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지만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하고 빛나는 기업.’ 김동수 한국도자기 회장의 47년째 흔들림 없는 기업경영 철학이다. 회사 이름 그대로 그는 도자기처럼 빛나는 회사를 만들고 싶어한다. 그 결실인가. 50여 개 국에 수출하며 세계 5대 도자기 메이커로 성장해 명품 도자기로 인정받았고, 62년째 한 우물 경영을 하며 정리해고나 노사분규가 단 한 번도 없는 노사화합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청계천에 다시 물이 흐르고, 한국도자기 직원들은 더욱 즐겁다. 서울 청계천8가 사옥 11층 휴게실에서 200원짜리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내려다보는 청계천이 아름답다. 꼭대기에서만 신나는 게 아니다. 그 건물 1층에선 더 신바람이 난다. 이곳 도자기 전시장을 찾는 손님이 부쩍 늘었기 때문이다.
“은행 지점이 들어오겠다는 것을 뿌리치고 전시장을 설치하길 백번 잘했어요. 요즘 임대료 수입 이상의 짭짤한 수익을 올립니다. 옥상에 아트센터를 만들어 고객들이 그린 그림을 바로 도자기에 담아 구워내 갖고 돌아갈 수 있도록 할 계획입니다.”
2000년 7월에 완공한 한국도자기 사옥은 김동수(69) 한국도자기 회장의 회사 사랑의 열매다. 그 혹독한 외환위기는 이 회사에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내부에서 정리해고가 거론됐다. ‘어떻게든 같이 먹고 살자’고 다짐한 김 회장은 150억원 상당의 개인 재산을 내놓았다. 20년 동안 고물상에 세 주었던 사옥 부지도 이때 회사에 기증한 것이다.
“사실 이 건물이 청계천 고물상 거리에 섰으니 눈에 띄지요. 시내 한복판이면 빌딩 숲에 가려 잘 보이지도 않을 겁니다. 말 그대로 개천에서 용 난 셈이죠.”
Made in Korea 명품 도자기 ‘프라우나’ 과거 도자기 굽는 일은 한국과 중국 등 동양이 앞서 있었다. 하지만 산업 도자기가 유럽에서 부흥한 것은 문화와 상업이 그만큼 발달했기 때문이다. 자동화와 품질관리, 대량생산 시설과 왕실의 후원이 뒷받침해 오늘날 유럽의 명품 도자기로 성장했다. 한국도자기가 캘빈클라인 ·랄프로렌 ·레녹스 ·웨지우드 ·로열덜튼 등 세계적인 회사에 납품했지만, 그 가운데 70%는 자체 브랜드가 아닌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이었다. 자체 명품 브랜드가 없으니 해외시장 개척에도 한계가 있었다.
“솔직히 처음에는 따라가느라 바빴지요. 그런데 똑같이 우리가 만든 제품인데 해외 브랜드론 비싸게 받고, 우리 상표로는 대접받지 못하는 현실이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동양적인 미와 서구적 현대 감각을 합친 명품 브랜드 개발에 나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2003년 7월에 나온 명품 브랜드가 ‘프라우나(Prouna)’. 영국의 세계적인 도자기 업체 로열덜튼의 디자이너와 한국도자기의 기술력이 어우러진 결과다. 뚜껑에는 사슴과 백조, 찻잔에는 돛단배와 달무리를 새긴 퓨전 스타일로 고급스런 아름다움과 함께 실용성을 추구했다.
프라우나는 뚜껑에 새긴 조각을 제대로 표현해야 하므로 일반 도자기보다 5배나 많은 10~15개의 금형이 필요하다. 그만큼 만드는 과정이 어렵고 시간도 많이 걸린다. 그래서 가격이 일반 도자기보다 4~5배 비싸다. 찻잔 한 세트가 수십만 원, 풀 세트는 100만원을 호가한다. 당연히 해외 VIP가 공략 대상이다. 올해 2월 독일 프랑크푸르트 메세에서 열린 세계 최대 규모 소비재 박람회 ‘암비엔테(Ambiente) 2004’에서 프라우나는 세계 명품만 출품할 수 있는 10번 홀 4층에 터를 잡았고, 10여 개 국의 바이어들로부터 300만 달러어치의 샘플 계약과 선주문을 받았다. 지난 7월에는 태국 왕실에 납품했다.
국내에서도 반응이 괜찮다. 단순한 그릇이 아니라 품격있는 선물이란 이미지가 통했기 때문이다. 은행 PB(Private Banking) 담당자 사이에 입소문이 나면서 첫해 수천 세트가 팔렸다. 올해도 추석을 앞두고 한 대기업에서 선물용으로 대량 주문을 해와 직원들이 밤샘 작업을 했다.
