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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해우(海隅)의 백합국어사랑방(신문사설&칼럼) 원문보기 글쓴이: 해우(海隅)
2010년 8월 28일 토요일, 오늘의 주요 신문사설&칼럼
* 일러두기 : 이 자료는 교육용으로 쓰기 위해 편집한 것이며 상업적 목적은 일절 없습니다. 선정된 사설의 정치적 성향은 본인의 성향과는 무관함을 알려 드립니다.
* 오늘의 주요 신문사설
[한국일보 사설-20100818토] 검찰은 '김태호 무혐의' 처리한 근거 해명해야
김태호 국무총리 후보자의 인사청문회에서 드러난 최대 의혹은 단연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과의 관계다. 김 후보자는 박씨를 처음 만난 시점에 대해 거짓 증언을 했다. 2007년 이후부터 박씨를 알았고 2008년에야 골프를 함께 쳤다고 증언했으나, 2006년 10월 함께 골프를 했고 같은 해 박씨 공장이 있는 베트남을 두 차례 방문한 사실이 드러났다. 김 후보자가 2007년 4월 뉴욕에서 박씨 부탁을 받은 식당 주인으로부터 수만 달러를 받았다는 의혹을 의식해 거짓 증언을 했다고 의심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물론 김 후보자가 박씨와의 친분 관계를 숨기려 했다 해서 이를 곧장 금품수수 의혹으로 연결 짓는 것은 비약일 수 있다. 그러나 시선을 검찰 쪽으로 옮기면 문제는 달라진다.
검찰은 지난해 박씨를 수사할 당시 그의 진술에 의지해 정황증거만으로 이광재 현 강원도지사 등 참여정부 인사들을 수사하고 기소했다.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김 후보자에 대한 수사는 다른 정치인들에 비해 소홀했다는 인상이 짙다. 김 후보자 스스로 인사청문회에서 박씨와의 골프 회동이나 베트남 방문 등에 대해 검찰 조사를 받은 적이 없다고 했다. 검찰은 또 김 후보자에게 돈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진 뉴욕 식당의 종업원조차 제대로 수사하지 않았다. 그러고도 검찰 관계자가 이례적으로 무혐의 내사종결 사실을 김 후보자에게 친절히 알려줬다니, 김 후보자 수사와 관련해 검찰에 무슨 특별한 사정이라도 있었는지 의아할 따름이다.
검찰은 지금이라도 김 후보자 수사내용과 무혐의 판단 근거를 가감 없이 공개해 의혹을 해소해야 한다. 부실 수사를 인정하기가 껄끄럽다면 인사청문회에서 김 후보자와 박씨의 관계에 관해 새로운 증거사실이 드러난 만큼 김 후보자의 금품수수 의혹 수사를 재개해야 마땅하다. 김 후보자와 검찰을 보는 국민의 시선이 싸늘하고, 야당이 특별검사를 거론하고 있다는 사실을 검찰은 유념하기 바란다.
[한겨레신문 사설-20100828토] ‘국치 백년’을 맞는 회오와 다짐
내일은 일본 제국주의의 강압으로 나라를 뺏긴 지 백년이 되는 국치일이다. 이날을 맞아 과거를 겸허하게 되돌아보고 냉철한 자성의 시간을 갖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첫째, 포함외교와 약육강식의 식민지 쟁탈전이 난무하던 시기에 우리 선조들이 무엇을 잘못해서 그런 치욕을 당했는지 옷깃을 여미고 반추해야 한다. 망국의 백성들이 국내 또는 국외를 유랑하면서 얼마나 고통을 겪었는지, 나라의 독립을 위해 온몸을 던져서 싸운 애국자들이 어떻게 죽어갔는지, 그들의 후손들이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도 똑똑히 기억해야 한다. 나아가 징병·징용 등 강제연행의 피해자, 군대위안부 할머니, 사할린 잔류 동포, 피폭자, 시베리아 억류자 등이 그동안 어떻게 방치돼왔는지, 정부를 포함해 우리 사회가 이들의 고통에 얼마나 무심했는지도 살펴봐야 한다.
