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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 후기,여행 후기 스크랩 소백산 자락길 첫째 자락 ① : 선현들의 향기가 물씬 풍겨나는, 선비길
갈하늘 추천 0 조회 340 17.09.04 05:0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소백산 자락길 중 첫째 자락 #1 : 선비길

 

산행일 : ‘17. 6. 12()

소재지 : 경북 영주시 순흥면과 풍기읍 일원 

산행코스 : 소수서원주차장소수서원금성단선비촌향교죽계계곡초암사달밭재달밭골비로사삼가주차장(소요시간 : 5시간)

 

함께한 산악회 : 좋은 사람들

 

특징 : ’소백산 자락길은 경북 영주시, 봉화군, 충북 단양군, 강원도 영월군의 34개시·군에 걸쳐져 있다. 영남의 진산이라 불리는 소백산자락을 한 바퀴 감아 도는데 전체 길이는 143km(360)에 이른다. 올망졸망한 마을 앞을 지나는가 하면, 빨간 사과가 달린 과수원 안길을 통과하기도 한다. 또한 잘 보존된 국립공원 구간을 통과하게 되므로 따가운 햇볕에 노출되는 다른 곳의 걷는 길과는 많이 차별된다. 특히 국립공원 구역이 많아 원시상태가 잘 보존된 숲의 터널에서 삶의 허기를 치유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돌돌 구르는 시냇물과 동행할 수 있어 신선함도 함께 느낄 수 있다. 거기다 소백산이란 명산에 걸맞게 부석사를 위시해 성혈사, 초암사, 비로사, 희방사, 구인사 등의 불교유적지를 탐방하는 재미까지도 쏠쏠하다. 독자적인 3(三道)의 생활문화 감상은 보너스(bonus)로 여겨도 되겠다. 자락길은 모두 열두 자락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오늘 걷게 되는 첫째 자락은 가족여행객에게 가장 인기가 높은 길이다. 100살은 족히 넘어 보이지만 선비의 곧은 마음만큼이나 높게 뻗은 소수서원 소나무숲길에서 시작되며, 조선 500년을 관통하는 유학이념이 자락 곳곳에 위치한 문화유산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과거시험을 치르기 위해 한양으로 모여들던 선비들이 한번쯤 지나쳤을 법한 이곳은 아직도 까마득한 숲길이고 보드라운 흙길로 보존되어 있다. 산수의 아름다움과 더불어 예로부터 신성시되고 명당으로 여겨져 수많은 명현을 배출한 이곳에서 옛 선비가 된 듯 선비걸음으로 천천히 아름다운 풍광을 만끽하며, 생생한 역사를 만나보면 어떨까.

 

트레킹의 시작은 소수서원 주차장(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중앙고속도로 풍기 IC에서 내려와 931번 지방도를 타고 풍기 방면으로 우회전한다. 풍기읍을 통과한 부석사 방면으로 9Km쯤 더 들어가면 소수서원 주차장이 나온다. 오늘 트래킹의 들머리이다. 참고로 소수서원 지역(서원과 선비촌, 향교, 금성단)을 둘러보고 버스를 이용해 배점주차장까지 들어가는 방법도 있다. 아니 여름철에는 필수일 수도 있겠다. 3Km를 훨씬 넘기는 먼 거리를 뙤약볕 아래에서 걸을 수는 없을 테니까 말이다.




첫째 자락(1구간)의 가장 핵심은 뭐니 뭐니 해도 소수서원(紹修書院. 사적 제55)이다. 경내 관람을 빼먹어서는 안 된다는 얘기이다. 3천원의 입장료가 아깝지 않으니 일단은 들어가고 보자.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賜額) 서원이다. 풍기군수로 부임한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 1495~1554)이 고려시대 성리학자인 안향이 어릴 적 놀던 곳인 옛 숙수사(순흥면 내죽리) 자리에다 세웠다. 그는 이곳에 안향을 배향하는 회헌사당을 세우고 사당 동쪽에 서원을 건축했다. 이후 1544년 안축(安軸)과 안보(安輔), 그리고 1633(인조 11)에는 주세붕을 추배(追配)하였다. 건축당시 이름은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다. 중국 송나라 때 주자가 세운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에서 따왔다고 한다. ’여산에 못지않게 구름이며 산이며 언덕이며 강물이며 그리고 하얀 구름이 항상 서원을 세운 골짜기에 가득하다하여 그렇게 이름을 붙였단다. 백운동서원이 소수서원으로 사액을 받게 된 결정적 역할은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이 했다. 풍기군수로 부임한 이황은 경상도 관찰사 심통원을 통해 백운동 서원에 조정의 사액을 바라는 글을 올리고 국가의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명종은 대제학 신광한에게 서원의 이름을 짓게 했다. 신광한은 이미 무너진 유학을 다시 이어 닦게 했다(旣廢之學 紹而修之)‘는 뜻으로 소수서원이라 이름하고 편액을 내렸다. 이와 함께 사서오경(四書五經)’성리대전(性理大全)’ 등의 내사(內賜)를 받게 되어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賜額書院)이자 공인된 사학(私學)이 되었다. 1871(고종 8)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에도 철폐를 면한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로 지금도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서원의 건물로는 명종의 친필로 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란 편액(扁額)이 걸린 강당, 그 뒤에는 직방재(直方齋)와 일신재(日新齋), 동북쪽에는 학구재(學求齋), 동쪽에는 지락재(至樂齋)가 있다. 또한 서쪽에는 서고(書庫)와 고려 말에 그려진 안향의 영정(影幀:국보 111)과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大成至聖文宣王殿坐圖:보물 485)가 안치된 문성공묘(文成公廟)가 있다.



