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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디모데전서 6장 2b-5절
참 신학과 거짓 신학
저희 교회 첫 주일 예배가 2012년 12월 16일인데, 정확하게 10년이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지켜주시고 도우시면서 은혜를 베풀어 주신 하나님께서 감사드리며, 계속해서 동일한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하늘뜻장로교회가 추구해야 할 바와 관련해 본문을 통해 조금 살펴보려고 합니다. 제목 자체는 참 신학과 거짓 신학이라고 해서 좀 거창하게 보일 수 있지만, 무엇이 참된 가르침인지 그리고 무엇이 거짓된 가르침인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디모데전서 마지막 장에 속해 있는 부분입니다(마스트리흐트의 이론과 실천 신학, 제1장 신학의 본질 일부 정리). 여기서 사도는 참된 가르침과 거짓된 가르침, 다시 말해 참 신학과 거짓 신학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우선 본문 2절 하반부를 보시면 “...너는 이것들을 가르치고 권하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이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면서(디전1:2) 디모데 너는 이것들을 가르치고 권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것들’은 사도 바울이 디모데전서 앞부분에서 언급한 모든 내용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3절에 보면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이라는 표현을 하는데, 바울이 디모데전서 앞부분에서 언급한 것을 요약하자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1장 13절에서는 이렇게도 표현합니다.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오늘 본문에서 ‘이것들’이라고 할 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의 내용과 사랑의 내용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른 말이라고 말함으로 거짓된 믿음, 거짓된 사랑과는 달리 참된 믿음과 참된 사랑으로써 반드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것이란 전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조금 더 확장해서 말하자면 사도행전 20장 27절의 내용으로 말할 수 있는데, 거기 보면 사도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 그러니까 너는 이것들을 가르치고 권하라고 할 때 하나님의 뜻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신학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것들을 가르치고 권하라. 부분적으로는 참된 가르침에 관한 설명을 통해서, 오늘 본문 3절에서 언급하지만 부분적으로는 거짓된 가르침에 대한 반박을 통해서 듣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울러 권하라고 하는데, 단순히 가르치는 정도로만 있어서는 안 되고 훈계하고 간청하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등을 통해 실천으로까지 나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이것들을 가르치고 권하라고 한 그것을 추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 전체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이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인 것입니다.
이어지는 3절에서는 이것들을 가르치고 권하라고 한 것과 정 반대의 내용에 대하여 언급하는데,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이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 자신이 가르치고 권한 것과는 다른 교훈, 다시 말해 자신이 바른 말로 가르치고 권했다면 그것과 상관없는 그런 가르침과 권면에 대해서는 경계할 것을 말씀합니다. 특히 다른 교훈을 하는 자들은 어떤 자들인가? 또한 다른 교훈의 가르침과 권면을 따르게 될 때 어떤 결과가 따라오는가 할 때 오늘 본문 4절과 5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 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최근 베드로후서의 내용을 살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이후 사도들이 활동할 때 거짓 교사들도 있었습니다. 사도 시대만 거짓 교사들이 있었는가? 구약 시대 때도 있었습니다. 선지자라고는 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사람들이 좋아하는 말을 하는 그런 거짓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바로 그런 자들에 대하여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거짓 교사들 그리고 그들의 거짓된 가르침, 교훈을 피하도록 하기 위해 이 말씀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거짓 교사들이 다른 교훈, 그릇된 교훈을 가르쳤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 그리고 다른 사도들이 친히 가르친 것과는 다른 것을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런 가르침에 대하여 주의해야 할 것을 말씀합니다. 예를 들어 이사야 8장 20절에 보면 다음의 말씀이 있습니다.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따를지니 그들이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 오늘 본문과 연결해서 생각해 보면,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따르라는 것은 너는 이것들을 가르치고 권하라는 말씀과 동일합니다. 또한 그들이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다는 부분은 오늘 본문에서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사야 8장은 그들이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 아침빛을 보지 못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사도 베드로의 경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더 확실한 예언으로 표현하면서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다고 말하기도 했는데(벧후1:19), 바른 말이 아니라 거짓 교훈을 따르게 되면 어두움 가운데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교훈, 그릇된 교훈은 주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갈라디아서 1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1:8-9) 이사야 말씀은 거짓 가르침이 아침빛을 보지 못한다고 했지만 사도 바울을 통해서도 좀 더 두려워할만한 말씀으로 증거 되는데, 다른 복음에 대해서는 저주를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증거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교훈, 그릇된 교훈에 대하여 주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갈라디아서 6장에서는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갈6:16)는 말씀도 하는데, 다른 복음에 대해서는 저주가 선포되지만 참된 복음과 복음에 합당한 삶에 대해서는 평강과 긍휼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다시 본문으로 와서 거짓 교사들이 다른 교훈, 그릇된 교훈을 가르쳤다고 할 때 사도 바울은 조금 더 상세히 설명하는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이라고 말합니다. 쉽게 설명하면 거짓 교사들은 바른 말을 따르지 아니하였다는 것입니다. 거짓 교사들의 거짓된 가르침은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가르친 것들에 머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가르친 것들에 무엇을 더하거나 빼서 그것들을 변경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더하거나 빼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변경하는 것에 대해서도 주의하라고 가르칩니다. 한 예로 신명기 4장 1절과 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준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게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내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 요한계시록 22장 마지막 부분에서는 이렇게도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22:18-19)
