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김용범 /시인·문학박사
얼마 전 의정부의 부대찌개 집에서 미군부대 잔반(殘飯)에서 건져낸 햄이며 소시지며 베이콘 등으로 찌개를 끓여 팔다가 무더기로 적발된 적이 있었다. 그 기사를 보며 너무나 당연한 일이 이제는 식품 위생법에 저촉이 되고 사회문제가 되는 세상이 되었다는 생각에 새삼스러웠다. 부대찌개란 것이 원래 그런 것 아닌가. 미군이 우리 땅에 진주하면서부터 생겨난 국적불명의 음식. 잔반통에서 추려낸 육고기들을 섞어 끓여 먹는 음식인 꿀꿀이죽이 그 근원이다. 필자는 꿀꿀이죽을 먹던 세대는 아니고 의정부식 부대찌개 세대에 속한다.
70년대 초 의정부 자금동에서 군대생활을 했던 필자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음식이 바로 의정부식 부대찌개이다. 외출을 하거나 외박을 하고 부대로 들어오는 길이면 어김없이 걸고 푸짐한 부대찌개를 찾아 먹던 세대이니 아마도 그 족보상으로 보면 2세대에 속한다. 그러니 부대찌개라면 잔반의 고기 아니면 유통기한을 넘겨 폐기처분 일보직전의 짜디짠 냉동 소시지들이 원재료임을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 들인 셈이다. 그러니 원조 집에서 원래대로 만들어 파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느냐는 것이다. 그러려니 하고 먹어야 마땅한 음식에 시비를 붙는 것을 보며 격세지감을 느끼는 것은 웬일일까. 이렇듯 음식은 지역과 산지 그곳의 역사만큼 중요한 것이 바로 세월의 맛이란 점이다. 겨울이 되면 어딘가에서 나타나는 붕어빵이며 국화빵. 설탕을 녹여 소다로 부풀린 뽑기. 지금도 변두리 초등학교 앞 문방구에 가면 어김없이 존재하고 있는 쫀드기니 아폴로니 시커먼 문어발을 보며 탄성을 지르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에게 이런 주전부리가 바로 시간을 넘어 세월의 맛을 실감케 해 주는 빌미가 될 것이다. 먹을거리 역시 마찬가지이다. 어느 시대엔가 우리주변에 흔하게 널려 있다가 어느 날 주변에서 슬며시 사라진 것들. 그 흔적도 찾을 수 없던 것들을 우연히 만나게 된다는 것 역시 큰 기쁨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그곳이 우연히도 인천에 있다는 사실 또한 흥미롭다.
옆구리가 터진 팥빵과 호떡, 월병, 공갈빵의 본산
나는 전차를 타고 학교를 다니던 마지막 세대이다. 지금은 세계일보 자리가 된 철도고등학교. 용산에서 을지로 4가까지 전차로 통학을 했다. 전차에서 내리면 참으로 유구한 중국집들이 그곳에 있었다. 오구반점이 그러했고 전통의 중국집 안동장이 그러했다. 갈빗집 조선옥 옆에는 중국집들에 장을 공급하던 승리간장 가게가 있었는데 한 되씩 되로 간장을 팔았다. 스카라 극장으로 올라오는 길에 작은 중국빵집이 있었다. 지금은 흔적조차 없어진 호떡집은 길옆으로 난 창에 옆구리를 잘라 팔소가 드러나 보이게 만든 팥빵이며 공갈빵 차곡차곡 쌓아놓아 누가 봐도 분명한 중국 빵을 만들어 팔았다. 드럼통을 잘라 만들었음직한 화덕에서 구어 내는 그 빵들을 바라보며 애꿎은 전차표만 만지작거리던 기억이 새롭다. 더러는 추석을 앞뒤로 그 집에서는 월병을 팔았다. 가진 씨앗과 달콤한 건포도며 그런 것들로 가득 찬 바삭거리는 월병. 아침나절이면 막대기처럼 긴 기름에 튀긴 유조우라는 빵과 콩물을 판다. 그리고 중식 과자들 마치 맛동산처럼 생긴, 아니 맛동산의 원조일 듯한 과자들이 그 집에 있었다.
