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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군 여행] 亡國[망국]의 한이서린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릉...........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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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군 여행] 亡國[망국]의 한이 서린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릉...........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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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연천에 가면 亡國[망국]의 한이 서려 있는 묘가 있다. 신라 제56대 경순왕능과 고려인으로 원나라에 공녀로 끌려가
황후 까지 올랐던 기황후능 터다. 경순왕이 통일신라의 마지막 왕이라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지만 그의 능이 경
주가 아닌 이곳 연천에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에는 의아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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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역사를 다시 한번 되돌아보면 우리가 배웠던 그대로 한국의 역사는 주로 한강과 임진강을 지형적으로 이용하며
한반도의 남북을 경계해 왔다. 특히 임진강은 삼국시대, 통일신라, 고려시대를 통해 접경지를 이루면서 강의 북안과 남안
에 많은 다양한 모습의 성채들을 오늘날 까지도 남겨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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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7년 11월,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의 수도 금성을 기습 침략하여 경애왕 박위응을 살해하고, 경애왕의 이종사촌 형제
인 김부(金傅)를 임금의 자리에 오르게 하니 그가 바로 경순왕이다. 재위 기간은 927년부터 935년까지 8년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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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史蹟) - 연천 경순왕릉(漣川 敬順王陵)
경순왕(敬順王, 재위 927~935)은 신라의 마지막 왕으로 성은 김(金), 이름은 부(傅)이다. 경순왕이 즉위할 당시 한반도는
후백제, 고려, 신라로 분열되어 있는 후삼국 시대였다. 신라는 후백제 견훤의 침략으로 영토는 날로 줄어들었으며 국가의
기능이 완전히 마비된 와중에 귀족의 권력 다툼은 끊이지! 않았다.
이에 경순왕은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하였지만 이미 기울어 가는 나라를 되살리기는 힘들었다. 경순왕은 무고한 백
성들이 힘들어하는 것을 막고자 신하들과 큰아들 마의태자의 반대를 무릅쓰고 고려 왕건에게 평화적으로 나라를 넘겨주었다.
그 후에 경순왕은 왕건의 딸 낙랑공주를 아내로 맞아 정승공에 봉해졌으며, 경주를 식읍(食邑)으로 받아 최초의 사심관
(事審官)으로 임명되었다. 경순왕이 고려 경종 3년(978)에 개성에서 세상을 떠나자, 능이 마련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오
랜 세월 동안 잊혀 오다 조선 영조 23년(1747)에 다시 찾게 되어 조선시대 전형적인 묘소의 격식으로 재정비되었다. 전하
는 바로는 운구 행렬이 경주로 가기 위해 이곳 임진강 고랑포에 이르렀을 때, 고려 왕실에서 "왕능은 개경 100리밖에 쓸 수
없다"라는 이유로 막았다고 한다.
이는 후삼국을 통일하고 왕권을 확립해 가던 고려가 경주에서 치러질 장례로 자칫 민심이 동요할 가능성을 염려했던 것으
로 보인다. 따라서 경순왕능은 왕능으로서 곡장(曲墻)을 두르는 격식은 갖추었지만, 이곳 고랑포 북쪽 언덕에 자리 잡아 신
라 왕능 가운데 경주 지역을 벗어나 있는 유일한 능이 되었다.
* 식읍 : 나라에서 공신이나 왕족에게 지급한 일정한 지역
* 사심관 : 서울에 있으면서 고향의 일에 관여하던 관직
* 곡장 : 능, 원, 묘 따위의 무덤 뒤에 둘러쌓은 나지막한 담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 산 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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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에 따르면 삼국시대는 임진강을 대수 또는 七重河[칠중하]라 하였고, 경기도에 고구려 七重縣[칠중현]의 治所[치소]
인 파주 칠중성[城]이 있었다. 그래서 이었을까, 臨津江[임진강]은 예부터 한강 유역과 패서[황해도] 지역 간의 자연 경계
의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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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원삼국시대에는 마한 세력과 한사군의 경계선으로 추정 중이며 4세기~5세기 무렵에는 백제와
고구려, 6~7세기에는 신라와 고구려의 대치선이었고 통일신라 시대에도 임진강을 경계로 한주와 패강진을 분리해 대치하
였다. 이후에도 임진왜란이나 6.25 전쟁의 주요 전장이었으며 오늘날 군사분계선도 臨津江[임진강] 근교를 지난다. 이는
38선 근처에 위치해 있으면서 방어 상으로 유리한 지형이라는 점 때문이었을 것이라 推論[추론]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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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5년 12월(양력 936년 1월), 고려 태조에게 항복한 후 경순왕은 '정승'에 임명되고, 지위는 고려의 태자보다 높여졌으
며, 녹봉으로 쌀 1,000석을 받고 신란궁(神鸞宮)을 하사받았다. 또한 고려는 신라국을 폐지하여 경주(慶州)라 하고, 경주
지역을 식읍으로 주면서 경순왕을 경주의 사심관에 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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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한반도 역사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임진강! 이러한 과거의 역사를 되돌려 오늘 유랑자는 임진강 고랑포 주변에 있
는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능을 찾았다. 주차장에 주차하고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인 짧은 오르막길을 지나면 외롭게
자리한 경순왕릉을 만난다. 오르막길 주변에는 철책선이 2m 이상 높이로 쳐져 있으며 지뢰가 있다는 섬뜩한 표식도 보인
다. 경순왕릉 주변의 숲은 군사지역이라 출입이 통제되며 바로 앞이 민통선이다. 삼엄한 경계가 느껴질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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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자가 제천 여행기에서 덕주사와 미륵리 석불입상 등에서 잠시 이야기했었던 그 경순왕 아들 마의태자와 덕주공주의
哀切[애절]하고도 애틋했던 이야기는 이제 그들의 아버지였던 敬順王[경순왕, 재위 기간. 927년 음력 11월~936년 1월
13일(8년 2개월)]의 마지막 이야기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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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순왕릉... 사적 제244호(지정일: 1975.06.25.)