강학당으로 가다보면 숙수사지 당간지주(宿水寺址 幢竿支柱, 보물 제59)‘가 나온다. 당간지주(幢竿支柱)는 절의 위치를 알리는 조형물로, 말 그대로 당(, 불화를 그린 )을 매달던 깃대다. 그러니 숙수사라는 절의 당간지주라는 뜻으로 보면 되겠다. 아무튼 유교문화를 상징하는 서원에서 불교의 유적을 만나는 매우 독특한 포인트라 할 수 있겠다. 참고로 높이 3.65m의 이 당간지주는 59의 거리를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는데, 지주 하나의 너비는 53이고, 두께는 36이다. 윗부분은 올라갈수록 약간 가늘어지고, 맨 꼭대기는 둥그렇게 만들어졌다. 안쪽 면에는 아무런 조각을 하지 않았고, 바깥면 가운데에 세로로 띠선을 새겼다. 앞뒷면의 테두리에는 너비 7인 선을 팠으며, 그 가운데에 다시 능선(稜線) 모양의 띠를 새겼다. 지상에서 1.7m 쯤 되는 안쪽면 윗부분에는 네모나면서 넓은 홈이 얕게 오목새김 되었는데, 이것은 당간을 고정시키는 장치로 보인다. 이러한 모습들은 통일신라시대에 건립된 당간지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식이다.



서원의 배치는 강당인 강학당(講學堂)을 중심으로 뒤쪽에 일신재가 자리하고 오른편에 동?서재의 기능을 수행한 학구재와 지락재가 위치하고 왼편에는 제향공간이라 볼 수 있는 문성공묘가 일각문을 두고 방형 담장 내에 자리하고 있다. 따라서 굳이 배치법의 이름을 붙인다면 동묘서학(東廟西學)이라 할 수 있겠다. 그중 가장 중요한 건물은 물론 보물 제1403호로 지정되어 있는 강학당이다. 정면 4, 측면 3칸의 굴도리 초익공(서까래를 받치는 도리가 둥근 것)‘ 건물로 평면구성은 마루방 3칸과 온돌방 1칸이고 사면에는 퇴(退. 툇마루의 준말)를 두었다. 강당의 입구에는 백운동(白雲洞)‘이라는 주세붕선생이 처음으로 지은 이 서원의 이름이 적힌 편액(扁額)이 걸려있다.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현재의 이름이 적힌 편액은 강당의 내부에 걸려있다.



강학당의 바로 옆에는 일신재(日新齋)와 직방재(直方齋)가 있다. ’()‘가 들어간 건물은 오늘날의 기숙사쯤으로 생각하면 된다. 강학당의 북쪽에서 강학당을 바라보고 있는 직방재(直方齋)와 일신재(日新齋)는 원장, 교수 및 유사(有司)들의 집무실 겸 숙소로 각각 독립된 건물이 아닌 연속된 한 채로 이루어졌으며 편액으로 구분하고 있다. 직방재와 일신재는 소수서원 창건 이후 263년이 지난 1805(순조5)에 건축되었으며 다른 서원의 동?서재(東西齋)에 해당하는 건물이다. 먼저 서재(西齋)에 해당하는 직방재는 건물이 자리한 방향의 우측에 있는 2칸을 말하며주역(周易)‘깨어 있음으로써 마음을 곧게 하고, 바른 도리로써 행동을 가지런하게 한다(敬以直內 義以方外)’는 말에서 각각 ()’()’자를 취했다. 이어 동재(東齋)에 해당하는 일신재는 직방재 좌측에 있는 2칸을 말하며 일신(日新)’‘(인격도야가) 나날이 새로워져라(日日新又日新)’라는 뜻으로 대학(大學)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 사진은 생략했지만 학구재(學求齋)와 지락재(至樂齋)는 유생들이 기거하며 공부하던 곳이다. 스승의 처소인 직방재와 일신재(直方齋, 日新齋)의 동북쪽에 자로 배치되었다. 학구재란 학문을 구한다는 뜻으로 일명 동몽재(童蒙齋)라고도 하며 지락재는 배움의 깊이를 더하면 즐거움에 이른다는 뜻으로 앙고재(仰高齋)라고도 한다. 유생들이 학문에 정진하는 공간인 학구재와 지락재는 온돌방과 온돌방 사이에 진리의 숫자인 3을 상징하여 둘 다 3칸으로 꾸며졌으며, 건물 입면 역시 배움을 장려하기 위한 의도로 공부(工夫)’자 형태로 지어졌다. 또한 학구재와 지락재는 스승의 거처인 직방재, 일신재보다 한자(一尺) 낮게 뒷물림하여 지어졌는데 이는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윤리의식이 건축구도로 형상화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건물 배치에서부터 예()를 염두에 둔 선인의 인간적인 깊이를 느낄 수 있는 이 구도를 마주하게 되면 글선생은 만나기 쉬워도 사람 만드는 스승은 드물다(經師易遇 人師難逢)’는 말이 무색해진다.



