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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23 자전거하이킹 만경강변 대장촌(춘포)호소가와농장2만보
자유인은 자전거로 익산서부역을 출발, 풍요의 강 만경강 춘포나루에서 잠시 쉬었다가 대장촌 호소가와농장으로 이동, 자전거 받혀 놓은후 옛 일제시대의 잔재를 알아보고자 대장촌을 두어시간 둘러보고, 만경강뚝방길 익산천변으로 자전거페달을 밟아 정자에서 집에서 싸온 도시락과 오미자술을 곁들여 점심을 먹고 삼례비비정까까지 하이킹했으며, 순례길 느바기길 만경강억새밭 2만보를 도보로 걷다.
자유인 나그네의 자전거하이킹 만경강뚝방길 코스중 우물쉼터 전망대는 만경강 경치가 좋아 내가 들리는 곳이기에 오늘도 이곳 우물쉼터전망대에서 늦가을 만경강변에 장관을 이룬 은빛 억새군락을 바라보며 가을 정취를 느끼고, 만경강 익산천변 억새의 장관을 구경하며 만경강억새군락 순례길을 걸었지.
그누가 인생은 나그네라 말했던가?
덧없는 세월의 흐름속에 젊음은 흘러가고 찬란했던 시절은 떠나간 세월아!
한세기를 풍미했던 사람들도 떠나가고 인생무상 아니던가?
아름다운 기억을 생각하면서 찬찬히 걸으며 힘들면 쉬어가고, 즐거운 한세상 살아가야지.
자유인 인생 나그네는 오늘의 목표를 대장촌의 일제시대와 현재의 모습을 담고싶은 마음과, 만경강 억새군락 순례길을 느바기로 걸으며, 망중한의 세월을 낚고 즐거움을 느끼고자 점심에 먹을 도시락과 오미자술을 준비하여 늦은 아침 집을 나섰지.
흘러가는 시간이 아쉬운 나그네는 시간을 붙잡아두고 싶은 심정으로 변화무쌍하게 흐르는 세월의 여정속에 우물쉼터에서 굽이쳐 흐르는 만경강과 익산천을 조망하고, 만경강 익산천변의 은빛으로 물든 억새의 장관을 구경하니 기분이 감개무량하였다.
두눈이 있어 우물쉼터에서 만경강을 조망할수 있어 감사하고,
두발이 쓸만해 자전거하이킹을 할수 있어 감사하고, 집에 까지 무사히 귀로 할수 있었음을 감사하게 생각하며 오늘하루가 흘러가다.
감사한 마음으로 세월을 낚으니 행복하였다.
그누가 속세를 가리켜 잠깐의 꿈속세상이라 했던가?
인생은 한조각 뜬구름 같은것이며 자연에 순응하며, 오직 한번의 인생 소중한 시간을 즐겁게 살자.
☛hiking시간 및 거리 : 10:30-18:00(8시간) 17.0km
왕복 34km 도보2만보
☛hiking코스 : 익산서부역송학사거리-목천포-만경강변-춘포나루-호소가와농장-춘포역-우물쉼터-익산천-비비정-만경강억새군락2만보-귀로
★누구나 올 때는 알몸 갈 때는 빈손★
조금 양보하는 미덕으로 살면 될 텐데
조금 돕고 베풀면 행복할 텐데
조금 배려하고 용서하면 될 텐데
조금 덜먹고 나누면 행복할 텐데
무엇이 그리 길고 질기다고 움켜만 쥐나
갈 때는 너나 나나 보잘것없는 알 몸뚱이뿐인데
누구나 올 때는 알몸 갈 때는 빈손
누구나 이 름만 대면 알만한
억만장자도 알몸으로 왔다가
이 세상에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북망산천 갈 때에는 국화꽃 수백 송이와
삼베 몇 필 감고 가는 그것이 고작인 것을
인심이나 쓰고가지 쌓놓으면 무엇하리
우리가 영생을 살 것처럼
아둥바둥 지지고 볶다
욕심이 골마 쥐어짜고 해봐야
산천 초목이 70~80번 바뀌면
그대나 나나 노병에는 이기는 장사 없으니
누우라면 눕고 오라면 가고 힘없으니
세상 순이대로 살아가는 이치가 아니던가
우리는 길 떠나는 나그네인데
언제 떠나는지 서로 몰라도 가다 보면