둘째, 잔인한 식민통치의 가해자였던 일본과의 관계를 당당하고 의연하게 재정립할 수 있도록 중지를 모아야 한다. 지난 10일 발표된 간 나오토 일본 총리의 담화가 이전 담화나 문서에 비해 진일보했다고 평가할 수 있는 구석이 있는 것은 맞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일본 사회의 기준으로 볼 때 그렇다는 것이지 한국인의 처지에서 보면 그저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강제병합과 식민지지배가 한국인의 ‘뜻에 반하여’ 이뤄졌다는 표현을 하는 데 백년이나 걸렸다면 일본 사회에서 양식의 기준이 어디에 있는지 진정으로 묻고 싶다. 심지어 아베 신조 전 총리는 간 총리 담화에 대해 ‘부끄러운 일이며 역사에 대한 공부가 부족하다’고 신랄히 비난했다. 그와 비슷한 사고 구조를 가진 일본 정치인들은 담화 내용이 한-일 우호의 초석인 한-일 기본조약 체결에 진력했던 양국 노력을 손상시켰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965년 조인된 기본조약에는 식민지지배에 대한 사죄는커녕 식민지라는 언급이 아예 없었다. 당시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에 대한 유·무상 5억달러 차관 제공도 보상이 아니라 ‘독립축하금’이라고 했다. 처음부터 잘못 끼운 단추를 바로잡지 않으면 진정한 새출발을 하기가 어렵다. 무엇보다 지난해 총선에서 승리해 역사적 정권교체를 이룬 일본 민주당 정권이 여명이 얼마 남지 않은 피해자들에게 구체적 조처를 취해주기를 기대한다. 이 문제와 관련해 일본이 국제사회에서 어떤 평가를 받느냐는 결국 일본인들의 몫이고 선택이다. 일본이 종래의 길을 고집한다면 참 딱하다고밖에 달리 말할 수 없다.
셋째, 두 나라 시민 사이의 교류 폭과 수준을 더욱 넓히고 다양화해야 한다. 솔직히 정부 차원의 교섭에서 과거사 문제가 매끈하게 정리되기를 기대하기는 쉽지 않다. 그런 점에서 엄청난 속도로 확대되고 있는 시민사회의 교류가 관광과 대중문화 차원에 머물지 않고 상생·화해·평화·복지 분야 등으로 확대되는 것이 중요하다.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의 과거를 부끄러워하고 상처를 아물게 하기 위해 진정으로 노력하는 양심적 일본인이 적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우리 시민단체나 지자체 등이 이들과의 교류를 넓혀간다면 우호와 화해의 기반이 더욱 튼실해질 것이다.
[조선일보 사설-20100828토] 國恥 100년, 다시 동아시아 격변의 복판에 서서
내일로 우리는 대한제국이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로 떨어진 지 100년을 맞는다. 1910년 8월 29일로부터 36년간은 한국인들이 발 딛고 살 나라가 사라져버린 세월이었다. 2000만 백성은 이민족 통치에 생명과 재산 그리고 영토를 내맡긴 채 숨도 크게 못 쉬는 신산(辛酸)의 삶을 살아야 했다. 겨레의 말과 역사, 내가 누구인지 밝히는 정체성(正體性)의 뿌리인 성(姓)과 이름마저 빼앗겼다. 역사상 우리 민족이 이처럼 철저하게 존재 자체를 부정당했던 적은 없었다.
일본은 무장한 군대와 헌병과 경찰이 둘러싼 폭압 분위기 속에서 일본과 내통(內通)한 대한제국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에게 조선통감이 작성한 전권위임장을 주고, '대한제국 황제가 일왕에게 통치권을 넘겨줘 일왕이 이를 받아들인다'는 내용으로 조선통감이 만들어놓은 조약문서에 서명하도록 했다. 한국과 일본의 지식인들은 지난 5월 '한국 병합 100년에 즈음한 성명'에서 "한·일 합병조약은 전문도 거짓이고 본문도 거짓이며 조약 체결의 절차와 형식에도 중대한 결점과 결함이 보이는 불의 부당한 것이었다"며 "조약은 체결 당시부터 무효"라고 선언했다.
광복 후의 새로운 한·일관계는 일본이 국권 침탈 과정에서 저지른 이 같은 불법성을 엄정하게 지적하고 그들로 하여금 이 역사적 죄과(罪過)를 솔직히 인정하고 선언하도록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했어야 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지 못했다. 절대 빈곤으로부터 탈출할 경제 발전의 종자돈 마련에 다급하게 쫓겼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1965년 이렇게 체결된 한·일 기본조약을 방패 삼아 한국 강제병합이 도덕적으로야 어찌 됐든 법률적으로는 합법적이었고, 한국 식민 지배도 법적으로 유효했다는 입장을 지금껏 한 번도 거둔 적이 없다. 식민 지배에 따른 한국민의 개별적 피해 보상 역시 이 조약으로 모두 청산됐다는 주장을 되풀이해 왔다.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과 역사 교과서 왜곡 같은 문제의 뿌리도 결국 여기에 닿아 있다.