옛날 소수서원의 선비들은 경내(境內) 정자인 경렴정(景濂亭)에서 경전을 읽고, 취한대(翠寒臺)로 건너와 시를 읊고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취한이란 푸른 연화산의 산 기운과 죽계의 맑은 물빛에 취해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긴다.’는 뜻의 옛 시 송취한계(松翠寒溪)’에서 따온 이름이라 전해진다. 퇴계가 조성했다는 취한대의 아래 죽계천은 맑은 물 위에 연잎이 두둥실 떠 있고, 물가에 숲을 이룬 수초가 수채화 분위기를 자아내는 개울이다. 취한대에서 조금 북쪽으로 올라가면 경자암이라는 바위가 있다. 붉은 색으로 ()’자가 새겨져 있고 그 위에 하얀색으로 백운동(白雲洞)’이라는 글자가 각자(刻字) 돼 있다.‘은 서원을 창건한 주세붕이 새겼고 백운동은 이황이 썼다. ‘경이직내 의이방외 敬以直內 義以方外에서 따왔다고 한다. ‘경으로써 마음을 곧게 하고 의로써 밖으로 드러나는 행동을 반듯하게 한다.’는 뜻이다.



소수서원을 둘러봤다면 이젠 금성단으로 향할 차례이다. 길가에 단종애사 대군길(端宗哀史 大君路)’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2015년엔가 경북 정체성선양 홍보사업에 선정되어 영주 선비길을 조성한다는 기사를 본적이 있는데 공사가 벌써 종료되었던 모양이다. 기사에서는 선비길은 우국충정 삼봉길회헌안향 도동길그리고 단종애사 대군길3개 구간으로 이루어진다고 했다. 이중 단종애사 대군길은 금성대군신단을 출발해 취한대와 사현정을 거쳐 피끝마을에 이르게 되는데 총길이는 8.7Km에 이른다. 이곳 주민들은 금성대군(錦城大君)이 도모한 단종 복위운동(1456)’이 발각되어 순흥도호부가 폐지되는 등 초토화가 되었으나 그를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금성대군신단을 세워 제향(祭享)하고 성황제(城隍祭)를 통해 그의 충정을 민간신앙으로 승화시켰다고 한다. 그때 희생되었던 사람들의 피로 붉게 물들었던 죽계천 물줄기를 따라 걸으면서 목숨을 초개(草芥)와 같이 던진 충절(忠節)’의 역사를 되새겨보라는 의미일 것이다.



잠시 후 금성대군 신단(錦城大君 神壇)’의 들머리임을 알리는 이정표가 나타난다. 참고로 계속해서 도로를 따를 경우 선비촌순흥향교로 연결된다. 금성단을 둘러본 뒤에는 이곳으로 다시 되돌아 나와야 한다는 얘기이다.



방향을 틀어 마을로 들어서면 단종 복위운동에 연루돼 순흥에 유배됐다 살해된 세종의 여섯 째 아들 금성대군을 모신 금성단(錦城壇)이 쓸쓸한 표정으로 맞는다. 금성단(錦城壇)은 단종 복위 사건으로 유배된 뒤 처형당한 왕숙 금성대군(錦城大君)을 추모하기 위해 설립된 제단이다. 순흥읍지에 의하면 홍천현감 이대근이 선영을 다녀오던 중 순흥 청달리를 지날 때 그가 탄 말이 길을 피하여 비껴가는 곳이 있으므로 이를 이상하게 여겨 하마 후 살펴본 뒤 이곳이 금성대군이 피 흘린 곳이라 생각하여 의심을 품은 채 지나갔다. 그날 밤 꿈에 금성대군이 나타나 그 곳은 자신이 피 흘린 곳임을 말함으로써 곧 부사와 함께 사람을 시켜 조사한 후 이 곳을 봉축하고 단을 쌓았다고 한다. 아무튼 정축지변(丁丑地變)으로 알려진 당시 사건으로 인해 금성대군은 죽임을 당하고 순흥부는 폐부되는 아픔을 겪는다. 그로부터 127년이 지난 1683(숙종 9) 순흥부가 복원되고 순절의사들이 신원(伸寃)되자 1719(숙종 45)에 부사 이명희(李命熙)가 주창해 그 유허지(遺墟地)에다 단소(壇所)를 설치했다. 1742(영조 18)에는 경성감사 심성희(沈聖希)가 단소를 정비하면서 위()를 모시고 순의비(殉義碑)를 세워 매년 봄과 가을에 향사(享祀)를 지내오고 있다.