서로 만나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애절한 사연 서로 나누다 갈림길 돌아서면
어차피 헤어질 사람들
더 사랑해 줄 걸 더 베풀 것을 후회할 것인데
웬 욕심으로 무거운 왜 그리 못난 자존심으로
용서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고 비판하고 미워했는지
사랑하며 살아도 너무 짧은 시간
베풀어 주고 또 줘도 남는 것들인데
웬 욕심으로 무거운 짐만 지고 가는
애절하고 고달픈 나그네 신세인가
천 년을 살면 그리할까? 만년을 살면 그러리오
사랑한 만큼 사랑받고 도와준 만큼 도움받는데
심지도 않고 거두려고만 몸부림쳤던 부끄러운 나날들
우리가 서로 아끼고 사랑해도 허망한 세월인 것을
어차피 저 인생의 언덕만 넘으면 헤어질 것을
그날이 오면 다 벗고 갈 텐데 무거운 물질의 옷도
화려한 명예의 옷도 자랑스러런 고운 모습도
더 그리워하면 더 만나고 싶고 더 주고 싶고
보고 또 보고 따뜻이 위로하며 살아야 하는데
왜 그리 마음에 문만 닫아걸고 더 사랑하지 않았는지
아니 더 베풀지 못했는지
미워하고 싸워 봐야
상처 난 흔적만 훈장처럼 달고 갈 텐데
이제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 감사하고
이제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 사랑해야지
우리는 다 길 떠날 나그네들 이라네 .
대장촌(일어:오오바무라)과 호소가와농장 유래
➡대장촌(大長村 조선시대)→대장촌(大場村 일재시대)→춘포(春浦 현재)
부끄럽고 자랑스럽지 못한 역사일지라도 대장촌을 알아보자.
오늘 옛 지명 대장촌(현 춘포)을 둘러보며, 느낀점은 일제의 잔재가 아직도 이지역의 간판이란든가 건물의 명칭이 그대로 사용되고 있는 현실을 보았으며, 내려오는 습관이 있어 쉽게 고쳐지기가 어려운가보다 생각했소이다.
대장교회, 대장촌 유명탕집, 대장촌노인복지센타, 대장공장(옛정미소)등의 간판들이 보였다.
역사적 사실인즉 조선시대에 대장촌으로 마을이름이 전해져 내려왔다고 하는데, 일제시대에 가운데 한자가 바뀐 것이 눈에 뛴답니다.
쓰잘대기 없이 대장촌의 유래를 알아보았는지 내마음 나도 모르겠으나 내가 알아보고 싶어 알아보았지롱요.
일제가 한국을 침탈하여 대장촌은 일본인들이 전북 서부 평야 지역을 장악하기 위한 핵심 근거지였다.
1914년 전라선이 개통된 후 대장역은 줄곧 ‘대장역’으로 불리왔으나, 1996년 ‘춘포(春浦)역’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대장이라는 지명이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일제 잔재라는 것이 역명 교체의 근거였다. 익산시는 일제잔재 청산의 일환으로 조례를 개정해 1996년 1월 1일부로 ‘춘포면 대장촌리’를 ‘춘포면 춘포리’로 개칭했고, 이에 따라 대장역도 춘포역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대장촌이라는 지명은 일제의 침략 이전부터 조선시대부터 있던 이름이다. 원래 대장촌(大長村)이던 것을 일본인 지주들이 여기에 자리를 잡으면서 대장촌(大場村, 큰 농장이 있는 동네)으로 바꾸었을 뿐이다.
대장촌 호소가와 농장은 익산군 춘포면에 관리사무소와 사택 등을 건립하고 농장이름을 넓은 땅이라는 뜻의 대장농장(大場農場)으로 명명하였다. 이런 연유로 이 지역은 대장촌(大場村)이 되었다.
