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수부족은 일당백의 현실로 나타났다. 김성한이 투수와 타자를 할 수 밖에 없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동국대를 졸업한 그는 타자를 원했지만 팀 상황이 허락하지 않았다. 직구하나는 일품이었던 투수의 능력을 버리기도 아까웠다. 김성한은 경기 후반에 나서서 팀내에서 유일하게 10승 투수가 됐다.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유례없는 10승과 타점왕을 동시에 차지한 인물이다. 그는 모두 26경기에 등판해 완봉 포함 완투 3회, 방어율 2.88을 기록했다. 주로 지명타자로 출전해 후반에는 투수로 나섰다. 어떤 경우에는 처음부터 선발발투수 겸 3번 타자로 나서기도 했고, 1루를 맡기도 했다. 말이 좋아 팔방미인이지 마당쇠나 다름 없었다.
해태는 6명의 투수로 80경기를 치렀다. 투수들이 태부족했으니 그들의 근성에 기댈 수 밖에 없었다. 야수들은 아프면 바로 공백이 생겼기에 아프면 이를 악물고 경기에 모두 출전했다. 경기 일정이 1주일에 4경기 정도여서 그나마 여유가 있었던 점이 다행이었던 시절이었다.
초등학교 다닐 때, 야구부가 있던 학교에 재학하게 되어 초등학교 시절부터 야구를 가까이에서 보고, 응원하고 지켜보던 나는 고교야구를 끔찍히도 좋아하여,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리시버를 끼고, 고교야구 중계를 듣게 되는 마니아층으로 진화된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던 만화와 함께, 지금까지 이러한 취미를 버리지 못하게 된다....
비록 정치적인 기획으로 인해 민심을 돌리기 위한 타개책으로 출범했다고는 하지만, 가슴에 한을 품고, 피멍이 든 이념을 어딘가에는 풀어야 했는데, 사회적으로 기댈 곳이 없는 서민의 입장에서는 하나의 분출구가 되는 프로야구에 눈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1983년에 발간된 이현세의 만화 '공포의 외인구단'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이슈화가 되었을 때, 해태 타이거즈가 저렇게 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내가 초등학교에서 우리 운동장에서 매일 보던 야구선수들( 초등학교 선, 후배 선수들)이 프로선수가 되어 매일 매일 경기를 하고, TV에서 경기를 중계하고, 프로라고는 하지만 16명의 선수에 모구단은 150원짜리 부라보콘에 100원짜리 맛동산을 팔아서 선수단을 운영하는 가난한 구단에, 김봉연의 연봉을 2400만원은 줘야 하는데, 연봉을 1800만원 주었던가??
이현세의 만화 '공포의 외인구단'이 이듬해인 1986년에 최재성(까치)과 이보희(엄지)가 주연으로 영화화 됩니다.
그리고, 한국프로야구의 공포의 외인구단으로 나타나게 될 "해태 타이거즈"도 1983년에 기적을 일으키게 됩니다.
1982년 프로야구가 태동되던 시기,
그 때부터 프로야구에 관심을 갖고 줄곧 타이거즈를 응원하던 팬의 한 사람으로서, 해태 타이거즈에 대한 기억을 써 보려고 한다.
1975년!
광주일고가 제9회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 결승전 경북고와 대결에서 차영화 강만식 김윤환 선수의 쓰리런 홈런 등으로 우승했을 때, 광주 시내에서는 많은 시민들이 TV 앞에서 광주의 아들들이 우리들의 한을, '우승'이라는 멋진 모습으로 치유해주기를 기원하고 있었다. 그 바람대로 광주일고의 야구선수들은 우승을 이루어냈고, 그 이후로 광주의 시민들은 광주에 연고를 둔 야구팀들의 실력에 눈과 귀를 집중하기 시작했고, 고교 야구의 팬들을 많이 생산한 것으로 기억한다. 광주에 야구의 붐이 일어난 것은 그 때부터였던 것 같다. 고교야구대회 지역예선부터 눈과 귀가 집중되었고, 전국대회에 출전할 경우에는 TV중계가 있는지 찾아보고 관심을 가졌다. 물론 그 이전부터 야구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나로서는 많은 사람들이 야구를 좋아해주니까, 참 좋았던 기억이 난다.
1980년 5월 1일 서울에서 열린 대통령배 고교야구대회 결승 경기는 광주의 야구팬들에게는 잊지 못할(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광주 고교야구 팀들의 맞대결! 선동열, 차동철, 허세환이 있던 광주일고와 김태업, 이순철, 윤여국이 있는 광주상고의 맞대결이었고, 누가 이겨도 상관없었던 정말 재미있었고, 자랑스러움과 자부심을 느끼게 해주던 경기였다. 결과는 8:2 광주일고의 승리. 최우수 선수는 선동열. 중앙 무대에서 스타로 떠오른 계기가 된다. 결승전이 끝나고 광주로 와서 광주일고와 광주상고 야구선수들은 금남로에서 카퍼레이드를 펼치기도 한다.
