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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이철수 새김 마을 이야기 길을 묻다, 길을 가다 낮이면 농사짓고 밤이면 기록할 뿐 글 김규호 역사지리학자 최영준 교수 이야기가 있는 맛 내 삶의 뿌리 ‘식해’ 글 김홍성 편집위원 함경도 팔순 어머니의 손맛 김경애의 풀빛밥상 소스 하나로 풍성하게 글\요리 김경애 풋사과샐러리샐러드·버섯들깨순두부탕·표고버섯탕수·통밀들깨과자 이 사람의 살림살이 인문학 공부에서 품앗이 공동체로 글 우미숙 편집위원 문탁네트워크 마을작업장지기 권성희 씨
[특집] 마을, 마을사람들 빛그림 이야기 나의 살던 고향은… 1993, 그리고 2012 우이천 글\사진 박영록 1 들어가는 글 : 우리가 꿈꾸는 마을 글 이호 마을에는 '마을사람들’이 산다 2 도시의 마을과 행정 : '뉴타운’을 넘어 '마을공동체’로 글 이주원 서울시 마을만들기, 성급한 결과를 경계하라 3 도시마을 다시 만들기 : 서울 삼각산재미난마을 글 김세진 편집부 아이와 함께 성장해온 마을 4 오래된 도시마을 되살리기 : 서울 장수마을 글 이선미 편집부 고치고 가꾸며 사람들이 뿌리내리는 마을 5 생산자 공동체 마을만들기 : 전북 부안 산들바다공동체 글 김세진 편집부 일도 놀이도 신명나게, '무공해’ 농부들 6 도시 젊은이들의 귀촌 : 전남 영광 여민동락 글 권혁범 농촌 어르신들과 살맛나게 이웃으로 7 도시에서 농촌으로 간 예술가들 : 예술과마을네트워크 글 박명학 '크고 빠름’을 버리고 열린 문화예술의 눈으로 8 농촌마을의 행정 : 진안군 마을만들기 10년 글 구자인 마을공동체를 되살리는 기초자치단체시스템 9 일본의 마을만들기 글 강내영 시행착오가 자치의 힘을 키운다 10 만화 수박공동체 그림 소복이
[연속기획] 핵 없는 세상을 위해 전체 전력량 1%에 목숨을 거나? 글 안재훈 35살 노후 핵발전소 고리1호기 재가동의 위험성 핵발전소 52기를 멈춘 일본은 지금? 글 이헌석 전체 전력 25%인 핵발전 비율 감소 노력
[살림살림] 제철살림 나물 말리는 계절, 나물 무치는 행복 글\사진 장영란 땅땅거리며 살다 우리 땅의 생명을 늘린 우렁이농법을 창안하다 글 김성희 편집위원 충북 음성 성미마을 최재명 씨 시골살림 길잡이 ⑦ 사람은 거들 뿐, 자연이 키우고 여물게 하라 글 전희식 아이살림 해태의 무덤에 올린 감자꽃다발 글 신순화 교육살림 부모를 떠나 하루하루 도전하기 글 카스아줌마 몸살림 자연과 하나되기 글 정현숙 말글살림 ⑧ 너랑 나랑 베프 '한올진 사이’ 사람 사이를 일컫는 우리말 글 박남일 살림이 눈여겨본 이 물건 보이는 거품, 안 보이는 위험 합성세제와 비누 글 윤선주 다시 본 이 물건 지금 숲을 파괴하고 있는 당신에게 휴지 글 이소영 편집위원 살림 오피니언 88만 원 세대의 역습 글 김형근 살림의 현장 그 밭에는 또다시 열매가 맺힌다 두물머리 농부 이야기 글 봄눈별 외 살림이 본 영화 '위안부’ 할머니와 십대 가출 소녀들 <그리고 싶은 것>과 <간지들의 하루> 글 이영진 살림이 읽은 책 왜 나는 음식에 집착하는가? 《음식 여행 끝에서 자유를 얻다》 글 윤미화 살림이 눈여겨본 새 책 《밥 한 숟가락에 기대어》 외 살림의 눈 인농 박재일 선생님 이주기에 정기구독 사랑하는 사람에게 《살림이야기》를 선물하세요
특집 6) 도시 젊은이들의 귀촌 : 전라남도 여민동락공동체 노인복지사업과 마을사업으로 농촌 어르신들 살맛나다
글. 권혁범 6년 전 농촌의 ‘농’자도 모르던 도시 젊은이들이 일을 벌이고 말았다. 30년 삶의 궤적을 송두리째 바꾸고 존재를 옮기는 일생일대의 변화를 시도한 것. 대학 선후배 관계인 세 부부가 귀농을 결심했다. 자립하기 위해 국가 보조 없이 시작한 노인복지센터 사실 구체적이고 치밀한 계획이 있었던 건 아니다. 살맛나는 세상을 꿈꾸며, 청춘시절에 의기투합했던 열정을 새로운 현장에서 펼쳐보고 싶었다. 복판보다는 가장자리에서보다 우직하게 사회적 실천을 해보자고 했다. ‘남들이 가지 않은 곳으로 가자’는 생각에 이르렀다. 어디선가 그 지역에 필요한 일을 하면서 살고 싶었다. 농촌복지센터를 하고 싶었다. 현재 여민동락공동체 대표인 강위원 씨의 제안으로 이곳, 전라남도 영광군 묘량면에 귀촌했다. 원하는 대로 '자립과 자치, 공생의 농촌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자립해야 했다. 