호소가와에 의해 만들어진 대장촌은 인근 평야 3개군 100 촌락에 걸치는 약 1000 정보의 대농장을 설립했다.
농장에 관리사무소, 사택 등을 건립하고 넓은 땅이라고 해서 ‘대장촌 농장’이라고 불렸다.
춘포리 옛 일본인 농장가옥(춘포면)은 1940년대에 건립된 건물로 전북도 지역에 만들어진 대규모 농장 중 대표적인 호소가와 농장에 소속된 주택으로 이 지역의 근대사를 잘 보여주고 있다.
춘포나루터에 들어 쉬어가다.
춘포는 우리말로 하면 봄나루이다.
봄나루라 불리다가 일본사람들에 의해 대장촌이라 불렸고
일제잔재 청산차원에서 춘포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이곳은 춘포나루터입니다.
춘포는 봄이 드나드는 나루라는 뜻으로 춘포나루터는 만경강따라 수많은 배가 드나들어 번성했던 곳입니다.
➡일제강점기“일본 사람들이 들이 넓다고 큰 대(大), 마당 장(場) 자를 써 ‘대장촌’이라고 했다. 춘포에는 아직도 대장의 지명을 딴 상호가 많이 남아 ”대장미용실 대장교회등이 있다.
춘포
춘포의 뜻은 봄나루입니다. 옛날 이곳의 지명 '봄개나루'에서 나온 이름입니다. 지명에 '개'가 붙는 것은 바닷물이 들어 왔다는 뜻입니다. 만경강은 바닷물이 드나드는 감조하천으로 삼례 비비정까지 바닷물이 드나들었습니다. 다시 말해 만경강은 너른 들을 지나지만 바닷물이 드나들기에 농업용수로는 사용할 수 없었고 주로 교통로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만경강 주변의 마을들엔 '포' 혹은 '나루'라는 이름이 많습니다.
춘포도 원래는 '봄개나루'였는데 발음을 편리하게 하기위해 '봉개나루'라 불렸고 춘포에 있는 산은 '봉개산'이라 불렀습니다. 고지도에는 우리말의 뜻을 한문으로 표기하여 '춘포' 혹은 '춘포산'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산수유의 효능
춘포나루 부근 및 만경강변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산수유의 효능을 알아보자.
신맛과 떫은맛을 내는 산수유는 구례 의성 이천등지에서 많이 나고 있으며,
산수유는 봄이면 노란색의 꽃이 예쁘고
가을에는 붉은 열매가 예쁘게 열리며
한방에서 약재로 사용하는 귀한 열매랍니다.
10월 중순 이후에 수확을 하며, 산수유에는 코르닌, 모로니사이드, 로가닌, 타닌, 사포닌 등의 배당체와 포도주산, 사과산, 주석산 등의 유기산이 함유되어 있습니다.
또한 비타민A와 다량의 당도 포함되어 있으며, 산수유에는 과실 중에는 특이하게 탄수화물이 다량 함유되어 있습니다.
동의보감에 따르면 "산수유는 음을 강하게 하고 정력향상에 좋다"고 기록되어 있을 만큼 예로부터 남자에게 좋은 원료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산수유 효능>은
1. 정력강화 스테미너 향상
2. 고혈압 예방
3. 당뇨병 개선
4. 눈건강
5. 피부미용
6. 갱년기증상 완화
7. 요실금 증상 완화
익산 구 일본인 농장가옥
➡근대등록문화재 제211호 (2005.11.11)
➡위치 : 전북 익산시 춘포면 춘포리 103-3
➡규모 : 2층 목조 일본식건물. 건물 106.78m².
일제강점기 농업 수탈의 아픈 역사를 증언해 주는 근대문화유산으로, 이 집은 옛 일본인 소유의 호소가와농장에 소속된 건물이다.
건물 지붕은 팔작지붕 위에 일식 기와를 얹었고, 외벽은 비늘벽으로 마감하였다.
농장의 농업 기술자였던 에토가 살았던 집이다. 그래서 에토주택이라고도 불린다.
