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희 1백50주기를 맞아 국내에서 기념행사 준비가 한창이다. 한국 예술의 기치를 높인 추사는 그동안 많이 연구돼 왔고, 관련 전시회도 무수히 열렸지만 그에 대한 이해의 깊이는 좀처럼 생겨나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전공별로 진행되는 연구는 전인적 추사를 파편화해서 연구결과를 모아보면 전체적 상이 그려지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 여기에 그에 대한 민족주의적 추앙과 모화주의자라는 비판이 가세해 추사를 이데올로기적 대상으로 화석화시키는 경향도 있다.
교수신문은 이에 주목해 추상적으로 과장된 추사에 대한 이해를 비판하고, 그의 지적기원, 동아시아에서의 위상, 당시 사회적 배경과 추사체의 연관 등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보고자 했다. / 편집자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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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철(李漢喆, 1808~?) 사(寫), 권돈인(權敦仁, 1783∼1859) 제(題), <김정희 초상>, 조선 1857년, 견본채색, 보물 547호, 개인소장.©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제공. |
우리나라 문예역사에서 최고의 인물을 꼽으라면 누구나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를 친다. 여기에는 추사의 파란만장한 생애와 ‘추사체(秋史體)’라는 예술가로서의 최고 성취가 서로 중첩되면서 더 극적으로 표출된다. 그러나 정작 추사를 좀 더 구체적으로 보자면 누구도 쉽게 이야기하지 못한다. 그래서 ‘추사를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아는 사람도 없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다.
사후 150년이 지난 지금까지 추사에 관해서는 많은 연구와 전시가 있었다. 그림 시문학 글씨 불교학 등 추사관계 논문은 분야별로 어림잡아도 200여 편을 헤아리고, 크고 작은 전시 또한 수십 차례가 넘는다. 우리 역사상 실로 한 인물을 두고 이렇게 모든 분야에서 집중적으로 조명을 받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추사에 대한 연구와 전시는 많은 부분 문제점과 함께 미진처도 남아있는 것이 사실이다.
가장 큰 문제로 우선 관심사의 편중을 지적할 수 있다. 추사예술은 한마디로 ‘추사체’로 요약된다. 그러나 추사체는 단순한 글씨가 아니다. 추사 학예(學藝)의 총합이자 그 결정체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주로 추사체는 그 조형성(造形性)에 포커스가 맞추어져 왔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골동가치와 결부된 진위(眞僞) 문제가 추사작품의 가장 큰 관심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판(懸板) 위주의 대작이 추사체 논의의 중심이 되었고, 정작 추사체의 형성과정은 물론 내용적인 측면에서 학문이나 생애사실을 밝힐 토대가 되는 간찰(簡札)이나 시고(詩稿) 등은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취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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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金正喜, 1786~1856), <답왕맹자희손서초(答汪孟慈喜孫書艸)>, 개인소장. 김정희가 1839년(54세) 경 사신편에 정역전(程易田)의 『통예록(通藝錄)』을 받고 50여일간 독파했다거나 『주역(周易)』 등의 경학에 대한 견해를 논한 내용으로 추사가 중국문인에게 보낸 많은 간찰 중 알려진 바로는 현존 유일의 것이다. ©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제공. |
사실상 지금까지는 누구나 인정하는 기본적인 척도도 없이 경험에 의지하여 추사체의 진위를 판단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결과 추사체의 진위문제에 대해서는 관련 학계는 물론 고미술현장에 있는 어떤 사람의 안목도 정설로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실정이다. 그러나 추사체의 형성(形成)∙변화(變化)과정을 생애 전부를 통괄하는 기준작(基準作)을 중심으로 객관적으로 밝혀내지 못한 것은 정작 진위에 대한 오판의 폐해보다 추사의 학예연구 자체에 대한 부실을 초래한다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김정희가 늘 주장하던 예서(隸書)의 기원이 어디에 있는가를 본문과 옆에 씌어진 글을 통해서 분명히 밝히고 있는 작품이다.
