교의 정수를 한데 모아 팔만사천대장경을 압축한 책으로까지 평가를 받으면서도 오늘날까지 이 책의 저자를 포함한 책의 내용에 대한 논란이 아직도 그치지 않는 것은 하나의 좋은 실례라 할 것이다.
이 무체법경의 논란은 의암 손병희선생이 1909년에 통도사 내원암에서 49일 기도를 행하였을 때, 의암선생이 그 곳 수련 장소가 천년고찰임을 고려하여 동학을 불법에 비유하여 설법한 내용의 일부를 기초로 해서 양한묵의 수려한 문장력으로 집필이 된 후, 당시 중앙총부의 강습교재용 교리서로 출판하여 사용하던 것인데, 당초의 이러한 교리서들을 1960년 삼부경전으로 합본할 때, 아무런 여과 없이 의암선생의 법설이나 저서로 정착시키려는 교단 측과, 이에 의문을 제기하는 전문 학자들, 그리고 양한묵 후손들의 견해가 서로 확연하게 다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다시 말하면 수운선생에 의하여 창도된 동학을 지강 양한묵처럼 다양한 해석과 종합을 토대로 동학의 지평을 넓히고 깊게 하려는 시도는 좋지만, 이러한 시도들이 수운동학의 본질에서 합리적으로 연역되지 않고 왜곡되어 나타난 것이라면 그것은 이미 수운동학의 정당한 흐름을 혼란스럽게 할 원인으로 작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논란의 원인은 당초 무체법설의 초고를 의암 손병희선생에게 보이다가 큰 꾸지람을 들었다고 하는 것을 과거의 천도교의 원로들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다. 이로 인하여 양한묵이 의암선생을 학문에 무지한 사람으로까지 불평을 하였다고 하며, 3차에 걸친 수정을 가한 끝에 겨우 천도교 총부에서 운영하는 사범강습소의 “교리서”정도로 펴낼 수 있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가진다.
이 주장은 천도교의 교사를 자료 중심으로 정리해 왔던 천도교의 원로 표영삼(원래의 본명이 표응삼인데 삼부경전을 편술한 박응삼과 같은 이름을 쓰지 않겠다고 하여 호적상 본이름인 응삼을 영삼으로 개명하는 동기가 되었음)의 평소 지론이기도 하며, “천종법경”이니 “도종법경”이니 하는 명칭 역시 교리 근대화작업에 독자적으로 종횡무진하던 지강 양한묵의 지론에 따랐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논란은 박응삼에 의해 천도교의 최초 삼부경전이 집대성 될 때까지 결론이 나지 못한 채 최초 삼부경전 발간사에서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 이 책은 그 내용을 천종법경(수운대신사편) 도종법경(해월신사편) 교종법경(손의암성사편)등 3편으로 가려서 엮었다....“天宗法經”이라 “道宗法經”이라 한 것도, 이번에 갑작스러히 지어낸 것이 아니요, 비록 활자화 되지는 못했으나 일찍이 芝江 梁漢黙 선생께서 “東經演義”를 다시 주해하여, 천종법경이라 하였으며, 해월신사의 법설을 종합하여, 주해를 붙이어, “도종법경”이라 하여서, 다 같이 강습교재로 쓰던 것이다. ....중략.... 될 수 있는 대로 1961년 4월 천일기념 때에는 책이 나오도록 하자는 생각으로 밤낮 원고를 쓰노라 한 것이 날로 90일만에야 탈고가 되었다.
崔東熙씨의 많은 협조에 감사한다, 일은 크고, 시간은 촉박하고, 원고는 밀리고 해서,
일변 원고가 정리 되는 대로 편집위원회의 독회를 거쳤으나,
그것도 제3편(교종법경편)은 충분한 독회를 갖지 못한 것이 유감이다.
독회에 참석해주신 분은, 張昌杰, 白重彬, 白世明, 韓泰然, 李宇英, 李在淳, 崔東熙, 朱東林, 諸氏요, 끝까지 조언을 해주신 분은, 韓泰源, 金用天 두 젊은 동덕이다.
어찌 완벽을 기하랴 ! 날짜가 급하다는 구실도 있었지만, 워낙 역자의 재주가 둔하여,
번역이 제대로 되었을 리 만무하다. 천리마가 발견 될 때까지, 천리마가 죽은 뼈의 역할을 한 것뿐이다. 다시 후일을 기다릴 수밖에 없고, 우선 천도교의 교리를 연구하려고 애쓰는 이에게 원문만이라도, 한 책에 수록하여, 내어놓고 싶은 충정임을, 헤아려 살펴주시기 바란다.> (무체법경은 여암 최린선생의 부인(후처)인 김우경 사모님으로부터 얻어다가 그대로 실었다고 밝히고 있음)
<삼부경전 발간사에 붓을 놓으며 철암 박 응 삼>
결론적으로 수운심법의 근간이 되어야 할 “영부”와 “주문”은 차치하더라도, 지금까지 제3편 의암선생 편을 독회도 갖지 못한 채 발간하게 되었다는 박응삼의 초판 삼부경전 “발간사” 어간의 뜻을 고려하지 않고, 이 교리서들(‘무체법경’ ‘대종정의’ ‘현기문답’ 외 다수)에 대한 단 한 번의 세심한 문헌학적 고찰도 없이, “교리서”와 “법설”의 구분도 하지 않은 채,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은 분명한 오늘의 숙제이고, 수운 심법으로서의 영부와 주문이 소외된 이러한 교리서들을 천도교의 최고 經典으로 추켜세워서, 동학의 수도 5단계 중, 최고의 경지가 “견성(見性)” “해탈(解脫)”과 “자천자각(自天自覺)” “극락(極樂)” 등으로 자리매김 되어가는 경향은, 향후 수운심법의 정체성에 적지 않은 혼란을 야기할 수 있음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7. 1910년대 천도교회 월보에 나타난 영부
천도교 중앙총부 설립 초기에 대대적인 교리 근대화 작업을 진행하던 양한묵이 실권에서 물러난 직후인 1911년 천도교회월보 제7호(2월호)에서 처음으로 영부에 대한 기록이 나오기 시작한다. 그러나 “오교의 삼칠영부”라는 제목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아직도 양한묵의 교리강습소 출신이었던 교리강연부 청년들에 의해서 진행되고 있는 교리 근대화 작업과 연관되어서 유형한 부도(물형부)의 활용에 대해서는 제한을 받고 있었던 것 같다.
○ 월보제7호(1911년2월호) 吾敎의 三七靈符(崔東旿)
譯) 대저 靈符는 天靈이 모이는 바요 上帝의 靈感이니 사람의 정성으로써 한울님의 총애를 얻은 것이요 믿음으로써 神의 은혜를 얻으면, 한울과 사람이 오고가는 사이에 한울이 사람의 靈에 반드시 感化하는 것이며, 사람이 반드시 天道에 합하는 神靈한 한울이니, 天靈이 感應함에 어느 일이 불가능하겠으며 어떤 바람인들 이루지 못하리오. ...중략 .... 그런고로 한울로서 靈符를 쓴즉 비록 적으나 그 亨通이 無窮할 것이요, 사람으로서 靈符를 쓴즉 비록 많으나 그 씀에 다함이 있으리라. 우리 천도교의 靈符는 사람의 목숨으로써 天壽의 靈藥을 얻은 것이니 ...東西世界의 뭇 衆生의 靈을 물론하고 이 영부의 이치를 얻어 깨달으면 다 함께 자연스런 한울이라 한울이 한 가지면 몸도 한 가지요 몸이 한 가지이면 길도 한 가지이리라. 이와 같은즉 우리교의 3.7영부의 큰 열매와 큰 효과가 대개 如何한 것이오. 欽哉라! 우리 교여 ! 전 세계의 뭇 靈性이 돌아와 깃들 곳이로다.
○ 월보제20호(1912년3월호) 長生不死하는 藥 (具鈴書)
譯) 약이 없으면 온 세계가 병으로 인한 害를 입어 消滅을 당할 것이로다.
원래 세상에는 백 천 가지의 병이 있는 곳이요, 이에 한울은 신령한 수단으로 신령한 약을 준비하는 곳이라. 한울이 무슨 연고로 그 약을 주시는고. 세상에 병이 많은 것을 근심하사 어느 때이든지 크게 쓸 예비와, 또 한 두 사람이라도 약을 지성으로 구하는 자에게 주고자 하심이지만, 세상 사람들이 약 구할 마음은 고사하고 자기 몸에 병이 있는 줄조차 알지 못하야 병이 점점 자라게 놔두다가 필경 죽을 지경에 이르는 자가 많도다. 이제 가만히 증험하여 보건대, 선천이 개벽한 이후로 오만 년을 내려오며 쌓인 병이 날로 커지고 달로 점점 자라서 큰 고질이 되었으되 한 사람도 고칠 생각이 없고 약을 구하는 자도 없는 고로 지나간 세상에 억천만 민족이 모두 병으로 죽고 또한 지금도 죽게 된 사람이 많으니 이 세상은 진실로 병 가운데 있는 세계라 하겠노라. .... 중략 .... 그러면 무슨 병이 그렇게 위태로우며 무슨 약이 가장 적당할까? 병이란 형용이 없는 지경으로 좇아서 생기는 性靈病과, 형용이 있는 지경으로 좇아서 생겨나는 肉身病의 두 가지 부문에서 여러 종류가 있다. 한울이 주는 약은 형용이 없는 한조각의 약방문이요, 또한 천지간에 가득 쌓인 것이로되 만일 정성을 드리지 않으면 그 있는 곳을 알 수가 없고 얻어 보기도 극난할 뿐더러 설혹 얻을지라도 정성이 아니면 한울님의 감응을 얻어서 효력을 보기가 어렵도다. ..... 중략 ... 그 약의 이름은 長生丸이니, 天道根, 弓乙皮, 大活, 防風으로 군신紫麝의 재료를 삼고 三神山의 生淸과 東海의 경명주사로 作丸하야 淸水 한 그릇에 타서 無時로 복용하되 성경신 三字로 조리를 하면 萬病에 모두 神效하고 겸하여 정성으로 永侍重盟하여 일평생을 長服하면 이것이 不死藥이로다. ...중략 ... 진시황 한무제가 어찌하여 못 구하고 산속에 묻혔는고, 그 때에는 운수가 못 되었는가 그 사람들이 박복하여 그랬는가. 다행히 오늘날에 이르러서 한울님이 이 세상을 건질 큰 의원을 내시어 전에도 없고 후에도 없는 선약을 발명하시니, 생각건대 한울님이 죽어가는 이 세상을 건지시고자 하심이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1910년대 천도교중앙총부 발행의
“천도교회월보 제65호(1915년12월호)”부터는 거의 매회 “영적실기(靈迹實記)”라는 제목으로 전국 각 지방교구에서 일어나는 “청수”에 대한 영적(靈迹)과 함께 “영부도(靈符圖)”의 실용에 대해서, 총부에 보고하거나 취재한 글들이 계속 월보에 연재되고 있다. 바로 이 시기는 의암손병희 선생이 전국의 두목들을 우이동 봉황각으로 불러 49일 기도에 박차를 가하고, 전국의 교인들에게 “이신환성” 수련에 총력을 기우리게 한 시기와 맞물려 떨어지며, 또한 이 시기에 왕성한 포덕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천도교회월보”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면, 아직도 천도교 각 지방교구의 신앙실천 현장에서는 신문화운동과 교리의 합리화 작업에 치중하는 중앙총부의 지도부와는 별개로, 수많은 일반 교도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영부도(靈符圖)의 제인질병(濟人疾病)을 포덕 교화에 활용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가 있으며, 영부는 항상 청수 음복(飮福)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16년 “천도교회월보”에 게재 된 영부에 대한 “영적실기”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청수영적 제외)
◎. 평안도 성천교구 공보 <월보 67호 (1916년 2월호) 영적실기>
성천군 상덕면 운봉리 교인 張錫晁씨 집에서는 포덕52년(1911년) 1월 17일부터 시작하여 49일 기도를 마치고 또 계속해서 3.7일 기도를 행하는데 3월 29일에 이르러서는 청수를 길어오는 우물의 가운데서 서기가 뻗쳐 하늘에 닿았다가 7일만에 없어지고, 또 3월 9일 9시 청수그릇에 달그림자가 비치어서 등불을 꺼도 집안의 밝음이 낮과 같았으며 또 그달 15일 하오 9시에 그집 부인 徐晁嬅씨가 청수를 모시다가 홀연히 몸이 떨리며 글씨를 쓰고 싶은고로 종이를 펴고 붓을 드니 복희씨의 하도 팔괘와 문왕의 64괘 그림이 완연히 쓰인지라 보는 사람마다 다 말을 하되 무식한 부인이 어떻게 河圖洛書를 ....