에토는 당시 이리농림학교에 유학 온 일본인들 중 한 명으로
넓은 농장을 터전으로 삼아 크고 멋진 집을 지었었다.
일제강점기 수탈의 아픈 역사 춘포역
➡등록문화재 210호
만경강변에 자리잡은 춘포(春浦)의 원래 이름은 봄나루였고, 이것을 한자식으로 고쳐서 '춘포'라 했다.
일본은 넓은 들이라는 뜻으로 대장촌(大場村)이라 이름지었고, 일본인들은 '오오바무라'로 불렀다.
춘포역은 우리나라의 현존하는 역들 중에서 가장 오래된 간이역 역사를 가지고 있는 곳으로,
1914년 11월 17일 대장역(大場驛)으로 영업 개시이후 1996년 6월 1일 춘포역(春浦驛)으로 역명 변경되었다.
이곳이 호소가와 도장공장으로 현미를 가공하여 일본으로 반출한 곳으로, 슬프고 아픈역사의 장소이지만 규모가 굉장히 큰데 자유인 나그네는 놀라다.
호소가와 농장(細川農場)의 도정공장
호소가와농장의 도정공장은 1914년에 세워진 공장이라 하며, 대장촌일대의 토지를 소유했던 일본인 대지주 호소가와 모리다치(1883~1970)가 세웠으며, 도정공장에서 벼를 현미로 가공한 후 현미만을 일본으로 가져갔다고 합니다.
도정공장은 우리나라가 독립한 후 신한공사가 맡았다가 1949년 금융조합에서 운영하였고 1953년 박묘순, 1971년 조상래로 소유자가 바뀌면서 '대장도정공장'이라는 이름으로 정부양곡도정업을 하였다고 합니다.
호소가와모리다치는 일본 귀족원의 위원이며 고향인 구마모토현의 후작이었다고 하며, 1993~1994년 일본 총리를 지냈고 93년 우리나라를 방문한 호소가와 모리히로가 그의 손자라는 사실입니다.
호소가와가문의 대를 이은 승승장구가 한국인에게는 왠지 씁쓸한 마음이 드는군요.
호소가와모리다치는 1904년 조선에 진출하여 자금 15만원을 투자, 1909년 경 850정보 정도의 토지를 소유했다 합니다. 그리고 1920년대 말경에는 3천정보가 넘는 대토지를 소유하게 되지요.
1정보가 3천평 정도 되니 얼마나 넓은 땅을 소유했는지 짐작이 갈만합니다.
일제시절의 대장촌 일본인 농장주들과 농장 관리인들, 그리고 조선인 소작인들로 북적이던 시절의 고달픈 조선인들이 먹고살기 위해 싸래기를 주어먹으며, 힘든 삶을 살았으리라.
춘포 익산천 우물쉼터
춘포 우물쉼터는 자전거길 옆에 전망대가 설치되여 자전거하이킹을 즐기다가 전망대에 올라 경관을 구경할수 있도록 해 놓았다.
자전거 하이킹을 즐기는 자유인 나그네는 페달을 밟아 익산천 우물쉼터 지나는 중 우물쉼터 전망대에 올라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하다.
우물쉼터는 만경강과 익산천이 만나는 곳으로 새들과 다양한 생물들이 많이 드나드는 풍광이 아름다운 곳입니다.
과거에는 취수정으로 사용되었던 곳으로 옛 취수정의 흔적이 남아있고 아름다운 순례길인 느바기길이 지나는 곳이기도 합니다.
달팽이처럼 느리게 세월을 낚는 나그네는 느리게 느바기길이 지나가는곳 순례길에 세워진 우물쉼터에서 아름다움 만경강 풍광을 조망하고 은빛 억새군락을 바라보며 망중한을 즐기는 기분은 아주 좋았지.
'느바기길'의 의미란 "느리게 걷고, 바르게 걷고, 기쁘게 걸으라를 의미를 담고 있다" 한다.
➡느바기(느리게-바르게-기쁘게의 합성어로서 느바기를 나타내는 것은 달팽이이다.)