신단(神壇)3단으로 조성돼 있다. 상단은 금성대군, 우단은 이보흠, 좌단은 모의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한 여러 의사들의 단소(壇所)이며, 지금도 매년 봄과 가을에 제향을 지내고 있다. 하지만 퇴계 이황이 죽계천 유역의 아홉 경승을 골라 각각의 이름을 붙였다는 죽계구곡중 제2곡인 금성반석(金城盤石)의 위치는 명확하지 않다. 금성단 부근 순흥향교 앞 죽계천 바위나 금성단을 금성반석으로 추정하고 있을 따름이다. 참고로 퇴계가 선정했다는 죽계구곡1곡 백운동 취한대(白雲洞翠寒臺), 2곡 금성반석(金城盤石), 3곡 백자담(栢子潭), 4곡 이화동(梨花洞), 5곡 목욕담(沐浴潭), 6곡 청련동애(靑蓮東崖), 7곡 용추비폭(龍湫飛瀑), 8곡 금당반석(金堂盤石), 9곡 중봉합류(中峯合流) 등이다.



신단을 빠져나와 오른편으로 돌면 거대한 은행나무가 길손을 맞는다. 금성대군의 죽음을 지켜본 증인으로 수령(樹齡)1200년이나 되었단다. 잎사귀 모양이 오리발을 닮았다고 해서 압각수(鴨脚樹)로도 불리는 이 은행나무는 고을이 폐부될 때 스스로 고사했다가 200년 후 순흥부가 복권되자 다시 살아났다고 한다. 정축지변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가히 신목(神木)인 셈이다. 나무에 앉은 매미들이 목청 높여 서럽게 울어대고 있다. 저리도 서러운걸 보면 그때의 아픔을 기억하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선비촌을 들러보기 위해서는 청다리로도 불리는 제월교를 건너야 한다. 지금은 시멘트다리로 변했지만 청다리는 우는 아이 주워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곳. 소수서원에서 공부하던 젊은 유생들이 기생을 불러 풍류를 즐기다 아이를 낳으면 서로 기를 형편이 못돼 이곳에 버렸다고 전해진다. 다리 아래로 흐르는 죽계천은 핏물로 물들었던 슬픈 역사가 흐르는 곳이다. 1457(세조 3) 10, 수양대군(세조)이 단종을 쫓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그의 친동생인 금성대군은 반대하다가 순흥으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금성대군이 세조복위를 추진하다 관노에 의해 탄로 나자 이 고을 유생들과 주민들이 참화를 당하고 만다(丁丑之變). 그때 죽임 당한 주민들의 시체가 산을 이루듯 죽계천에 수장되었고, 그 핏물이 10여 리나 흘러내린 뒤 멎었다 한다. 지금도 피가 멎은 곳에 자리한 마을을 피끝마을이라 부르고 있다고 한다.



제월교를 건너자마자 길은 두 갈래(이정표 : 선비촌0.3Km/ 순흥향교0.4Km/ 금성대군 신단0.2Km)로 나뉜다. 선비촌으로 가려면 도로를 따라 계속해서 직진해야 한다. 이정표에 나와 있진 않지만 오른쪽으로 난 도로는 소수박물관과 영주시청소년수련원으로 연결된다. 소수서원을 둘러보고 후문으로 빠져나올 경우 이 도로로 나오게 됨은 물론이다.



잠시 후 만나게 되는 선비촌이라고 적힌 커다란 빗돌 앞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면 조선시대 주요 고택을 재현한 우리 고유의 전통마을인 선비촌이 나온다.



광장을 겸하고 있는 주차장이 널따랗게 펼쳐진다. 군락을 이루고 있는 건물들 앞에는 커다란 동상(銅像) 하나가 세워져 있다. ‘영주 선비상이란다. ‘선비란 학문을 닦는 사람을 예스럽게 이르는 순 우리말이다. 이곳 영주는 예로부터 학문과 예()를 숭상했던 선비문화의 중심지로 자부해왔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성리학자(性理學者)라 할 수 있는 고려 말의 회헌(晦軒) 안향(安珦, 1243-1306) 선생의 고향이다. 그런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동상까지 세워놓은 모양이다.



그 옆에는 옛날 풍으로 안내판을 만들고 선비촌의 조성 경위를 적어 놓았다. 오늘날 우리가 본받아야 할 선비의 정신과 태도를 새롭게 이해하고 전달할 수 있는 장으로 활용하고자 위에서 얘기한 바 있는 안향 선생의 고향에다 조성했단다. 이를 위해 영주 선비들이 실제 살았던 생활공간을 그대로 복원하였으며 선비촌답게 수신제가(修身齊家), 입신양명(立身揚名), 거무구안(居無求安), 우도불우빈(憂道不憂貧) 4구역으로 조성해 놓았다. 선비의 정신이 그대로 묻어나는 말들이다. 부자가 아니어도 좋다. 가난해도 자기 수양이 먼저다. 벼슬길에 욕심을 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만사 편리함만 추구해서도 안 되며 순응하며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고 있다



안내판의 뒤로 들어서면 선비촌이 나온다. ‘선비촌은 한국인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해 온 유교사상을 조선시대 선비정신을 통해 재무장하고 윤리도덕의 붕괴와 인간성 상실의 오늘날 사회를 되짚어 볼 수 있게 재현해 놓은 곳이다. 해우당고택(김상진), 두암고택(인동 장씨 종가), 만죽재(김문기) 등 영주지역의 대표적인 반촌 무섬마을의 고택을 이곳에 재현한 기와집 7채와 초가(草家) 5, 그리고 당시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정자, 누각, 디딜방아, 대장간, 저자거리, 주막, 외양간 등 사라져간 모습들을 고스란히 보고 체험할 수 있게 해놓았다. 아무튼 옛 모습 재현에 신경을 많이 썼는지 영화나 드라마의 촬영지로 각광을 받고 있단다.