◎. 황해도 곡산교구 공보 <월보 68호(1916년 3월호 영적실기)>
● 황해도 곡산군 상도면 방동리 노전동 교인 石重珍씨는 포덕56년(1915년) 9월에 우연히 병이 들어 석 달을 누워서 일어나지 못하더니 동년 12월 19일 侍日 날 밤중에 홀연히 강령이 됨에 온 집안사람들이 다 놀라서 청수를 모시고 念天念師 한 후에 환자가 자기 손으로 붓을 들어 영부(靈符) 한 장을 써서 먹으니 정신이 祥活하고 혈맥이 순환하며 거의 죽게 되었던 병이 雲捲晴天 하듯이 쾌차한지라 ...그때 문병하러 갔던 교인들이 그 일을 참관하고 모두 이상히 여겼다 하며 불어난 돈은 교구로 보냈다 하고,
● 동 곡산군 서면에 사는 교인 金八龍씨의 부인이 대하증(帶下症)으로 칠팔 년 고초를 겪으며 백약이 무효이더니 정종화씨의 영부(靈符)로 그 병이 쾌차 하였고,
● 또 곡산군 부내면 崔明汝씨 부인은 안질(眼疾)로 여러 해 고생하더니 이 또한 정종화씨의 영부로 쾌차하였고,
● 또 부내면 야척리의 朴八甲씨는 담증(膽症)으로 일 년간을 고생을 하더니 이 또한 정종화씨의 영부로 쾌차하였고,
● 또 곡산군 산내면 심천리 金大坤씨의 부인 유동오씨가 부족증(不足症)으로 수년을 고생하다가 이 또한 정종화씨의 영부로 쾌차하였고,
● 또 부내면 성북리 金興澤씨가 부족증(不足症)으로 거의 죽게 되었더니 이 또한 鄭부인의 영부로 쾌차하였다고 한다.
◎. 경기도 용인교구 공보 <월보 제 69호(1916년 4월호 영적실기)>
충북 진천군 金水嬅씨는 진천교구장 박문화씨의 모친인데 이 부인은 본래 삼십세 이전의 청상과부로 슬하에 다만 박문화씨 한 사람만 데리고 근근이 지내며 자식이 장성하기만을 기다리다가 박문화가 장성한 뒤에 입교를 하였는데, 金부인은 천도의 本志를 몰랐기 때문에 반대가 滋甚하더니, 임진년 봄에 해월신사께서 그 근처 부창리로 移居하심에 김 부인도 자연스럽게 相從이 되어 동학의 진리를 알고 즉시 입교를 한 후, 가족까지 힘써 권하여(勸勉) 극진히 수도를 하다가, 갑오년 변란을 당하여 그녀의 자제가 기포하여 보은 장내의 도회에 참여를 했는데, 가산 전쟁은 모두 전멸이 되고 지목으로 인연하여 아들 대신으로 관부에 잡혀 갇히기를 여러 차례하고 가족을 데리고 흩어져 도망하는 무한한 고난을 겪었으나, 道 믿는 마음이 조금도 끊어지지 아니하며 혹 지목이 심할 때는 자기가 나서서 비밀스럽게 각 교인들에게 통기를 하여 환란을 면하게 한 일도 많았고, 혹 신병이 있어서 6. 7개월을 모질게 고생을 하면서도 의원의 약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오직 淸水와 靈符로써 치료를 하여 天師님의 감화를 받았음이 많았다. 그런데 이 세상의 인연이 定壽가 있어서인지 금년 3월 10일에 환원함을 면치 못한지라, 천도교 의식으로 안장하는 날 장례식에 모인 수백 명이 모두 이야기하기를 “오호~라 김수화씨여 ! 도를 믿은 지 27년 동안에 허다한 풍상을 겪으셨으되 처음의 마음을 변치 않고 환원할 때까지 한울마음이었으며 영부로써 5. 6인의 병을 가지고 돌아가셨다 하더라.
◎. 용인교구 공보 <월보 제70호(1916년 5월호) 영적실기>
● 용인군 수지면 동천리 교인 姜載德씨는 靈符로써 5. 6인의 병을 낫게 하였는데 , 그의 종씨 강재도씨가 다년간 고생을 하던 身病을 고친 일도 있었고, 또 그곳 金胤植씨 집은 포덕 51년(1910년) 12월 10일 밤 청수가 얼어서 세치가량이 솟았는데 그 끝은 붓의 형상과 같았고, 또 1911년 동짓달 20일 밤 청수가 얼어 두 줄기로 솟았는데 ....
● 또 그곳 安領植씨는 그곳 교인 함용현씨의 오른편 다리에 大腫(큰 종기)이 생겼는데 강재덕씨가 靈符를 내어 붙였더니 3일 만에 쾌차하였고....
● 또 용인군 교인 洪種憲씨의 부인 정종화씨는 靈符를 내어 5. 6명
의 병을 고쳤고, 포덕 51년(1910년) 동짓달부터 석 달 동안 청수의 영적이 3.4차례 발현 되었는데 혹 청수물이 없어지기도 하고, 혹 엄동에 밖에 모신 청수가 얼지 않기도 하고, 혹 청수가 구슬같이 얼기도 하고, 혹 눈발같이 얼었고, 또 1911년 1월 10일 밤에는 청수가 얼어서 3층으로 세치가량 솟았고,...
● 임실군 오천면 관촌 우종학씨는 포덕 55년(1914년) 12월에 그의 모친 嚴永嬅씨가 우연히 병이 들어 침석에 누웠더니 15일 밤 비몽사몽간에 양위 신사께서 “乙乙弓弓”을 많이 외우라고 하시기에 말씀대로 口不絶誦으로 외웠더니 그 밤을 지내고 아침에 일어난즉 病이 어느새 나아버리고 왼손에 붉은 점이 있어서 석 달을 지난 후에 없어졌는데 그 이후로는 기력이 대단히 건강하였다.
◎. 전라남도 광주교구 공보<월보 제71호(1916년 6월호) 영적실기>
전라남도 나주군 敎區室에서는 포덕50년 4월 4일 밤부터 4월 6일 밤까지 교구실에 瑞氣가 공중으로 뻗쳤고, 또 포덕 51년(1910년) 5월에 나주교구 성화실에 모신 청수그릇에 “弓乙”의 형상이 드러나서 두 시일 동안을 여전하였고, ......
◎. 전라북도 함열교구 공보<월보 제71호(1916년 7월호) 영적실기>
전라북도 익산군 함라면 소룡리 권재선씨 집은 청수상을 침방 북편에 놓았는데 포덕56년(1915년) 3월에 청수상 놓은 자리에 죽순이 나서 무성하되 조석으로는 이슬이 맺히고 ......
또한 포덕50년(1909년) 1월에는 자기(권재선)의 출가한 누님이 요귀 병으로 죽게 되었는데 기도를 하고 영부를 먹였더니 3일 후 病이 나았고, 도 포덕51년(1910년) 4월에 자기 모친의 위급한 病을, 기도하고 영부를 썼더니 쾌차하였다 한다.
◎. 전라남도 고흥교구장의 공보
고흥면 장전리 교인 양두성씨는 본디 무식한 사람으로, 1년 전 49일 연성을 할 때에 마음이 서늘하고 몸이 떨리며 붓을 잡아 글씨를 쓰고 싶어서, 장지 같은 큰 종이 한 장에 큰 글자 두 자씩을 썼으니, 한 장에는 ‘默軒’ 한 장에는 ‘普通’ 한 장에는 ‘神通’ 한 장에는 ‘衆生’인데, 과연 龍蛇飛騰하는 신필이라 총부에 올렸다.
◎. 황해도 신천군 교구 공보<월보 제73호(1916년 8월호) 영적실기>
황해도 신천군 궁흥면 서재동에 사는 여성교인 이월용씨는 講道員인 차정륜씨의 모친인데 본디 삼십 청상과부로 입교 수십 년에 포덕이 50여 호요, 主職은 天道敎事요, 2등 포장까지 탔는데, 여러 해 위험과 곤란과 허다한 靈迹이 이루 말할 수 없거니와 그 중에 특별한 일은 해마다 3월 8일이면 청수상 위에 흰 가루가 한 봉씩 생기는데, 그 가루를 물에 타면 붉은 朱色의 물이 되는지라, 그 물로써 靈符를 그려서 病 고치기를 5, 6년이나 한결같이 할 뿐더러 청수 맛의 달기가 꿀 같기도 하고 혹 降筆(글자 내림)이 되는 일도 많으며, 무신년 봄에 所屬淵源의 두목 방찬두씨가 흰 가루 한 封을 의암성사께 바친 일도 있었으며, 금년 봄에 우연히 병이 든 지 7일 만에 그의 가족들을 불러 이르기를 “내 大先生을 뵈옵고 우리 교의 좋은 결과를 보지 못하고 가는 것이 유감이라 하였는 바, 大先生이 말씀하시기를 “너의 命이니 어찌 하리오” 하시고 내 가슴에 무슨 인장을 쳐주시면서 “이것으로 표를 삼노라” 하셨다. 그러니 너희들은 내 가슴을 자세히 보라 하는 고로, 모두가 다 본즉 과연 가슴에 붉은 도장(印)을 친 자리가 손바닥만 한지라, 또 말을 하기를 “오늘은 내가 가는 날이다”라고 말을 한 다음, 목욕을 하고, 새 옷을 입고, 청수를 모시고, 엄숙하고 자연스럽게 잠이 들었는데, 그 붉은 흔적은 3일 동안이나 여전히 그대로였다. 환원한 날이 3월 8일이요 그녀의 나이는 61세였다. 아~ 이상하도다 한울님이 매년 3월 8일마다 흰 가루를 주시더니, 필경 그 날에 마쳤으니, 한울이 사람 수명의 한도를(壽限을) 미리 定함을 알겠도다.