100년 전 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유학자 매천 황현(黃玹)은 "국가는 필시 스스로 자기를 해친 연후에 남이 치고 들어온다고 했으니, 아 슬프다"고 했다. 매천의 말 그대로였다.
서양 제국주의의 서세동점(西勢東漸) 소리가 누구 귀에도 훤히 들리던 19세기 후반 조선의 지배층은 세계의 기운(氣運)이 바뀌는 것에도, 제국(帝國)의 책략이 무엇인지에도 깜깜했다. 일본에선 개화(開化)냐 양이(攘夷)냐를 놓고 온 나라가 목숨을 건 노선 투쟁을 벌이고, 늙고 굼뜬 청(淸) 또한 국제법과 국제정치를 익히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그때 조선은 개화를 통해 세계의 정세를 판단하고 새 문명의 문법(文法)을 도입해 경제와 군비(軍備)를 정비해 나라의 뼈대를 바꾸려는 움직임이 너무나 더디고 미약했다. 훗날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전략으로 나라의 쇠망을 막아보려던 시도가 서양 제국의 이면(裏面) 흥정에 의해 번번이 농락당하고 만 것도 국제 정세에 대한 이런 무지(無知) 때문이었다.
21세기의 두 번째 10년을 시작하는 지금 동북아 무대 위에선 반(半)식민지 50년, 공산 폐쇄사회 30년을 보낸 중국이 개혁·개방 30년의 성과를 딛고 세계의 공장으로 세계 제2 경제 대국을 향한 도약을 눈앞에 두고 미국과 세계 질서를 논하는 '글로벌 2'(Global 2)의 위치에 올라섰다. 지난 40년 동안 세계 제2의 경제 대국 자리를 지켜온 일본도 100년 만에 다시 찾아온 동북아 질서 재편의 기회와 위험 앞에서 국가의 새 진로를 암중모색하고 있다. 일제 36년의 후유증인 남북 분단의 십자가를 걸머진 대한민국 역시 근대화와 민주화를 차례로 달성하고 세계의 선진 대열에 올라섰다. 세계 인구의 3분의 1과 세계 부(富)의 3분의 1 가까이를 차지하고 있는 동북아지역의 질서 재편 과정에서 대한민국이 얼마나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느냐의 여부는 이제껏 우리의 멍에로 짊어져 왔던 북한이란 변수를 어떻게 민족 재도약의 시너지(synergy)원(源)으로 바꿔나갈 수 있느냐에 달렸다.
100년 전 흥망의 교훈을 돌아보는 오늘이야말로 지도자는 지도자 자리에서, 국민은 국민의 자리에서 민족 재도약의 열쇠를 담고 있는 북한문제를 머리와 가슴만이 아니라 온몸으로 떠안고 풀어가야 할 때다.
[서울신문 사설-20100818토] 北 3대세습 본격적인 대책 마련해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그제 전용 특별열차편으로 중국 지린성을 찾았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을 초청해 놓고는 전격 중국을 방문한 성동격서(聲東擊西)식이다. 카터 전 대통령은 김 위원장을 만나지 못한 채 지난 1월 불법으로 북한에 들어가 억류됐던 미국인 아이잘론 말리 곰즈와 함께 어제 평양을 떠났다. 김 위원장이 3개월여 만에 중국을 다시 방문한 주요 목적은 3남 김정은으로의 세습체제 구축과 관련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 위원장은 방중 첫 일정으로 김일성 주석이 다녔던 위원 중학교를 둘러봤다. 항일유적지인 바이산 공원도 찾았다. 지린성에는 김일성이 다녔던 학교와 항일유적지들도 있다.