인생나그네 '느바기'의 의미처럼 "느리게 걷고, 바르게 걷고, 기쁘게 1만보 2만보 걸으며 감사하며 느리게 살아가자.
느리게 걷는다는 의미를 닮아 달팽이 모양을 상징화한 우물쉼터에 잠시 쉬어가며 옛 전통놀이도 즐길수 있습니다.
깨끗하고 아름다운 만경강 푸른물결이 만나는 우물쉼터에서 잠시 머물러 쉬어가다.
자유인 인생 나그네 조동화는 오늘도 소풍 나온다는 생각으로 도시락을 집에서 준비하여 오다.
새로 담은 깎두기와 갓김치가 맛이 있어, 일부러 도시락을 먹을 요량으로 점심을 도시락으로 하다.
우물쉼터 익산천 다리를 지나 쉬어가는 정자에서 깎두기와 갓김치로 점심을 먹었으며, 오미자로 담근 술 한잔과 찐계란두개를 먹으니 기분이 좋고 말고 제주도에서 온 귤도 먹고~~~~~~~~점심을 먹고 만경강 억새군락 느바기길 순례길을 따라 천천히 느바기로 걷다.
느바기가 뭐여.
느바기는 합성어로서 ‘느바기’는 ‘느리고 빠르고 기쁘게’라는 뜻이 담겨 있으며,
➡느바기(느리게-바르게-기쁘게의 합성어로서 느바기를 나타내는 것은 달팽이이다.)
인생나그네 오늘의 소풍은 '느바기'의 의미처럼 "느리게 걷고, 바르게 걷고, 기쁘게 걸으며, 감사하며 느리게 시간을 보내다.
귀로길 자유인 인생나그네가 자전거 페달을 밟고 춘포(대장촌)다리에 가까이 오니 시간은 17:10 해가 서산에 기울어가고 있었다.
인생은 나그네 - 방운아
웃고오는 인생이냐 울고가는 나그네야
대장군 마루턱에 고향집이 그립구나
짖궂은 운명속에 떠 다니는 뜨내기몸
돌부리 사나운데 눈물속에 길은 멀다
그리운게 사랑이냐 야속한게 인정이냐
나그네 옷자락엔 찬서리만 설레이네
쓰라린 부모마음 그 사랑은 일반인데
지팽이 절룸절룸 이 고개를 울고넘네
님의 침묵 (沈黙) / 萬海 - 韓龍雲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끝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 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 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 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에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은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한용운(韓龍雲, 1879년 8월 29일 ~ 1944년 6월 29일)은 한국의 시인, 불교 승려이자 독립 운동가이다. 호는 만해(萬海)이다.
일제에 대한 저항 정신으로 집도 조선총독부 반대 방향인 북향으로 지었고, 식량 배급도 거부했다는 이야기는 매우 유명하다. 또한, 변절한 친일파 최남선이 한용운과 가까운 사이임을 자처하자, 한용운은 "'최남선'이라는 사람은 (마음 속으로) 이미 장례를 치러서 당신은 모르는 사람입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전기로 고은의 《한용운 평전》(1975)이 있으며, 외아들 한보국은 고향인 홍성에서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가 한국 전쟁 때 월북했다.
☛한용운의 생애
•1879년 충청남도 홍성 출생.
•1908년 명진학교(明進學校, 지금의 동국대학교) 졸업.
•28세에 설악산 백담사에서 불문에 귀의.
•1919년 3월 1일 (→ 3·1 운동) 불교 대표로 독립 운동에 참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3년간 감옥살이.
•1925년 시집 님의 침묵 출판
•1944년 서울에서 중풍으로 사망.
출처 - 위키 백과
건강글
소금3%가 바닷물을 썩지 않게 하듯이
마음 안에 있는 3%의 좋은 생각이
우리 삶을 지탱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향기롭고 맛깔스러운
산해진미는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줄지 모르겠지만
건강에는 아주 해롭다.
● 남을 미워하지 마세요. 미움은 피에 독성물질을 만들어 냅니다.
● 웃으세요. 스트레스가 만병의 원인입니다.