어느 해인가 부산에 갔을 때 동서대학에 교수로 있는 오랜 친구 남일재 교수를 만났는데 (그 친구는 국문과를 다니다가 뜻한바 있어 부산의 모 대학 정치과로 옮겼는데 서울과 부산의 두 과가 다른 두 대학 동창회를 들락거리고 있다. ) 내가 문득 호떡집이야기를 하니 불문곡직 나를 끌고 간곳이 부산 역 앞 텍사스 골목 화교학교 앞의 호떡집이었다. 이곳은 원래 부산 차이나타운이었는데 미군들이 들어오며 텍사스로 이제는 러시아 사람들이 들락거리며 로스케마을로 바뀐 곳이다. 오랜 역사의 흔적처럼 화교학교는 그 자리에 존재하고 있었으며 정문 앞에는 마치 60년대에 우리의 기억을 되살려 놓듯 만두 콩물 유조우 그런 것들을 굳세게 파는 집이 있었던 것이다. 옛 생각이 난다고 부산으로 달려 갈 수도 없다면 인천으로 떠나보라. 선린동 화교 촌에 100년의 역사를 지닌 마을 한쪽에 복래춘(福來春)이 버티고 있다. 어김없이 여러 사람들에게 잊었던 기억을 되살려줄 풍부한 월병과 중국 팥빵이며 과자들이 그곳에 있어 우리를 감동하게 한다. 한 개에 500원. 한 봉지에 1,000원에서 2,000원 변함없이 옛맛 그대로를 지키는 호떡집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날은 행복하다. 그 옆집은 상원 오향장육과 물만두(水餃子)맛이 정말로 예술인 노포가 나란히 있다. 5000원이면 60개 생만두도 판다. 이 어찌 감격스럽지 않겠는가! 프라자 호텔 뒤편에 최근까지 버티다가 헐려나간 오향장육집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침을 흘리며 인천으로 떠나야 할 판이다. 공갈빵과 만두는 신포동 시장의 산동만두집을 찾아야한다. 신포동 신포만두 본점 앞 시장입구에서 수십 년 공갈빵과 팥빵 고기만두 소위 뽀즈(包子)를 구어내고 쪄내는 산동만두가 있다. 여느 집과 달리 화덕이 집 앞에 있어 익숙한 솜씨로 반죽하고 구어 내는 모습을 보면서 바삭하고 공갈빵을 씹어 먹는 소리까지 잊었던 오감이 살아나는 곳이다.
수수부꾸미와 가자미 튀김을 아십니까 ?
연안부두 어시장은 신선한 어물로 가득 차 있는 곳이다. 서울에서 눈을 씻고 찾으려해도 없는 곤쟁이젓이며 조개젓 밴댕이젓이 지천이다. 꽃게 철이면 더욱 흥성한 어시장이 바로 이곳인데 사실 연안부두 어시장이다. 그러나 그곳에는 우리가 까맣게 잊고 있었던 길거리 음식들이 있어 우리를 감동하게 한다. 노점상 13호 전옥란 할머니(70세)가 부쳐내는 500원 짜리 수수부꾸미. 수수를 갈아 반죽하고 기름에 지진 뒤 거피한 팥소를 넣어 반달처럼 부쳐내는 이 먹을거리는 아마도 나보다는 십년 위의 선배들이 더 환호하는 것이리라. 한자리에서 19년을 버티고 있는 전할머니는 황해도 옹진 동남면이 고향인데 이남으로 피난 나와 당초는 어시장에서 생선을 받아 팔아가며 아이들을 길렀다고 한다. 맹이 엄마라고 더 잘 알려진 할머니가 힘이 부쳐 시작한 것이 황해도식 수수부꾸미이다. 하도 반죽을 해대서 엄지손가락이 기형으로 일그러질 정도이다. 여하튼 그 맛은 청계천 방산시장 초입이거나 동대문시장 근처 억척스러운 이북사람들이 장사판을 벌리던 곳이면 어김없이 존재했었던 길거리 음식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뜨거운 것이 좋다는 사람도 있고 약간 식어서 쫀득거리는 맛이 일품이란 사람도 있지만 그 집 부꾸미는 식혀먹을 시간이 없을 정도이다. 아니 주문하자마자 바로 구어 주기 때문에 식힐 여유가 없다는 말이 옳을지 모른다.
노점 13호에서 스무 걸음 쯤 가면 옷장사 할머니 (73세)네 튀김이 있다. 포장마차 두 대가 나란히 있는데 서로 자리를 일주일에 한번 씩 바꿔가며 장사를 한다. 길 거리표 튀김이 뭐 그리 신기할 것인가 묻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게 아니다. 오징어 튀김이나 고구마 튀김 야채 튀김이야 종로통 어디를 가도 있는 것이지만 언젠가 연기처럼 사라진 가자미 튀김이거나 꽁치 튀김 같은 생선 튀김들이 그곳에 옛맛 그대로 살아 있다. 유신 시절 학교가 문을 닫아 갈 곳 없는 군상들이 어슬렁거리며 찾아들던 지금 쁘렝땅백화점 자리 삼각동의 튀김집을 기억하는 사람들이라면 찌그러진 막걸리주전자에 담긴 카바이드 막걸리를 꽁치며 가자미 튀김과 함께 먹으며 절은 기름 냄새에 젊음을 불사르던 기억들이 새로워질 것이다. 그 뒤로 생선튀김집은 한양대 근처 기동차길 위로 옮겨져 여러 집이 성업하더니 정말 오징어다리만 남기고 감쪽같이 서울에서 사라졌다. 가자미 300원. 바닷장어튀김 3000원에서 5000원, 새우튀김이 천원 그리고 소주 한 병. 길거리 좌판에서 70년대 초반의 세월 맛이 살아나리라고 누가 생각했겠는가.
노란색 물감은 식용색소가 아니라 치자 물이라고 강조하는 할머니의 말을 들으며 오히려 식용색소이었으면 오히려 더 좋겠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천박한 입맛을 확인해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인천에 있었다. 세월은 흘러도 세월의 맛은 지워지지 않는 법이다. 인천에 가면 사십년쯤 시간을 거슬러 우리를 가난했지만 아름다웠던 시절로 되돌아 가게 하는 사람들이 있어 중늙은이들을 살맛나게 한다. |
첫댓글 산악대장'신상복'입니다!~좋은글!고맙습니다!
산악대장'신상복'입니다!~좋은글!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