8. 천도교 지도자들의 인물 분석에 따른 영부 접근
이상과 같이 천도교 교리 근대화 시절의 영부에 대한 자료들을 추적하면서 필자 나름대로 주요 지도인물들의 성향을 파악하고 분석함으로써 당시의 영부 이해에 대한 상황 접근을 하여 보도록 하겠다.
첫째, 의암 손병희선생 재세 시(在世時)인, 1910년대 당시 동학 교리서 주필편찬의 쌍벽을 이루었던 사람은 양한묵(천도교 제3대 현기사장)과 권병덕(천도교 제4대 현기사장)이라 할 수 있다. 이 두 사람은 똑같이 당대의 걸출한 文人이었으며 두 사람 똑같이 다량의 저작물을 남겼다.
그러나 지강(芝江) 양한묵이 천도교 교리의 근대화 과정에서 필수불가결(必須不可缺)하게 외부로부터 차입(借入)된 인재라면, 청암(淸菴) 권병덕은 해월선생과 생사고락을 같이하면서 구 동학의 전통적 수행과정을 의암선생과 함께 거친 本家의 인재로 구분 지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지강 양한묵의 기록에서는 영부에 대한 거론이 일체 없는 반면, 청암 권병덕의 저술에서는 영부에 대한 기록들이 구체적으로 남아 있다는 점이다.
둘째, 3.1독립선언 이후, 즉 의암 손병희선생의 타계 후, 1920년대에서 1930년대의 천도교 교리 근대화 후기 과정에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야뢰)이돈화와 (소춘)김기전을 들 수 있다. 당시의 야뢰 이돈화와 소춘 김기전은 전국의 순회 강연시마다 구름 같은 군중을 몰려들게 하며 쌍벽을 이루었던 저명한 문인이었고 연설가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야뢰(이돈화) 역시 지강 양한묵처럼 본래 불성(佛性)이론과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던 인재로서, 1902년 당시 사회적으로 교세가 막강했던 천도교의 영향을 받아 입교한 인물이었고, 순수 신앙적인 측면 보다는 천도교회월보사의 사원으로부터 출발한 인물이다. 그리고 개벽 잡지의 창간과 주필, 신인간 잡지의 창간, 주임종리사, 지도관장, 총부대령 등을 거치면서 왕성한 저술활동을 한 걸출한 이론가였다. 그의 저서로는 〈천도교서(1921년)〉·〈인내천요의(1924년)>. <수운심법강의(1926년)>.〈신인철학(1930년)〉. <천도교 창건사(1933년)〉.<동학지인생관(1945년)> 등이 있다.
천도교의 근대적 교리 전개의 전기(前期)를, 지강 양한묵이 주도했다면, 이돈화는 양한묵에 의해서 정립된 인내천의 이론을 “인내천 주의(人乃天主義)”로 발전시키며, 천도교 교리 근대화의 후기 과정을 주도한 인물임은 누구도 부인 할 수 없다. 그는 교리 근대화 제 2기인 1920년대에 개벽 잡지를 통하여 종교적 사회개조론을 형성시키며 “사람성주의”를 체계화한다.
그리고 제3기에 해당하는 1930년대에 이르러서는 교리철학을 체계화하며, “수운주의(水雲主義)”적 “신인철학(1930년)”을 완성한다. 또 천도교 교리의 합리적 해석을 시도한 양한묵이 불성이론(佛性理論)과 성리학적(性理學的) 틀 속에서 근대화 작업을 시도했다면, 이돈화는 성리학적 틀을 벗어나 서양철학에 기반을 두고 교리 전개를 하는 특징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러한 이돈화가 그의 저서 “인내천요의(人乃天 要義/1924년)”에서 “영부(靈符)”란 흉장불사지약(胸藏不死之藥)으로서 천심(天心)을 회복하는 “생혼(生魂)”을 뜻하는 것이므로 주문(呪文)과 심고(心告)만 잘 하면 되는 것으로 정리하고 있다. 또 그가 동학의 역사를 총정리 하여 1933년에 집대성한 “천도교창건사(創建史)”에서는 다음과 같은 이전의 사료에 분명히 나타나 있는 도통과 심법전수 시의 “영부도 전수(靈符圖 傳授)” 부문만을 유독 슬그머니 생략해 버린 이유도 당시의 교리 근대화 작업과 불가피한 연관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 1910년 천도교회월보 창간호부터 연재된 “本敎歷史”합본 23면
-수운과 해월의 도통전수-
<날이 밝음에 守心正氣 네 자를 크게 써서 맡겨 가라사대 일후에 병이 있거든 이것으로 쓰라 하시며 또 符圖를 주시고 동자 김춘발에게 먹을 갈도록 명하사 대신사 붓을 잡고 ‘龍潭水流四海源 劍岳人在一片心’이라는 訣詩를 써서 손수 신사에게 맡기며 가라사대 이 글은 그대를 위하여 내리는 글귀이니 길이 지켜 저버리지 말라 하시었다.>
○“天道敎會史” 10면
同年 八月十四日에 水雲大神師 守心正氣 四字를 書하시어 해월당에게 授하시고
또 ‘符圖’로써 施하시고 筆을 執하여 ‘受命’ 二字를 書케 하시고 ‘龍潭水流四海源 劍岳人在一片心’의 訣詩 授하시고 曰 此는 君의 將來事이니 永守하여 勿替하라고 하시었다.
또한 1926년에 출판한 그의 “수운심법강의”에서는 영부의 의의(意義)를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로 열거하며, 한사코 영부란 마음속에 있는 영부심(靈符心)을 뜻하는 것이지, 백지에 그려내는 물형부로서의 영부는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자상한 이론을 전개한다.
한울님이 수운대신사께 이르기를 세상 사람들한테 이 법을 가르치라 하시고, 이 법을 가르침에 왈 靈符라 하였으니, 이로써 보면 靈符는 실로 道를 깨닫는 중심이 된다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영부라 함은 무엇인가?
①(영부의 형체) 명칭은 선약이라 하고 그 형체는 태극과 궁궁이라 하였으니, 지금부터 이 영부의 형체 상으로 좇아서 보면 象形文字인 마음심 字를 풀어 쓴 글자(破字}됨이 명백하다. 弓弓은 弓의 형상을 겹친 것이니 그 형상이 이렇게 (꒗꒘) 될 것이다. (꒘꒘)의 모습을 원형으로 그릴 때에는 곧 태극의 모습으로 되는 것이니, 그래서 心字의 모양이 되는 것이다.
②(마음심이라면 어떤 마음?) 대신사로 보면 득도 이전의 마음과 득도 이후의 마음이 있는데, 한울님은 하필 왜 나에게 영부가 있으니 이것으로써 사람들을 질병에서 건지라 하였을까? 이를 좇아서 살펴보면 영부적인 마음이란 우리의 보통마음인 心理를 가리킨 말이 아닌 것이 명백하다. 마음을 대별하여 所有心과 創造心으로 나눌 수 있는데 “카알막스”의 “사람의 의식은 외계의 경제적 상태와 상응한다”는 말에 비유하면 소유심은 수시로 외부의 환경에 변동함으로 영부는 곧 天心卽大宇宙의 本性이 人間性에 分化한 創造心을 말하는 것이다.
③(영부심은 生魂의 약동) 사람性은 누구나 그 根底에 靈符心의 潛勢力을 가졌으므로 영부심은 바로 사람의 全生을 生生케 하는 生魂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현대인의 심리에는 모두가 死魂이 가득 찬(充溢) 鬼氣의 전횡으로 볼 수 있으므로, 대신사가 이를 탄식하여 힘써 죽음의 기운 가운데서 生氣를 도와 심고자{扶植)한 것이 곧 영부심이다.
④(그러면 왜 영부를 바로 마음(心)이라 이르지 않고 영부를 그림의 모양으로 나타나게 한 것이며 또 그것을 선약이라 하였는가?) 만약 영부를 바로 마음이라고 하게 되면, 세상 사람들은 문득 우리가 통상 가지고 있는 所有心을 연상할 것이므로, 대신사는 마음 心字를 피하여 태극과 궁궁의 모양으로 創造心이 약동하는 형상을 상징케 한 것이다. 요컨대 현대문명의 폐해는 소유욕의 발휘가 그 중심이 된지라 그런고로 대신사는 지금까지의 소유욕의 악습을 제거하기 위하여, 영부를 곧바로 마음(心)이라 칭하지 아니하고 상징적으로 영부심의 약동을 형용케 한 것이었다.
⑤(영부라는 글자의 올바른 해석) 符는 곧 “부작부”라 하니, 符籍이라는 것은 문자도 아니요 그림도 아닌 無形의 표본을 이른 것이므로 靈符라 함은 마음의 무형을 標本하였다는 뜻이니, 즉 창조심의 표본을 符로써 보인 것인데, 대우주 대생명의 약동, 생혼의 약동, 창조심의 약동체를 곡선형으로 도출한 것이며, 또 符를 대쪽이라는 의미로 보면 대쪽(兵符)은 兩方符合의 의미인데, 靈符라 함은 天心과 대신사의 道心이 완전히 符合되어 如合符節이라는 의미를 취한 것이라. (吾心卽汝心)
⑥(영부는 愚昧者 不見) 영부를 보고자 하면 視而不見聽而不聞이라 한 天眼이라야 능히 이를 想像할 수 있을 것이요, 所有欲의 노예가 된 우매한 자는 보지 못함이라. 처음에는 영부를 마음의 눈으로 본 것을 후에 이를 符圖로 그려서 유형한 물형으로 圖出한 까닭에 동학당시에는 그 徒弟들 중에는 이 符圖를 그려서 傳道의 방편으로 사용한 자가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이돈화는 수운 최제우선생에 대한 동학원류의 전통을 계승하려고 노력하면서도 일본의 창구를 통해서 들어온 서구의 근대사상을 수용하여 천도교의 교리에서 철학적 사유를 전개하는 데 주력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그는 초기 교리 근대화 과정에서 천도교의 신관(神觀)을 근대철학사상으로 정립하려는 시도를 했기 때문에, 여기에서 그는 수운선생의 신관에 혼재되어 나타나고 있는 초월적 경향과 내재적 경향을 종합하고자 범신론적 일신관(汎神論的一神觀)으로 정리한다. 그러나 실재적으로 야뢰의 범신론적 일신관은 수운선생 원래의 초월적 경향을 가능한 한 배제하고 순전히 내재적인 경향만을 수용했기 때문에 수운심법의 맥락에서 실제적으로 수운의 영부를 다루기가 여간 거북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야뢰 이돈화는 양한묵과는 달리 말년에 이르러서, 그의 초기 교리서들의 종교적인 신앙성 부재에 대한 반성과 더불어서, 그가 1945년에 최종적으로 집필한 그의 “동학지인생관” 제2장 제1의 “제인질병” 편에서 “영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입장을 견지함으로써, “흉장불사지약”으로서의 무형한 영부와 더불어서 물형(物形)으로 형상화 된, 영부도(符圖)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일대 변화가 일어났다.