사는일
사는 일이 너무 바빠
봄이 간 후에야 봄이 온 줄 알았네
청춘도 이와 같아
꽃만 꽃이 아니고
나 또한 꽃이었음을
젊음이 지난 후에야 젊음인 줄 알았네
인생이 길다 한들
천년만년 살 것이며
인생이 짧다 한들
가는 세월 어찌 막으리
봄은 늦고 여름은 이른
칠월과 같은 사람들아
피고 지는 이치가
어디 꽃 뿐이라 할까...
나의 초년인생 경험담
1970년 鐵道에 入門하여 40여년을 철도에 젊음을 불사르고, 무엇하나 만족스럽게 이룩 한 것 하나 없이 흘러간 歲月!
1970년2월20일 목포기관차사무소 기관조사 초임발령으로 사회 초년생이 되어 목포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당시 철도는 증기기관차(영국의 조지스티븐슨 1829년발명)의 운행에서 디젤전기기관차로 동력이 바뀌어가는 과정에 있었으며, 목포-광주간을 운행하는 몇 개열차는 증기기관차사업이 있었으므로 신규발령된 기관조사에게는 증기기관차승무로 지정되어 기관사1인 본무기관조사1인 보조기관조사1인 3명이서 하는 근무형태로 기관사는 운전만담당하고 기관조사는 교대하여 석탄을 투척하여 증기를 가열시켜 증기기관차가 움직이므로 석탄을 투척하는 작업이 기술이 필요하기도 하지만 힘을 쓰는 작업이었기에 어려운 작업이었다.
칙칙폭폭, 철컹철컹 한밤의 정적을 깨며 기적소리를 직접울리면서 달렸던 추억어린 시절이 있었음을 추억삼아 이야기 해보았습니다.
시골의 어른들은 기차소리에 깨어 많은 자손을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허구한 이야기는 아닐것이요, 그래도 인정있고 살기가 좋았던 시기는 그때 그옛날이 좋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순천철도국 목포기관차사무소 기관조사의 사회초년생은 2년6개월의 반복되는 임무후 1972.8.29. 군에 입대, 전주 35사단에서 6주간 훈련을 마치고 후방기 교육을 춘천에서 2주간의 훈련후 강원도 인제 현리 공병부대 의무실 위생병으로 자대 배치되었다.
군생활중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35사단 훈련병때 모악산KBS송신소 건설 작업시 모악산아래에서 세멘 한포대씩 등에 메고 정상까지 오르던일이 가장 내인생에서 힘들었던 일이었답니다.
자유인 趙東和는 黃金萬能主義의 核家族 개인주의 세상에서 옛시절의 인정은 찾아볼수 없고 하루면 수도없는 갖가지 사건사고 홍수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속에 나자신도 예외가 될수 없듯 바쁜일상으로 어영부영 하루가 흘러간다.
자유인 조동화 그는 누구인가?
전쟁의 포성이 한창인 6.25 시대에 태어나, 인생의 삶이 무엇인가 고뢰하며 즐거운 인생을 꿈꾸고자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쉼없이 흘러가는 세월속에 지나온날들이 아쉬움만 가득하지만 흘러보낸 세월은 다시오지 않기에 지나간 시간들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고, 무상한 삶의 여정을 자연에 순응하며, 오직 한번의 인생 소중한 시간을 즐겁게 살기 위하여 나날이 최선을 다하자.
인간의 삶이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이 세상에 왔으니 삶에 이유가 없고, 그냥 태어났으니 사는것이다.
인간의 삶이란 정답이 없는 것이 정답인 것 같다.
정답없는 인생, 내가 하고자 하는것 하면서 행복 느끼며 살면 그것이 행복아닐까 생각해본다.
조동화의 벗님들!
자유인 조동화의 신조는 삶의 여로에서 이세상 살아가는 것이 모두가 “부질없다” 하면서 그냥 하루 하루 최선을 다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다.
그누가 속세를 가리켜 잠깐의 꿈속세상이라 했던가?
