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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 개갑 장터 순교 성지
고창 개갑 장터는 신유박해 때 고창 최초의 천주교 순교자
최여겸(崔汝謙, 1763~1801, 마티아)이 처형된 장소다.
최여겸은 충청도 사도인 이존창에게서 교리를 배우고 영세를 받은 후
고향에서 열렬히 전교하여 그가 입교시킨 사람은 기록상에만 28명이 되며
전라도교회의 중요한 지도자 중의 한 사람으로 활약하였다.
전주교구의 초대 교회사에서
유항검(柳恒儉, 아우구스티노, 1756~1801)은 무척 유명하다.
그러나 그의 그늘에 가려 있는 훌륭한 사도는 최여겸이다.
구전에 의하면 무장현에는 호남의 토호 유항검 소유의 토지가 많았고
이를 마름 두 사람이 관리하였다고 한다.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그들은 무장 옥사에서 치명하였다고 한다.
이는 초대 고창 본당 신부였던 김 아오스딩 신부가
마름의 후손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김진소 신부에게 전한 이야기다.
당시 전라도 무장현 동음치면의 개갑 장터는,
전국에서 유명한 우시장이었다.
최여겸 마티아는 박해가 일어나자 처가가 있는
충청도 내포 남쪽 한산으로 피신했다가 1801년 4월 13일
한산 관아에서 체포되어 무장, 전주, 서울 형조를 거쳐
‘해읍정법’에 따라 고향 개갑 장터로 이송되어
8월 27일(음 7월 19일) 39세의 나이로 참수 당했다.
최여겸은 충청도 한산으로 장가를 들었는데
여기서 충청도 사도인 이존창(李存昌, 1759~1801, 루도비코 곤자가)을 만나
그에게서 교리를 배우고 영세를 받아 고향에 돌아왔다.
최여겸은 고향에서 열렬히 전교하여
그가 입교시킨 사람은 기록상에만 28명이 된다.
무장에 사는 조카 최수천, 최일안, 함평의 남중만, 흥덕의 김처당,
영광의 이화백 등 많은 사람을 입교시켜
전라도 교회의 중요한 지도자 중의 한 사람으로 활약하였다.
《순조실록》 순조 1년 7월 13일 정해조에 보면
“호남의 한정흠(韓正欽, 1756~1801, 스타니슬라오), 최여겸,
노복 천애(金千愛, 1760~1801, 안드레아) 등은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하여
그릇된 방면으로 사람들을 인도하고, 천주를 독실하게 믿으며
교리를 따라붙어 익혀서 십계명을 버리기 곤란해 하고
죽음을 달갑게 받는다고 말하고 있으니 아울러 다시 자백을 받은 뒤
전주 감영으로 압송하여 각각 그 고을에서 사형에 처하소서.”라고 하였다.
이렇게 해서 최여겸 등 세 사람은 참수 치명한 것이다.
무장 고을과 법성 포구를 연결하는 중간 지점에 위치한
개갑 장터(현재 고창군 공음면 석교리 갑촌)는 조선 시대 각종 산물의 집산지이자
매우 번창했던 장터로 한일합방 후 구한말 의병들의 보급소와
연락처로 활용되면서 일본인들의 미움을 사
물산의 중앙집산지가 아니라는 이유로 폐쇄되었다.
일명 개개비 장터라 불리는 지금의 면소재지에서 서북간 700m 거리에 있다.
◆ 개갑 장터 이야기
조선조 때 이 개갑[개가리(凱歌里)] 장터가 서게된 유래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공음면의 대종을 이루는 성씨는 전주 최씨와 안동 김씨이다.
두 성이 이곳에 정착한 것은 그들의 선조가 임진왜란 때 피난차 머문데서 연유된다.
그중 안동 김씨에는 김질(호 영모당)이라는 효자가 있었다.
진사로서 1496년(연산2년)에 동음치면 개가리(개갑)(현 공음면 석교리)에서
출생한 분으로 효성이 남달리 지극하여 부모상과 조부모상과
조부모 승중상(承重喪)등 도합 12년간을 시묘살이로 일관한 사람이다.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생전에 꿩 고기를 몹시 좋아 하셨기에
그는 매년 12월 제사 날에는 짚신을 삼아 그곳에서 8km나 되는
안장 머리장(안자시장[鞍子市場], 현 해리시장[海里市場])에 가서
짚신을 팔아 꿩을 사서 제물로 쓰곤 하였다.
어느 해 눈이 많이 내려 시장이 서지 않아 제물을 구할 수가 없어서
크게 걱정하면서 그는 그의 불효로 인하여
하늘이 내린 벌로 알고 제사 날을 맞이했다.
그런데 눈이 많이 내린 그날 석양 무렵에
갑자기 꿩 한 마리가 부엌으로 날아 들어와 벽에 부딛쳐 죽어 있었다.
김질은 그 꿩으로 제물을 삼아 제사를 고이 모셨다.
그 다음 해에도 짚신을 등에 지고 눈 길을 헤쳐 제물을 구하기 위하여
안장 머리장에 가는 도중 때마침 무장 원님께서 그 곳을 행차하다가
그의 모습을 보고 이 추운 날씨에 무엇 하러 가는 사람이냐고 물어 보았다.
자초 지종을 듣고 난 원님은 김질의 효성이 지극함을 극찬하고는
그를 위하여 개가리에 저자(시장)를 세워 주게 되어
평생토록 눈 길에 장을 보러 가는 고생을 덜게 되었다.
그 뒤로 퍽 번성해 오던 개가리 시장은 한일 합방 후
구한말의 의병활동을 위한 보급소와 연락처로 낙인이 찍혀
왜인들이 물산의 중앙 집산지가 못 된다는 이유를 내세워
끝내 없애버리고 말았다.
그리하여 지금은 장터의 흔적조차 없이 그 이름만 전해오고 있다.
개갑장이 세워진 200년전만 해도 100호가 살았고,
1925년 경만해도 10여 호가 있었다고 한다.
개갑장은 전국에서 유명한 우시장으로 소장달인 7월에는 장관이었다고 한다.
외양간 경당
어린 예수님을 업고 있는 성모님의 모습 속에
복자 최여겸(마티아)의 마음을 담았다.
그는 순교 직전 늙으신 어머니를 간절히 보고 싶어 했으나
박해 당국자에게 거절당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 최여겸은 어머니를 만나,
그녀의 등에 업혀 새근새근 잠들어 있다.
첫댓글 어부바 성모상이 특이합니다 복자 최여겸마티아 때문에 개갑장터가 생겼다니 그의 효심이 하늘을 움직였네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