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관
오래되어 손때 묻고 풀어진 노트가 낡을 대로 닳아 후줄근하다. 보물인 양 겨드랑이에 안고 다니다 강의 때 펼친다. 분필 가루 묻은 손가락으로 침을 묻혀 한 장 한 장 넘기며 온 정성으로 강의하는 모습이 선하다. 텁텁하고 소박한 그분 모습을 닮은 소설을 읽노라면 목에 힘이 들어가 주인공처럼 나댄다. 우리말을 골라 어쩌면 그리 잘 어울리게 썼을까 을숙도에서 대티고개와 원동 화제리, 양산, 마산, 지리산 등 경남 일대 곳곳이 무대이다.
다니던 회사 사보에 ‘인간단지’를 연재해 요산 김정한을 알렸다. 대신동에서 무표정하고 두툼한 입술의 선생을 자주 만나 통장으로 일한다는 말씀과 경로당에 엉덩이를 들이밀고 끼여 앉아 본다는 구수한 얘기도 들었다. 성지곡 수원지 오른편 언덕에 문학비를 지날 때마다 어루만진다. 오래전 우리 곁을 떠나가고 없는데, 한번 가 봐야지 하면서도 차일피일 느닷없이 무심하게도 흘러간 세월이다.
남산동 어디에 문학관이 세워졌다는 말을 들었다. 범어사역 1번 출구에서 초등학교 앞길을 따라 곧바로 걸어오라는 안내를 받았다. 어릴 때 자라던 집을 넓혀 요산문학관으로 만들었단다. 오늘은 큰맘 먹고 그곳을 찾아 나섰다. 지하철에서 내려 물어물어 골목으로 들어서는데 웬 사람들이 쫙 늘어섰다. 뭣 하는 사람들일까. 어디로 가려는가. 수백 명은 돼 보이고 꾸역꾸역 자꾸만 모여든다.
한참 느린 걸음으로 걸어서 산기슭을 올랐다. 포근한 낮때 조용한 마을 가운데에 고즈넉한 문학관이 스스럼없이 나타났다. 지난달에 요산 선생을 기리는 문학축제가 열려 문학상 수여식을 가졌는가 보다. 직원 한 분이 덩그런 집을 지키고 있었다. 다 어디 갔는가 사람이 안 사는 텅 빈 마을 같은 느낌 속에 다소곳이 앉은 문학관이다.
‘사하촌’을 비롯해서 ‘수라도’, ‘모래톱 이야기’ 등 20여 편 소설을 남겼다. 전집으로 5권을 엮어 만들고 읽기 쉽게 단행본으로 자그마한 책을 진열해 두어 판매도 한다. 40회 가까운 문학상이 주어졌다. 빼곡히 수상자의 얼굴이 진열됐다. 주로 소설가에게 안겼다. 옛날 살던 집은 낡아 뜯어내고 새로 지은 기와집이 차분하게 앉아 졸고 있다.
2층으로 올라가니 선생의 생전 사진과 함께 유품들이 가운데 널려있다. 긴 소설의 원고와 사용하던 것들을 고스란히 올려놨다. 여러 종류의 명함과 병원 진료카드도 보인다. 각종 필기도구와 도장, 돋보기, 쓰던 안경, 주민증, 숨죽은 찌그러진 모자 등 쓰던 온갖 것을 가지런히 펼쳤다. 마치 살아있을 때처럼 생생하다. 참 정갈하게도 골고루 챙겨 전시해 놨구나. 아직은 숨결이 들려도 더 오래면 잦아들어 이곳을 알기나 하겠나.
뒷날 열강하던 소설창작 강의를 많은 사람에게도 널리 알려져 기억됐으면 좋겠다. 그 무심한 표정에 먼 산을 은근히 바라보는 무엇인가 할 말이 있는 듯 터벅터벅 걷는 모습이 떠오른다. 나오다 사랑채 마루에 걸터앉아 ‘등대지기’를 하모니카로 낭랑하게 불러 고요를 일깨웠다.
터덜터덜 걸어 내려오는데 아까 그 많던 사람들이 다 어디로 가고 없다. 기웃거리니 마당으로 들어 술렁댄다. 무슨 일인가 물으니 매주 목요일 종교단체가 베푸는 무료 급식이란다. 오늘이 바로 그날이다. 마침 출출해서 한번 얻어 먹어볼까. 뒷줄 꽁무니에 서니 붉은 조끼를 입은 안내하는 사람들이 어서 오라고 반갑게 맞이한다.
