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영 수공업의 발달
조선 후기에는 수공업 분야에서도 생산력이 크게 늘어났다. 상품 화폐 경제가 진전되면서 시장 판매를 위한 수공업 제품의 생산이 활발해진 것이다. 그것은 거의 민영 수공업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 시기에 이르면서 종래의 관영 수공업은 쇠퇴하고 민영 수공업이 점차 발달하고 있었다.
관영 수공업의 쇠퇴는 부역제의 변동과 상품 화폐 경제의 진전에서 비롯된 것이다. 본래 관영 수공업은 부역제를 토대로 하여 운영되었다. 즉, 정부는 왕실이나 관청에서 소요되는 물품을 조달하기 위해 수공업자들을 관청에 등록시켜 일정 기간 그들의 노동력을 강제로 징발하였다. 이들을 공장이라 하였는데, 16세기 이후 공장들은 가급적 등록을 기피하였고, 또 정부의 재정 사정도 악화되어 조선 후기에는 관영 수공업을 유지하기가 어렵게 되었다.1)
그리하여 17세기 각 관청의 작업장에서는 공장이 없어 민간에서 기술자를 고용하여 물품을 제조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 시기에는 도시 인구가 급증하여 제품의 수요가 크게 늘어났고, 대동법의 실시로 관수품의 수요도 적지 않았다. 그러한 수요는 거의 민간 수공업자들이 충족시켰다.
민간 수공업자들은 장인세(匠人稅)만 부담하면 비교적 자유롭게 생산 활동에 종사할 수 있었는데, 그들의 제품은 품질과 가격면에서 관영 수공업장에서 만든 제품과 비교할 때 경쟁력이 높았다. 물론, 무기나 자기의 제조 분야에서는 여전히 관영 수공업이 중심을 이루었고, 그 품질도 우수하였지만, 이들도 점차 민영 수공업으로 전환되어 갔다. 이러한 추세 속에서 18세기 말에 정부는 장인의 등록제 자체를 폐지하였다.
대장간(김준근)
민간 수공업자들의 작업장은 흔히 점(店)으로 불렸다. 철기 수공업체는 철점, 사기 수공업체는 사기점이라 하였다. 판매를 위해 제품을 생산하는 민영 수공업은 주로 도시를 중심으로 하여 발달하였지만, 점차 농촌에서도 나타났다. 농촌의 수공업은 지금까지는 자급 자족을 위한 부업의 제조 형태였으나, 점차 소득을 올리기 위해 상품으로 생산하는 경우가 늘었고, 이를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농가도 나타났다. 농촌에서는 주로 직물과 그릇 종류가 생산되었다.
그런데 민간 수공업자들은 그들 자신이 작업장을 가지고 물건을 생산하여 시장에 내다가 처분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작업장과 자본 규모가 소규모여서 원료의 구입과 제품의 처분에서 대체로 상업 자본에 의하여 지배를 받았다. 대부분의 수공업자들은 공인이나 상인들로부터 주문과 함께 자금과 원료를 선대(先貸)받아 제품을 생산하였다.
즉, 수공업자들은 상업 자본에 의해 지배되거나 이에 의존하였으므로, 아직 독자적으로 제품을 생산하거나 판매하지 못하였다. 특히, 종이, 화폐, 철물 등의 제조 분야에서 그러하였다. 그러나 18세기 후반에 이르면서 수공업자 가운데서도 독자적으로 제품을 생산하고, 이를 직접 판매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수공업자들의 독립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광산의 개발
민영 수공업이 발달하면서, 그 원료인 공산물의 수요가 급증하게 되어 광업도 발달하게 되었다. 조선 초기 이래 광업은 국가가 직접 경영하여 사적인 광산 경영은 통제되었다. 광산의 경영은 정부가 수요 액수를 일률적으로 정하여 부과하면, 해당 고을의 수령들이 농민들에게는 엄청난 부담이었고, 이로 인하여 때로는 농사철을 놓치는 경우도 많았다.
16세기 이래로 농민들은 광산에 부역으로 동원되는 것을 거부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정부는 17세기 중엽에 사채(私採)를 허용하고 대신 세금을 받아 내는 정책으로 전환하였다. 1)
이에 따라 광산의 개발이 보다 촉진되었는데, 특히 청과의 무역에서 은의 수요가 늘어나면서 은광의 개발이 활기를 띠었다. 그리하여 17세기말에는 거의 70개소의 은광이 개발되었다. 그 후 18세기 중엽부터는 상업 자본이 광산 경영에 참여하면서 금광의 개발이 더욱 활발해졌다. 광산의 개발은 이득이 많았기 때문에 합법적인 경우도 있었지만, 몰래 개발하는 이른바 잠채(潛採)도 성행하였다.
조선 후기의 광산 경영은 덕대(德大)가 대개 상인 물주로부터 자본을 조달 받아 채굴 업자인 혈주(穴主)와 채굴 노동자, 제련 노동자 등을 고용하여 광물을 채굴하고 제련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 때의 작업 과정은 모두 분업에 토대한 협업으로 진행되었다. 즉, 굴진, 운반, 분쇄, 제련 등의 과정이 분업화되어 있었다.
(2) 시장권의 확대
공인의 활동
조선 후기에는 상업계에서 변화가 특히 두드러졌다. 본래 조선 왕조는 중농 정책을 내세워 수공업과 광업 뿐만 아니라 상업에 대해서도 초기부터 정부가 적극적으로 관여하여 그 활동을 규제하였다. 따라서, 상업 활동은 왕실이나 관청에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는 시전 상인의 활동 외에는 거의 보잘것이 없었다.