어쨌든 거짓 교사들은 바른 말을 따르지 아니하였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바른 말 또는 그리스도에 관한 바른 말을 가르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인 그리스도를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거나, 그리스도를 가르친다고 해도 바르게 가르치지 않고, 그리스도의 인격이나 직임이나 은택에 관한 말씀을 변질시켰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참된 경건을 가르치겠습니까? 당연히 거짓 교사들은 경건에 따른 교훈도 전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들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라고 소개합니다. 그들의 교만이 얼마나 높은지 하나님으로부터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선지자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사도들로부터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께서 선지자와 사도들을 통해 기록한 이 말씀을 순수하게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데, 왜 이것을 좋아하는가 할 때 소위 말재주로 자신의 말이 맞다는 것을 증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같은 성경을 가지고 말하면서도 성경의 말이 아니라 자신의 말을 합니다. 성경의 말이 아니라 자신의 말이기 때문에 바른 말이 아니라 다른 교훈인 것이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않는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들에게 결과 되는 것은 무엇인가?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며, 그들의 마음은 더욱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 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만이 일어날 뿐입니다.
이상의 내용에서 우리는 참 신학을 배우고 거짓 신학에 대해서는 피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는데, 참 신학에는 신학과 함께 실천까지를 포함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을 통해 너는 이것들을 가르치고 권하라고 말합니다. 소위 신학에 대한 가르침, 교리에 대한 가르침과 함께 실천하기까지 권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모든 가르침의 요약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피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3문을 보면 성경이 제일 중요하게 가르치는 것은 무엇인가 할 때 성경이 제일 중요하게 가르치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에 관해 믿어야 할 바와 하나님이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의무라고 설명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우리의 의무, 이것이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치는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학은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함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의무까지 포함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실천이 없는 하나님 지식은 어떤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는가? 야고보서의 말씀을 따르자면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2:26)는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3절을 다시 보시면 참된 가르침이 아니라 다른 교훈을 한다고 할 때 다른 교훈을 설명하는 것이 바른 말을 따르지 않는 것, 좀 더 구체적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역으로 참된 가르침은 무엇인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디모데후서에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이라고 말하는데(딤후1:13), 우리가 배워야 할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가 포함되어 있는 신학과 실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 지식과 관련되지만 이 지식 안에 그리스도가 빠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거짓 신학은 그리스도에 대한 무지나 그리스도에 대한 거짓된 가르침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대한 몇 가지 예를 들자면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박해한 유대인들은 참 신학이 아니라 거짓 신학에 머물러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를 알지만 하나님이자 사람이신 구속주가 아니라 단지 대단한 선지자로만 받아들이고 있는 이슬람교도들 역시 참 신학이 아니라 거짓 신학에 머물러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대교나 이슬람교가 그리스도에 대한 무지로 거짓 신학 안에 있는 것이라면, 그리스도에 대한 거짓된 가르침으로 거짓 신학 안에 있는 자들이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교회 역사 안에 수없이 많은 자들이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그 중에 몇 부류만 언급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 번째가 소키누스주의자들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대속을 부정합니다. 그리스도에 대해 불신자들이나 이슬람교도가 생각하는 것과 동일하게 생각합니다. 때문에 불신자들과 이슬람교도에 가장 가까운 자들이 소키누스주의자들입니다. 두 번째는 재세레파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참된 인성을 모독하고, 그리스도의 대속에 대해 확실한 태도를 밝히지 않습니다. 세 번째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 적그리스도로까지 언급되고 있는 교황을 따르는 자들, 즉 교황주의자들입니다. 저들의 경우 적어도 말로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대속을 인정하는 너그러움을 보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중보자들을 수없이 세워서 그리스도의 대속을 무너뜨립니다. 뿐만 아니라 선행의 공로성, 교황의 사죄권 등과 같은 것들을 도입하여 그리스도의 대속을 무력화시켜 버립니다. 이 외에도 주의해야 될 가르침에는 루터파라고 부르는 자들의 공재설과 같은 내용도 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인성은 어디에나 임재 해 있거나 적어도 성찬 혹은 미사라 칭해지는 떡과 잔에 임재 해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리스도의 인성을 자신들의 입 안에서 씹어 먹는다고 말하는데, 거짓된 가르침이요 거짓 신학입니다.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 역시 예외가 아닌데, 이들은 인간 및 인간의 의지와 행위와 완전함을 지나치게 높입니다. 그로 인해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폄하하게 만드는데, 이런 내용들은 거짓된 가르침이요 거짓 신학입니다.