쉬운 떡국이나 국밥이겠지 하며 그것도 어딘데 감사한 일이다. 이 추운 날 따끈한 끓인 음식을 먹다니 고마워라. 각자 줄 서 받아 아무 데나 앉아 훌쩍이며 먹겠지 하며 들어갔다 얻어먹는 주제에 오감하고 흔감스러운 일이다. 안내하는 사람들이 진땀을 뺀다. 밀고 당기며 새치기로 북적이는 사람을 줄 세운다.
우 몰려가는 떼거리를 붙잡고 몇 사람씩 나눠 정한 자리에 앉게 한다. 속이 비어 견딜 수 없는가. 막무가내인 사람을 잘 타일러 알아듣게 하고 다독여 따르게 한다. 화를 내고 얼굴을 찡그리지 않게 교육을 받은 것 같다. 웬걸 식탁에 정중히 앉게 한 뒤 정성껏 식판을 날라와 깍듯이 안겨줬다.
식당이 넓어 한꺼번에 백 명 이상 앉을 수 있을 것 같다. 들고나고 계속하니 속속 자리가 나 어느새 그 많은 사람이 금시에 먹고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뿔뿔이 흩어졌다. 허기져 시장했던가 보다. 배식판을 보니 뽀얀 쌀밥을 그득 담았다. 고깃국에 돼지고기 반찬이 맛났다. 흔한 김치는 보이지 않고 삶은 무나물이 나왔다. 바나나와 야쿠르트까지 올려져 있어서 귀한 밥상이 아니라 수라상이다.
모두 허겁지겁 먹는데 어떤 사람은 부스럭대고 있다. 보니 비닐에 밥을 퍼넣고 반찬과 국을 각각 다른 비닐에 담았다. 앞에만 그런 게 아니라 옆 사람도 슬금슬금 눈치 보며 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가. 밥이 많다. 국도 가득하다. 달게 먹고 나오는데 일일이 향긋한 따신 물을 한 컵 따라준다. ‘잘 들었습니까.’ 인사하는 게 고마워라. 음식 담은 가방을 들거나 배낭을 맨 채 모자를 푹 눌러쓰고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을 편하게 해 주려는 말씀이다.
수많은 식당 일하는 사람과 안내원이 마당 곳곳에서와 문 입구에 서서 찾아와 주니 고맙다고 고개 숙인다. 벌벌 다니며 음식을 챙기는 말 안 듣는 사람도 있다. 모두 따뜻이 맞이해 주면서 편하게 밥 한 그릇을 먹게 해 주니 이런 곳도 있나. 비닐 음식은 뒀다가 저녁에 먹거나 남은 가족을 주려는 것 같다.
나눠준 식권을 보니 2천 번에 이른다. 처음 본 광경으로 적이 놀랐다. 노인 중 열에 일고여덟은 어렵게 산다는 말이 정말로 다가왔다. 아름답고 화려한 세상이다. 어디 없이 번쩍거리고 넘쳐나는데 이게 뭔가. 겉치장과는 달리 소갈머리가 없다. 다 곱게 늙은 단정한 사람들이 게눈감추듯 먹고 서둘러 지하철로 들어간다.
문학관 아니면 어디서 늙수그레한 같은 또래를 만나고 귀한 음식을 먹었겠나. 대신동을 지나면서 삐걱대고 서행할 때 통장 일하고 노인정을 들락거린 선생이 머물던 곳을 지나는구나. 생각이 난다.
첫댓글 선생님 열정에 감동입니다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것 같애요
문학관 탐방 계기로 더 좋은 경험담이
요산 선생님의 환생 이야기처럼 느껴요
수고하셨습니다
요산 선생은 살아계실 때 텁텁한 이웃 아저씨 같더구만
지금은 문학관에서 드높게 계십디다.
모두 자식 손자에게 퍼주고 헐벗고 배고픈 노인들을 봤습니다.
올 한해도 글 많이 쓰시고, 여전히 건강하시길...
길게 줄 서서 배식 받는 걸 봐도 남의 일처럼 여기고, 관심조차 없어 하는데ㅋ..역시나 남다른 경험을 하시니 글 소재가 풍부하신가 봅니다.무료급식을 하려면 비용이 만만찮게 들어갈텐데,..그저 경의를 표하고 싶습니다. 줄 서서 드시는 분 들께서 그분들의 노고를 알아야 할텐데...올 한해도 그저 건강하시고,즐겁게 보내세요.
성도님 새해에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