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문화재 연구소에서 발간된 문화유적 총람에 언급된 자료를 보고 몇번이나 답사했지만 인연을 짓지 못했었다 석불이 소재하는 행정구역은 가천면인데 대가면으로 기록되었으니 엉뚱한 곳에서 헤매인 결과가 되어버렸다. 그렇더라도 고향 성주. 특히 안태고향 대가면과 인접한 창천리 석불 존재를 모르고도 방방곡곡 문화재 답사를 다녔다고 떠벌렸으니 이런 후안무치한 화상이 있겠는가?
가야산을 눈앞에 두고 고령, 성주댐을 경유하여 김천 증산, 전북 무주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한 성주군 가천면 창천리에 위치한 비지정 옛님이다. 가천면소재지 파출소 맞은편 골목으로 진입하여 대가천 교량을 건너 대가면 뒷개마을로 가는 속칭 '개고개'의 청명사에 봉안되어 있다.
가야산 정상 우두봉을 향해 좌향한 작은 절집 청명사 대웅전은 마치 민가처럼 소박하고 수더분하며 따뜻한 온기를 머금은 아랫목 같은 느낌이다. 대웅전은 협칸이 없고 어칸의 사분합 띠살문 창살이 유년의 추억을 아스라히 떠올리게 한다.
청명사의 창건연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주석하시는 스님의 말씀으로는 고려시대에 창건되었다고 전언 하셨다. 우리나라 여러 절집을 순례했는 중에서도 가장 순박한 심성을 지니신 '성근'스님은 석불을 조사한 문화재청 직원, 교수, 불교사학자, 답사 매니아 들의 이야기를 가감없이 전해주시며 홍보와 문화재 지정이 되었으면 40년 모신 보람이 있겠다고 간곡하게 말씀하셨다.
미륵불로 모시는 듯 용화전에 계셨다. 해방되던 1945년 인근 청주 한씨 집안 사람의 꿈에 세 번이나 나투시어 문중산속에서 발굴하여 당시 작은 암자였던 청명사에 모셨다고 한다. 성근스님은 찾아온 불청객에게 용화전 문을 열고 신이 난 모습으로 스위치를 올려주어 나도 몰래 부하뇌동, 얕은 지식을 전개하여 부끄럽기 그지없다.
석불좌상은 주형거신광배에 불신을 한 돌에 투박하게 저부조로 돋을새김하여 양감이 떨어진다. 광배의 붉은 색조는 채색의 흔적같다. 불상 채색은 장엄과 위엄, 불상의 특징을 싱징하는 것으로 더이상 논쟁의 대상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두광에는 연꽃이 활짝 피었다.
결가부좌한 하반신부가 넓어 석대좌는 본래부터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나발의 머리에 원만형의 상호, 눈,코는 민초들의 소원성취를 위해 돌려주고도 겨우 보이는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감돈다. 귀는 길며 목에는 삼도가 보일듯 말듯하다. 법의는 우견편단이며 수인은 선정인 같다. 고려시대 불상 인가?
용화전에 모셔진 산신탱. 화기가 없어 조성연대가 불명이나 여러 곳에서 판매하라는 압력이 있었다고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근세의 탱으로 보여진다.
청명사 중정에 서면 멀리 가야산 정상 우두봉이 아련하고, 흙냄새 품은 푸른 들녘과 성주 사람들의 애환과 질곡의 삶이 고스란히 맺힌 비닐 하우스 물결 너머로 대가천 둑이 보인다. 붕알 친구 이름을 부르면 금방이라도 미역감다 말고 유년의 추억과 그리움을 족대 가득 담아 뛰쳐나올 듯한 천변 건너에는 곱게 빚은 할머니 쪽진머리의 가리마 같은 들길이 가천면 소재지로 이어진다.
고향땅이지만 마치 데자뷰 느낌의 풍경에 젖어 성주출신 배창환 시인의 '흔들림에 대한 작은 생각'을 떠올려본다. 어쩌면 소읍 가천 닷새장(우리 고향에서는 천창장으로 더 알려져 있다) 할매가 말아주는 국밥 한 그릇과 막걸리가 더더욱 그리운 것은 아닐런지...
흔들림에 대한 작은 생각...배창환
추수 끝난 강둑에 무리지어
2010.06.25
배경음악은 유경환시 박경환작곡의 산마을 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