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향의 연혁]
나주(羅州)는 전라남도(全羅南道)에 위치하는 지명(地名)으로, 본래 백제(百濟)의 발라군(發羅郡)인데 통일신라 경덕왕(景德王)이 금산군(錦山郡)으로 고쳤고, 고려 태조(太祖) 때 나주(羅州)로 개칭하였다. 995년(성종 14) 해양도(海洋島)에 속했다가 1018년(현종 9) 목(牧)으로 승격하였고, 조선 세조(世祖) 때 진(鎭)을 두었으며 인조(仁祖) 때 강등하여 금성현(錦城縣)이 되었다. 후에 주(州)로 승격하고 1733년(영조 9) 다시 현(縣)으로 강등하였다가 1737년(영조 13) 복구, 1894년(고종 31) 나주부가 되어 관찰사가 주재했으나 1895년 나주부가 폐지되어 전라남도의 한 군으로 강등되었고, 1931년 나주면이 읍으로 승격하였으며 1981년 나주읍(羅州邑)과 영산포읍(榮山浦邑)이 합쳐서 금성시(錦城市)로 승격하였다.
[가문의 유래]
나주임씨(羅州林氏)의 시조(始祖) 임비(林庇)는 고려조(高麗朝)에서 벼슬을 지내고, 충렬왕(忠烈王)이 원(元)나라를 다녀올 때 호종(扈從)했던 공으로 보좌2등공신(輔佐二等功臣)에 책록되어 철권(鐵券)을 하사(下賜)받았으며, 뒤에 상장군(上將軍)에 올랐다. 그 후 시조의 9세손 탁(卓 : 호군 선의 아들)이 고려 말에 해남 감무(海南監務)을 역힘한 후 고려의 국운이 기울고 조선(朝鮮)이 개국되자 망국의 한을 가슴에 안은 채 송도(松都) 부조현(不朝峴)에서 조천관(朝天冠)을 벗고 북쪽을 향해 통곡하면서 금성(錦城) 회진(會津)으로 내려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忠節)을 지켰으며 두문동(杜門洞) 72현(賢)의 한 사람으로 후세에 추앙을 받았고 그로부터 나주임씨의 시원(始原)을 이루게 되었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맥(人脈)으로는 탁(卓)의 7세손 붕(鵬 : 중참판 평의 맏아들)이 중종(中宗) 때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과 승문원 주서(承文院主書)를 거쳐 예조 및 병조좌랑(兵曹佐郞)과 이조(吏曹)를 제외한 5조(五曹)의 참의(參議)를 역임한 후 광주목사(光州牧師)로 나갔다가 경주부윤(慶州府尹)을 지냈다. 특히 그는 문과에 오르기 전에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유생(儒生) 200여 명을 이끌고 정암 조광조(趙光祖)의 억울함을 논하다가 화(禍)를 입을 뻔했다. 또 과거를 볼 때 시관(試官)이 간사한 집권자에게 아부하기 위하여 신진사류(新進士類)들을 간사한 무리로 지칭하자 붓을 그 시관의 얼굴에 던지고 과장(科場)을 뛰쳐나왔다.
붕(鵬)의 아들 복(復)은 명종(明宗) 즉위년에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에 등용되고 양재역(良才驛) 벽서사건(壁書事件)에 연루되어 삭주(朔州)에 유배되었다가 풀려 나와 무고(誣告)를 입고 향리에 내려가 은거하였으며, 그의 아우 진(晋)은 무신(武臣)으로 제주목사(濟州牧師)와 5도 병마절도사(五道兵馬節度使)를 역임하며 선정(善政)을 베풀어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고 청정비(淸政碑)가 세워졌다. 복(復)의 아들로 선조(宣祖)때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했던 서(㥠)는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황해도 관찰사 겸 병마 수군절도사가 되어 적폐(積弊 : 오랫 동안 뿌리 박힌 폐단)의 시정과 농사의 장려, 군사의 조련(調練)을 많이 남겨 이념이 있는 정치가로 칭송을 받았으며, 절도사 진(晋)의 맏아들 제(悌)는 당대의 명류로 많은 일화를 남겼다.
1577년(선조 10)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했던 백호(白湖) 제(悌)는 지제교(知製敎)와 장악원정(掌樂院正)에 올랐으나 당시 격렬했던 당쟁을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전국(全國) 명산(名山)을 찾아다니며 문필(文筆)로 여생(餘生)을 보냈다. 호쾌(豪快)하고 의협(義俠)한 시풍(詩風)으로 호남파(湖南派) 시인(詩人) 가운데 백미(白眉)로 두각을 나타냈으며, 「화사(花史)」와「수성지(愁城志)」를 비롯한「백호집(白湖集)」․「계벽류상영록(溪碧樓觴詠錄)」 등의 문집을 저술하여 크게 문명(文名)을 떨쳤고, 그의 아들 탄(坦)은 벼슬을 하지 않았으나 시명(詩名)이 높았다. 제(悌)의 아우로 공조정랑(工曹正郞)을 역임했던 환(懽)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 김천일(金千鎰)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창의(倡義)하여 전공을 세웠다.
정유재란에는 사재(私財)를 털어 이순신(李舜臣)의 병량을 조달했고, <진사군(進士軍)>이란 의병을 일으켜 의병대장으로 대소 전투에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인조(仁祖) 때의 명 외교관 담(土覃 : 서의 아들)은 기재(奇才)가 있는 정치가로도 이름났었고,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총융종사관(摠戎從事官)으로 남한산성(南漢山城)에 들어가 남격대(南格臺) 수비에 공(功)을 세웠다. 특히 담(土覃)은 예조(禮曹) 및 이조(吏曹)의 판서(判書)를 지내고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에 이르렀으나, 청탁을 배제하고 청빈하여 집안이 무척 가난하였다. 어느날 그의 형 연(堜 : 우승지)이 담(土覃)의 아들에게 말하기를 “너의 아버지가 벼슬이 높아도 몸 둘 곳이 없구나” 하면서 성(城) 서쪽에 조그마한 집을 사서 주었다.
그러나 집이 좁고 누추하여 손님이 오면 먼저 온 사람이 물러가야만 뒤에 온 사람이 들어올 수 있었다 한다. 그 밖의 인물로는 인조반정(仁祖反正)에 공(功)을 세워 정사원종공신(靖社原從功臣)에 책록되고 9군의 목사(牧師)와 부사(府使)를 지낸 후 시명(詩名)을 떨쳤던 타와 이괄(李适)의 난에 의병(義兵)을 일으켰던 게(垍)가 유명했다. 안산군수(安山郡守)와 장성부사(長城府使)를 지내며 선정(善政)을 베풀어 선정비(善政碑)가 세워졌던 세량(世良), 박세채(朴世采)의 고제로 「창계집(滄溪集)」을 저술했던 영(泳 : 첨지중추부사 일유의 아들), 「동사회강(東史會綱)」과「노촌집(老村集)」의 저자(著者) 상덕(象德) 등이 유명했다.
한수(翰洙)는 철종(哲宗) 때 강원도와 함경도 관찰사를 지내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구한말에 와서는 절충장군(折衝將軍) 영준(英儁)의 아들 창택(昌澤)이 백운동(白雲洞)에 은퇴하여 후진양성에 진력하며 「숭악집(崧岳集)」을 저술했고, 용상(龍相)은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의병(義兵)을 규합하여 보현산(普賢山)을 중심으로 광복운동(光復運動)에 헌신하여 독립운동가로 외무부장관(外務部長官)을 지낸 병직(炳稷)과 함께 나주임씨의 전통(傳統)을 빛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