그래서 국가의 보조를 받지 않았다. 2008년 개미 후원자들의 십시일반으로 노인복지센터를 시작했다. 하지만 초창기에 지역에 정착하는 과정은 힘들고 어려운 성찰의 시간이었다. 당연하게도, 마을사람들의 신뢰와 지지를 하루아침에 얻을 수는 없었다. 새로운 환경에서 적응하는 것 또한 녹록치 않았다. 해가 질 무렵이면 인적이 끊겼고, 고령화된 마을이라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들리지 않고, 면사무소와 보건소 같은 공공기관 외에는 그 어떤 생활문화시설도 존재하지 않았다. 집성촌 한가운데 허름한 농가주택, 그곳에 전혀 다른 성씨인 우리가 들어가 사는 건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도시 출신 젊은이들의 귀촌은 큰 관심거리였다. 세 부부가 모두 학생운동권 출신이라는 것 때문에 오해와 편견이 생기기도 했지만, 찾아다니며 해명할 수 없었다. 그저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 의견을 구하고 인사 잘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걸레를 들고 바닥을 닦고 경청해야 했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왼손엔 수첩을, 오른손엔 걸레를, 입가엔 미소를.'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여민동락의 철학이 되었다. 생각지 못했던 어려움도 있었다. 머리로만 구상했던 계획들을 실행하려니 막상 현장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게다가 농촌에 살아본 적이 없던 우리는 말 그대로 시행착오를 계속했다. 하지만 답은 현장에 있다고 생각했다. 성찰하고 토론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상황에 따라 계획을 변경하고 진행했다. 원래 노인복지센터보다 지역아동센터를 만들려고 했지만 종교단체가 먼저 추진하고 있어서 변경했다. 노인복지센터는 요양시설부터 재가시설까지 어느 정도 규모를 생각 했었으나 농촌에서 그럴 필요가 없다는 판단이 들었다. 작은 재가시설만 설립하고 대신 '마을로 찾아가는 마을복지사업'을 하기로 했다. 사무실은 주민사랑방으로 만들어, 책방 겸 찻집으로 내놓았다. 찻값과 이용료는 공짜다. 벽의 한 켠엔 이렇게 적혀 있다. “지역주민 모두가 주인이기에 찻값과 이용료는 무료입니다. 다만, 지나실 일이 있으시거든 호박 1개, 오이 2개, 고구마 3~4개 조용히 놓아두시면 그것으로 ‘행복’입니다.” 무엇인가를 하고 싶은데 무얼 할지 몰라, 지역 곳곳을 찾아가 어르신들에게 인사를 드리고 의견을 구했다. 그렇게 방역사업을 시작했다. 어디선가 후원물품이 들어오면, 모두 독거 어르신이나 마을 경로당에 나누었다. 그러고도 남는 것이 있으면 여기에 초보 농사꾼인 우리의 수확물을 더해 다른 마을을 찾아갔다. 경로잔치를 열고, 어른들의 바람대로 생신잔치를 열어 드리고 무료급식을 시작했다. 마을사람들이 어느새 조금씩 마음을 열고 우리를 반겨 주기 시작했다. 호박, 고구마, 마늘, 양파 등 직접 생산한 농산물을 하나둘 갖다 주기도 했다. 곳간이 빌 때마다 쌀을 두고 가셨다. “나랏돈도 받지 않고 허름한 시골집에서 검소하고 성실하게 지역에 좋은 일한다”며 손을 내밀어주니 더 잘하고 싶었다. 할머니들이 모싯잎 따고 송편 만드는 여민동락할매손 노인복지사업을 시작하고 1년이 지났는데, 고민이 생겼다. 농촌이 어두운 현실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방향을 이렇게 잡았다. 노인복지센터에서는 거동이 어려운 어르신에게 돌봄의 복지를, 건강한 대부분의 어르신에게는 스스로 생활이 가능하도록 일자리를, 지역주민들에게는 바르고 건강한 마을을 만들어 가도록 거드는 마을복지를 하자. 2009년 첫 번째 사업으로 모싯잎송편 공장 ‘여민동락할매손’을 시작했다. 특별한 기술이 필요하지 않는 데다, 모싯잎은 영광군의 특산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빚을 내 묘량의 한적한 곳에 공장을 세웠다. 마을 어르신들이 송편을 만들고, 여민동락은 판매했다. 들어오는 수익으로 운영비를 충당하고, 어르신에게 드렸다. 67명의 어르신이 일하게 되었다. 