몇 가지 예를 들었지만 교회 역사를 보면 끊임없이 거짓 신학이 교회 안에 들어왔으며 지금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참 신학과 거짓신학을 분별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 첫 번째로 요구되는 것은 우리가 이 일을 위한 시금석인 성경으로 무장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이사야 8장 20절에 대하여 언급했지만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따를지니 그들이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라고 할 때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따르지 않을 때는 아침빛을 볼 수 없습니다. 사도 베드로를 통해 말씀하신 것처럼 더 확실한 예언으로서의 성경, 그것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습니다(벧후1:19). 때문에 우리는 무엇만을 주목해야 하는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만 주목해야 합니다. 이 성경이 곧 우리의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사도 베드로를 통해 말씀하시기를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라고도 했습니다(벧후1:20). 베드로후서 3장에서는 사도 바울의 편지와 관련해 언급하면서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벧후3:16)는 경고도 하였습니다. 때문에 성경으로 무장할 뿐 아니라, 두 번째로 요구되는 것은 신앙의 유비와 ‘바른 말씀의 본’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유비란 로마서 12장 6절의 말씀처럼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해석하는 것을 말하는데, 전에도 언급한 것처럼 이 구절에 대한 칼빈의 자세로서 성경을 대해야 합니다. 그는 이 구절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울이 모든 예언은 믿음의 분수대로 해야 한다고 말했을 때(롬12:6), 그는 성경의 모든 해석을 시험하는 아주 명백한 규칙을 제시한 것입니다. 이제 만일 우리의 해석이 이 믿음의 규칙에 의해 평가된다면 승리는 우리의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입혀 주시는 옷을 입기 위해 우리는 미덕이 전혀 없는 벌거숭이이며, 하나님에 의해 채움을 얻기 위해 우리에게는 아무 선한 것이 없으며, 그분에 의해 자유를 얻기 위해 우리는 죄의 종들이며, 그분에 의해 비췸을 얻기 위해 눈 먼 자이며, 그분에 의해 교정을 받기 위해 절름발이이며, 그분에 의해 지탱되기 위해 약한 자라는 것을 시인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믿음에 가장 잘 부합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에게서 모든 영광 돌릴 기회를 제거하여 그분 홀로 영광스럽게 부각되며 우리는 그분 안에서 영화로워하는 것보다 믿음에 더 잘 부합되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고전1:31, 고후10:17 참조)” 저는 바른 말씀이 본이라고 할 때 이것보다 더 좋은 본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되 선하게 지으셨다는 것, 그러나 인간 스스로가 타락했다는 것, 그래서 인간 스스로는 구원을 이룰 수 없다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 가운데 일부를 구원하시되,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구원하셨다는 것, 그리고 이때 구원의 전 과정이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게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만 달려 있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 아닙니까! 물론 참 신학이라고 할 때 신학과 함께 실천을 말합니다. 가르침만이 아니라 권함도 있습니다. 소요리문답의 내용으로 하자면 믿음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무도 가르칩니다. 그러나 성화조차 성령의 일하심이요, 성령과 분리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일하심이라고 성경을 통해 가르치고 있다면 우리에게 요구하는 의무는 결국 누가 이루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나의 나 됨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다른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은 수고와 열심으로 주의 일을 행했지만 이때도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고전15:10). 이런 점에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았다면 칼빈의 해석처럼 우리 자신에게서 모든 영광 돌릴 기회를 제거하고 그분 홀로 영광스럽게 부각되며 우리는 그분 안에서 영화로워하는 것보다 믿음에 더 잘 부합되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더불어 역사적 개혁주의 신앙에 바탕을 둔 신앙고백서와 요리문답 등을 통해 바른 말씀의 본을 정리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신앙고백이나 요리문답과 같은 내용은 그냥 나온 것이 아니라 참 신학과 거짓 신학 사이에서 무엇이 참 신학인지를 드러내고자 역사 속에서 정리하여 작성되거나 그것을 교육하기 위해 기록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경의 무오성은 주장할 수밖에 없지만 신앙고백이나 요리문답의 무오성을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의 무오성의 경우 성경 원본에 대하여 구약에서부터 신약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는 점에서 무오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고백이나 요리문답의 경우 성경 