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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으로의 여행 크로아티아, 발칸을 걷다]
Serbia
07 세르비아 니시 그리고 마케도니아 스코페(2)
내가 엘레나에게 물었다.
“이곳 마케도니아의 공식 언어가 무엇인지 아세요?”
“마케도니아어와 알바니아어입니다. 중앙집권 공화제, 다당제, 단원제이고 수도는 지금 향하고 있는 스코페죠.”라고 말하면서 그녀는 나를 쳐다보았다. 둘의 눈이 잠시 동안이지만 마주쳤다. 나는 고개를 돌려 앞을 보았다. 왠지 갑자기 알 수 없는 쑥스러움, 부끄럼 같은 것이 느껴졌다.
나는 이러한 감정을 들키지 않으려고 엘레나의 말을 이어받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마케도니아 공화국은 역사상 마케도니아 지방의 일부에 불과합니다. 가은 이름을 가진 그리스 북부 지방과 불가리아 남서부의 블라게에프그라드 주 역시 옛 마케도니아 땅이었습니다. 정부 수반은 대통령이고 1991년에 독립하였습니다. 화폐는 데나르(MKD)를 사용하고 종교는 마케도니아 정교가 약 65퍼센트 그리고 이슬람이 33퍼센트 정도 됩니다.
나는 운전 도중 커피를 꺼내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마케도니아 공화국은 발칸 반도 한가운데 있는 내륙국가입니다. 이 나라를 둘러보면 북으로는 세르비아, 동으로는 불가리아, 북서쪽으로는 코소보, 남으로는 그리스, 서로는 알바니아와 접하고 있죠. 이러한 지정학적인 위치만 보더라도 이 나라가 얼마나 많은 시련을 겪었을 것인지는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요?
“마케도니아의 주요 도시로는 비톨라, 쿠마노보, 오흐리드를 비룻한 여러 도시가 있습니다. 호수도 50여 개 넘게 있습니다. 큰 수원지가 1,000개가 넘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2000미터가 넘는 산도 16개나 있다고 합니다. 오늘날의 마케도니아는 이전의 유고슬라비아의 남쪽 지역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국경은 제2차 세계대전이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이 들어서면서 확정된 것입니다.”
엘레나는 국경을 넘어 마케도니아로 들어올 때 길가에 걸려 있는 마케도니아 국기를 바라보면서 나에게 물어보았다.
“저기 보이는 국기 있죠? 빨강 바탕에 중앙에 노란색 원이 있고 그리고 노란색 선이 보이는 저게 마케도니아 국기이죠?”
나는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엘레나는 운전하는 나를 쳐다보면서 말하였다.
“피롬(FYROM)이 ‘Former Yugoslav Republic of Macedonia)’의 첫 자를 따서 만든 국명인 거 아세요? 또 마케도니아가 독립하면서 ‘Republic of Macedonia’라는 국명으로 독립을 선포함으로써 그리스와 마찰을 일으킨 거 아세요?”
나는 자세히 모른다고 하였다. 그리스와 국명 때문에 사이가 안 좋은 정도는 알고 있다고 말하였다.
그녀는 나를 쳐다보면서 웃었다. 그리고 커피 한 모금을 마시더니 계속 말을 하였다.
“참 재미있는 것 같아요. EU, UN 등 국제기구나 다자 협정 시에는 피롬(FYROM)을 사용하고 러시아 등 구 사회주의 국가와 관계할 경우엔 ROM(Republic of Macedonia)을 사용한다는 것이요. 이런 혼란은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분리되고 여섯 개의 나라가 독립하면서 그중 하나였던 마케도니아 공화국이 마케도니아라는 이름으로 독립을 선포하면서 야기되었죠. 그 때문에 그리스인들의 반발을 사게 됩니다. 1993년에는 UN에 마케도니아라는 이름으로 가입신청을 해서 분쟁이 더욱 악화되기도 했죠.”
나는 엘레나에게 물어보았다.
“그럼 혹시 그리스가 마케도니아에 요구한 세 가지를 아시는지요?”
“세 가지요? 무슨 세 가지요?”하고 엘레나는 나에게 되물었다.