의외로 모싯잎송편의 인기가 좋았다. 다음 해엔 휴경지 3,000평을 임대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모싯잎을 심고 재배하고 삶아서 송편을 찌는 전 과정을 어르신들이 직접 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일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은 농사와 공장을 따로 하고 있다. 어르신들이 송편 만드는 걸 좋아하면 그것을, 농사하는 게 적성에 맞으면 그것을 하신다. 움직이는 가게 동락점빵 2011년에는 마을기업 ‘동락점빵’을 열었다. 가게가 없던 곳에 가게를 연 것. 묘량면은 여느 시골처럼 교통편이 매우 불편해서 버스가 하루 3~4차례밖에 다니지 않는다. 그런데 2010년 중반에 면소재지에 있던 유일한 구멍가게가 사라졌다. 막걸리 한 병 사러 읍내까지 가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동락점빵은 아예 '이문이 없어도, 사람과 사람을 잇는 마을가게'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효자 노릇을 하기로 한 셈. 어르신이 좋아하는 걸 보니 다른 마을 어르신이 생각났다. 아예 움직이는 가게를 하면 어떨까? 교통 불편과 거동 불편으로 어려움을 겪는 어르신들을 위해, 차량으로 이동하는 마을 장터를 열었다. 불편한 몸을 이끌고 두부 한 모, 고등어 한 마리를 사러 장에 나가는 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마을 42군데를 다닌다. 무엇이 필요한지 묻고, 어르신들의 그 소소한 욕구를 풀어드리려고 한다. 마을별로 조사하고 있다. 사실 동락점빵은 더 큰 목표를 가지고 있다. 농도직거래를 하는 유통의 거점이 되는 것. 모싯잎송편 공장, 영농사업단, 동락점빵이 어르신을 위한 사업이라면 농도직거래는 소농, 고령농, 귀농인들을 위한 사업이다. 올해부터 사업 준비를 시작했다. 지역의 개별 생산자들과 마을의 생산자 조직이 협의해, 3개년 로드맵을 실천하고 있다. 8개 법정리에 마을의 자원과 특성에 맞는 마을기업을 만들려고 한다. 지역공동체가 스스로 지역 문제를 풀어 가고, 공동체 관계를 회복하기를 바란다. 지역공동체복지모델의 초석이 되면 좋겠다.
지역공동체를 살리기 위한 장기적 사업이 하나 더 있다. 면에 유일하게 남은 교육기관인 묘량중앙초등학교를 되살리는 일. ‘행복한 작은 학교’라는 이름으로, 젊은 학부모들과 함께 학교 살리기를 시작했다. 이 학교는 학생수가 부족해 2009년 통폐합 대상이 되었다. 2010년 6학년이 졸업하자 아이들이 12명으로 줄었다. 학부모들은 작은 학교의 장점을 홍보하고, 학교 운영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교사, 학부모, 학생들이 민주적으로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구조를 만들었다. 처음에는 학부모들과 교사들이 갈등하기도 했다. 그러나 3년을 지내는 동안 상황이 좋아졌고, 학생수가 34명으로 늘어났다. 이렇게 변하는 것을 보면, 희망과 가능성 때문에 설렌다. 그러나 이제 귀촌한 지 겨우 6년, 사업을 시작한 지 5년이다. 조심스럽다. 최소 10년은 지나야 성과를 논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그때도 좋은 소식을 들려줄 수 있으면 좋겠다. 여민동락이 '지역주민과 더불어 함께 행복한 세상'을 만들고 있다는 소식 말이다. 여민동락공동체는? 전남 영광군 묘량면에 있는 농촌지역복지시설이다. 농촌의 교육과 문화, 경제적 자립을 고민하며 농촌의 삶터를 살리는 생활공동체가 되고자 한다. 농민들과 함께 농사짓고 시골학교에 아이를 보내는 생활일체형 공동체를 추구한다. 귀농하려는 사람에게는 빈집을 소개하고 여러 가지 도움을 주고 있다. (누리집: cafe.daum.net/ym3531141, 전화: 061-353-1141) 권혁범 님은 여민동락공동체 노인복지센터장으로 사는 게 즐겁습니다. 단순하고 소박하고 재미있게 그렇게 살아가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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