이곳 선비촌은 영주 선비들이 실제로 살았던 생활공간을 그대로 복원하였다고 한다. 전체적으로 마을공동체 형태로 구성하여 옛 영주 선비들의 생활모습을 입체적으로 느낄 수 있으며, 각 가옥별로 거주했던 사람들의 신분에 맞는 가옥규모에 여러 가구와 생활도구를 전시하였다. 또한 한옥을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도록 한옥스테이 프로그램도 있다. 조선시대 선비와 상민의 삶을 체험해볼 수 있는 일종의 테마파크로 보면 되겠다. 윷놀이 제기차기 장작패기 등 전통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행사가 열리는 것은 물론이고, 기와집과 초가집에서 숙박까지 가능하니까 말이다. 참고로 숙박체험은 김상진가(기와), 해우당 고택(기와), 가람집(초가), 김문기가(기와), 만죽재(기와), 김세기가(기와), 김뢰진가(초가), 장휘덕가(초가), 김구영가(초가), 김규진가(초가), 두암 고택(기와) 등에서 할 수 있다.



저잣거리라고 안 만들었을 리가 없다. 아예 하나의 테마(theme)로 조성해 놓았다. 저잣거리는 숙박이 가능한 마을 울타리 밖에다 배치했다. 영주지역의 오랜 특산물인 묵밥과 산채비빔밥 등을 먹을 수 있는 우진’, 영주 불고기를 파는 수라간’, 인삼곰탕과 청국장을 먹을 수 있는 인삼주막’, 구이정식, 뚝배기 불고기를 파는 종가집등 집집마다 솜씨자랑에 듣기만 해도 침이 넘어가는 장터다. 그밖에도 찻집과 소나무로 만든 도마와 소품 가구를 살 수 있는 소나무도마, 은장도를 파는 도우공방 등이 있다.




저잣거리를 빠져나오니 영주시청소년수련원으로 연결되는 도로가 나온다. 이곳에서 조금만 더 들어가면 2004922일 개관했다는 소수박물관에 이를 수 있다. 선사시대에서부터 유교문화, 서원과 향교 등 영주의 귀중한 유물과 유적을 전시해 놓은 공간이라지만 들러보는 것은 생략한다. 그보다는 순흥향교에서 새로운 뭔가를 찾아보는 것이 더 유익할 것 같아서이다.



이번에는 순흥향교로 향한다. 거리도 얼마 되지 않을뿐더러 주요 기점마다 이정표가 세워져 있으니 큰 어려움 없이 찾아갈 수 있다. 가는 길에 백산계 숭모비(白山 ? 崇慕碑)’가 보인다. 지역민들이 결성한 모임인 모양인데 비석의 크기로 보아 그 규모가 꽤 큰 모양이다.



잠시 후 삼거리(이정표 : 순흥향교0.1Km/ 삼괴정(배점)3.2Km/ 선비촌0.4Km)를 만난다. 그리고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었다싶으면 산기슭에 호젓하게 들어앉은 순흥향교를 만나게 된다. 향교를 들르지 않고 곧장 자락길을 따르고자 할 경우에는 계속해서 도로를 따르면 된다.




순흥향교(順興鄕校,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47)는 조선시대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창건되었다.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니 공립학교인 셈이다. 창건 시기는 미상(고려 충렬왕 30년이라는 설도 있다)이며, 처음에 순흥부(順興府) 북쪽 금성(金城)에 창건되었다가 1718(숙종 44) 동쪽 위야동으로 이건하였다. 1750(영조 26) 남쪽 석교리(石橋里), 1770(영조 46)에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으며, 1971년에 중수하고 1975년에 누각과 단청을 보수하였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7칸의 대성전, 6칸의 명륜당, 5칸의 동무(東?)와 서무(西?), 4칸의 동재(東齋), 7칸의 문루(門樓), 삼문(三門협문(夾門주사(?舍) 등이 있다.




대성전(大成殿)에는 5(五聖), 10(十哲)의 위패가 동무·서무에는 송조6(宋朝六賢), 우리나라 18(十八賢)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교생을 교육시켰으나,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졌다. 대신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奉行)하며 초하루와 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다. 현재 전교(典校) 1인과 장의(掌議) 수인이 운영을 담당하고 있다. 그래선지 향교는 한적하기만 하다. 한때는 대학자 안향의 영정을 모시던 큰 향교였으나 예전과 같진 않은 듯, 맞은편에 자리한 소수서원과 비교하면 쓸쓸함이 묻어나기만 한다.