○1973년에 재판한 이돈화의 “동학지인생관” 186면
인간의 生老病死 중 生.老.死 세 가지는 한울님이 定한 바이며, 大自然의 理法 아래서 不可抗力에 속한 것이지만, 그러나 病이란 어찌 생각하면 인간의 信仰力, 또는 精神力, 修鍊力, 氣化的 修養力, 等에 의하여 퇴치할 수 있는 可能的 本質을 가졌다.
天師問答에 曰 吾有靈符 其名仙藥 其形太極 又形弓弓 受我此符 濟人疾病 受我呪文 敎人爲我 則 汝亦長生 布德天下矣(啓示)라는 것은 神의 啓示로서 인간의 행복이 제인질병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계시한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질병적 상태가 아닌 사람은 없다. ......중략 ..
靈符라는 符字는 符合이라는 뜻도 되며 如合符節이라는 合一의 意味도 된다. 符合의 뜻은 內有神靈의 靈의 움직임(動)을 표시한 것이며 合一의 뜻은 天人合一을 의미한 것이다.
수운선생은 內有神靈의 靈動의 形을 有形의 符로 상징하여 神靈의 분명한 존재를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그러므로 종이 위에 그린 符圖는 일종의 暗示 작용으로 생각의 방향 전환을 촉진하는 敎化의 방편이다. 지금까지의 육신의 생존경쟁 속에서 貪.嗔.痴에 몰두하는 생각을 內有神靈의 內在存在 편으로 단연 방향을 전환케 하는 至上命令의 神印인 것이다.
인간과 인간의 계약에는 印章을 필요로 한다. 인장의 印은 無形心의 서약을 중한 맹서의 형식으로 취하기 위한 眞心의 표상이다. 즉 마음의 서약에 대한 표상이다. 神과 사람의 서약에도 어떤 誓約의 印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수운선생이 경신 사월 오일, 신의 계시를 받은 후에 靈眼으로 靈符의 形을 보았다. 神이 天心 그대로의 靈動形相을 靈符로 보여 주었고, 수운선생은 靈眼으로 그 형상을 보았던 것이다. 이것이 受我靈符의 증거이다. 이 증거가 神印이며 한울님과 수운선생의 誓約의 증거이다. 이 증거를 무지한 세상 사람들에게 육안으로 보이게 하는 방법으로 符圖를 그렸다. 즉 無形의 符가 有形의 符圖로 된 것이다.
비록 有形의 符圖라고 할지라도 神印의 弓乙形 太極形은 본래 그대로이므로 인간과 인간의 天心 서약에서도 당연한 것이다. 그러므로 “受我靈符 濟人疾病”의 원리는 어떤 사람에게도 보편타당성을 갖는다. ......
그리하여 각 개인이 다 같이 정신적 또는 육체적으로 질병을 몰아내면 그것은 자신의 행복일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보편적인 행복이 될 것이다. 수운선생이 “입도한 세상사람 그날부터 군자 되어 무위이화 될 것이니 地上神仙 네 아니냐” 하신 말씀은 지상신선은 무위이화의 인격에서 되는 것이고 군자적 인격은 濟人疾病에서 원인이 되는 것이므로 제인질병은 인간행복의 入德之門이 된다.
한편 소춘(김기전)은 당시 천도교에서 운영하던 보성전문(현 고려대) 출신의 전문 이론가요 주요 일간지인 매일신보의 기자출신으로서 신진 문필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교회관이 수도 수련을 겸비한 신앙인이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 스스로가 실제로 영부를 그려서 탄복하면서 지병인 폐결핵을 치료하였다. 그리고 천도교 기관지인 “신인간지”에 영부의 실용론까지 찬찬히 독려하였다.
이상의 네 사람에 대한 업적과 그 생애를 살펴보더라도 지강(양한묵)과 야뢰(이돈화)는 동학의 呪文에 관해서는 수많은 이론 접근을 하였지만, 동학천도의 靈符에 관해서는 그 분들이 수도 수련과는 거리가 멀었었기 때문인지는 모르나, 영부의 철학적 해석을 제외하고는 그 기록이 거의 미미한 형편이다. 그러나 청암(권병덕)과 소춘(김기전)은 수도 수련과 더불어서 靈符에 대한 효용론을 내세우고, 용담영부의 물형적인 이론과 적극적인 해설을 그들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 是儀經敎 卷三 無爲化法 (번역) 1914년 1월 10일
(권병덕.김낙철. 최소현. 원용일. 김낙봉 공동 編譯)
1) 靈符圖란
聖人이 세우신 心法의 지탱목(支撑木)이 가리키는 방향은, 비록 제한함이 없어서 그때그때 형편을 좇고 시세를 따라야 하나, 어찌 전혀 근거함이 없겠는가 !
河水의 龍馬圖와 洛水의 거북도가 傳하여짐도, 그것을 처음 보신 분이 지금은 이 세상에 아니 계시지만, 지혜롭고 밝은 후속에 의하여 그 법을 이어받은 때문이며, 신령한 符圖가 직접 나타나 보이는 것은, 사람과 하늘이 하나가 되었던(與天地合其德) 수운 대선생님의 거룩한 눈에 비치신 것이다. 天地가 영부 가운데 있으니, 우주의 圖形이요, 모든 학문의 源泉이며, 병이 낫고 몸이 윤택하여지는 것은, 거룩한 기틀이 미치는 바이고, 자연스럽게 저절로 나타나서 존재하는 것이다.
2) 三觀 (영부도의 모양)
영부의 모양은 3가지로 보이도록 이루어졌으니, 본체와 형상과 진퇴(進退)의 모양으로 되어 있다. 돌아가는 것 같고(旋), 물이 퍼지는 것 같은 것은(渦), 본래의 덩어리가 원만하게 이루어지며, 성품과 마음이 발양하는 모양이고, 활궁 자 같은 것이(弓) 弓弓으로 이어지는 것은 나아가고 물러가는 進退의 모양이자 기틀의 파란과 뜻의 실마리 줄이며, 새을자(乙)같은 것이 乙乙로 이어지는 것은, 온갖 萬象과 한 기운이 化出하는 근각이자 활궁 자(弓)의 홑 형상이다.
머리가 있고 꼬리가 있으니, 머리의 소용돌이는 아홉 번 돌고, 꼬리는 다섯 개의 새乙자 형상이다. 그리기는 평면에 그렸으나 실상의 모양은 입체로 되어 있고, 머리와 꼬리로 나뉘어 그리는 것은 심오한 뜻을 자세히 드러내기 위함이니, 원래의 참모습(입체)은 꼬리가 없다.
돌리는 선은 꼬리를 닮아 따낸 형상으로 하되, 활弓 자로 두르고, 새乙 자로 겉을 싸도록 되어 있다.
3) 弓乙
꼬리는 아홉 새乙 자로 나누어서, 한 시대의 기간을 드러내 나타냈으니, 큰 乙은 9이요, 작은 乙은 72로 된다. 乙은 단순한 형상으로 드러난 현상이요, 弓은 겹친 형상이로 잠겨있는 현상이니, 弓 가운데 乙이 있고, 乙 가운데 弓이 있다. 2개의 弓으로 형상을 연 이었으니, 차례로 세어보면 9로 이루어져 있고, 꼬리의 매듭이 서로 연이어짐은 10수의 빈 형상이다.
4) 旋渦
旋渦(물결이 소용돌이치는 형상)가 이루는 바는 弓과 乙이요, 弓과 乙이 이루는 바는 旋渦라, 弓乙가운데 무한한 선와(旋渦)가 있고, 선와 가운데 무한한 궁을이 있으니, 궁을은 德을 이루고, 선와는 바탕(質)이 되는 것이다. 旋渦가 모여서 줄(線)이 되는 것은, 점(点)이 모여서 線(줄)이 되는 것과 같으니. 우주의 삼라만상이 영부의 뜻을 갖추지 아니한 것이 없으며, 쌓이고 계속 겹쳐지며 포개지는 모양은, 삼라만상의 덕이 갖추어짐을 함축함이다.
5) 線纏(선전)
한 선(줄)으로 얽혀지며 이뤄졌으니, 처음에 시작한 데도 없고, 나중에 끝나는 데도 없어서, 무궁하게 순환을 하니, 우주의 恒常한 덕이며, 본체와 형상이 서로 의지하여 서있는 바다.
한 선(線)으로 이루어진 것이, 왕복을 겸하는 성품이니, 旋渦의 머리와 乙의 꼬리가 서로 잇닿아 있고, 꼬리로부터 머리까지 거듭되는 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6) 三眞
①旋渦는 일심(一心)으로 된 것이며, 일체의 근원이 그곳에 있는 바이며, ②弓弓은 一心의 형상이고, 일체의 근원이 얽힌 것이며, ③乙乙은 한마음이 부딪쳐 드러난 바이자, 일체의 근원이 나타나는 형상이다.
아~ 거룩할진저! 한울님이 주신 참된 자취여라. 영부의 큰 덕이 갖춤인저!
기(氣)로써 형상을 이루고, 물(水)로써 근본을 세움이로다.
旋渦가운데 주장이 있고, 弓 가운데 오묘한 것이 있고, 乙 가운데 형상(形像)이 있으니,
旋渦가 있지 아니한 곳이 없고, 오묘함이 있지 아니한 곳이 없으며, 형상이 있지 아니한 곳이 없다.
주장 위에 마음을 베풀고, 오묘함 위에 기틀을 두고, 형상 위에 빛을 두면,
마음 가운데 원인이 있고, 기틀 가운데 능함이 있고, 빛 가운데 구별이 있으니,
시의경교 속표지에 그려져 있는 ① 영부 ② 영부해석 ③ 선와(영부 원형인 머리 부분)
★ 소춘 김기전 (신인간 1943년 5월호)
제인질병(濟人疾病)의 영부선약(靈符仙藥), 반드시 이 영부를 사용합시다.