인생은 한조각 뜬구름 같은것이며 자연에 순응하며, 오직 한번의 인생 소중한 시간을 즐겁게 살자.
오늘 해야 할일이 있다면 바로 시행하고, 평범한 일상이 나에게 가장 소중한 행복의 자원임을 꼭 기억하며 사리라.
과거는 지나갔고 내일은 나의 날이 아닐수도 있기 때문이다.
행복이 뭐 별거 있습니까? 그냥 내가 하고 싶을거 하면 그게 행복입디다.
고맙고 감사합니다.
인간의 진정한 행복(happiness)이란 무엇인가?
안병욱 교수는 행복이란
첫째는 낙천적 인생관이다.
인생의 모든 것을 밝게 긍정적으로 보고 기쁜 마음으로 살아가는 생활 태도다.
인생은 마음가짐이 가장 중요하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이 세상의 모든 일은 마음가짐에 달렸다.
극락과 지옥은 내 마음 속에 있다.
감사와 기쁨의 눈으로 인생을 보면 모두 즐겁고 기쁘다.
둘째는 사랑이다.
사랑은 인생의 주성분이다.
인간의 주성분은 사랑으로 되어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아무도 없고,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을 때, 우리는 견딜 수 없는 허무주의와 고독감과 절망감에 빠져 살아갈 수가 없다. 인간은 빵만으로 사는 동물이 아니고 사랑을 먹고 사는 동물이다.
셋째는 보람있는 일이다.
산다는 것은 일하는 것이요, 일 하는 것은 사는 것이다. 일을 하되, 보람있는 일을 해야 한다. 자기가 하는 일에 아무 보람을 못 느낄 때, 인생은 참을 수 없는 고역으로 변한다.
건강, 돈, 명예, 성공, 신앙,지혜, 자유도 물론 중요하지만, 행복의 핵심적 요소는 아니다.
부자의 대부분은 불행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낙천적 인생관, 사랑, 보람있는 일.
3가지 행복관을 가지고 살면 행복하다.
중국속담에 행복은
할 일이 있는 것,
바라볼 희망이 있는 것,
사랑할 사람이 있는 것, 이 세가지다.
할 일이 없다는 것, 아침에 눈을 떠도 갈 곳이 없다는 것,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다는 것만큼 비참한 사실은 없을 것 같다. 죽을때까지 일을 놓지 않는 사람이 건강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일은 행복의 필수조건 중 하나다. 존 록펠러 3세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행복으로 가는 길에는 두 가지 단순한 원칙이 있다. 먼저, 당신이 관심 있고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라. 그 일을 찾았다면 당신이 가진 에너지, 야망, 능력 등 모든 영혼을 쏟아 부어라."
행복( happiness)은 어디에!
독일의 철학자 칸트(1724.4.22-1804.2.12)는
" 인간 행복의 3가지 조건으로
첫째 어떤 일을 할 것,
둘째 어떤 사람을 사랑할 것,
셋째 어떤 일에 희망을 가질 것'이라고 했다."
그 세 가지를 충족할 수 있다면 행복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으로 일생을 보낸 대철학자가 제시한 행복의 세 가지 조건이 범인들이 쉽게 생각할 수 있는 평범한 과제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우선 놀라게 되고, 그러면서도 오늘날 우리가 처한 상황이 이 세가지 조건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하고 있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놀라게 된다.
➡노동뒤의 휴식은 순수한 기쁨 행복의 원천
노동 뒤의 휴식이야말로 가장 편안하고 순수한 기쁨이다.- 칸트
근로는 매일을 풍부하게 하며, 휴식은 피곤한 나날을 더욱 값있게 한다. 뿐만 아니라 근로 뒤의 휴식은 높은 환희 속에 감사를 불러일으킨다. -보들레르
휴식은 단순히 일을 중단하고 노는 것이 아닙니다. 좀 더 많은 일을 좀 더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재충전의 기회가 바로 휴식이라는 사실을 우리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휴식과 행복은 그대가 바라는 것, 그러나 그것은 오직 근로의 결과에서 얻을 수 있다'- 토마스 A. 캠피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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