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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독립정신과 성경의 독립정신
마 22 : 37-39
청년 이승만은 고종 퇴위음모에 가담한 혐의로 한성 감옥에 투옥되었습니다. 조선이란 이름을 버리고 고종이 선포한 대한제국은 강력한 왕권 군주국가를 표방하였지만, 열강의 각축장이 되어버린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이를 통분(痛憤)하게 여긴 이승만은 1904년 그의 나이 29세에 독립정신이란 책을 옥중에서 저술하였고 이승만과 함께 감방 생활을 했던 박용만이 먼저 출옥하여 1905년에 트렁크 밑창에 원고를 감추어 미국으로 건너가서 1909년에 출간하였습니다.
미국 선교사들이 설립한 배재학당에서 이승만은 기독교를 접하게 되었고…. 미국의 독립과 그 선언문…. 그리고 자유와 평등을 쟁취한 프랑스 역사를 공부하면서 시대의 흐름을 알게 된 그는. 나라의 흥망성쇠가 정치제도에 달렸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으며 자유민주주의 체제만이 한 나라가 진정한 독립국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정치체제가 되려면 무엇보다도 모든 국민이 자주와 주체성을 가지고 한 개인으로서 각자가 독립정신을 가질 때…. 세계를 향하여 문호를 개방할 수 있는 자유민주국가를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이 이 책의 요지입니다.
전제 군주제 밑에서는 모든 힘은 군주에게서 나옵니다. 당시 조선은 고종황제의 나라로서 개인의 인권이나 독립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청년 이승만은 풍속이 고쳐져서 아래로부터 힘이 만들어져서 위로 올라와야 한다고 그의 책 “독립정신”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당시에는 참으로 놀라운 혁명적인 주장이었습니다.
이러한 파격적인 선언은 성경에도 있습니다. 고대 인간의 인식 속에는 신의 모습을 한 인간은 애굽 왕 “바로”밖에 없었습니다. 중국에서는 왕을 천자(天子)라 하였지요. 그런데 성경에서 모든 인간은 신의 형상과 모습으로 창조되었다고 선언합니다. 바로 왕과 그 왕의 발을 씻어주는 노예와 그 상급노예의 발을 닦아주는 그 밑의 하급노예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똑같이 신의 모양을 가진 독립적인 존재라는 이 선포는 고대사회에서는 참으로 천지개벽하는 혁명적인 선언입니다.(창1:26-27)
이와 같은 역사적인 사실 앞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이승만이 얼마나 나라와 백성을 사랑하였는지를 생각하게 되고 성경에서 하나님이 얼마나 인간을 사랑하시는 가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이치로나 성경의 이치로나 사랑과 독립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연관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과 성경이 말하는 사랑과 독립에 관해서 묵상해 보고자 하는 것이 오늘 우리의 주제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너 자신 같이 사랑하라 ......(마22:37-39)
우리는 사랑이란 것은 내가 마음을 먹지 않아서 그렇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사랑할 수 있는 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하려면…. 먼저 자신이 독립해야 가능한 일이란 것을 대부분이 간과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땅에서 인간의 성장 과정은 독립하는 과정입니다. 아기가 태어나서 3-4세 쯤 되면서 부터 모든 일을 “내가 할 거야”하고 고집 피우는 것은 나는 독립하고 싶다는 표현입니다. 그러다 중학생이 되어 사춘기가 시작되면 본격적인 독립운동(?)이 일어나는 시기입니다. 사춘기라는 것은 지금까지 부모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든 사고방식을 심리적으로 독립하여 나가는 과정입니다. 독립하려니 지금까지 자기가 제일 의존해 왔던 부모한테서 떨어져 나와야 독립이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부모에게 이유 없는 반항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때 부모에게서 심리적으로 독립이 성공하지 못하면 한평생 부모 의존성으로 살아가든지 아니면 이유 없는 반항의 기질로 살든지 둘 중의 하나를 하게 됩니다.
피터팬 증후군이란 것이 있습니다. 피터 팬 증후군(Peter Pan syndrome) 또는 콤플렉스라고도 불리며, 어른인데 몸은 성인이 되기를 거부하고 어린이나 소년이 되기를 원하는 심리상태 또는 그러한 행동을 말하는 것으로 마마보이란 말과 유사합니다.
결혼한 30대 남성이 출근할 때마다 어떤 옷을 입을 것인가를 매일 엄마에게 전화로 물어봐야 비로소 결정하는 남자…. 모든 것을 어머니에게 의존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개인이 독립하지 못하면 가정을 꾸려갈 수 없습니다…. 오늘날 이혼이 많은 이유가 개인이 정신적으로 독립하지 못하고 서로가 너무 의존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혼자 있어도 얼마든지 기쁘고 유쾌하게 살 수 있는데….근데 다른 한 사람하고 같이 살면 더 기쁘고 더 풍요로울 것 같아서 결혼하는 것이지…. 나 혼자 사는 것이 외롭고 힘들어서 나의 힘이 되어줄 어떤 한 사람이 필요해서 결혼한다면 그 결혼생활은 십중팔구는 지옥이고 종국에는 파탄이 나기 마련입니다.