경신사월 오일 한울님께서 스승님께 내리신 말씀은 “나에게 영부 있으니 이 영부를 받아 사람의 질병을 건지고 내 주문을 받아 사람을 가르치되 나를 위하게 하라 그리하면 너도 또한 장생하여 덕을 천하에 펴리라”(吾有靈符 受我此符 濟人疾病 受我呪文 敎人爲我則 汝亦長生 布德天下) 하셨다. 그러면 한울님이 스승님께 주신 것도 영부와 주문 두 가지요 스승님이 한울님께 받으신 것도 이 영부와 주문 두 가지뿐이다. 한울님 스승님 도를 받드는 것이 마땅히 이 영부를 써서 사람의 질병을 건지고 이 주문을 전하여 사람에게 한울님 위하는 길을 가르쳐야 할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우리의 실제를 보면 주문은 잘 읽으나 못 읽으나 반드시 읽을 줄 알되 영부를 사용하여 자타(自他)의 질병을 건지는 일은 그렇게 행하지도 아니하고 관심도 적으니 실로 생각할 일이라 말하고 싶다. 우리는 한울님을 믿으면 절대로 믿을 것이요 스승님을 배우면 또한 절대로 배울 것이다. 여기에 감히 선택을 할 수 없고 회의(懷疑)를 할 수 없는 것이다. 한울님이 분명히 주셨고 스승님이 실지로 사용하셨으니 우리도 그대로 영부를 사용하여 자신의 병을 고치고 남의 병을 건질 것이다.
여러분이 짐작하실 바와 같이 이 글을 적는 필자는 이 몸이 양약 한약 백약이 무효한 중에서 오직 우리 도의 영부선약을 사용하여 담임 의사가 손을 뗀 이 목숨을 구원하여 내었거니와 무릇 누구나 오직 한울님 스승님의 가르침을 믿고 일념으로 영부를 사용하면 결단코 결단코 병으로써 죽을 리는 없는 것이다. 나는 한울님 스승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또 내 자신의 망극한 체험에 의지하여 영부를 이 세상에 오직 하나인 불사약임과 이 영부를 사용하면 반드시 반드시 만병을 통치한다는 것을 서슴없이 선언하는 바이다.
한울님이 어찌 속이시며 스승님이 어찌 거짓 하시리요. 우리는 무조건하고 이 영부를 사용하여 자기의 병을 건지고 집안의 병을 건지며 나아가 사람마다 이 도를 받들고 이 영부를 사용하게 하여 온 동포 온 창생의 질병으로 인한 사망을 근절케 할 것이로다. 이제 이 영부사용에 대하여 좀 더 자세한 말로써 남녀 도우의 중요한 참고를 짓고자 한다.
영부를 쓰면 어찌하여 병이 소멸되는가? 여기에 대하여 우리는 이 세간의 상식으로써 이를 설명할 수는 없다. 다만 사실로써 병이 나으니 낫는다고 할 뿐이다. 우리는 온갖 것을 무시할 수 있다할지라도, 실재한 사실만은 무시할 수 없다. 남녀 도우여! 이제 이 뚜렷한 사실을 사실로써 말씀할지니 사실로써 인정함이 계시라.
이 영부선약을 탄복하면 그 첫 작용으로 온몸에 땀이 함숙하게 흐른다. 영부를 탄복한 후에 평심서기하고 고요히 누어, 몸을 덥게 하며(保溫) 묵념 상태(혹은 수면상태)에 들게 함이 좋다. 이 땀이 흐르면 벌써 열은 내리고 몸은 가뿐하며 입맛이 돌기 시작한다. 오랫동안 잠을 못 들고 대소변이 고르지 못하는 등등의 여러 가지 병적 현상이 소멸되기 시작한다.
영부가 열을 내리고 구미를 생기게 하는 작용은 참으로 강하다. 그리고 각종의 설사를 멈추고 위장을 정리시키는 일도 참으로 신령하다. 우리가 다른 해열제나 소화제를 사용하여 이만한 효력을 얻으려하면 실로 가망도 없는 일이다. 먼저 영부는 먹기에 간편하고 상쾌하고 또 아무러한 부작용이 없다. 이와 같이 열을 제거하고 위장을 정리하는 작용이 강함으로
일종의 열병 각종의 위장병에 특효가 있다. 예를 들면 일체의 감기 염병(장질부사) 학질 홍역 풍증(風症) 등등이며 일체의 배앓이 토사, 곽란, 적백리질, 쥣병(虎列刺) 등등에 절대 유효하다.
영부는 영부이니만큼 물론 병에 종류도 없고 또 정도도 없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어떠한 병이든지 또 어떠한 정도의 병이든지 나을 수가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영부를 쓰는 그 사람의 영력 여하와 또 그 영부를 탄복하는 당자의 성심여하에 따라서 그 결과가 스스로 다름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영부는 이와 같이 속병, 즉 내과에 관한 병에 영효가 있음과 같이 외과 즉 각종의 종기 독창 담소 속의 화농증, 피부병 일체에도 신효가 있다. 이러한 겉 병에는 영부를 탄복하는 동시에 다시 이것을 불에 살라서 그 재를 상처에 바르거나 혹은 영부 그대로를 붙이면 유효하다.(재를 바르는 데에는 기름 같은 데에 화합해서 붙이는 것이 좋은 방법이다.)
우리가 도를 믿으면 도를 믿음으로 해서 받는 이익이 있어야 할 것이다. 덕을 천하에 펴서 창생을 널리 건지고 보국안민하는 전체적 큰 이익도 있어야겠지만, 우리 도인 각자가 자기 자신으로나 또는 가족으로나 우선 당면에 받는 이익이 있어야 할 것이다.
남녀노소의 도우가 각각 지성으로 도를 닦아 첫째 심화기화를 얻어 영육쌍전의 생활에 남이 얻지 못하는 윤채와 기쁨이 있는 동시에 힘써 대인접물 처사에 성경신을 실행하여 스스로 성운성덕을 지어냄은 믿는 사람 각자가 받는 다시없는 이익이 되려니와 어찌 어찌하여 내 자신이 병이 들거나 또는 집안 가족 간에 우환이 있을 때는 문득 영부를 사용하여 병을 멸하고 생명을 붙들어, 한 몸 한집안의 사시평강을 얻는 다는 것은 우리가 받는 당면이익의 큰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우리는 참으로 쌀자루를 베고 굶어죽는 사람이 되지 말고, 한울님 스승님이 주신 자재한 영부를 정성스럽게 사용하여 자기를 이익케 하고 남을 이익케 하는 큰 적선 큰 공덕을 베풀 것이다.
더욱 우리 도의 교역자 되는 사람쯤은 적어도 이 영부를 모시어, 순회하는 중에 교인 간에 질병 있는 이를 대하면 그 병을 고쳐주는 일쯤은 실행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아주 병을 고치는 사람이 되어버리자는 말은 물론 아니다.
영부를 사용하는 실제에 있어 반드시 생각 할 것은 첫째 영부를 탄복하는 당자나 또는 그 가족이 이 영부에 대한 경건한 마음을 갖도록 하는 그것이다. 자세히 말하면 영부를 탄복할 때는 반드시 청수를 모시고 그 청수 물에 탄복하게 하되, 할 수 있으면 그 당자나 가족이 그 몸이나 그 집안을 온통 청제(淸濟)를 행하여, 모신 한울님의 신령심을 일으켜 동하기에 마땅한 차림 차림을 하는 것이다. 둘째 이 선약을 탄복할 때에는 일정기간의 특별 기도를 드리어 근본적 도력을 북돋우게 할 것이며, 셋째 이 영부를 탄복하는 데에는 한번이나 두 번이나 또 혹은 하루나 이틀이나 써보고서, 효력이 있다 없다 하지 말고, 반드시 상당한 시일을 두고두고 근기있게 사용하되 형편에 따라서는 칠팔 삭이나 또는 일 이 년을 계속 사용할 작정을 가질 것 등이다. (영부는 영약이니, 나을 것이면 한 두 장이나 한 두 번의 탄복으로 나으리라 하여, 그 사용을 계속하지 못하는 데에서 그만 효력을 못 보는 이가 많으니, 이점을 특히 주의할 것이다.)
영부는 무슨 특별한 병이 없는 이라도 이를 때때로 탄복하면 몸이 가볍고 식사가 좋아서 크게 원기를 보하게 된다. 즉 보제로 생각해도 육미팔미(六味八味)나 인삼 녹용이상이 된다. 몸이 좀 피곤한 때, 감기기운이 있는듯한 때, 또 잠이 잘 오지 않을 때, 이 선약을 탄복하면 참으로 좋다. 무병장수의 신단선약(神丹仙藥)은 참으로 이 영부이다. 세상 사람은 물론이다. 우리 도인까지도 이 비밀을 잘 모르니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선약을 모실 적에는 완전강령(完全降靈)을 행한 후 붓을 드는 것이 제일이나, 사람에 따라서는 수심정기하고 궁을체의 글자영부(예를 들면 弓乙聖世心信回水 守心正氣 등의 문구)를 모시어 씀도 불가함은 아니다. 다만 정성으로 쓰고 정성으로 탄복할 것이다.
끝으로 한 말씀 할 것은 궁을영부는 우리 각자의 가슴속에 있는 것이니, 우리가 도를 닦아 모신 한울님을 통하여 한울님의 지기가 늘 우리 몸에 기화되어 있으면 구태여 영부를 쓰지 않아도 스스로 병이 나을 것이요 또 근본으로 병이 생기지도 아니할 것이다. 우선 사람마다 그렇지 못하니 우리는 우리 가슴속에 모셔져있는 영부의 형태를 백지에 그려내어 병을 건지는 것이다. 근본으로 완전한 기화상태(完全降靈)을 안보할 만한 평상시의 수련이 긴요한 것이다.
필자는 지금 우리 도인 중에 중년이하의 사람이 병으로써 불행해 하는 사실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 문득 이 글을 적사오니, 여러분은 참으로 닦는 동시에 참으로 영부의 신력을 힘입어, 우환질병의 무서운 고통에서 쾌히 구원되기를 간절히 비옵니다.
09. 오늘의 영부공부 상황
동학의 적통임을 자부하는 오늘날의 천도교에서는 영부에 대한 이렇다 할 공식적인 지도나 종학(宗學)이 없다. 그리고 천도교를 신봉하는 교인들도 영부에 대한 관심이나 견해가 없을뿐더러, 혹 있다 하더라도 가짜 약을 먹고 효험을 보는 플라시보 효과(Placebo effect)정도로 이해하는 것 같다. 또 이런 형이상학적인 심법을 연구해야 할 현기사의 기능조차 사라진지 오래 되었다. 이것은 지금부터 약 70여 년 전에 “신인간지”에 기고한 다음과 같은 소춘 김기전 선생의 다음과 같은 안타까운 절규의 연장선상에 그대로 놓여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한울님이 스승님께 주신 것도 영부와 주문 두 가지요 스승님이 한울님께 받으신 것도 이 영부와 주문 두 가지뿐이다. 한울님 스승님 도를 받드는 것이 마땅히 이 영부와 주문을 써서 사람의 질병을 건지고 이 주문을 전하여 사람에게 한울님 위하는 길을 가르쳐야 할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우리의 실제를 보면 주문은 잘 읽으나 못 읽으나 반드시 읽을 줄 알되, 영부를 사용하여 자타(自他)의 질병을 건지는 일은 그렇게 행하지도 아니하고, 관심도 적으니 실로 생각할 일이라 하고 싶다.