본문 글씨는 “호고유시수단갈, 연경누일파음시(好古有時搜斷喝, 硏經婁日罷吟詩)”로, 해석하면 “옛것을 좋아해 때때로 부서진 비석을 찾고, 경전 연구로 며칠 동안 시를 못 읊는다.”이다.
측면의 긴 관기(款記)는 ‘죽완(竹琬)’이라는 호를 가진 사람에게 이 글씨를 보내면서 쓴 것으로, 그가 늘 주장하던 서법(書法)의 기원이 예서와 촉비(蜀碑)에 있음을 밝히고 있다. 관기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죽완(竹琬) 선생님, 평가를 부탁드립니다. 근래에 예법(隸法)은 모두 등완백(鄧完白, 字 石如, 1743~1805)을 으뜸으로 생각하나 사실 그의 장기는 전서(篆書)에 있습니다. 그의 전서 글씨는 진대(秦代)의 태산(泰山)?낭야(琅邪)에까지 곧장 올라가서 변화불측의 묘를 얻었고 예(隸)는 오히려 그 다음입니다. 이병수(伊秉綬, 字 墨卿, 1754~1815) 같은 사람은 기고(奇古)한 맛은 있으나 역시 옛 법에 얽매였습니다. 그러니 예서(隸書)은 서한(西漢)의 오봉·황룡(五鳳·黃龍 : 宣帝의 연호, B.C. 57~49) 시대의 문자를 따르고, 촉비(蜀碑)를 참고로 해야 바른 길을 얻게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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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컨대 추사의 말년작을 중년작으로 분석하기도 하고, 극단적으로 위작을 놓고 진작으로 서술하기도 한다. 삼성미술관 소장 《호고(好古)·연경(硏經)》은 지금까지 38세작으로 알려져 연구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추사가 제주유배에서도 풀려난 이후 첩학(帖學)과 비학(碑學)의 성과가 혼융되고, 그 진수가 완전히 농익어서 나온 말년의 작품이다. 즉 40대를 전후한 추사체는 비학의 맛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옹방강(翁方綱, 1733-1818)의 첩학 영향권의 한 중간에 있을 때로 자리 메김 되어 진다. 따라서 이러한 오류는 추사체의 성분을 첩학과 비학의 영향관계로 분석해 낼 때 사안의 본말을 뒤바꿀 위험이 있는 것이다.
중국서예의 수용과 자기화 맥락에서 객관화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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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金正喜, 1786~1856), 『완당진적(玩堂眞跡)』, 개인소장. 학문의 길이란 모름지기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추사의 생각이 잘 밝혀져 있는 글이다.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제공. |
두 번째는 추사체의 형성과정(形成過程)에 대한 문제이다. 지금까지 대체적으로 추사체의 형성과정 또한 생애시기와 결부시켜 24세(1809년) 연행(燕行)과 55세(1840년) 제주유배를 기점으로 크게 3단계로 구분해 왔다. 이러한 구분은 추사체 형성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사건이었다는 점에서 별 무리 없이 수용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실제 작품에서는 생애시기와 작품시기가 일치하지 않는 다는 점이다. 예컨대 한예(漢隸)가 추사의 작품 속에서 등장하는 것은 30대 초반에 가서야 보이는 일이며, 해서(楷書)나 행서(行書)에서 골기(骨氣)나 음양(陰陽)의 대비가 뚜렷한 추사체의 징후는 이미 40대 중반에서부터 보이고 있다. 더욱이 추사체의 완성이라 할 비첩(碑帖)과 각체(各體) 혼융의 성과는 해배(解配)된 이후 60대 중반인 북청∙과천시절에 두더러 진다. 이러한 추사체의 형성 변화과정은 생애시기로만 볼 때 잘 포착되지 않는다.
