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의 패륜
김지남 25세, 김위남 25세, 김원록 25세, 김혀성 27세, 김대덕 26세,
김태우 24세, 김태정 24세, 김태국 24세, 김영구 28세, 김우급 26세,
김0 선 26세, 김상하 27세, 김종길 28세, 김질간 26세,
선조 8년(1575)에 김효원과 심의겸의 감정문제로 벌어진
동서분쟁이 더욱 악화되어, 참혹한 전쟁중에서도 살아지지 않았다.
동인에서는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졌고,
북인끼리 대북과 소북으로 갈라졌다.
당파싸움이 왕위 계승 문제와 엉켜서 광해군의 비극을 볼러오게 된다.
광해군은 선조의 정비소생도 아니고, 서자의 서열로도 둘째 왕자다.
임진왜란으로 선조가 피난길에 오르면서 갑작스럽게 책봉된 세자다.
인목왕후가 영창군을 낳자 선조는 세자를 바꾸려는 뜻을 비추었다.
류경영등 소북파는 선조의 뜻을 받드러 영창을 세자로 세우려했다.
이이첨 등 대북파는 광해군과 내통하며 이에 반대를 하였다.
선조는 미처 세자를 바꿀세도 없이 승하하였다.
광해군이 왕위에 올랐다.
류경영 이하 소북파가 죽음을 당하고, 이이첨, 정인홍과 같은
대북파들이 귀양을 가다가 되 돌아와 권력을 잡았다.
이이첨이 광해군을 충동하여 형 임해군을 강화도로 유배를 보내 죽인다.
영창대군은 외조부인 김제남을 역적으로 몰아,
3아들도 역적죄로 함께 죽였다.
9살의 영창대군도 강화도로 보내어 방에 가두고 불을 때어 죽였다.
페륜을 저지르니 조정의 백관중
오리 이원익, 한음 이덕형, 백사 이항복 같은 남인이나,
당시 영의정 대북파 김자헌도 반대하고 나섰다.
민심조차 광해군을 떠나고 말았다.
광김의 선조들 중에서 광해군이 영창대군과 그 모후 인목대비를
페할 때 페모 불가론을 주장한 분들이 많았다.
김지남(止男, 25세)은
사간으로 있으면서 인목대비를 페위할 때
페위 불가론을 논리적으로 논책했다.
선조조에서 사헌부 장령을 거쳐 암행어사로 관서지방을 살폈다.
광산김씨 최초의 족보 용계보를 만든 주인공이다.
김우남(偉남, 25세)은
이이첨등 간신들이 백관을 협박하여 의견을
말하도록 하였다. 아무도 이야기를 하지못하였다.
“이 일은 신하가 된 자로 감히 논할바가 아니다”라며 반대하였다.
그래도 결행하니 식음을 전페하면서, 자결하고야 마는 절의를보였다.
김원록(元祿, 25세):
선조가 승하하자, 통례원 통례로서 태묘에서 선조임금 3년 상을 마친뒤,
그 신주를 태묘에 모시는 예를 마치자,
광해군으로부터 관복을 하사받았다.
페모론이 일어나자 부당함을 지적하여 반대하고 사직하였다.
인조반정후 벼슬을 제수 받았으나 나가지않으니,
임금이 위로의 은전을 베풀고, 가선대부 동지돈녕부사(종2품)을 제수했다.
김효성(孝城, 27세)은
인목대비를 페위하려는 간신들을 처벌해야 된다는
상소를 올렸다가 진도로 유배되었다.
인조반정후 청주목사와 그 뒤 대사헌에(종2품) 추증되었다.
26세 참판공 휘 대덕(사온직장공파)
1577(선조11)-1639(인조17) 조선중기 문신. 자는 득지. 호는 소봉.
아버지 증 판서 원상, 어머니 증 정부인 전주 이씨.
1601(선조35) 증광 생원시 동방진사과에 3등 51인으로 합격.
동년 식년시 문과에 병과 24인으로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가 되었다.
검열 봉교 사간을 거쳐, 병조 좌랑, 사간원 정언이 되었다.
1613(광해6) 충청도 도사, 서산 군수로 나가 선정을 베풀어 통정대부로
승진되었고, 천추절 명나라 사신으로 다녀왔다.
광해 10년 페모론을 극력 반대하였다. 1623년 인조가 즉위하자
대사간이 되었다. 1624년 이괄의 난에 임금을 공주로 호종한 공으로
가선 대부로 승자되고 한성부 좌윤이 되었다.