“고려청자의 얼을 잇는 최고의 도자기를 만든다는 일념으로 일합니다. 프라우나의 시작은 도자기이지만 앞으로 시계와 액세서리, 세라믹 보석류 등으로 확대해 나갈 것입니다.”
이 사업계획에 따라 올 봄 주얼리 박스(jewery box)를 선보였다. 한국도자기는 지난해 크리스털 식기류와 숟가락 등 주방용품 시장에 ‘리빙한국’이란 브랜드로 진출했다. 전국 100여 개 도자기 매장을 찾는 고객의 원스톱 쇼핑이 가능하도록 식탁보 ·앞치마 등에까지 영역을 넓힐 계획이다.
62년 장수 브랜드… 장인정신으로 승부 한국도자기는 김동수 회장의 부친인 고(故) 김종호 회장이 1943년 충북 청주에서 창업, 3대에 걸쳐 62년째 한 우물을 파며 국내 도자기의 역사를 쓰고 있다. 김동수 회장은 도자기 같은 사람이다. 소탈한 외모와 1m70㎝, 66㎏의 작은 체구. 하지만 검도와 국선도로 단련한 체력 때문인지 섣불리 넘볼 수 없는 강건함이 느껴진다.
그는 철저한 현장주의자다. ‘사장 아들’이란 얘기를 듣기 싫어철저하게 밑바닥부터 경영수업을 쌓았다.
59년 연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그는 교수 꿈을 접고 충북제도회사(한국도자기의 전신)에 들어갔다. 그 무렵 회사는 매출의 40%를 이자로 내야 할 정도로 어려웠다. 독실한 크리스천인 그는 “빚만 다 갚을 수 있다면 제 영혼을 가져가도 좋습니다”라고 기도하며 당시 최대 매장인 서울 동대문 ·남대문 시장에서 살다시피 했다. 벽돌가마에 넣을 장작을 직접 패고, 청주공장에서 갓 생산한 물건을 트럭에 싣고 상경해 팔았다. 이렇게 공장과 시장을 넘나들면서 그는 고객의 소리에 귀기울였고 이를 제품개발로 연결시켰다.
“현장에서 고객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세상 물정과 경기 흐름을 알 수 있고 신제품 아이디어도 떠오릅니다. 기업가는 현장을 떠나면 생명을 잃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한국도자기가 처음부터 해외시장에서 통하는 도자기를 만든 것은 아니다. 여느 국내 메이커처럼 보통 그릇을 구워 시장에 내다 팔았다. 73년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다. 당시 청와대 안방을 지키던 육영수 여사가 영국산 본 차이나(Bone China)를 보여주며 “우리도 이런 것을 만들 수 있느냐”고 물었고, “한 번 해보자”는 각오로 도전했다.
73년 동양 최초로 섭씨 1,200도 이상 고온에서 젖소뼈를 태워 정제한 도자기 원료인 본 애시(Bone Ash)를 절반 이상 함유한 본 차이나를 만들어냈다. 당시 김동수 전무가 71년부터 2년에 걸쳐 본차이나의 고장 영국을 오가며 공을 들인 결과다. 도자기 명가로서의 명성은 하루아침에 그냥 쌓인 게 아니다. 한국도자기는 국내 업계에선 유일하게 디자인센터를 갖고 있다. 95년에는 디자인학교 ‘프로아트’를 세워 인재를 키운다.
이들 인력이 매년 600여 개의 새 제품을 만들고 신소재를 개발해낸다. 88년부터 3년 동안 20억원을 들여 젖소뼈를 함유한 특수초강자기 ‘수퍼암스트롱’ 개발에 성공했다. 일반 도자기보다 강도가 두세 배 세고 수분 흡수율도 아주 낮은데, 값은 본 차이나보다 20~30% 싸다. 최근 3년간의 연구 끝에 선보인 은이 들어간 ‘은 나노 그린 차이나’로 올 가을 혼수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30여 년 전부터 청와대에 식기를 납품해온 한국도자기는 세계 50여 개 국에 내다파는 수출 역군이다. 91년 합작공장이 들어선 인도네시아에선 10년 전부터 대통령궁에서 이 회사 제품을 쓴다. 지난 8월에는 예멘공화국 대통령 식기를 납품했다. 로마교황청과 노벨 만찬장에서도 한국도자기 제품을 사용한다. 그 결과 월 350만 개의 생산능력을 갖춤으로써 도자기 생산으로 세계 5위, 본 차이나만으론 2위 업체로 발돋움했다. 한국도자기는 로제화장품과 수안보파크호텔을 계열사로 두고 있다.
