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 선물
편 영 미
우리 집은 막내를 뺀 네 사람이 모두 음력 11월에 생일이 들었다. 연말이면 공용 생일 선물을 사거나 가족 여행을 가기도 한다. 하지만 지난 연말엔 생일을 기념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남편과 큰아이는 해를 넘기기 전 끝내야 하는 일이 있어 야근뿐 아니라 주말에도 출근했다. 그렇게 한 달을 꼬빡 일에 매달리고 있고 둘째는 취준생이라 서울을 오가며 취업 준비에 온 힘을 다 쏟고 있다. 막내는 인천에서 군 복무 중이라 자유롭지 못하고, 나는 시부모님 병원 나들이가 잦아 덩달아 바쁜 몸이 되었다.
이렇게 한 해를 마무리 하나 했는데, 둘째 아이가 기쁜 소식을 알린다. 요즘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힘들다는 취업, 그 어려운 것을 해냈단다. 이런 반갑고 고마운 일이 또 있을까. 두 손을 잡고 폴짝폴짝 어린아이처럼 뛰며 기쁨을 나눴다. 그간 아이의 노고를 알기에 가슴이 먹먹하고 눈가가 촉촉해진다. 가만히 안고 토닥여 준다. 자그마한 체구로 보기에도 버거워 보이는 커다란 트렁크에 짐을 챙겨 서울로 떠났다.
남편은 불쑥 번개 모임을 제안했다. 새해 초 서울에서 있는 큰집 잔치에 모두 함께 가자고 한다. 잔치 하루 전날 만나 저녁을 먹고 파자마 파티하면 좋겠단다. 가능할까 싶은데 패밀리 단톡방이 부산스럽다. 큰아이는 KTX 표를 예매하고 둘째 아이는 식당을 예약했다. 막내는 예식이 있는 호텔에 방을 잡았다.
출근하기 전 서울살이 준비로 바쁜 둘째 아이에게 전화가 왔다.
“엄마, 구스타프 클림트 특별전 하는데 같이 갈까? 엄마 연말에 아무 데도 못 갔잖아. 결혼식 전날 엄마 먼저 일찍 올라올래? 데이트 신청-.”
“응, 좋아.” 전화를 끊고 표를 다시 예매했다. 아이가 합격 소식을 듣고 급하게 서울로 올라가 여간 서운한 게 아니었다. 구스타프 클림트, 거실 벽에 걸린 그림에 눈길이 머문다. 농담 반 진담 반 ‘우리 비엔나 꼭 가자.’ 했었는데…. 그의 그림을 서울에서 볼 수 있단다.
몇 해 전 코로나19로 식구들이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졌을 때 가족 공용 생일 선물로 홈쇼핑에서 판매하는 인테리어용 명화 그림을 한 점 샀다. 여러 작품 중 구스타프 클림트의 ‘사과나무’가 마음에 들어왔다. 잎사귀는 초록과 연두의 향연을 펼치고 그 사이사이 빨간 사과와 사과나무 아래로 이름 모를 꽃들이 캔버스 액자를 빈틈없이 채우고 있었다. 아기자기하고 밝고 따뜻한 느낌이 좋았다. 쇼호스트의 말도 맘에 쏙 들었다. 사과 그림은 풍수적으로 재물과 건강을 상징하며 집 안에 행운을 불러온다고 한다.
하얀 거실벽에 걸린 그림의 존재감은 눈부시다. 초록빛의 싱그러움과 빨간 사과 등불이 집 안을 환히 밝히고 있다.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시간에 가만히 들여다보면 무성한 초록 뒤편의 끝없는 풍요가 입체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가끔 올라가는 서울은 기차에서 내리면 괜스레 긴장되고 떨린다. 이런 나의 마음을 아는지 아이가 역으로 마중 나왔다. 멀리서 실루엣만 봐도 서로를 알아본다. ‘엄마 늦었지만 생일 선물이야.’ 하며 티켓을 내민다. 예매표는 매진이라 국립중앙박물관에 들러 현장 티켓을 끊어 왔다고 한다.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 구스타프 클림트부터 에곤 쉴레까지” 티켓을 손에 쥐어 준다. 2시 30분 입장이다. 시간이 여유롭다. 점심은 둘 다 좋아하는 이탈리아 피자를 먹었다. 커피를 마시며 이번 특별전 전시 담당자의 작품 소개 동영상을 찾아보며 먼저 전시관을 둘러보았다.
입장할 때 기다리는 경우도 많다는 후기가 있었지만, 현장 발권을 미리 해둔 덕에 바로 들어갈 수 있었다. 1900년대 비엔나 예술 아카데미의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예술계에 맞서 자유로운 예술을 추구하던 ‘비엔나 분리파’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비엔나 레오폴드 미술관에서 소장한 진품 191점을 그대로 옮겨왔다고 한다. 와, 지구촌은 이웃사촌.
오디오 도슨트를 신청해 들으며 감상했다. 시대적 배경과 작가들의 어린 시절 살아온 이야기를 들으며 그림 앞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진다. 특히 평탄치 않은 28세 짧은 생을 살다간 에곤 쉴레의 작품은 암울하고 거칠고 불안해 불편하게 느껴진다. 그의 가정환경, 원만하지 못한 가족 관계는 작품에 많은 영향을 끼친 듯하다. 어머니에 대해 그린 그림을 보며 아이들을 생각해 본다. 아이들에게 나는 어떤 모습일지?
으으으 아이와 보기 민망한 작품들도 있다. 에곤 쉴레의 작품 중 ‘네 그루의 나무’가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 초판본 표지로 사용되었다고 아이가 귓속말로 알려준다. 밖으로 나와 에곤 쉴레의 ‘꽈리 열매가 있는 자화상’ 포토존 앞에서 그의 눈빛과 마주 선다. 찰칵찰칵
남편과 큰아이는 퇴근 후 KTX를 타고 올라오는 중이고 막내는 일과를 마치고 출발했다고 한다. 전시실을 나와 중앙박물관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지하철역으로 걸었다.
모처럼 온 식구가 다 모여 앉아 식사하며 안부를 묻고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눈다. 사이사이 들려오는 크고 작은 웃음소리들이 듣기 좋다. 눈발이 흩날리는 추운 거리를 함께 걸었다. 숙소에 들어와서는 시끌벅적도 잠시다. 씻고 누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잠이 들었다. 잠든 가족들을 보며 선물이란 걸 생각해 본다.
선물이라는 게 따로 있겠는가? 함께 누리는 이런 편안한 잠, 함께하는 시간이 좋은 선물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