해석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무오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또한 더 좋은 해석으로 있는가 할 때도 가장 좋은 해석이기보다는 그렇지 못한 것으로 나타날 때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여러 사람이 모여 신앙고백을 작성한다고 할 때 모든 사람이 가장 좋은 해석으로 의견을 모으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장 좋은 해석이지만 그런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도 있기에 의견을 모은다고 할 때는 반드시 가장 좋은 해석으로만 결과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 해석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바른 말씀의 본을 제공하기에 우리는 역사적 개혁주의 신앙에 바탕을 둔 신앙고백서와 요리문답 등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것 없이 오직 성경만 말한다면 그 마음의 진심은 어느 정도 인정해 줄 수 있을지 몰라도 결코 지혜로운 길은 아니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으로 가되, 가장 안전한 길은 무엇인가 할 때 정통주의라는 정거장을 거쳐 가야 합니다. 방금도 말했지만 오직 성경을 말하면서 다른 것은 전혀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무오한 성경이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한계와 오류가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것이 교회 역사 가운데서 분명히 나타났다는 점에서 성경으로 곧바로 가는 것은 결코 지혜로운 길은 아니라고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오히려 정통주의라는 정거장을 거쳐 간다고 할 때 우회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근본적인 한계를 인정하고 교회 역사의 실수와 실패를 피하고 진리로 남은 것을 한 교회의 한 믿음과 한 교리로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 역사 가운데 중요한 정거장이라고 할 만한 내용이나 인물들이 있는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로 볼 때 가깝게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및 대소요리문답, 예배모범과 교회정치가 그것입니다. 조금 더 앞으로 가면 도르트 신조와 같은 고백서를 산출한 17세기 개혁신학 및 인물이 중요합니다. 나아가 이들에게 영향을 준 칼빈이 중요하고, 칼빈이 이해한 어거스틴이 중요합니다. 어거스틴의 경우 가톨릭과 칼빈이 이해한 것이 다른데, 가톨릭이 이해하고 있는 어거스틴이 아니라 칼빈이 이해한 어거스틴으로 가는 것이 성경으로 가는 가장 안전한 길입니다.
끝으로 예레미야 6장 16절을 보면서 마치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가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가지 않겠노라 하였으며” 우리는 예레미야 선지자 당시 어리석은 백성들의 길을 따라 가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옛적 길 곧 선한 길입니다. 선한 길은 참 신학이 있는 그 길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는 길이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이 있는 길이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이 있는 길입니다. 이 길에 평강이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다른 교훈을 피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무엇을 더하거나 무엇을 빼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바른 말씀과 부합하지 않는 모든 것을 거절해야 합니다. 인간의 수없이 많은 전통을 더한 교황주의자들, 삼위일체와 대속을 비롯한 그 밖의 다른 근본 교리를 빼 버린 소키누스주의자들, 우리는 이들과 같은 길을 걸어가서는 안 됩니다. 유대교와 이슬람의 실패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을 고수하지 않은 것입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인간 및 인간의 의지와 행위와 완전함을 지나치게 높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폄하하는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 펠라기우스주의자들, 교황주의자들, 소키누스주의자들, 그들은 결코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합니다. 루터주의자들조차 예외일 수 없는데, 그들은 하나님의 보편 은혜와 그리스도의 보편 대속을 주장해서 그것을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정의나 자비에 거의 부합하지 않는 방식으로 구원의 길을 확대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육신적인 안일함에 빠질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습니다. 여기에 어떻게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우리는 거짓 신학을 피해야 합니다. 거짓 신학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무너뜨립니다. 거짓 신학은 진리의 길을 모독합니다. 거짓 신학은 사람들을 미혹해서 진리에 복종하지 않게 합니다. 거짓 신학은 교회들을 무너뜨립니다. 결국 거짓 신학은 그리스도에 대해 적대적입니다. 이런 거짓 신학에 대하여 성경은 단호히 말합니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1:7-8) 역으로 말하면 참 복음만이, 참 신학만이 우리에게 참 복을 주기에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이 길 외에는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