무차입 ·무노조 ·무해고… ‘3무(無)경영’ 한국도자기는 무차입 ·무노조 ·무해고 등 ‘3무(無)경영’을 실천하고 있다. 94년 사옥 공사를 시작했는데, 시공회사가 2년이면 될 것으로 예상했던 건물을 6년 만에 완공한 일화는 유명하다. 은행 빚 없이 영업이익만으로 짓겠다는 김 회장의 강한 의지 때문에 공사가 여러 차례 중단됐기 때문이다. 한국도자기 사옥은 11층짜리로 규모는 작지만 고급스럽게 잘 지은 건물로 알려져 있다.
“비록 작지만 다이아몬드처럼 빛나고 단단한 기업을 만들고자 합니다. 동시에 너무 욕심부리지 말고 한 가지라도 제대로 하자는 주의입니다. 아울러 적게 벌더라도 같이 먹고 살자는 생각입니다.”
김 회장은 이 같은 경영철학을 철저하게 이행했다. 외환위기가 닥치자 회사 형편이 어려워졌지만, 단 한 명의 정리해고 없이 함께 극복해냈다. 작업과정이 자동화됨에 따라 지난해 잉여인력이 150명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그래도 한국도자기는 인원정리 없이 5년 동안 정년퇴직 등 자연감소로 대체하기로 했다. 이 회사의 장수 비결 중 하나가 바로 ‘장수 근로자’다. 50~70대 간부와 근로자가 현장을 누빈다. 생산라인에서 20~30년 일한 숙련공은 나무젓가락으로 도자기를 두드려만 봐도 문제점을 금방 찾아낸다.
김동수 회장은 거래업체와의 관계에서 약속한 날짜보다 적어도 하루 이틀 전에, 그것도 전액 현금으로 결제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왔다. 거래업체부터 만족시켜야 좋은 재료를 구할 수 있고 제품도 살아난다는 이유에서다. 73년 사채를 완전히 정리한 뒤 어음 발행 없이 현금으로만 결제한다. 은행 돈을 빌리러 다니거나 어음을 막을 필요가 없으니 한국도자기 경리과는 늘 조용하고 한가한 것으로 소문나 있다.
“행복이란 가족과 직장 등 주변이 모두 건강하고 편안해야 찾아옵니다. 기업주가 지나친 욕심을 부리면 엉뚱하게 사원들이 고통받을 수도 있습니다. 규모만 키우려 들지 말고 돈이 잘 돌게 해야 제품도 잘 나오지요. 분수에 맞는 경영을 해야 기업도 살고, 사원도 행복해집니다.”
정치판에 기웃거리지 않고, 이권에 개입 안 하고, 세금 꼬박꼬박 내고, 작지만 단단하게 기업을 꾸려왔다고 회고하는 김 회장은 “외환위기 이전에는 알아주지 않았는데 중소기업들이 어려워진 요즘에는 우리 회사를 알아준다”며 웃었다.
직장 행복지수=기업 ·제품 경쟁력 김 회장은 ‘직원들이 행복해야 기업과 제품의 경쟁력이 살아난다’고 확신한다. 이런 믿음으로 그는 공장의 작업환경부터 바꿨다. 한국도자기 청주공장 화장실은 특급호텔보다 깨끗하기로 유명하다. 직원용 화장품도 비치돼 있다.
“대학을 졸업한 뒤 공장에 가서 처음 한 게 화장실 청소입니다. 정말 엉망이더라고요. 그때 결심했지요. 화장실부터 최고로 만들자고요.”
부모에 효도하는 직원이 일도 잘한다고 믿는 김 회장은 추석과 설에 맞춰 “부모님을 위해 쓰라”며 직원들에게 일률적으로 현금 35만원이 든 봉투를 준다. 연봉이나 상여금과 별도로 지급하는데 1년에 7억원 정도 들어간다. 가정의 달인 5월에는 직원 부모님들을 초청해 공장 견학과 수안보온천 관광도 마련한다. 직원들의 중겙?대학생 자녀에게 학자금을 지급하며, 6세 미만 아이들을 위한 보육시설도 운영한다.
120여 명을 무료로 보살피며 가르치는 성종어린이집은 삼성에서 벤치마킹했을 정도다. 실내체육관과 미혼 여사원용 아파트를 갖췄다. 급전이 필요한 직원들이 연 3%의 싼 이자로 빌릴 수 있는 희망복지기금(현재 4억원 규모)도 운영한다.