향교에서는 순흥의 너른 들녘이 한눈에 잘 들어온다. 소백산 큰 줄기에 기대어 있는 순흥(順興)’은 이름만큼이나 아늑한 풍경을 지닌 땅이다. 그러나 땅이 품은 역사는 만만치가 않다. 이곳 순흥은 여말선초(麗末鮮初) 한강이남 제일의 도시였다는 순흥도호부(順興都護府)’가 터를 잡았던 곳이다. 하지만 정축지변(丁丑地變)으로 인해 순흥도호부는 폐부(廢府)됐고, 모반(謀反)의 땅으로 버림 받았다. 순흥의 비극은 조선 세종의 여섯 째 아들 금성대군에서 비롯된다. 세조가 조카 단종을 쫓아내고 영월로 유배시켰을 때, 순흥에 유배됐던 금성대군은 순흥부사 이보흠 등과 뜻을 모아 단종복위 거사를 추진했으나 그만 발각되고 말았다. 금성대군을 비롯해 순흥의 65개 크고 작은 집안의 자손 300여 명이 역모로 죽임을 당했다. 그들이 흘린 피가 죽계를 타고 20리를 흘러 멈춘 곳엔 피끝이란 지명이 생겨날 정도였다고 한다. 200년 뒤 숙종에 의해 단종이 복위되면서 순흥 또한 명예를 되찾았지만 새로 생겨난 영주군의 한 개 면에 만족해야 할 정도로 왜소해져 버렸다. 지금의 영주는 물론이고 강원의 영월 태백 삼척과 경북의 봉화 울진 예천 안동, 그리고 충북 단양에까지 이르렀다던 순흥의 영화는 그렇게 세월에 묻혀버린 것이다. 야은(冶隱) 길재(吉再, 1353~1419)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며 읊던 과거에 대한 회한의 정이 과연 이랬을까?



선비촌으로 되돌아 나온다. 향교 앞 삼거리에서 곧바로 자락길을 탈 수도 있지만 선비촌에서 기다리고 있을 집사람을 내버려두고 혼자서 길을 나설 수야 없지 않겠는가. 집사람을 픽업해서 함께 금성단을 둘러본 다음 본격적인 트레킹을 나선다. 압각수(鴨脚樹)를 지난 자락길은 배점마을로 들어가는 아스팔트도로로 이어진다. 길지 않은 이 길은 정겨운 걷기 길이다. 길가에 심어진 뽕나무는 아직까지도 연한 이파리를 매달고 있다. 그 이파리를 따고 있는 집사람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피어난다. 초여름의 풍요로움이 마냥 즐거운 모양이다. 도로에 이르기 전 단종 복위운동이 발각된 이후 금성대군이 갇혀 살았다는 위리안치지(圍離安置地)’를 만나게 된다고 했는데 확인할 수는 없었다.



길 양편에는 사과와 복숭아 과수원들이 줄줄이 늘어섰다. 수줍음 타는 시골처녀 얼굴처럼 발그레한 사과는 전국 생산량의 14%를 차지하는 영주 특산물. 기하학적으로 뻗은 굵은 가지에 수십 개의 사과가 주렁주렁 열린 모양새가 하늘을 떠받치는 소백산처럼 기운차다. 사람들은 이런 길을 일러 카멜레온(chameleon)’ 같다고 한다. 봄마다 사과꽃이 만발하던 하얀길이 여름엔 녹음 짙은 녹색길로 변했다가, 가을철만 되면 빨간 사과길로 바뀐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런 사과밭은 초암사 들머리에 이를 때까지 계속해서 나타난다. 영주의 사과생산량이 전국 최고라는 말이 실감난다. 눈이 닿는 곳마다 전부 사과밭이기 때문이다. 사과는 배수가 잘 되고, 일교차 크고, 일조량 많고, 비가 적은 지역이 당도가 높고 맛있다고 한다. 영주가 이 조건에 딱 들어맞는 것이 그 원인이란다.




저만큼에 소백산이 나타난다. 조선 중기의 풍수가인 남사고(南師古·1509~1571)가 말을 타고 가다가 산을 보고는 즉시 말에서 내렸다는 전설(傳說)의 산이다. 그리고는 이 산은 사람을 살리는 산이라며 넙죽 절을 했다는 것이다.



길가 이정표(삼괴정 2.8Km/ 선비촌 0.8Km)의 상단에 고인돌 고분이라는 이름표가 붙어있다. 이름표까지 내걸어놓은 곳을 그냥 지나칠 수 없기에 일단은 들어서고 본다. 논두렁을 타고 잠시 들어가자 커다랗고 너른 바위를 괴어놓은 듯한 형태의 돌무덤이 나타난다. 무덤의 앞에다 안내판을 세우고 돌방무덤에 대한 설명을 해놓았다.



돌방무덤은 석실분(石室墳) 또는 석실묘(石室墓)라고도 불리는데 강력한 권력이 나타난 삼국시대에 만들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돌방무덤은 짜임새와 묻는 방식(葬制)에 따라 몇 가지로 나누어지는데 주검을 널방에 넣는 방식에 따라 벽을 만든 뒤 천장돌을 얹는 구덩식(竪穴式)과 천장돌을 얹은 다음 한쪽 벽을 여는 굴식(橫穴式)으로 구분된다. 신라는 고구려나 백제에서 유행하던 굴식 돌방무덤의 영향을 받았지만 기존의 돌덧널무덤(石槨墳)의 전통을 이어오다가 7세기쯤 널길이 앞 벽의 한쪽에 치우치거나 가운데에 있고, 나들이문이 있는 굴식 돌방무덤이 널리 퍼졌다고 한다. 이곳 순흥에는 비봉산을 중심으로 돌방무덤이 산재해 있는데, 읍내리고분군과 바느래고분군이 있다고 적고 있다.