다만 가끔 동학의 교역자들 중에 교화(敎化)의 기질과 소양에 따라서 영부에 대한 반응이 다음 몇 가지의 현상으로 나타남을 살펴볼 수 있다. 하나는 영부란 마음 심자(心字)이기 때문에 물형부(物形符)를 논하는 것은 동학 초기의 전설인양 아애 관심조차 없는 경우이고, 또 하나는 강령(降靈)상태의 마음상태를 “영부심(靈符心)”으로 규정하고 “흉장불사지약”으로서의 무형한 영부심만을 인정하고, 유형한 부도(符圖)를 그리는 행위를 미신 시 하는 경향이 있고, 다른 또 하나는 혼자서 주문 수련을 하는 도중에 강령의 상태에서 그 때 그 때 떠오르는 현상이나 여러 형태의 글자나 문양을 종이 위에 옮겨서 스스로 탄복하거나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탄복토록 하면서 그것을 영부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근년에 출판되는 몇 가지 연구 간행도서에서도 영부에 대해서만은 어떤 문제의식이나 특별한 영부활용의 제안이 없어 보이고, 영부에 대한 지극히 일반적인 견해의 선을 넘지 않으며, 아직도 야뢰 이돈화의 교리해설수준과 그 범위선상에 머무르면서 조심스러워 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아쉽게도 해월선생의 법설 중, <궁을은 우리 도의 부도요 천지의 형체이다. 그런고로 “성인이 영부를(之) 받으시어 그 영부로써 천도를 행하시고 그 영부로써 창생을 건지시니라”(故로 聖人이 受之하사 以行天道하시고 以濟蒼生也니라)> 라는 대목에 대한 명료한 분석이 선행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영부의 개념정리 수준에 머물러 있지 않나싶다.
도서출판모시는사람들 발행 라명재 저 “천도교경전공부하기” 21면
○영부는 지극한 수련을 통해 생명의 원형을 체험한 것을 형상화한 것이다.
영부를 받는 사람의 몸과 마음의 상태에 따라 그 형태는 모두 다르지만 태극과 궁을의 모습이 가장 많은 유형을 나타낸다. 그것을 타서 마신다는 것은 자신이 체험한 것을 영원히 잊지 않고 지키겠다는 맹세의 의미가 아닐까?
○예부터 제사를 지낸 뒤 지방을 불에 사르곤 했다. 그것이 잘 타오르며 하늘로 잘 날아오르면 제사를 지낸 정성이 하늘에 잘 전해지는 것으로 여겼는데, 영부를 태운 뒤 물에 타서 먹는 것도 같은 풍습이라고 생각된다.
○한지에 먹으로 그린 영부는 그것을 태운 재를 물에 타서 먹는다 해도 의학적으로 해가 될 것은 없다. 오히려 요즘도 중독 환자에게는 독을 중화하기 위한 활성탄을 먹인다. 또한 영부를 탄 물은 영부에 담긴 생명의 원기를 물 분자에 기억하고, 복용하는 사람의 생명을 북돋는 역할도 할 수 있을 것이다.(방건웅. 물은 모든 것을 기억한다. 신과학이 세상을 바꾼다)
도서출판모시는사람들 발행 윤석산 저 “동학교조수운최제우” 107면, 108면
○해월선생은 궁궁 또는 궁을을 “마음”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궁은 天弓이요 을은 天乙이니 궁을은 天地의 形體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즉, 궁궁 궁을은 “마음”이며 동시에 “천지의 형체”라는 말이다. 종합해 보면 영부란 다름이 아닌 우주의 근원을 표상화 한 것이며 그 형태인 궁을은 약동하는 천지의 형체를 나타내는 것이요 동시에 사람의 본원적인 마음을 표상한 것이 된다.
○영부를 신령스러운 부적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러므로 부적의 부정적인 면, 즉 祈福이나 逐邪의 민간신앙 측면에서 영부를 해석하고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본래 符籍이란 符合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말이다. 따라서 靈符란 “靈의符合” 즉 “신령스러움의 부합”을 뜻한다. 수운선생이 결정적인 종교체험의 순간에 들었다는 한울님의 마음이 수운선생의 마음과 한 치도 어긋남이 없이 부합했다는, 그 “오심즉여심”의 표상이 곧 영부인 것이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나의 마음과 천지의 형체가 부합된 것을 영부라고 하겠다.
한편 동학의 변성 종단인 어느 증산계열에서는 아래와 같은 내용으로 좀처럼 이해할 수조차 없는 “영부도법전수식(靈符道法傳受式)”이라는 것까지 만들어서 인터넷 상의 온라인과 실재 훈련 현장에서 민중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는 것을 보면, 증산의 후예들에 의한 동학영부의 난법난도가 과연 언제 어디까지 이어질지 모를 일이다.
이야기 현무경
매일 주송(呪誦)하는 시천주(侍天主)는 “증산天主님을 모신다는 뜻”인데, 이것이 바로 靈符를 몸에 모시는 거라 한다. 강증산이 숨을 거둔 것을 화천(化天)이라 하는데, 증산이 화천을 하면서 열석자의 몸으로 다시 오겠다고 하였다. 13자는 공전과 자전의 일치를 가리키는 것인데, 이것이 곧 음양의 일치이고 이 음양의 일치를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 靈符라고 한다. 즉 이 세상에 다시 오는 증산의 몸이 바로 영부라는 것이다. 인간들이 만든 문자는 인간들만이 소통하는 도구였으나, 영부는 天.地.人.神 四物이 소통하는 도구이므로 그것을 망각치 말라고 가르친다. 이 영부를 자기들의 심령신대에 심어놓고 매일 물을 주고 키우다 보면 언젠가는 자신의 몸 전체가 靈符로 화하는 체험을 하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자기 몸이 온 우주를 다 뒤덮는 거대한 기운 덩어리라는 것을 알게 된단다. 이 “영부도법전수식”에서는 이 영부를 心靈神臺에 각인하고, 생문방위에 맞추고, 28星首符를 치고, 年月日時 分秒頃刻까지 맞추어 황극구궁도수에 맞추고, 비신을 불러오고, 자기 염원을 侍天主를 통해서 나타내며, 천문지리, 풍운조화, 팔문둔갑, 육정육갑, 지혜용력 하게 해달라 하고, 5呪를 이루게 해 달라는 소원을 적고, 자신의 이름을 적어서, 매일 일기를 치는 법을 일러 준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내지 말고 자기의 심령신대에 새긴 영부를 기운으로 화하게 하라고 가르친다. 그러면 영부 속에 들어있는 至氣를 타고 노니는 乘遊至氣가 된다는 것이다. 즉 여러분 모두 강증산이 남긴 현무경에 등장하는 영부를 타고 놀아야 한다. 나중에 알게 되겠지만 매일 영부의 지기를 타는 수행을 하다보면 기존의 단전호흡이나 기공수련이 감히 따라올 수 없는 능력이 솟는다는 것을 알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유의 할 것은 최근 천도교에서 사용하고 있는 궁을기(弓乙旗)와 궁을장(弓乙章)을 “용담영부”로 착각하여 이를 오용하거나 혼란을 야기하는 경향도 가끔 있다. 그러나 궁을장과 궁을기는 의암 손병희선생이 동학을 천도교라는 근대종교로 개명공포 할 때, 양한묵, 오세창, 권동진이라는 일본 망명 중이던 세 사람의 신진 개화인재들에게 부탁하기를, 영부의 이치를 참고하여서 천도교라는 한 종교단체의 상징적 로고(弓乙章)와, “깃발”(弓乙旗)을 새로 창작토록 지시하여 만든 것이지, 이 궁을장의 형상이 곧 수운선생이 직접 그려서 탄복하였던 동학의 영부(符圖)와는 별개라 할 것이다.
10. 영부의 부흥과 동학(천도) 포덕의 문제점
실용주의(Pragmatism) 철학의 확립자요 근대 심리학의 창시자로 잘 알려진 윌리엄제임스(William James)는 “종교체험의 다양성”이라는 그의 명저에서 “신비적 종교체험의 특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네 가지를 밝히고 있다.
신비적 종교체험의 특징
①. 첫째는 “언어 표현의 불가능성”이라는 것이다.
즉 종교체험의 전 존재를 뒤흔드는 의미 깊은 실재의 체험 속에서 그 체험의 진정성과 확실성을 체험하는 당사자는 확신을 하지만, 종교적 체험의 인식론적 특징이 체험자와 체험대상자의 인식론적 “주객구조”를 초월하는 면이 있으므로 일상적 언어로써는 표현해 내기가 어렵기 때문에, 각종 ‘이상적 행동’ ‘상징적 언어’ ‘신령한 부도’ ‘황홀경험’ 등을 동반한다는 것이다. (동학의 영부(靈符) 같은 것이 여기에 해당된다고 본다.)
②. 두 번째는 이지적(理智) 특징이다.
신비적 종교체험은 단순한 이성의 합리적 논리와 이해를 넘어서는 실재의 참여적인 깨달음을 말하는 것이다. (동학 천도교에서 말하는 각천주(覺天主)가 여기에 해당된다고 본다.)
③. 세 번째는 일시성(一時性)이라는 것이다.
신비적 종교체험에서는 일상적(日常)이거나 균질적(均質)인 것, 또는 등가적(等價)이거나 객관적(客觀)인 시간흐름의 관념이 초극된 영원한 현재 속에서 극히 짧은 시간동안 이뤄진다는 것이다. (동학 천도교에서 말하는 의암선생의 “적멸굴 강시(降詩)”같은 것이 여기에 해당될 것 같다.)
④. 네 번째 특징으로서 수동성 내지는 피동성 특질이다.
보통 인간이 연성수련 과정의 종교체험에서 자기존재의 변화과정이 인간자신의 주체적 참여와 책임을 동반하면서도 인간의 힘을 넘어서는 초월적 능력에 힘을 입어서 이루어진다는 좀 독특한 종교체험의 현상학적 특징이다.
이상의 특징과 관련하여 한신대학교 김경제 교수가 “천도교 현도 일백주년”을 기하여 동학학회에 발제한 논문 중에서 다음과 같은 지적과 충고를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천도교에서는 동학창도 46년만인 1905년에 “동학”이라 불리어지던 종교단체의 이름을 천도교로 개칭한 다음 세 가지의 이유와 의미를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천도교 현도시대의 급진적인 교리근대화 과정에서 이러한 종교체험적 특징들을 얼마만큼 신묘하게 지탱시키고 살려왔는지, 아니면 종교 신앙의 실천 및 체험과는 무관했던 학술이론가들에 의해서 교리근대화가 진행되면서부터 영부와 같은 신비적 종교체험의 신묘한 신앙성을 지탱시키지 못하고 상실해 버렸는지 다시 한 번 살펴볼 일이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이 언급하는 천도교 “대고천하”의 입장과 의미는 다음과 같다.
①. 일본의 간교한 조선식민지 정책에 휩쓸려 들어간 일진회의 반민족적 이미지를 불식시키고 동학 내부의 혼란을 일거에 수습해야 할 긴박한 정치사회적 입장.