그러나 정작 추사작품에 있어 문제가 되는 것은 그 내용을 도외시해왔다는 점이다. 추사는 우리나라 문예역사에서 차지하는 실제 비중을 놓고 볼 때 문집을 제외하면 본격적인 저작이 없다는 비판이 있어왔다. 예컨대 경학자로서 추사를 칭송하지만 이에 관한 본격적인 저술은 거의 없다.
우리나라 금석학(金石學)의 비조로 추사를 꼽지만 <진흥이비고(眞興二碑攷)> 등 2편의 논문이 실린《예당금석과안록(禮堂金石過眼錄)》이 현재로는 전부이다. 이것은 동 시대 다산(茶山) 정약용(鄭若鏞, 1762-1836)의 경우 5백여 책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을 남긴 것 하고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알고 보면 대련 병풍 현판 서첩 등의 추사가 남긴 작품은 물론 시고 간찰과 같은 자료나 방대한 자호(字號)나 용인(用印) 자체가 시문학(詩文學)은 물론 금석학(金石學) 고증학(考證學) 경학(經學) 불학(佛學) 서화감식(書畵鑑識) 비평(批評) 회화(繪畵)는 물론 한중교류사 등의 분야에서 하나의 저술에 맞먹는 내용을 함축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추사의 작품 하나하나에 대해 이 모든 분야를 통합해서 분석해낸 본격적인 논고는 드물다. 《세한도(歲寒圖)》정도가 있다 해도 문인화의 측면에서 기법이나 그 영향관계를 주로 분석하였다. 즉《세한도(歲寒圖)》에서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 1804-1865)을 찬미한 발문(跋文)의 내용이나 그 출전을 추사의 경학(經學)과 결부시키고, 중국문인들의 찬문을 토대로 19세기 한중문화교류의 최정점에 있었던 추사의 존재를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추사체로 귀결되는 추사의 학예의 성취를 어떻게 보는가 하는 문제이다. 특히 한국의 문예역사, 더 정확히 서예의 역사적 맥락과 한∙중∙일을 아우르는 동아시아 서예역사에서 추사를 어떻게 자리 메김 하는가 하는 문제다. 전자의 경우 한국서예사 전개맥락에서 추사의 성취는 좀 거칠게 말하면 단절(斷絶)로 보는 시각이 많다. 그 이유는 백하(白下) 윤순(尹淳,1680-1741),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1770-1847)과 같은 조선 전래의 서풍(書風)을 계승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즉 추사의 경우 ‘추사체’ 성취 그 자체는 높이 사더라도 중국 학예경향이나 서풍에 지나치게 경도되어 청조문화의 수입에 골몰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적은 충분히 일리 있는 말이다. 그러나 추사의 성취는 그 이전에 삼국시대-통일신라-고려-조선 등 한국서예사 전개맥락에서 분기점이 되는 김생(金生,711-790이후), 탄연(坦然,1069-1158),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 1418-1453), 석봉(石峰) 한호(韓濩,1543-1605) 등 훨씬 이전의 선대작가들의 성취, 즉 중국서예의 수용과 자기화라는 측면에서 객관적으로 비교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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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원(玩元, 1764~1849) 발(跋), <정역전(程易田)초상>, 『경학사선생상(經學四先生象)>』,개인소장.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제공. |
더구나 추사체가 서예의 근본을 왕희지(王羲之,307?-365?)에 둔 기존 서예사를 뒤집고, 왕법(王法) 이전으로 돌아가 한예(漢隸)에서 그 진수를 획득했다는 점을 특별히 주목 할 필요가 있다. 즉 19세기 동아시아 서예사의 화두가 기존 왕희지를 토대로 그 이전의 서예성과를 담아내는 ‘비첩혼융(碑帖混融)’이라고 한다면 그 장본인으로서 추사를 꼽는데 주저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조선 사람으로서 추사의 이러한 성과는 청조(淸朝) 서단에서조차 학예일치(學藝一致)라는 문제의식과 고증학과 금석학이라는 방법론은 있었으되 제대로 완성을 보지 못한 것이었다. 