“아까 마케도니아 국기를 물어보셨죠? 마케도니아 국기는 고대 그리스 문장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이것은 고대 마케도니아 왕국의 상징물이죠. 이것을 ‘베르기니아의 별(Star of Verginia)’이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는 이것의 사용을 금지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 요구는 마케도니아 헌법에 있는 그리스의 마케도니아 영토를 수복한다는 문구를 삭제할 것을 요구합니다. 즉, 현 국경의 불가침성을 보장하라는 것입니다. 마케도니아라는 이름을 포기하고 다른 이름을 사용한다면 이를 인정하고 경제적인 원조도 해주겠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갈등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현재는 ‘북마케도니아’가 공식 국가명이다)
“그러면 왜 마케도니아라는 명칭이 문제가 되나요?”하고 엘레나가 나에게 물었다. 나에게 해줄 이야기가 있지만 다시 물어본다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이야기를 하였다.
“이곳 마케도니아 지방은 아주 오래전, 그러니까 알렉산더 대왕, 아리스토텔레스 당시에도 그리스어 즉 희랍어를 사용하였던 곳이에요. 그런데 그후 이 이름을 처음 국호로 사용하였던 때는 티토가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하나로 ‘Republic of Macedonia’를 신설하던 때부터랍니다. 그리스 내전 당시 티토는 공산주의자를 지원하였고요. 이들이 승리할 경우 그리스의 마케도니아 지방을 요구할 의도였다더군요. 1913년 발칸 전쟁 직후 마케도니아 지역을 유고슬라비아는 39퍼센트, 그리스는 51퍼센트 차지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케도니아에 관한 티토의 정책은 팽창주의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는 겁니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 우리는 거의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국경에서 약 한 시간 정도 달리자 마케도니아의 수도인 스코페(Skopje) 근방에 다다른 것이다.
“스코페”하고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그리고 엘레나에게 말하였다.
“마케도니아는 200만 명이 조금 넘는 인구를 가지고 있는 나라입니다. 그중 약 25퍼센트 정도가 이곳 스코페에 거주하고 있지요. 스코페는 바르다르 강(Vardar river) 상류에 위치해 있는데 아테네와 중부 유럽을 잇는 중요한 통로 역할을 합니다. 마케도니아는 바르다르 강 유역 산맥을 국경선으로 삼는 내륙국가입니다. 강과 협곡들 사이로 거친 지형이 펼쳐져 있지요.”
엘레나가 내 말을 받아 이야기했다.
“이곳의 역사를 보면 수 세기 동안 많은 지배자들이 거쳐 갑니다. 그러면서 문화도 다양성을 나타내는 것 같던데요.”
“그렇죠. 아무래도 슬라브족 문화가 주류이고 정교회의 내부 건축양식을 가지고 있지만 예비는 그리스적 요소가 많이 남아 있습니다. 또 국민의 3분의 1이 이슬람교도인 것을 보면 오스만제국의 지배 기간 동안에 이슬람이나 터키 문화의 영향이 많았다고 불 수 있습니다.”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해지는데요?” 하고 엘레나가 말하였다.
“간단히 마케도니아의 역사를 이야기해보면 서기 4세기 후반부터 비잔틴제국의 지배하에 있었고 7세기 말에는 슬라브족의 침입을 받았다가 다시 비잔틴제국의 통치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서기 700년이 지나면서 오스만 투르크의 통치를 받기 시작하는데 그때부터 이슬람이 들어오게 됩니다. 20세기에 들어서는 오스만 투르크에 대한 저항이 있었고, 1,2차 세계대전 후 1944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에 통합됩니다. 그리고 1991년 독립하면서도 마케도니아의 수도가 되는 게 스코페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 스코페에 거의 다 도착하였다.
시내로 들어섰다. 생각보다 거리는 한산한 느낌이었다.
엘레나에게 말했다.
“호텔 체크인을 먼저 할까요? 아니면 시내 구경부터 할까요?”
“글쎄요, 호텔 예약을 하셨나요?”
“네. 제 생각에는……..우선 시내에 주차를 하고 한번 둘러보고?”
그녀는 좋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중앙 광장에서 가까운 곳에 주차를 하였다.
공짜로 주차를 할 만한 곳은 없는 듯 보였지만 주차비는 큰 부담이 없었다. 시간과 상관없이 40데나르 정도로 유로로 하면 0.35유로 정도였다. 주차를 하고 메인 광장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길거리는 양쪽으로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다. 이곳이 가장 번화한 거리인 신시가지 광장이라고 한다. 이곳을 따라 내려가다가 엘레나가 말했다.