②. “동학농민혁명” 이후 동학당에 대한 정치세력권의 끊임없는 탄압과 부정적 이미지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근대시대에 걸 맞는 종교 신앙의 자유와 포덕활동을 정당하게 보장받으려는 의도.
③. 사회변혁의 문화적 접근을 통하여 교정일치와 성신쌍전의 기본입장을 관철해 나가고, 동학의 본래 목표였던 포덕천하 광제창생 보국안민을 달성 할 의도.
<동학학회 학보 : (김경제)종교적 입장에서 본 현도 100년의 천도교>참조
다시 말해서 천도교 대고천하 초기의 교리근대화 과정에서 발전시킨 천도교의 인간론과 한울님의 이해는 사실 성심신삼단론(性心身三段論)에 의하여 좀 더 발전시키고자 하였으나, 그 이론을 현대 유기체 철학의 대표적인 사상인 과정철학과의 대화를 통해서 좀 더 미시적인 면에서 섬세한 논리적 발전을 시키지 못하고 정체되어버림으로서 성심신(性心身) 삼단에서 몸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중요한 계기를 놓쳐버리고 전통적 동양사상의 성리학적 이기론(理氣論)이나 불교적 일심론(一心論)철학 속으로 또다시 함몰되어버릴 위험성을 안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교리근대화 이후로 천도교가 “인내천(人乃天)”을 그 종교의 모든 정신을 드러내는 표어로써 종지(宗旨)라고까지 주장을 할 때, 동학 초기의 역동적이었던 “강령체험”과 한울님을 굳건히 믿고 기다리는 “시천주신앙(侍天主信仰)”, 그리고 인간의 진솔한 대원(大願)에 의해서 감응하고 응답을 하기도 하는 “내재적 초월자(內在的超越者)로서의 신령한 지기(至氣)와 영부(靈符)의 신앙은 사라져버리지는 않았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이런 점에서 천도교 영남지역의 대 두목으로써 천도교의 교령을 역임한 묵암 신용구는 그의 강론에서 천도교인들이 “인내천을 함부로 남용하게 되면 무천(無天)이 되니 조심해야 하며 인내천은 반드시 시천주를 원리로 하고 사인여천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주의를 여러 차례 환기시킨바 있다.
다시 말해서 수운선생에게는 분명히 내 안에 모셔져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나와는 구별된 초월적 신령을 경외지심으로 받들어 모시면서 내 몸과 마음으로 천령(天靈)이 강림하시기를 대원하는 한울의 “님”이 분명히 계셨는데, 교리근대화를 거치면서부터, 한울님을 내 몸에 모시어서 신앙하는 종교라기보다는 “자천자각(自天自覺)”만을 강조하는 “인내천종교철학체계”로의 인식변화로 진행되어버리고, 이로부터 지기(至氣)의 약동에 의한 영부(靈符)의 심법신앙이 미신 시 되어버리지 않았나 싶다.
실재로 인내천의 교리를 천명한 교리해설서인 대종정의에서 양한묵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수운대신사는 천도교의 元祖라. 그 사상이 博으로 徒하야 約히 倫理的 要點에 臻하니, 그 要旨는 人乃天이라 人乃天으로 敎의 客體를 成하며 인내천으로 認하는 心이 그 主體의 位를 占하여 自心自拜하는 敎體로 天의 眞素的 極岸에 立하니 此는 人界上 初발명한 大宗正義라 위함이 족하도다.
여기서 동학 천도교의 원조가 수운대신사라는 것을 분명히 명기하여 도통이 수운선생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동학의 정통신앙임을 밝히고는 있으나, 수운사상의 본질인 종교적 영성(靈性)보다는 윤리적 요점에서 파악하면서 그 요점을 인내천이라고 단정하였다. 이 내용을 검토하여 보면 수운선생의 시천주신앙과 그 표현만 다를 뿐 본질상으로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믿으며 따르라고 요청할지 모르나, 이에 대한 일반적인 소감은 동학의 종교성 약화와 더불어서, 원래 한울님의 계시종교를 인간중심적 자각종교로 변질시켜버릴 위험성을 크게 안고 있음을 지적하지 아니할 수 없다.
또한 교리근대화 후기에 와서도 야뢰 이돈화에 의해서 집필된 “천도교창건사”의 다음 내용 같은 것들도 동학의 종교성 상실과 장기적으로는 교세의 쇠락에 심상치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吾敎의 과거는 의뢰시대라. 故로 天이 奇蹟과 靈蹟으로 人을 導하였으나 오교의 금일은 熙和시대라. 譬하면 白日의 當天에 萬象이 含輝함과 같으니 비록 纖雲이 있다 할지라도 午天에 至하여서는 天下大明하리라. 우리 신도는 이제로부터 天主와 神師께 의뢰하는 마음을 타파하고 自天을 自信하라. 만약 自天을 自信치 못하고 天師만 의뢰하면 臨事에 自力을 얻지 못하여 진실한 建步를 얻지 못하리라. 自天은 侍天主의 본체니 唯我信徒는 주체와 객체를 구별하여 수련하라.
위 인용문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한울님의 기적과 영적을 믿거나 한울님에게 의뢰하는 신앙심을 매우 유아기적(幼兒期的)인 인간 발달단계의 종교적 심리상태라고 규정하고 있는 점이다. 본래 수운선생이 “나는 도시 믿지 말고 한울님만 믿었어라”했던 말씀과도 어울리지 않는 대목이다. 그리고 한울님과 인간의 상호관계가 역설적인 관계가 아니고 단순하게 균형적인 관계이어야 한다고 해석하는 사상이 매우 과학적이고 멋있어 보일지는 몰라도, 이러한 교리사상을 접하는 세상 사람들은 이런 교리를 이해하고 칭찬은 할지언정, 그들이 결코 믿음과 신앙의 세계로 들어오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균형이 현실에서 지속되지 못할 때는 언제든지 인간중심주의로 돌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혹자들은 이러한 계몽주의적 교리사상의 모든 책임을 당시의 수장이었던 의암선생에게 돌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동학의 3세 종통인 의암 손병희 선생은 탁월한 시대적 경륜가로서의 기질을 겸비한 영웅적 민중의 지도자로 불리기도 하였지만, 그러나 그는 어디까지나 교리를 정교하게 정리하고 발전시키는 학자적인 이론가는 아니었다. 오히려 의암선생은 수운과 해월선생의 심법전수에 의한 종교체험을 중시하는 실천가였으며, 한울님의 감응과 연성수련에 정진토록 강조하는 종교가였고 성인으로서 함부로 범접하기 어려운 카리스마를 지니신 분이었다.
또 의암선생이 1896년 해월신사로부터 도통을 전수받은 후, 그해 5월 해월선생의 명을 받아 법대도주로서 각 포의 접주들에게 발송한 다음과 같은 경통(敬通)의 내용을 보더라도 의암선생의 사사상수(師師相受)하는 도풍을 더욱 느낄 수 있으며, 약간 어찌 투리하여 자기가 강론한 것을 가지고 그것이 마치 선생의 설법인 것처럼 잘못 펴는 것을 크게 경계하시는 분이었음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경통(敬通)
우리도의 종지는 많은 말로 해야 되는 것이 아니요, 모두 정성, 공경, 맏음, 이 세 가지에 있다는 뜻은 전후 通示하여 거듭 반복했을 뿐이 아니로되 ..... 어떤 사람은 (선생의) 같은 말을 다르게 펴는 자도 있으며, 어떤 사람은 亂法亂道하는 자도 있으니, (처음의) 털끝만한 차이로 인해서 (나중에) 千里의 차이로 어긋나는 것이 있는지라, 어찌 민망하지 않은가. 명을 어기고 법을 그르치는 조목을 기록하여 간절히 권하노니 이에 의해서 시행하여 혹 한 가지라도 잃은 것이 없으면 천만 다행한 일이라.
①.내수도와 식고는 의례히 낮은 일로보고, 이치를 통하는 것을 위가 된다고 말을 하니, 이것이 과연 天命에 부합되는 것이겠는가. 진실로 이와 같으면 사람들에게 나를 위하도록 가르치라는 천명이 어디에 있겠는가? ...중략.......
⑤(자기들끼리) 아래에서 강론한 것을 丈席(스승님)에서 말한 것이라고 통칭하여 잘못 전해진 것이 많으니,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 잘못 전한 것을 또다시 잘못 전하니라. 이제로부터는 혹 마음이 열린 자가 있어 약간 논한 것이 있다면 그 사람이 傳布한 것이라고 지적을 하고, 이것을 丈席(스승님)께서 설법을 한 것이라고 잘못 전하지 말라.
다시 말해서 천도교의 현도 초기에 민중계몽을 위하여 급진적인 근대화 교리서 발굴에 몰두한 일부 개화파 지도자들이, 의암선생의 격조 높은 도풍(道風)을 읽어내지 못하고, 의암선생의 설법을 문자화 하는 단계에서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학자들 끼리나 할 수 있는 종교철학적 신념체계를 수립하려고 애를 썼을 뿐, 일상적인 민중(창생)들에게 깊숙이 뿌리를 내려 나갈 수 있는 종교신앙적 심학(心學)의 실천교리를 품어내지 못 한데에 그 원인이 있다고 할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이 의암선생 사후 일백년의 천도교 교세의 분열과 포덕 쇠퇴의 원인으로 작용하지 않았나 싶어 향후 동학의 포덕을 위해서는 수운심법의 핵심인 주문공부와 더불어 영부공부의 부활이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의미에서 당시의 이웃종교인 불교의 지도자 만해 한용운(韓龍雲)도 천도교의 기관지인 신인간 1928년 1월호에 다음과 같은 충고의 기고를 한 사실이 있다.
더 심각하게 종교화가 되어라
천도교에 대해서는 主義로 보든지, 歷史的 事實로 보든지, 현재 堅實한 團結로 보든지, 평소부터 많은 감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제 새삼스럽게 무슨 희망이니 감상이니 할 것은 없겠지요. 그러나 한 말씀하라고 한다면 나는 이런 말씀을 하고 싶습니다.
즉 “좀 더 심각하게 종교화가 되라”는 그것입니다. 현대에 와서는 어떤 종교든지 그 자체가 될 수 있는 대로 俗化되고 社會化하고 民衆化하려고 노력을 하는 모양이나 그러나 종교로서는 언제든지 종교화가 되지 않으면 그 자체의 힘을 保持하기 어렵습니다. 즉 속화, 사회화가 되는 만큼 종교자체에는 힘이 미약해 집니다.
천도교가 과거에 있어 그 만큼 튼튼한 힘을 얻어온 것은 돈의 힘도 아니요 지식의 힘도 아니요 기타 모든 힘이 아니요 오직 주문의 힘 인줄 생각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주문을 일종 종교적 의식으로 보아 우습게 보는지 모르나, 나는 무엇보다도 종교적 집단의 원동력으로서 呪文을 가장 의미심장하게 봅니다.