그 증거는 당시 청조서단을 이끌었던 유용(劉墉,1719-1804), 등석여(鄧石如,1743-1805), 이병수(李秉綏,1754-1849), 하소기(何紹基,1799-1873), 조지겸(趙之謙,1829-1884) 등의 작품을 놓고 보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궁극적인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즉 이러한 추사의 성취를 동아시아 서예사 공통의 업적으로 이해시키는 일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추사 사후 150년 동안의 많은 성과에도 불구하고 추사에 대한 인식이 우리 스스로에게서조차 고르지 못한 현실에서 중국이나 일본의 이해를 당장 요청하는 것은 욕심일 수 있다. 이를 위해 여기서 우리는 일차적으로 온전한 하나의 추사이해를 위해서 추사를 통해 서예의 본 모습을 다시 인도받을 필요가 있다. 전술한 바이지만 추사의 예술은 한마디로 ‘추사체(秋史體)’로 요약된다. 그러나 추사체는 단순한 글씨가 아니다. 추사체는 예술은 물론 추사 학문과 사상의 총합이자 그 결정체이다. 그런데도 혹자는 추사를 시문학의 대가로 이야기 하고, 경학자나 금석학자로 칭송한다. 또 혹자는 그를 글씨 값이 가장 비싼 서예가나 문인화가로 이야기하거나 금강안(金剛眼)을 지닌 비평가 감식가라 한다. 그러나 진정한 추사는 대여섯 가지가 되는 이 모두를 다 합친 한사람이다.
그러면 왜 지금까지 추사라는 한 사람에 대한 이해가 보는 사람에 따라 이렇게 분야별로 나누어졌을까. 그 이유는 추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추사를 보는 우리의 눈에서 찾아진다. 우리에게 20세기는 주로 근대화나 서구화로 특징 지워진다. 이것은 학문에 있어 문사철(文史哲)을 하나로 본 전통이 문학∙역사∙철학으로 갈라진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서예를 보자. 동양의 서예는 학예(學藝)의 총합이자 그 결정체이다. 이것은 문자(文字)가 동전의 양면과 같아 내용[學]과 조형[藝] 두 가지가 본래 하나인 것과 동일한 이치이고, 시서화(詩書畵) 일치(一致)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그러나 근대화과정에서 외세에 의한 서구미술의 일방적인 수용은 ‘서화(書畵)’에서조차도 ‘미술(美術)’로의 전환을 촉진시키면서 ‘서예’와 ‘그림’의 분리는 물론 학교교육에서 조차 ‘서예’가 제외되는 수모를 겪어왔다.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나라 서예 역사를 놓고 볼 때 작가나 관객 모두에게 20세기만큼 열악한 제도도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문자나 도구 재료 등 서예를 둘러싼 환경의 급격한 변화, 즉 일상 문자생활에서 서예창작이나 이해의 관건인 한자나 지필묵이 사실상 사라진 것은 서예 작가나 관객 양 측면에서 가히 치명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열악한 제도나 환경은 가령 서구 근대예술의 발전단계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예술을 즐기는 시민의 출현이나 예술에 대한 대중의 요구와 기호를 수용하여 창작하는 전문작가들의 등장을 근원적으로 막는 쪽으로 작동하였고 서예는 사실상 지금도 그 한가운데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서 결국 추사를 통해 서예라고 하는 장르의 온전한 회복이 전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지극히 평범하지만 무서운 역사적 사실을 깨달게 된다. 서예가 서구예술의 논리대로 예술이 아니어도 좋다. 서예는 서예일 뿐이다. 그러나 서예는 단순한 글씨가 아니다. 문(文) ∙ 사(史) ∙ 철(哲)을 두루 아우르는 학문과 예술의 총합이자 그 결정체가 서예인 것이다.
이동국 /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학예연구사
필자는 성균관대에서 ‘퇴계 이황 서예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책임 큐레이터로 재직중이다. 그 동안 서예관련 전시를 많이 기획했으며 ‘추사체의 형성과정과 성격고찰’ 등의 논문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