김정은도 중국방문에 동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정일·김정은 부자는 김일성 왕조의 성지순례를 하면서 후계세습에 관한 정통성을 인정받으려고 한 듯하다. 북한 주민들에게 선전하는 국내용뿐 아니라 ‘세자 책봉’을 추인 받듯이 중국의 지도자에게도 세습체제를 인정받으려는 뜻도 물론 깔려 있다. 다음 달 초에 열릴 노동당 대표자회에서 김정은은 당의 권력서열 2위인 조직비서가 될 것이라는 예상도 나오고 있다. 대표자회에서 김정은으로의 후계체제를 확실히 하기 위해 중국을 방문한 것으로 봐도 큰 무리가 없다. 김 위원장은 어제 중국 최고 지도자도 만나 지원을 요청했을 것이란 관측도 제기된다.
북한은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현대판 왕조국가다. 김일성·김정일의 부자세습도 모자라 김정은에게까지 3대가 대를 이어 가며 통치한다는 게 가당한 일인가. 먹을 게 없어 아사자가 속출하고, 목숨을 걸고 탈북하는 주민이 급증하는 상황에서 김일성 왕조는 세습체제 구축에만 혈안이 돼 있다. 김 위원장의 건강은 좋지 않다. 김정은으로의 세습이 이뤄지는 과정에서 혼란과 권력투쟁 양상도 배제할 수 없다. 북한에서 급변사태가 빚어질 가능성도 있다. 북한은 정상적인 판단과 상식이 통하지 않는 곳이다. 북한은 내부가 혼란스러울 경우 서해상에서 도발하며 내부단합을 꾀하려 할지도 모른다. 정부와 군은 북한의 3대세습 체제 구축과 급변사태 가능성 등에 대한 대비를 보다 철저히 해야 한다. 해이해진 듯한 군의 기강확립도 이뤄져야 한다.
[한국경제신문 사설-20100828토] 수출 사상최대, 엔高효과 사라질 때 대비를
한국은행은 우리나라의 7월 수출액이 지난해 같은 달보다 28.8% 증가한 431억7000만달러를 기록, 월간 기준으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고 어제 밝혔다. 반도체 선박 등의 수출 호조에 따른 것이다. 이에따라 7월 경상수지는 58억8000만달러 흑자로,사상 최대였던 지난해 3월의 66억4000만달러 이후 흑자 폭이 가장 컸다. 글로벌 경기둔화 우려가 다시 본격화하고 있는 시점의 이 같은 수출 호실적은 반가운 소식에 틀림없다.
수출 호조는 기업들의 원가절감과 생산성 향상 및 신시장개척 노력 등에 힘입은 덕분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특히 올 들어 환율이 대체로 하향세를 유지해왔던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다만 수출 증가의 이면에는 15년 만에 최고 수준인 엔고의 반사이익도 크게 작용했다는 점 역시 부인하기 어렵다. 올 들어 일본 엔화가치 상승 속도는 워낙 가팔라 원 · 달러 환율 하락폭을 상쇄하고도 남는다. 일본과 경쟁관계에 있는 제품 수출에서 상대적으로 우리 제품의 가격 경쟁력이 높아졌다는 얘기다.
엔고가 당분간 지속될 것이라는 전망이 많지만 경기침체를 겪고 있는 일본 정부가 시장개입에 나설 가능성도 적지 않은 상황이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 수출품의 상대적 이점이 사라질 수도 있다. 여기에 미국의 더블딥 우려를 비롯한 세계 경기둔화까지 본격화되면 수출 환경이 급속히 나빠질 가능성도 크다. 우리 경제의 대외의존도가 높은 만큼 글로벌 환경변화에 대응해 수출경쟁력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서울경제신문 사설-20100818토] 고무적인 대기업의 채용 확대
대기업들이 하반기 신입사원 채용규모를 크게 늘리기로 함에 따라 심각한 청년실업 문제에 다소 숨통이 트일 것으로 기대된다. 삼성그룹은 하반기 대졸 신입사원 채용인원을 당초 계획했던 4,000명에서 4,500명으로 늘리기로 했다. 이에 따라 올해 삼성의 대졸 신입사원 채용규모는 상반기 3,500명을 포함해 8,000명에 달하게 된다. 이처럼 신규 채용을 늘리게 된 것은 실적호조로 채용여력이 더 생겼기 때문이라는 게 삼성 측의 설명이다. 상반기에 2,200명을 뽑은 포스코도 투자확대에 따라 하반기에 1,300명을 추가 채용하기로 해 올해 채용인원이 당초 2,500명에서 3,500명으로 늘어난다. LG, 현대ㆍ기아차, SK 등 다른 대기업들도 오는 9월 초에 하반기 채용계획을 확정, 공고할 예정인데 규모를 대부분 예정보다 늘리기로 했다.