자락길은 고인돌 근처에서부터 햇빛에 노출된다. 그늘을 만들어줄만한 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는 완전한 땡볕길이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배점마을로 향하는 도로에 올라선다. 주말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평일 오전은 한갓지기만 하다. 이 길은 도로를 향해 늘어뜨린 단풍나무가 특징이다. 요즘 관광지들은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이 길가에다 벚꽃나무를 심는다. 내 눈에는 무척 거슬리는 풍경 중의 하나이다. 그래선지 몰라도 단풍나무 가로수길이 유난히도 신선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단풍나무 그늘 아래를 더운 줄 모르고 걷는데 도로 곳곳에 여우 출현 주의안내판이 내걸려 있다. ‘로드킬 위험구간이라는 현수막도 보인다. 소백산이 여우 방사지역이라 점프력이 뛰어난 여우들이 방사장 울타리를 뛰어넘어 도로로 내려올 수도 있기 때문이란다. 아무튼 멸종위기 종이라니 조심해서 운전해 볼 일이다.



도로에 올라서자 소백산자락길안내판이 걸려있다. 하단에는 자락꾼의 품격은 길바닥에 널려진다라는 글귀를 적어놓았다. 쓰레기를 흘리지 말라는 의미일 것이다. 아무튼 이 소백산자락길은 영남의 진산이라 불리는 소백산자락(단양·영주·봉화·영월 총 143)을 한 바퀴 감아 도는 숲길이다. 구간은 모두 12자락으로 매 자락마다 평균 거리가 12내외다. 2009년에는 문화체육관광부의 문화생태탐방로, 2010년에는 한국형 생태관광10대 모델에 선정됐고 2011년에는 국내 관광부분 최고의 영예인 한국관광의 별로 선정되기도 했다.



얼마쯤 걸었을까 길가에 쉼터를 겸한 작은 공원(公園)이 만들어져 있다. 그 옆에는 죽계별곡(竹溪別曲) 시비(詩碑)’가 세워져 있다. ‘죽계별곡은 고려말 순흥(順興) 사현정마을 출생인 안축(安軸, 1287-1348)이 지은 경기체가(景幾體歌)로 모두 5연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반적인 내용은 그의 고향 순흥에 대한 감정을 표현한 것이다. 1연은 죽령(竹嶺)의 남쪽, 영가(永嘉)의 북쪽, 그리고 소백산(小白山) 앞에 위치한 죽계의 경관을, 2연은 죽계의 숙수루(宿水樓복전대(福田臺승림정자(僧林亭子) 등에서 취해 노는 모습을, 3연은 향교(鄕校)에서 학자의 제자들이 육경(六經)에 심취해 있는 정경을, 4연은 좋은 시절이 돌아와 꽃이 만개하는 모습을 보며 천리 밖의 왕을 그리는 신하의 정을, 5연은 꽃·방초·녹수(綠樹) 등이 어우러진 운월교광(雲月交光)의 경치를 읊었다. 고려 신흥 사대부의 자신감 넘치는 생활 정서가 담겨 있으며, 문학성이 뛰어나지는 않지만 당시 한문체 가사에서 널리 유행했다고 한다. ‘관동별곡과 함께 근재집(謹齋集)’에 실려 있다.



빗돌을 지나면서 순흥저수지(竹溪湖)가 내다보이기 시작한다. 퇴계가 꼽은 제3곡 백자담(栢子潭)은 저 저수지물에 잠겨 버렸다고 한다. 덕분에 하계 이가순(霞溪 李家淳·17681844)소백구곡시송림곡(松林曲)을 통해 위치를 추정할 수 있을 따름이란다.



길가에는 예쁘게 지어진 집들이 즐비하다. 그런데 하나같이 모두 펜션과 음식점등의 영업을 하고 있다. 그만큼 많은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하긴 누군가는 이곳 죽계구곡(竹溪九曲)을 일러 소백산 국망봉에서 발원한 죽계천이 선비의 고장에서 빚은 아홉 폭 두루마리 산수화나 다름없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조선 명종 때 퇴계 이황이 중국 송나라 유학자인 주희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본 따 죽계구곡이라 명명했을 정도로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곳이다. 또한 고려 문장가 안축이 지은 죽계별곡의 배경지로도 유명하다.



아스팔트길이 지루하게 이어지던 소백산자락길은 600년생 느티나무 세 그루가 다정한 배점마을을 만난다. ‘배점은 배순의 무쇠점(대장간)이 있던 마을이라는 뜻이다. ‘배점(裵店)’ 마을의 원래 이름은 평장동이었다고 한다. 후세 사람들이 배순의 학문과 충··덕행을 기리기 위해 정려각을 세우면서 배순(裵純, 1548~1610, 행적기록이 있는 기간)자와 점방(店房) ‘자를 따서 배점이라고 고쳐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마을 뒷산에는 배순의 묘가 있으며, 이 마을주민들은 배순을 마을신(洞神)으로 모시고 매년 음력 정월 14일 밤 자시(子時, 23:00~01:00)에 삼괴정(三槐亭) 배순의 정려각(旌閭閣)에서 동제(洞祭)를 지내오고 있단다. 그는 비록 스스로 선비라 말하지 않았지만 모두 선비 이상으로 여겼다는 증거일 것이다.