그런데 17세기 이래로 농업 생산력이 증대되고 수공업 생산이 활발해지면서 상품의 유통이 활성화되어 갔다.
그리고 이 시기 이후 널리 확산된 부세 및 소작료의 금납화는 상품 화폐 경제의 진전을 보다 촉진시켰다. 더구나 조선 후기에는 인구의 자연 증가뿐만 아니라 농민의 계층 분화가 심화되어 농촌으로부터 유리된 인구의 도시 유입으로 상업 활동이 더욱 활발해졌다.
조선 후기 상업 활동의 주역은 공인과 사상이었다. 그 중에서도 처음에는 공인들이 상업 활동을 주도하였다. 공인(貢人)은 대동법이 실시되면서 나타난 어용 상인들이었다. 이들은 관청에서 공가(貢價)를 미리 받아 필요한 물품을 사서 납부하였다. 이들은 관청별로 또는 물품의 종목별로 공동출자를 해서 계를 조직하고 상권을 독점하였으며, 납부할 물품을 수공업자에게 위탁하여 수공업의 성장을 뒷받침하기도 하였다.
공인들은 서울의 시전뿐만 아니라 지방의 장시를 중심으로 활동하였고, 특정 물품을 대량으로 취급하는 까닭에 독점적 도매 상인인 도고(都賈)로 성장할 수 있었다..
사상의 대두
18세기 이후에는 사상들이 서울을 비롯한 각지에서 활발한 활동을 폈다. 서울을 비롯한 각 지방의 도시에 사상들이 나타난 것은 17세기 초로서, 도시 근교의 농어민이나 소규모 생산자, 군졸 등이 직접 생산한 채소, 과일, 수공업 제품 등을 행상으로 판매하면서부터였다. 이어서 농촌에서 도시로 유입된 인구의 일부가 상업으로 삶을 이어 가고자 하여 시전에서 물건을 떼어다가 파는 중도아(中都兒)가 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17세기 후반 이후에 이르러서 사상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상행위를 벌여 종루, 이현, 칠패 등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종래의 시전과 대립하기도 하였다.
이에 일찍부터 상업을 독점해 왔던 시전 상인들은 정부에 대해 일정한 부담을 지기로 하고 금난전권(禁難廛權)을 얻어내어 사상들의 활동을 억압하려 하였다.1)
시장도
그러나 사상들은 정부와 결탁하여 새로이 점포를 창설하거나, 금난전권이 적용되는 도성을 벗어나 송파 등 지방에서 도성으로 들어오는 길목으로 상권을 확대하면서 상행위를 계속하였다.
그리하여 18세기 말에는 정부로서도 더 이상 사상의 성장을 막을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 육의전을 제외한 나머지 시전의 금난전권을 철폐하였다. 이로써 사상들의 자유로운 상업 활동이 어느 정도 보장되었으며, 그들 중의 일부는 도고로 성장하여 갔다.
사상들의 도고 활동은 주로 칠패, 송파 등 도성 주변에서 이루어졌지만, 개성, 평야, 의주, 동래 등 지방 도시에서도 행해졌다. 그들은 각 지방의 장시를 연결하면서 물화를 교역하고, 각지에 지점을 두어 상권을 확장하기도 하였다. 즉, 개성의 송상은 전국에 송방(松房)이라는 지점을 설치하여 활동의 기반을 강화하였는데, 주로 인삼을 재배, 판매하고 대외 무역에도 깊이 관여하여 부를 축적하였다.
사상 가운데서도 경강 상인은 운송업에 종사하면서 거상으로 성장하였다. 그들은 한강을 근거지로 삼아 주로 서남 연해안을 오가며 미곡, 소금, 어물 등의 운송과 판매를 장악하고 부를 축적하여 갔다. 그리하여 그들은 선박의 건조 등 생산 분야에까지 진출하여 활동 분야를 넓히기도 하였다.
장시의 발달
조선 후기 사상의 성장은 이 시기에 전국적으로 발달한 장시에 토대를 둔 것이었다. 15세기 말, 남부 지방에서 개설되기 시작한 장시는 18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전국에 1천여 개소가 개설되었다.
장시 구역도
조선 후기 사사의 성장은 이 시기에 전국적으로 발달한 장시에 토대를 둔 것이었다. 15세기 말, 남부 지방에서 개설되기 시작한 장시는 18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전국에 1천여 개소가 개설되었다.
장시는 지방민들의 교역 장소로, 인근의 농민, 수공업자, 상인 들이 일정한 날짜에 일정한 장소에 모여 물건을 교환하였는데, 보통 5일마다 열렸다. 일부 장시는 상설 시장이 되기도 하였지만, 장시는 인근의 장시와 연계하여 하나의 지역적 시장권을 형성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18세기 말에는 장시 중에서도 광주의 송파장, 은진의 강경장, 덕원의 원산장, 창원의 마산포장 등은 전국적인 유통망을 연결하는 상업의 중심지로 발돋움하였다.
농촌의 장시를 하나의 유통망으로 연계시킨 상인은 보부상이었다. 이들은 생산자와 소비자를 이어 주는 데 큰 역할을 한 행상으로서, 장날의 차이를 이용하여 지역 안의 시장권에서 또는 전국적인 장시를 무대로 하여 활동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고 단결을 굳게 하기 위하여 보부상단이라는 조합을 이루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