질 좋은 일자리 창출은 우리 경제 최대 현안이다. 특히 전반적인 고용사정은 좋아지고 있지만 청년실업은 악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이명박 정부 임기 후반기 시작을 맞아 경제전문가 42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일자리 창출이 국정의 최대 과제로 꼽혔다. 지표상으로는 경제가 좋아졌다고 하지만 국민들이 피부로 느끼는 경기는 여전히 싸늘한 것도 고용부진이 큰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자녀가 일자리를 찾지 못해 놀고 있다면 경제회복에 공감하기 어려울 것이다.
대기업들의 채용규모 확대는 정부의 일자리 창출 정책에 적극 호응하는 것일 뿐 아니라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것이기도 하다. 최근 양극화가 심화됨에 따라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경영을 비롯해 대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요구가 커지고 있지만 고용증대만큼 중요한 것도 없다. 고용이 늘어야 소득이 증가하고 소비여력이 커져 경제가 활력을 되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도 일자리 창출에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기업을 중심으로 민간 부문의 고용이 늘어나기 위해서는 높은 수익을 바탕으로 투자가 활성화돼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기술개발과 생산성 향상 등 기업의 경쟁력 강화 노력이 강화돼야 한다. 아울러 기업들이 과감하게 투자에 나설 수 있도록 규제완화와 노사관계 안정 등 기업환경 개선을 위한 정부의 정책적 노력도 중요하다. 대기업들의 고용확대가 지속되기를 기대한다.
* 오늘의 주요 신문 칼럼 읽기
[동아일보 칼럼-횡설수설/이정훈(논설위원)-20100828토] 오은선의 14좌 완등 시비
올해 4월 여성 산악인으로서는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14좌에 모두 오른 오은선 씨의 기록이 국내 산악인들에 의해 부정됐다. 오 씨는 14좌 가운데 칸첸중가(8586m)를 실제론 정복하지 않았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오 씨에 앞서 칸첸중가를 정복했던 엄홍길 씨 등 산악인 7명은 “오 씨가 정상에서 찍었다는 사진 속 지형을 칸첸중가에서 찾아볼 수 없고, 등반 과정에 대한 설명도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밝혔다. 한편 세계 최초로 14좌를 완등한 남성 산악인 라인홀트 메스너(이탈리아)와 등반 전문 저널리스트인 엘리자베스 홀리(미국), 오 씨와 경쟁하다 한발 늦게 14좌에 오른 여성 산악인 에두르네 파사반(스페인)은 그의 기록 달성을 축하한 바 있다.
▷오 씨를 제외해도 한국은 스페인과 더불어 가장 많은 14좌 완등자(3명)를 보유한 나라다. 한국 산악계의 성장은 ‘인정사정없는 경쟁’ 덕분이었다. 엄홍길 씨는 후배인 박영석 씨의 거센 추격을 받으며 2000년 한국인 최초로 14좌를 완등했다. 그러나 14좌 가운데 로체와 시샤팡마 등정이 이상하다는 시비가 따라다녀 2001년 두 봉을 다시 올랐다. 그래서 일각에선 엄 씨의 완등은 2001년 이뤄진 것으로 보고, 박 씨를 한국인 첫 14좌 완등자로 꼽기도 한다.
▷라인홀트 메스너는 1970년 동생과 함께 처음으로 8000m급 고봉에 올랐다. 그러나 하산 길에 동생이 처지자 그냥 버려두고 내려와 ‘영원한 실종자’로 만들었다. 동생 시신은 35년 만에 냉동 상태로 발견됐다. 메스너는 ‘냉혈한’이라는 악명이 따랐지만 1978년 최초로 에베레스트를 무산소 등정하고 1986년엔 14좌를 완등했다. 그 후 14좌 도전은 무산소로 최단기간에 오르는 싸움이 됐다. 장비 도움 없이 사람 힘만으로 맞서는 비정한 승부다. 자연과의 정면 승부를 위해 대원들은 서로의 연결 로프를 풀고 오르기도 한다.
▷한국 산악계가 14좌 완등에 집중하는 사이 유럽 산악계는 산소가 희박한 8000m대 고산(高山)에서 직벽이나 빙벽으로 정상에 오르는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냈다. 고산 등반이 점점 더 극한투쟁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남을 의식한 기록경쟁보다는 자신과의 싸움이다. 국내 산악계도 숫자 달성 위주의 과도한 경쟁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한계에 도전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으면 좋겠다.