2002년 엘테크신뢰경영연구소가 근로자를 상대로 비공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중소기업으로선 유일하게 ‘훌륭한 일터’ 20곳 중 하나로 선정됐다. 이때 한국도자기가 받은 점수는 66점으로 18위. 그래서인지 이 회사에 들어오면 제 발로 나가겠다는 직원이 없다고.
“도자기는 빚는 사람의 혼과 정성이 들어가야 합니다. 이런 정성의 으뜸은 바로 효도입니다. 그래서 저는 효도를 최고의 정신으로 강조합니다.”
한국도자기 청주공장에는 ‘품질 세계 1위, 환경 세계 1위, 효도 세계 1위’란 슬로건이 크게 써붙여 있다.
김 회장은 직원에게는 너그럽지만 자식에게는 엄하다. 장남 김영신(43) 사장 부부는 미국 유학 당시 반지하방에서 신혼시절을 보냈다. 김 회장은 LA·뉴욕지사에 절대 도와주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는 지난해 중소기업인으로선 처음으로 ‘명예의 전당’에 헌정된 데 이어 2005년 8월 산업자원부로부터 제2회 ‘올해의 기업인상’을 받았다. 기업인상은 자격도 없고 부끄럽다며 6개월 동안 사양한 끝에 받았는데 “솔직히 지금도 찜찜하다”고 털어놓는다.
김 회장은 지난해 9월 1일 회사 경영을 장남에게 맡겼다. 차남 영목(41)씨는 부사장으로 프라우나 개발을 진두지휘했다. 두 아들의 지난 1년 경영 성적을 90점으로 매긴 김 회장은 “제 힘으로 날아가도록 구체적인 보고도 받지 않는데 잘하는 것 같다”며 “1년에 한 번 큰 방향만 제시할 생각”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기업공개 시점을 “주가를 너무 띄워도 곤란하므로 4~5년 안에 조금 인기가 없을 때 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김 회장은 한국도자기의 갈 길이 아직 한참 남아 있다고 진단한다. 카피(copy) 제품과 값싼 중국산과의 차별화를 꾀해야 한다. 아울러 지금까진 세계적 도자기업체들이 인정하는 수준이지만, 이젠 각국 소비자가 직접 한국도자기 제품을 알아보고 선택하도록 해야 한다.
“출발은 늦었지만 시설은 우리가 세계 최고입니다. 유럽 업체는 설비가 오래됐어요. 우리 것이 최신식이므로 그만큼 가능성이 있습니다. 작업환경도 우리가 최고, 원료도 최고만 씁니다. 도자기 코리아! 자신 있습니다.”
(본지 편집위원)
竹刀로 회사 세우고, 국선도로 건강 살리고 |
9월 12일 인터뷰를 마치고 점심을 함께 한 김동수 회장은 그 자리에서 물구나무 서기 시범을 보였다. 식사 도중 반주를 몇 잔 했는데도 그는 가뿐하게 해보였다. 그 비결은 17년째 해온 국선도. 그는 매일 오후 5시면 단전호흡에 빠져든다. 롯데호텔 헬스클럽에서만 13년째 수련을 쌓아 회원들 사이에선 ‘도사님’으로 통한다. 김 회장은 여기서 동년배 35명에게 무료로 국선도를 가르친다. 국선도로 스트레스를 풀고 몸과 마음을 가다듬기 시작한 뒤 감기로 고생한 적이 없다고 한다.
그가 대학 졸업과 함께 시작한 운동은 검도. 청주에서 아버지 공장 일을 돕는데 동네 불량배들이 자꾸 괴롭혀 그 퇴치용으로 검정 도복을 입었다. 죽도를 잡는 심정으로 공장을 일으켰으며, 검도 실력도 공인 6단으로 높아졌다. 김 회장의 사무실 창 쪽에는 지금도 모형 죽도가 있다. 78~83년 대한검도회장을 지낸 김 회장은 예일대와 버클리대, 연세대 ·경기대등의 검도회 창설을 적극 지원했다.
20년 넘게 검도로 단련한 몸이지만 운동을 게을리하고 일에 매달리자 고장이 났다. 80년대 말 고혈압과 당뇨, 신경성 위장병, 불면증이 함께 찾아왔다. 한동안 병원과 약에 의존하던 그는 89년 아는 이의 소개로 국선도를 접해 잔병을 고치고 오늘의 경지에 이르렀다. “욕심을 비우고 매일 수련에 몰두했습니다. 몸과 마음이 건강해야 고객이 다시 찾는 좋은 그릇을 빚을 수 있는 게지요.”내년이면 칠순인 김 회장은 손가락만으로 팔굽혀 펴기를 50회나 할 정도로 젊은이 못지않은 날렵한 몸매와 기력을 자랑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