해태 타이거즈가 프로야구 원년에 기록했던 여러 가지 기록들은 그 당시에 스포츠 신문을 통해서 읽고, 또 읽으면서 우리들의 삶 속에 녹아들었고, 1980년에 있었던 광주 5월의 아픔과 함께 가슴 속의 응어리로 남았다. 금남로에 나가면 뿌연 최루탄 가스로 눈을 뜰 수 없었고 젊은이들이 모여 있으면 어른들이 빨리 집에 가라고 조심하라고 하셨다.
비록 해태 타이거즈 팀의 모기업이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팬들 모두의 마음 속에서 만큼은 누구보다 부자이고, 타이거즈의 선수들은 마치 우리 모두의 가족처럼 느껴져서 자랑스럽고, 멋지던 시기였다.
그 당시에 어쩌다가 비행기를 탈 기회가 있었는데, 탑승할 시각이 되면 누구보다 먼저 트랩의 앞 쪽으로 가고는 했다. 그 이유는 각종 신문들이 무료로 배부되었지만, 스포츠 신문은 가장 먼저 오른 탑승객들의 손에 의해 사라지고 없어지기 때문이었다. 거리에 가판되는 신문 중에서도 늦게 가면 구입할 수 없는 것이 스포츠 신문이었다. 다른 지역들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내가 기억하는 광주에서는 프로야구가 광주 시민들 생활의 중심에 있을 수 밖에 없었다. 1979년부터 프로야구 창단에 대한 이야기가 조금씩 흘러나올 때 1975년에 전국대회에서 우승했던 광주일고 선수들에 대한 관심도 올라갈 수 밖에 없었다. 1981년 말쯤 신문에 조금씩 해태타이거즈 창단에 대한 이야기가 신문에 오르내렸다. 드디어 1982년 초, 해태타이거즈는 창단되었고, 선수가 부족한 만큼 그들은 더욱 열심히 뛰었던 것 같다.
1982년부터 2001년까지 해태 타이거즈는 나의 머리와 가슴에 그냥 "해태" 라는 이름으로 기억되고 있다. 야구장에서 외치는 응원가들은 그냥 그 것만으로 좋았다. 이기면 이기니까 좋았고, 가끔식 경기에서 지더라도, 그래 그럴수도 있지. 하면서 나의 생활로 돌아오고는 했던 것이다. 하지만, 울 타이거즈의 선수들은 지는 것 보다는 이기는 경기가 많았고, 그만큼 타이거즈를 응원하는 팬들에게 기쁨도 많이 주었었다.
1983년 아무도 기대하지 못했던 그 해에 해태 타이거즈는 우리에게 한국시리즈 우승이라는 기쁨을 선사해주었고, 그 때부터 해태 타이거즈의 팬들은 마치 "1등은 당연히 우리의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 이후로 정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우승을 가져왔고, 1997년 IMF 시기가 도래하기까지 해태 타이거즈는 우리의 우상이었다. 왜냐하면, 내가 나의 생활 속에서 이루지 못한 많은 것들을, 내가 상상하는 그 이상으로 이루어주었고, '이번에는 힘들겠구나!' 하고 생각했던 그런 때(1996년, 1997년)에도 한국시리즈 우승을 가져오면서, '나도 나의 생활 속에서 더 열심히 살아야겠구나!' 하는 채찍질의 역할 까지도 해주었던 것이다.
한국 프로야구는 81년 12월 11일 KBO 창립 총회를 열고 광주를 연고로 하는 해태 타이거즈, 서울의 MBC 청룡, 부산의 롯데 자이언츠, 대구의 삼성 라이온즈, 대전의 OB 베어스, 인천의 삼미 슈퍼스타즈 등 6개 구단으로 산뜻한 출발을 하게 된다. 위의 사진은 OB 윤동균 선수가 선서를 하고 있는 모습이다.
타이거즈는 82년 1월 30일 해태제과 본사에서 박건배 구단주를 비롯하여 김동엽 감독과 코치진 및 14명의 선수로 창단식을 가졌다. 당시 타이거즈는 절대적인 선수 구성의 어려움을 겪은 끝에 6개팀 중 가장 적은 선수로 창단식을 치렀다. OB와 MBC에 이은 3번째 프로구단의 탄생이었다. 얇은 선수층으로 시작한 타이거즈의 82시즌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전기리그가 시작된지 불과 한달만에 초대 감독이었던 김동엽이 사령탑을 놓고 조창수 코치가 감독 대행직을 수행하는 등 난항을 거듭했다.