이처럼 정신적으로 독립하지 못하면 남을 사랑할 수 있는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사랑이란 것이 사이다 마시는 것 같은 상쾌한 감정이 아니고 서로에게 관심을 가져야 하고 상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하고 육신으로도 돌보아 주어야 하는 고통을 인내할 수 있고 마음으로 품어주어야 하는 이지적이고 이성적인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백성들이 독창성과 주체성이 없이 권력계층에 종속되어 시키는 일에만 익숙하여져 있다면 그 나라는 자유민주체제로의 독립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도 내가 독립적인 존재로의 의식이 없이 종속적이고 의존적인 노예적인 근성에 묶여 있다면 이웃을 사랑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문제점이 있는데요…. 이 독립심은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독립의 이중적인 뜻을 모르면 우리는 스스로 모순되는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에서 설명하는 이중적인 독립심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추수한 부자 농부의 이야기입니다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눅12:19-20)
여기 이 부자는 열심히 노력하고 땀 흘려 일하여 세상 사람 그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독립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였습니다. 일차적인 독립을 이루어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원래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여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서 금단의 열매인 선악의 열매를 먹었습니다. 그 일로 하나님의 동산에서 추방당한 인간은 스스로 독립하기 위하여 땀 흘려 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결과로 명예를 얻고 건강을 얻고 부귀를 일구어냅니다. 그렇게 독립을 추구하고 그 독립을 이루고자 하는 욕구는 인간의 내면에 깊이 자리 잡아 다른 동물에는 없는 인간의 본성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위의 부자 농부처럼 영혼의 문제가 해결 받지 못한 정신적이고 경제적인 그런 독립만으로는 완전치 못하여 내면적인 갈등과 두려움으로 죽음 앞에 종노릇 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히2: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를 놓아주려 하심이니
모든 인간은 죽기를 무서워함으로 일생을 죽음에 매여 종노릇 하는…. 죽음 앞에 노예라는 것인데요…. 우리는 이 말씀을 아무리 거역해보고 변명하고 반박하려 해도 반박할 수 없습니다. 거부할 수 없는 인간의 최종적인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독립되지 못하고 사망에 매여 종노릇 하는 존재인 인간은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까? 사랑을 흉내 낼 수는 있지만 진정함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 성경의 판단입니다. 능력 자체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시인은 인간은 필사적으로 서로 사랑하려고 하지만 결국은 실패하고 마는 자신을 발견한다고 했습니다. 사랑과 행복과 평안 그리고 독립에 대하여 스스로 할 수 있다고 우리가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너 자신 같이 사랑하라 (마 22:37)
그렇다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어떻게 하는 것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까…. 교회를 위해서 힘을 다하여 봉사하는 것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표현인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나의 여러 행동은 그게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맞는 것인가…. 하나님도 내가 행한 그런 일들을 사랑이라고 쳐 주실까…. 이런 깊은 질문 없이 지금까지 우리는 습관적으로 행한 것을 사랑이라고 하는 고정적인 틀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난리를 치니까…. 예수님이 사랑의 기준을 제시하여 주십니다……. 요14;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하리라”
.......….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나의 계명(내가 한 말)을 따라 나(예수)처럼 그렇게 하면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당신 스스로가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말씀하신 구절이 있습니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요6:38)(요5;30)
그러니까 예수님은 자기의 독립성을 강조하신 것이 아니고 반대로 독립성을 소멸시키고 전 생애를 아버지께 의존하여 그 뜻을 따른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닮아서 작은 예수가 된다는 것은…. 우리가 독립적으로 예수를 위해서 위대한 공헌을 하는 그런 어떤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과 같이 자기가 독립된 주체이지만 자기의 그 독립성을 소멸시켜나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독립성을 소멸시킨 예수가 아버지와 하나가 되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독립성을 소멸시켜 예수와 하나가 되어 예수 안에서 예수와 완전한 연합체로 새롭게 제2의 독립을 하는 것....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이루어지는 제2의 독립이 없으면 이웃과의 진정한 사랑도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신의 독립심을 소멸하여 하나님과 그리고 이웃과 아름다운 관계를 맺어가는 것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자신들의 독립심을 강화하여 권위를 가지는 체제를 만들고 질서를 정하여 가는 방향으로 갑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체제와 질서가 가지는 권력은 다른 사람을 자신이 원하는 데로 조종하기 위한 수단이 되고 맙니다.
이러한 세상의 체제와 질서에서 개개인의 가치는 체제에 얼마나 잘 순응하는가에 생존과 그 위상이 결정됩니다. 정치 경제 사회할 것 없이 체제의 이익과 유지를 위하여 처음에는 한 사람이, 마지막에는 많은 사람이 쉽게 희생되고. 형태를 달리해서 모든 권력투쟁과 편견, 전쟁이 유발되고 이렇게 “권력과 독립성의 의지”가 만연하게 되어서 그것이 정상적인 것처럼 인간의 역사 속에서 자리 잡아 왔습니다.
이처럼 개인과 집단에서 각자가 가진 독립심은 편을 먹기에 따라 서로 충돌되기 마련이고 결과적으로 인간의 미래는 고해(苦海)일 수밖에 없습니다. 갈등과 증오 전쟁의 참혹함을 피할 수 없습니다. 아름다운 관계를 맺어 공존하려는 것이 아니고 독립하여 군림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입니다
때때로 인간은 하나님이 통제해 주시기를 바라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강제로 통제하지 않으십니다. 강제로 통제한다면 그것은 이미 하나님의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오래 참는 것입니다.” 설사 우리가 잘못된 결정을 하더라도 우리를 존중해주셔서 우리가 독립심을 스스로 포기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려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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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살아계심에도 고집을 피워 자기에게 돌아올 유산을 미리 챙겨 아버지 집에서 독립하여 멀리 외국으로 나간 둘째 아들…. 그 아들이 독립을 포기하고 스스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시든 아버지는…. 스스로 돌아온 그 둘째 아들의 손에 금가락지를 끼워주시며 살찐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풀어 주며…. 죽었다가 다시 살아온 귀한 아들로 맞아 주십니다. (눅 15:1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