[중앙일보 칼럼-분수대/송원섭(JES 선임기자)-20100828토] 생존자
1972년 10월 13일, 45명의 승객을 싣고 우루과이의 몬테비데오에서 칠레의 산티아고로 날아가고 있던 우루과이 공군 571번기는 기관 고장으로 안데스 산맥 오지에 추락했다. 즉시 수색이 시작됐지만 눈보라가 몰아치는 해발 3600m의 고산지대에서 생존자가 있을 거라고 기대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사실상 수색이 중단된 12월 23일, 사고 72일 만에 생존자 16명이 발견됐다.
환호가 울려 퍼졌지만 생존의 비밀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짧은 비행이었으므로 기내에는 식량이 거의 준비돼 있지 않았다. 식수는 눈을 녹여 해결했지만 문제는 굶주림이었다. 결국 이들은 죽은 동료들의 시신을 먹는 것 외에는 살아남을 방법이 없다는 냉엄한 현실에 도달했다.
진실이 밝혀진 뒤 일각에서 “그들은 영웅이냐 악마냐”는 문제 제기가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추위와 눈사태의 공포를 이겨낸 생존 의지에 박수를 보냈다. 이 이야기는 1993년 ‘얼라이브’라는 할리우드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이들 못지않게 극적인 생존자들이 최근 칠레에서 등장했다. 칠레 코피아포시 인근 에스테반 광산에서 붕괴사고로 실종된 광부 33명 전원이 지하 700m 갱도에 전원 생존해 있다는 기적 같은 사실이 알려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을 구조해내는 데에는 4개월여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또 다른 우려를 낳고 있다. 과연 섭씨 35도의 온도와 탁한 공기, 높은 습도에서 이들이 그렇게 오래 버틸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다. 극한 상황에선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전문가들은 심리적인 안정과 유머감각이 필수라고 말한다. 물리적인 생존조건 못지않게 긍정적인 태도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물론 어찌 보면 이들은 제3세계에서 빈발하고 있는 광산 사고 피해자들 가운데 상대적으로 행운아인지도 모른다. 전 세계에 걸쳐 대부분의 주요 광산이 20세기 초반의 기술로 구축된 만큼, 안전을 위해선 상당한 보수 비용이 필요하지만 투자 대비 효율의 문제로 적절한 조치가 이뤄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인류 사상 최악의 광산 조난 사고는 1942년 4월 26일 중국 랴오닝성 번시(本溪)에서 빚어졌다. 이 사고로 1549명이 사망했는데, 2006년 한 해에만도 중국에선 이 세 배인 4749명의 광부들이 사고로 숨을 거뒀다. 우리의 광업 노동자들은 얼마나 안전한지 점검해 볼 때다.
[경향신문 칼럼-여적/김태관(논설위원)-20100828토] 등정 의혹
알피니즘의 역사는 등정 의혹과 더불어 출발한다. 1786년 8월8일 오후 6시32분. 프랑스인 자크 발마와 미셸 파카르 두 사람이 알프스 최고봉인 몽블랑(4807m) 정상에 우뚝 선다. 근대 등산 역사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기념동상을 세울 때 두 사람 중 파카르는 빠진다. 발마가 초등(初登)의 영광을 독차지하려고 “파카르는 중도 포기했다”고 거짓말을 퍼뜨렸기 때문이다. 작가 알렉상드르 뒤마는 발마의 말대로 모험담을 발표했고, 대중은 대문호의 글을 그대로 믿었다. 진실이 밝혀진 것은 100여년 뒤이고, 파카르의 동상이 세워진 것은 200년이 지난 1986년의 일이다. 등산의 역사는 이렇게 첫 발짝부터 의혹 속을 헤맨다.
몽블랑뿐만이 아니라 세계의 고봉들은 등정 의혹으로 얼룩져 있다. 북미 대륙의 최고봉 매킨리(6194m)도 마찬가지다. 1906년 프레데릭 쿡이라는 미국인이 매킨리를 정복했다며 신문에 사진을 발표한다. 일부에서 의혹을 제기했으나 그는 등반기록을 정리한 책까지 펴내며 부와 명예를 누린다. 사기극은 1913년 또 다른 등반대가 매킨리를 초등하면서 막을 내린다. 쿡은 낮은 봉우리에서 사진을 찍은 뒤 정상이라고 속였던 것이다.