4월을 마감한 시점에서 5승 8패(5위)를 기록한 타이거즈는 6월 초반 김봉연 등 중심타자들의 맹활약으로 한때 5연승을 구가하며 선두권 진입을 위한 강한 의지를 내보인다. 하지만 박철순이라고 하는 불세출의 에이스를 보유하고 있던 OB베어스의 독주를 견제하기엔 턱없이 역부족이었다. 결국 OB베어스의 전기리그 우승을 지켜봐야만 했던 타이거즈는 절치부심 후기리그를 준비했으나 초반부터 연패를 거듭하며 후기리그가 시작된 지 한달 만에 선두와 4게임차로 벌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끝내 이 간격을 좁히지 못한 타이거즈는 38승 42패(4위)의 성적으로 원년 프로야구를 마감해야 했다.
투수 운영에 있어 현대야구는 선발, 중간, 마무리의 분명한 구분이 있지만 초창기 한국 프로야구에서는 얇은 선수층 탓에 엄두도 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82시즌을 뛴 타이거즈 투수는 총 6명으로 그 중 5명이 100이닝 이상을 소화했다. 페넌트레이스 총 80경기를 단 6명의 투수로 운영했으니 어쩔 수 없는 결과였다. 그런 상황에 누가 선발이며, 누가 마무리라 할 수 있었겠는가. 모두가 선발이자 중간계투요, 마무리였던 셈이다. 그 중에서도 김용남은 팀 내에서 가장 많은 175이닝을 소화해 9승 12패 방어율 3.09를 기록, 팀의 에이스 역할을 하였으며, 김성한과 강만식, 그리고 방수원, 이상윤 등이 그의 뒤를 받쳤다. (김용남)
전·후기리그 내내 뚜렷한 팀 성적을 거두지 못한 타이거즈였지만 타격만큼은 달랐다. 실업시절 3년 연속 홈런왕에 올랐던 김봉연이 22개의 홈런을 터뜨려 초대 홈런왕에 올랐으며, 김성한은 투수로서 10승5패로 다승 7위에 오르는 동시에 69타점으로 타점왕을 차지했고, 김일권은 53개의 도루로 초대 도루왕을 차지하며 대도 본색의 진면목을 발산했다. (82년 올스타전)
당시 박철순, 백인천 등 해외파들이 투타 전부문을 석권하고 있는 가운데 김봉연은 22개의 홈런으로 초대 홈런왕위에 오름으로써 한국의 간판타자임을 다시 한번 입증했다. 또한 그는 올스타 인기투표에서도 득표율 61%를 얻어 그의 폭발적인 인기도를 가늠케 했다. 우직해 보이는 인상과는 달리 강한 손목힘과 몸 전체의 파워를 배트에 집중시키는 탁월한 능력으로 팬들을 매료시킨 파워히터 김봉연. 아마의 화려했던 명성이 프로 무대에서도 그대로 이어지며 화려한 성공 신화를 써내려 갔다.
엄연히 지명타자제가 채택되던 한국야구에 타이거즈는 과감히 지명 타자제를 포기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선수가 김성한이다. 투수로서 10승 5패(7위), 방어율 2.89(6위)를 기록했던 그는 타자로서도 자신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타율 0.305, 홈런 13개(4위), 타점 69점(1위)을 기록하는 등 1인 2역을 완벽히 소화 해냈다. 타고난 펀치력을 자랑했던 김성한이 타격에만 전념했더라면 훨씬 더 좋은 성적이 기대되었으나 그 누구보다 팀 사정을 잘 알고 있던 그는 개인 기록보다 팀 성적을 위한 성숙된 모습 보였다.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야구를 배워 갖고 나왔다는 평을 들은 김일권은 호랑이 유니폼을 입고 도루왕이라는 타이틀로 이름값을 했다. 특히 7월 18일 대 OB베어스와의 경기에서 한 경기 5개의 도루를 성공시키는 등 '그라운드의 대도'로서 손색이 없는 활약을 펼쳤다. 김성한이 초대 타점왕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김일권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소리없이 강하다! 배트 중심에 잘 맞았다 싶은 공도 어느새 그의 글러브 속으로. 바로 차영화 선수. 호리호리한 체격을 소유한 그는 도루를 32개(5위)나 기록했을 만큼 빠른 발을 소유한 덕분으로 화려한 내야 수비를 뽐낼 수 있었다. 팀내 내야수비를 조율하며 2루수로서 75게임에 출장, 단 5개의 실책만을 기록한 차영화는 수비 평가의 바로미터라고 할 수 있는 골든 글러브 시상식에서 2루수 부문 수상의 기쁨을 맛보며 멋지게 원년 시즌을 장식했다.
유일하게 수비율 기록으로 주인공을 가린 제 1회 골든 글러브 시상식에서 영광의 수상자들이 트로피를 들고 한껏 포즈를 취하고 있다. 뒷줄 오른쪽 맨끝이 김준환 선수, 앞줄 맨 왼쪽의 차영화 선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