“저기”
나는 엘레나가 가리키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이름이 있었다. 바로 ‘마더 테레사 기념관’이었다.
“우리 저곳에 가볼까요?”
그녀는 그러자고 하였다. 기념관 한쪽에는 마더 테레사님의 기념 동상이 있었다. 흰색 빛이 도는 건물이었다. 우리는 2층으로 올라갔다.
기념관은 박물관 갤러리 등의 공간으로 꾸며져 있었다. 이 기념관은 마케도니아 정부에서 테레사 수녀를 기리기 위해 수녀님이 세례를 받은 예수 성심성당 터에 세운 테레사 수녀님 기념관이라고 한다.
엘레나가 나에게 물어보았다.
“혹시 마더 테레사 수녀님에 대해 아세요?”
“구체적인 것은 모르고 그냥 어떤 분이라는 거 정도죠.”
그녀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면 제가 마더 테레사 수녀님에 대해 이야기 좀 해 드릴까요?”
나는 “물론이죠.”하고 화답하였다.
그녀는 이런 화제를 좋아하지만 남에게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왠지 쑥스러워한다는 느낌이었다.
“수녀님은 1910년 8월, 마케도니아로 독립하기 이전의 유고슬라비아 스코페에서 ‘아녜즈 곤제 보야지우’라는 이름으로 알바니아인 집안의 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1928년에는 아일랜드 로레토 수녀원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 후 인도 콜카타의 빈민가에 살면서 고등학교 선생님을 하는데 1950년에는 ‘사랑의 선교 수녀회’를 설립하여, 빈민, 고아, 나병 환자 등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일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때부터 수녀님은 ‘마더 테레사’로 불리기 시작합니다. ‘사랑의 선교 수녀회’라는 조직은 1965년 교황청으로부터 정식 승인을 받게 됩니다. 교황 직속 조직이 되는 것이죠. 그후 1979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시고 1981년에는 한국도 방문하였습니다. 1997년 9월 5일 심장병과 말라리아로 세상을 떠납니다.”
우리는 박물관을 나와 아래로 걸어 내려갔다. 스코페의 신시가지이며 가장 번화한 거리라는 곳이었다.
광장 주변에는 동상이 있는데 고체 델체프(Goce Delcev)와 담 그루에프(Dam Gruev)의 기마상 그리고 알렉산더 대왕의 동상이었다.
마케도니아 사람인 듯한 가족들이 광장에서 함께하는 모습,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모습들이 보였다.
엘레나가 나를 보더니 말하였다.
“마케도니아는 지금 역사를 재창조하고 있는 것 같아요.”
나도 그녀를 쳐다보며 말하였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이 광장에 있는 모든 동상과 건물들이 전부 새로 지어진 거고 지금도 짓고 있어서요.”
“아마도 그리스와의 역사적인 문제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하고 나는 그녀에게 이야기하였다.
광장 아래로 바르다르 강이 보였다. 이 강에는 구시가지를 연결하는 카멘로스또 다리가 놓여 있다. 우리는 이 다리를 건너 구시가지로 향하였다.
다리를 건너자 다리 양쪽에 두 사람씩 서 있는 동상이 있었다.
나는 엘레나에게 물어보았다. “이 동상이 무엇인지 아세요?”
“글쎄요. 말을 타고 서 있는 모습이 아닌 걸 보니 전쟁이나 독립 영웅은 아닌 것 같고……”
나는 엘레나에게 설명하였다.
“다리를 건너기 전 구시가지에서 신시가지로 건너가는 길목, 신시가지에서 구시가지로 가는 길목에 서 있는 이 동상들의 한쪽은 바로 9세기에 키릴 문자를 발명한 키릴 형제입니다.”
나는 신시가지에서 내려오면서 왼편에 있는 동상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테살로니카 출신의 성 키릴(St. Cyril)과 성 메토디우스(St. Methodius) 그리고 다른 쪽에 있는 동상은 그를 도운 클레멘트와 나움입니다.
우리는 이야기를 하며 구시가지 안으로 갔다. 구시가지 안으로 들어가자 엘레나가 말했다.
“터키에 온 것 같은 느낌이네요. 구시가지의 모습들이. 물건들이 즐비한 상점, 히잡 쓴 여인들.”