억울한 경우도 많다. 1975년 중국인 스잔춘은 에베레스트에 올랐으나 서구권에서는 인정하지 않았다. 후일 정상에 설치한 삼각대를 확인하고서야 등정을 인정받았다. 8000m급 14좌를 세계 두번째로 오른 예지 쿠쿠츠카도 등반의혹에 휘말린 적이 있다. 그는 마칼루를 단독 등정했으나 사진이 없어 온갖 공격을 다 당했다. 나중에 정상 바위 틈에서 그의 마스코트를 한국의 허영호가 회수한 뒤에야 의혹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우리나라의 해외 등정 역사도 의혹과 더불어 시작한다. 1970년 추렌히말(7371m)을 정복했으나 뒤따른 일본원정대가 의혹을 제기했고, 83년 여성 최초로 겨울 시즌 안나푸르나 등정에 성공했으나 뒷말이 무성했다. 89년 초오유봉을 한국인 최초로 무산소 등정해 정부포상을 받은 한 산악인은 뒷날 그것이 거짓이었다는 양심선언을 하기도 했다.
오은선씨의 칸첸중가 등정에 대한 의혹이 끊이지 않고 있다. 대한산악연맹도 엊그제 “사실로 보기 어렵다”며 부정적 입장을 밝혔다. 진실은 신이 알지만, 거짓은 인간이 가려야 한다. 알피니즘의 역사는 훗날 무어라 증언할 것인가.
[매일경제신문 칼럼-매경춘추/김현철(프로듀서ㆍ가수)-20100828토] 고객중심
며칠 전 아는 선배와 조그만 일본식 꼬치구이 전문점에서 저녁을 먹었다. 가게 크기에 비해 꽤 유명한 집이라고 했다. 선배는 일본음식 마니아로 불릴 만큼 정통일식부터 선술집까지 안 다녀본 곳이 없을 정도였다.
저녁을 먹으며 그 선배는 일식의 가장 큰 장점으로 `고객중심`이라는 요소를 꼽았다. 우선 단품음식 양이 적어 그것을 조합해서 시킬 때 묘한 기대감을 느낄 수 있다는 등 장점을 들며 `고객중심` `고객만족`을 설명했다. 또 일본에서 음식점은 서비스업이라는 개념이 투철하고 요식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프라이드가 대단하다고 했다.
나는 우리 음식에 프라이드가 높다. 음식을 만드는 과정에 배어 있는 정성, 또 음식 색깔, 향기, 모양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세계 어느 나라 음식보다 우월하다고 본다. 그런데 우리 음식이 고객중심이냐는 물음에 대해선 글쎄다. 불고기나 갈비와 같이 손님이 직접 조리하는 음식을 제외하곤(그래도 고객중심과는 조금 차이가 있는 듯하다) 거의 모든 음식이 먹는 사람보다는 만드는 사람 입장을 더 드러내는 것 같기 때문이다. 고객중심이란 개념으로 조리를 하고 메뉴를 개발한다면 우리 음식은 더욱 완벽해지리라 믿는다.
이는 비단 음식 문제만은 아닌 것 같다. 국내 많은 기업이 고객만족을 외치며 각종 상품을 내놓고, 정부도 각종 상을 걸어 시상하고 있지만 실제로 그렇게까지 고객을 생각하는지는 의문이다. 많은 건설사도 고객만족에 입각해 아파트를 분양하고, 특히 인테리어는 고객들이 직접 하도록 하는 등 여러 노력을 한다지만 그것도 생각해 볼 문제다.
대학 교육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특히 요즘 새로 생겨나는 실용적인 학문을 배우는 학과는 더 그렇다. 이제는 `교수중심`이 아니라 `학생중심`이 될 필요가 있다. 준비된 강의를 강요하는 교수가 아니고 끝까지 학생들을 챙기고, 학생들이 모르면 왜 모르는지 관심을 갖는 그런 교수가 요구되는 것 같다.
이 밖에도 많은 분야에서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재미있는 것은 누구나 고객인 동시에 고객중심을 생각해야 하는 주방장이라는 사실이다. 역지사지로 우리가 고객을 더욱 더 위한다면 거꾸로 나를 위하는 길임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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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해우(海隅)의 백합국어사랑방(신문사설&칼럼) 원문보기 글쓴이: 해우(海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