천도교의 그만한 힘도 주문에서 나온 줄로 생각합니다. 보다더 심각하게 종교화가 되어 주십시오. 그렇다고 사회사업이나 시대상에 등한히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별개의 문제이니까요.
11. 맺는 말
1920년대 천도교의 근대 종교화기를 지나면서 신진개화 지도자들의 급진 교리근대화 과정에서 구 동학 시대의 영부공부가 미신시되었거나 자취를 감춰버린 지가, 어언 1세기에 이르렀다. 필자는 새로운 시대의 요청이기도 하는 동학이 기지개를 펴지 못하고 움츠러드는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오랫동안 고민하였다.
그리고 그 원인을 수운선생이 전해주고 강조한 영부와 주문의 심법상실에서 찾아보았고, 그 중에서도 영부망실의 원인과 그 회복에 중점을 두고 이 글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동학의 교조시대(敎祖時代) 용담의 영부공부에 대한 자취를 살펴보고, 수운 최제우선생이 한울님으로부터 분부를 받아 직접 수백 장을 그려서 탄복하시고, 그리고 그 부도를 수제자들에게 전수하여 가르쳐 왔던 그 영부의 원형과 진면목을 찾아보면서, 이것이 동학의 포덕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살펴보고자 하였다.
수운선생이 동경대전에서 영부에 대하여 직접 거론한 대목은 포덕문(布德文)과 수덕문(修德文) 두 곳이며, 한글가사 편에서는 안심가(安心歌)에 무려 8페이지에 걸쳐 강조하였다. 포덕문에서는 전체 글의 사분의 일가량을 영부에 대하여 할애(割愛)하였다. 그리고 영부를 거론할 때는 반드시 “영부”를 “포덕”과 등가(等價)의 원칙처럼 연관시켜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布德文 : 受我此符 濟人疾病 受我呪文 敎人爲我 則 汝亦長生 布德天下矣
修德文 : 賢士問我 又勸布德 胸藏不死之藥 弓乙其形 口誦長生之呪 三七其字
포덕문 : 서양의 그리스도교로서 세상사람들을 가르칠 일이 아니다. 나(한울님)에게 영부가 있으니 나의 이 부도를 받아 세상 사람들을 질병에서 건지고, 나의 이 주문을 받아 한울님을 위하도록 가르쳐야 너(수운선생)도 오래 살아 포덕천하를 할 것이다.
수덕문 : 지혜로운 선비들이 나(수운)를 찾아와 문답을 하며, 포덕을 권할 때 가슴으로는 궁을의 형상인 불사약(영부)을 간직하도록 하였고, 입으로는 장생을 하는 삼칠자의 주문을 외우도록 하였다.
이처럼 동학은 창도당시의 한울님 명교(命敎)처럼 영부(靈符)와 주문
(呪文)을 가지고 광제창생(廣濟蒼生)을 하게 되면 포덕천하(布德天下)
가 자연히 이루어지리라는 후천 태초의 한울님의 말씀과 이 심법 속에
서 동학 포덕의 길을 마련한 수운선생의 “오심즉여심(如合符節)의 가르침을 호말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다면 천도교에서 세상 사람들에게 밝힐 수 있는 진리란, 영부(靈
符)와 주문(呪文)의 이치(理致) 외에 다른 것이 또 뭐가 있으며, 과연
오늘날의 동학은 이 영부와 주문의 이치에 대해서 과연 얼마나 세상 사
람들에게 자세하게 밝히고 설명할 수 있는지 성찰(省察)해야 할 것이
다.영부(靈符)의 이치를 밝히기 위해서는 학문적으로나 과학적으로 그 근
거를 밝혀내서, 세상 사람들을 설득해 나가야 될 것이다. 그리고 실제
활용사례(活用事例)를 많이 발굴해내는 일도 중요할 것이다.
아마도 동학하는 사람들의 거의가 영부(靈符)를 마치 미신(迷信)처럼
생각하는 가운데, 동학의 교리근대화 시기의 철학사상 즉 격의동학(格
義東學)수준에 치우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다각적인 시각에서 동학
의 심법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좋다. 그러나 그러한 다양한 일련의 해석
들이 정당성을 인정받으려면 동학심법(東學心法)의 본질에서는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천도교의 발전과 융성기에는 매우 다양한 동학의 해석이 시도되었다.
유교, 불교, 도교는 물론, 기독교, 진화론과 같은 이론까지 동학 해설의 틀로 사용되어 그야말로 백가쟁명의 시대를 연출하였다. 이 과정에서 야뢰 이돈화와 같은 걸출한 인물이 나와서 서구사상과 진화론을 해석의 틀로 사용한 천도교의 독특한 사상이 형성되었다. 그 이후로 동학천도교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별다른 이론의 변화가 없다.
그동안 필자가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부분은 원형영부도(原型靈符圖). 즉, 수운선생이 해월선생에게 도통전수 시 전해 주었던 물형부(物形符)에 대해서였다. 그리고 해월선생이 강원도 태백산 적조암에서 제자들에게 영부도 익히는 공부를 시켰고, 그 광경을 지켜보던 그 절의 고승 철수좌가 人作이 아닌 조화의 자취라고 감탄하였던 그 영부도(靈符圖)에 대한 추적과 탐구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판단했다.
수운선생은 안심가의 기록에서 <수운선생 자신이 생전 보지 못했던 물형부
가 종이위에 완연하였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그 당시 세간에 나돌고 있던
이런 저런 부적들의 형태와는 전혀 다르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수
운선생이 개벽시국초일에 처음 본 물형부는 매우 독특하고 구체적인 형상이
었을 것이다. 그리고 수운선생 스스로 수백 장을 그리고 마시는 과정에서
천도와 천리에 맞도록 다듬어졌다고 봐야 할 것이다. 바로 그러한 부도(符
圖)를 해월선생에게 도통 전수를 할 당시에 수.심.정.기(守.心.正.氣)라는 네
글자 그리고 수명(受命)이라는 두 글자와 함께 전해(施賜) 주었을 것으로 생
각된다.
따라서 오늘날 수련하는 사람들이 강령의 상태에서 붓 나가는 대로 <수심
정기>나 <마음심자>같은 문자, 혹은 <궁궁자>나 <새을자>비슷한 형태로
아무렇게나 흘려놓는 양태(樣態)는 분명한 정체성을 가져야하는 무극대도에
혼란을 야기할 뿐, 이런 것들을 수운선생이 생전 보지 못했던 물형부(物形
符)라고는 말 할 수는 없겠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필자가 어린 시절 조부님(1889년생 原菴 朱水一)으로부터 수없이 들은 구전(口傳)에 의하면, 해월선생 시대의 영부수련은 일정수준의 수심정기(守心正氣)가 된 사람에 한해서, 비로소 수운선생이 전해준 부도(符圖)를 익히는 영부공부에 입문(入門)하게 되는데, 이때는 엄격한 필법(筆法)에 따라 정신을 집중하고, 붓 끝에 온 정성을 모아 한번 종이 위에 붓을 대면 부도가 완성 될 때까지 먹물을 뭍이기 위해 종이에서 붓을 떼는 일이 없어야 하며, 선(線)과 줄의 간격이나 굵기가 한결같이 고르게 마무리되어야 초급단계를 마친다 하였고, 이와 같은 지고한 영부 익히기의 절정에 이르러야 내 마음과 수운선생의 마음이 여합부절을 이루는 영부도(靈符圖)를 완성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로 미루어 보면 동학경전의 필법(筆法)편을 단순히 글씨 쓰는 법으로 해석하지 않고, 영부를 익힐 때 붓을 쓰는 방법으로 이해하여 대략 다음과 같이 해석 할 수도 있을 것이다.
修而成於筆法 其理在於一心
닦아서 (영부를) 이루는 것이 붓을 다루는 법에 있으니,
그 (영부의) 이치가 한 마음에 달려있다.
象吾國之木局 數不失於三絶
우리나라는 굳건한 나무형국으로 상징됨으로
세 번 끊어지는 위기에도 그 운수를 잃지 않도록 되어 있어서
生於斯得於斯 故以爲先東方
내가 이 나라에 태어나서 무극대도를 이 나라에서 얻은 것인 고로
그 (포덕을) 우선 이 나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며,
愛人心之不同 無裏表於作制
사람들의 마음이 본래의 천심처럼 한결같지 않음을 어여삐 여겨
(영부도를) 지을 때 안팍이 없도록 만들었노라.
安心正氣始畫(화) 萬法在於一心
그러므로 영부圖를 익힐 때는
먼저 마음을 평안히 하고 기운을 바르게 하여서 그려나가기 시작하되
만법이 한 점으로부터 시작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前期柔於筆毫 磨墨數斗可也
(영부도를) 그리기 전에 붓끝의 촉을 부드럽게 하고
글의 형상을 셈하여 먹을 가는 것이 옳으니라. (斗 = 書形 =書法이나 글씨의 형상)
擇紙厚而成字 法有違於大小
또 종이는 글자를 쓸 때처럼 두터운 것을 가려서 택하고
(영부 익히는) 법이 (선의 굵기가)크고 작거나, (선과 선의 간격이) 넓거나 좁아서
(전체 모양이) 어긋나지 않게 하는데 있으니,
先始威而主正 形如泰山層巖
먼저 위엄으로 시작하여 기운을 바르게 함을 주로 삼아 그려나가야
(영부의) 형상이 태산의 층암과 같이 될 것이다.
또한 필자가 지금까지 접한 자료들과 사고(思考)에 의하면, 아무리 동학의 주문수련에 의한다 할지라도, 동학의 영부도(靈符圖)에 대한 아무런 규범이 없고, 일정하고 엄격한 훈련의 기준도 없이, 그리고 수련수준 정도의 차이와도 관계없이 누구나 개별적으로 아무렇게나 떠오르는 대로 수십 가지의 그림이나 글자를 종이위에 올려놓는 행위는 그것이 비록 부적적(符籍的)인 가치를 가지고 약간의 영험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결코 무극대도의 정체성을 가진, 동학심법(東學心法)로서의 물형부(신령스러운 부도)로 정의 할 수는 없겠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바라건대 동학하는 사람들이 그동안 잃어버린 영부심법의 회복을 위하여 영부공부에 입문하려 한다면, 그동안 학문적으로 붐을 일으키고 있었던 “동학사상 연구” 및 “동학교리 현대화”의 열성 못지않게, 불과 백년 남짓한 세월 이전에 분명히 실존하고 행해졌던 동학의 영부(물형부)에 대하여, 종교 신앙적인 측면에서 귀납을 하고 더욱 심도있게 연구해 나가야 할 시점이라는 문제제기를 하면서 필자의 영부고찰을 마무리 짓고자 한다. 수운선생의 영성(靈性)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과거로 퇴행하는 것이 아니다. 주문수련과 함께 잃어버린 영부수련을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근본을 살려서 지엽을 무성하게 하고, 다시 열매를 맺게 하는 동학포덕의 근원적인 처방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끝)
2012년 8월 8일 정암 주선원 心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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