1636년(인조14) 병자란 때 남한산성이 적에게 포위되자,
척화신을 적에게 압송하지 못하게 반대편에 서서 극력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임금의 동의로 화를 면하게 하였다.
형조 참판에 올랐다.
나이 7세에 글을 읽을 줄 알았고,
글씨를 잘 써서 당시 사람들이 신동이라 일컬었다.
성격이 강직하여 항상 임금에 직언을 하였다.
문장과 명필이 일세에 뛰어났으며, 초서와 해서를 잘 써서
「국조필원」에 올랐고 유고가 있다.
가의대부 참판 소봉 대덕비명
공의 휘는 대덕이요, 호는 소봉이다.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럽고 우애도 극진하였다.
7세에 학문을 알아 문장에 능하고,
예서와 초서를 잘 써서 세인이 신동이라 불렀다.
14세에 과거에 합격하여 문필이 장내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선조 34년 진사로써 이내 문과에 뽑혀 승문원 정자,
예문관 검열에 천거되어 봉교로 옮겼다.
광해군이 동궁에 있어서 글씨를 구함에 공이 기예(손재주)로써
아부함을 수치로 생각하여 응하지 않았다.
선조 말년에 조정이 존호를 청함에 고관들이 의의하는 자가 없으되,
공이 홀로 양사의 말씀이 있으므로,
이내 죄를 얻어 전원으로 물러 나와 수년 뒤에 복직되었다.
광해군이 골육지친을 죽이자,
공이 논박한 관계로 충청도 도사로 나갔다.
선산군수로 임명되어 정치를 어질고 밝게 하니 창고가 넘친다는
사실이 조정에 들리자 천추사에 임명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갑자년에 이괄이 배반함에
공이 대가를 호종하여 공주에 내려갔음으로
가선에 승자되고 한성 서윤이 되었다.
정축년 호란으로 남한산성으로 임금을 호종하여 적의 포위를 받고 있을 때,
적이 척화신 김청음 및 3학사를 결박하여 보내기를 독촉하였다.
이에 공이 개연히 상소하여 말씀하되
“국사가 망할지언정 차마 이런 일을 할 수 있습니까?” 하니
상감이 가상히 여겨 눈물을 흘리며 우답하고 사론이 아름답다 하였다.
명하여 가로되,
행의가 있고 학문이 있으며 이미 질직하고 또 빛나도다.
충언을 올려 숨김이 없으니 나라를 이롭게 하였네.
6순의 나이에 돌아가셨네.
높은 수는 못하지만 마땅히 그 문호를 창대 시켜 뒤에 반드시
고거(高車)가 많이 나오리라.
이상공 경백 찬
김태우(泰宇, 24세)는
간신배들이 페비의 일로 청류들에게 화를 입히자,
말하기를 “인륜이 무너지는데, 선비가 구원할 생각이 없다면,
무엇으로 선왕의 은혜에 답하리오.”하고
김효성과 더불어, 이이첨, 정조, 윤 인등 삼적의 머리를 베고,
이원익을 불러드리기를 상소했다가 진도로 유배당했다.
김태정(태정, 24세)은
김태국과 형제로 선조때 형조참판으로 인성왕후(인종비)의
복제를 기년으로 주장하다가 대세에 몰렸다.
김태국(태국, 24세)은
태정과 형제로 음직으로 금산 군수를 지냈다.
김영구(永耈, 28세)는
광해조때 정조, 유인등이 인목대비를 페위하고,
서궁으로 유페시키자는 페모론을 주장했다.
공이 홍무적과 같이 페모론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고,
두 사람을 주살할 것을 주장했다.
김우급(友伋, 26세),
김 선(旋, 26세): 페모론을 반대하였다.
김상하(常夏, 27세)는
허균의 역모사건에 가담하였다고 무고되어 국문을 당하였다.
모진 고문에 불복하고 항변하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김종길(宗吉, 28세)은
상하의 아들로 숙종조에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를 지냈다.
김질간(질간, 26세)은
선조조에 관직을 시작으로 광해군이 등극하자,
선조실록을 편찬하는 기주관이 되었다.
홍문관 교리로 있을 때 서장관이되어 중국을 다녀온 문장가로 명망이 높다.
대사간을 거쳐 이조 참판이 되었다(종2품)
세조의 영정을 영변에서 봉안한 공으로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집 쌍오문집 진본이 전해진다. 김상하와는 당숙질간이다.
광산김씨약사. 2023년 6월.
편집 선국
대구 경북 종친회 전 부회장, 선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