배점마을에는 배순정려비(裵純旌閭碑, 경상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279)’가 세워져 있다. 정려비는 충신·효자·열녀 등의 언행과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그들이 살던 마을의 입구에 세워두는 것으로, 이 비()는 위에서 얘기했던 철장인(鐵匠人) 배순(명종광해군)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4각 방형의 대좌 위에 올라앉은 비()는 소박한 받침돌 위에 비신(碑身)을 세웠으며, 위쪽으로 갈수록 조금씩 넓어지는데 이수(?首)가 없는 게 특징이다. 1615(광해군 7)에 정려(旌閭)되어 1649(인조 27) 손자 배종(裵種)이 비석을 세웠고, 1755(영조 31) 그의 7대 외손(外孫)인 임만유(林晩維)가 비석에 충신이란 말을 넣어 고쳐 세웠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자. 배순은 천민인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난 탓에 공부를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소수서원까지 매일같이 걸어와 강학당 문밖으로 흘러나오는 유생들의 글 읽는 소리를 들으며 마당에서 공부를 했다고 한다. 퇴계 선생이 이를 가상히 여겨 유생들과 같이 글을 읽게 하였고, 그로 인해 배순은 성리학의 거성 퇴계 선생의 유일한 천민 제자가 되었다. 퇴계의 제자 309명을 수록한 급문제현록(及門諸賢錄)’에도 배순의 이름이 올라 있다. 배순은 퇴계 선생이 돌아가시자 철()로 상()을 모시고 삼년상복(三年喪服)을 입었으며 선조대왕이 승하했을 때에는 매월 삭망(朔望)에 국망봉에 올라 궁성(宮城)을 향해 곡제사(哭祭祀)3년이나 지냈다고 한다. 그 소문이 궁 안에까지 들리자 나라에서 정려(旌閭)를 내리게 되었다고 한다.



잠시 후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운영하는 널따란 주차장에 들어선다. 선비촌을 출발한지 1시간 만이다. ‘배점주차장이란 지명을 알리는 표지판 외에도 이정표(초암사 3.2Km/ 선비촌 3.6Km)와 낙동강이 이곳 소백산에서 시작된다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주차장 앞에서 자락길’ 12자락(코스)이 오른편으로 나뉘니 주의할 일이다. 1자락은 주차장을 오른편에 끼고 이어진다. 참고로 이곳은 삼괴정(三槐亭)’이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도 불린다. 배점마을 입구에 수령이 600년이나 된 느티나무 세 그루가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아무튼 해발이 230m인 선비촌에서 1시간을 걸은 끝에 50m의 고도(高度)를 높였다. 평지를 걸어온 셈이다. 이곳 주차장의 해발은 280m, 초암사의 높이가 500m이니 이제부터 본격적인 오름길이 시작된다고 보면 되겠다. 하지만 그 거리가 3.3Km나 되니 서둘러서 고도를 높여야 할 이유는 없다.



주차장에는 소백산 국립공원 안내도외에도 소백산 자락길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그런데 이게 없느니 만도 못하다. 달밭길(5.5km) 구간이 빠진 채로 선비길(3.8Km)과 구곡길(3.3Km) 구간만 그려져 있는 것이다. ‘소백산 자락길답사를 위해서 찾아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세 구간을 한꺼번에 걸어보길 원할 테니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지도가 되어버렸다. ‘CS(customer satisfaction)’라는 단어가 일상적인 용어가 되어버린 요즘이다. 고객만족, 고객의 눈높이에 맞춘다는 게 그리도 어려운 일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명색이 공공기관일진데 말이다.



주차장에는 아주 멋진 시설을 만들어 놓았다. 데크로 좌대(座臺)를 만든 다음 백보드(backboard)를 세우고 예쁜 글씨체로 소백산 자락길이라고 적었다. 그냥 지나치기 아쉬울 정도로 멋진 포토죤(photo zone)이 아닐까 싶다. 포즈를 취하고 있는 집사람의 입가에 미소가 떠오른다. 하긴 이런 멋진 자리에 앉았는데도 즐겁지 않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 게다. 자락길이란 이름에 걸맞게 잘 만들어 놓은 장소라는 얘기이다. 소백산자락길을 만든 ()영주문화연구회에서는 자락길을 自樂이라고 칭했다. ‘스스로 즐기며 걷는 길이라는 의미다. ‘걷는다는 그 자체가 스스로 하는 행위다. 즐거움 없이 할 수 없다. 길에서는 항상 새로운 것을 발견한다. 사색과 즐거움이 교차한다. 그렇다, 길은 과거를 보여 주며 미래를 생각하게 하는 사색의 공간이다. 과거와 미래를 공유한 가치의 결과가 현재 방향을 정하고 걷는 길이다. 길에서 묻고 길에서 답을 구하며 길을 걷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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