“그렇죠? 그들 문화의 흔적이 아직도 이렇게 많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골목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가 찾아간 곳은 발칸 최대의 터키탕이었다. 다우트 파샤이다. 이 터키탕은 1466년에 지어졌다고 한다. 현재 이곳은 국립 미술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둥근 지붕 모양을 하고 있는 이곳은 그림보다는 건물이 더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우트 파샤에서 나와 5분 정도 거리에 있는 재래시장인 동방시장으로 갔다.
동방시장은 발칸 반도에서 가장 큰 시장이라고 한다. 재래시장의 매력인지 사람이 제법 붐볐다.
우리는 동방시장을 돌아보기로 하였다. 의류와 잡화 시장을 둘러보니 토속 민예품과 관광 기념품이 많은 것 같았다. 식료품을 파는 곳은 사람들로 붐볐다.
청과물 시장으로 가니 사람들이 동양인 남녀가 신기한지 말을 건넸다. 한 상인은 말을 건네며 포도를 주었다. 공짜인 듯하여 포도를 받으니 물을 포도에 흘려 씻어준다. 포도 맛이 좋았다. 나는 엘레나에게도 맛을 보아 보라고 한 알 주었다.
엘레나는 포도 맛을 보더니 “맛있네요.”하며 웃었다.
우리는 포도를 사서 걸어가며 먹기로 하였다.
이곳 시장을 둘러보는 동안 엘레나와 나는 이 시장의 특이한 점을 하나 발견하였다. 그것은 바로 시장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전부 남자라는 것이었다. 아마도 이것은 이슬람 문화의 영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장을 나와 우리가 간 곳은 바로 스코페의 전망을 한 번에 볼 수 있는 칼레 요새였다.
언덕을 오르면서 우리는 이곳이 햇살 피할 곳이 없고 강한 햇살을 고스란히 받아야 된다는 것을 알았다. 나야 남자라서 괜찮지만 여자 입장에서는 이 강한 햇살이 무척이나 신경 쓰이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내가 엘레나에게 말했다.
“태양 빛이 강하죠?”
“아뇨 괜찮아요, 지중해의 태양이 더 강해요. 그리고 선크림 발랐어요.”
요새로 올라가면서 가까이 성곽을 보니 게르만 형태처럼 큰 돌을 가각으로 다듬어 만들지 않고 잔돌을 모아 촘촘하게 쌓아 높이 올렸다.
나는 엘레나에게 마케도니아 깃발이 펄럭이는 3중 방어벽으로 되어 있는 성벽을 가리키며 보라고 하였다.
“이 스코페는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그 산 위에 십자가가 있는 게 보이지요. 바로 이 땅이 기독교 국가임을 나타내는 것이랍니다.”
엘레나가 물었다.
“그럼 저 십자가는 언제 세운 거죠?”
“이 십자가는 마케도니아의 기독교 20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라고 합니다.”
2002년에 정교회에서 세운 것이라고 하죠. 정교회가 65퍼센트 정도 차지하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합니다. 주위에 있는 알바니아, 보스니아와 구별되는 정체성을 나타내려는 의미도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성벽은 518년에 지진으로 무너진 고대 로마의 ‘스쿠피’의 유적으로 추측한다고 합니다. 라틴어가 새겨진 대리석이 발견돼서 그렇게 추정한다는군요.”
“현재의 이러한 모습은 그 시대의 것이 아니라 10세기-11세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 재건한 것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러다가 1963년에 다시 지진이 나서 2,000여 명의 사상자가 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2006년부터 정부 지원으로 발굴 연구가 시작되면서 목관악기와 찰흙 장식품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성벽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산 아래로 바르다르 강이 보이고 오른쪽으로는 미국 대사관인 흰 건물이 보였다. 근처 산 일대가 전부 미국 대사관 소유라고 한다. 우리는 잠시 그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만 내려갈까요?” 내가 엘레나를 보면서 물었다.
“네, 그래요.”
내려오면서 나는 엘레나에게
“이곳에서 30-40분만 가면 코소보입니다. 하지만 그곳으로 가지는 않을 겁니다.”
“내일은 오흐리드로 갈 겁니다. 8시에 출발하지요.”라고 말했다.
호텔에 도착해서 각자 체크인을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왠지 피곤한 느낌이 들었다. 무엇이 피곤함을 만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의 피로감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