소재지 :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 산18-2호
경순왕(敬順王, 927~935 재위)은 신라의 마지막 왕으로 성은 김(金), 휘는 부(傅)이며 제46대 문성왕(文聖王)의 후손이
다. 경순왕이 경애왕(景哀王)의 뒤를 이어 즉위할 당시에는 국력이 쇠퇴하였다. 각처에서 군웅(群雄)이 할거(割據)하였는
데, 특히 후백제 견훤(甄萱)의 침략으로 영토는 날로 줄어들고 있었다. 대세(大勢)가 고려로 기울어지자, 경순왕은 무고한
백성들이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막고자 고려 왕건(王建)에게 평화적으로 나라를 넘겨준 후 왕위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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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순왕이 경종(景宗) 3년에 개경(지금의 개성)에서 세상을 떠나자, 이곳에 능이 마련되었으나 그 후 오랜 세월 동안 실전
(失傳)되었다가 조선시대 영조(英祖) 23년(1747)에 다시 찾게 되었다. 경순왕능은 조선시대 전형적인 묘소의 격식으로
재정비되어 능표(陵表), 양석(羊石), 장명등(長明燈), 망주석(望柱石) 등이 이때 마련되었다.
전하는 바로는 경순왕의 운구(運柩) 행렬이 경주로 가기 위해 이곳 임진강 고랑포에 이르렀을 때, 고려 왕실에서 경주 지
역의 민심을 우려하여 “왕릉은 개경 100리밖에 쓸 수 없다.”하는 이유로 운구 행렬을 막았다고 한다.
결국 경순왕능이 이곳 고랑포 북쪽 언덕에 자리 잡게 됨에 따라 신라왕능 가운데 경주 지역을 벗어나 있는 유일한 능이 되
었다. - 이상은 경순왕릉 안내 표지에서 옮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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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순왕의 최종 지위는 "추충신의숭덕수절공신(推忠愼義崇德守節功臣) 상보(尙父) 도성령(都省令) 상주국(上柱國)
낙랑군왕(樂浪郡王) 식읍 10,000호"가 되었다. 978년 음력 4월 사망했으며, 시호를 '경순'(敬順) 또는 '효애'(孝哀)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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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순왕은 신라의 마지막 국왕으로, 고려의 왕건에게 항복한 후 경주를 떠나서 개경으로 끌려가 살아야만 했던 기구한 운명
에 처했던 비운의 경순왕!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어서까지도 신라왕능 중 유일하게 경주시 바깥에 묻혔던 인물이다.
즉, 다른 신라왕능은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지만 경순왕만 유일하게 경기도 연천군에 있다.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임진왜란
등 전란의 여파로 사람들의 기억에 잊혀져 失傳[실전]되었다가, 1747년(영조 23년) 때 후손들에 의해 발견되어 석물 등을
정비하고 관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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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전쟁 전 1949년 김구가 참배를 하기도 했으나 6.25 전쟁을 거치며 잠시 세간의 관심에서 잊혀 졌다가 1970년대 군
사분계선을 시찰하던 육군 장교에 의해 다시 발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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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비(神道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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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순왕릉비(敬順王陵 碑)
이 비는 경순왕릉 신도비로 전해오고 있으나 언제 누구에 의해 건립되었는지 정확히 알려진 것이 없으며, 또한 비문의 내
용도 자연 풍화 등으로 많이 훼손되어 거의 알아볼 수 없다. 다만 조선 영조 24년 (1748년)에 후손 김빈과 김굉등이 경순
왕능 인근의 민가에서 비문의 내용이 다음과 같은 [경순왕(敬順王), 김(金), 십월여친지국(十月與친親至國), 경순왕이 10
월에 고려에 순국하러 왔다는 의미임] 십 여자 정도 남아 있는 비를 발견하여, 이 비가 경순왕릉 신도비일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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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비는 임진왜란 이후 경순왕릉의 관리가 소홀해 지면서 왕릉과 함께 방치되면서 실전되었다. 1973년 경순왕릉이 재
발견되면서 경주김씨 중앙종친회의 노력으로 이듬해 고랑포마을 내에 방치되어 오던 비를 발견하고, 이를 고랑포 초등학
교에 가져다 놓았다가 1987년에 현재의 위치에 비각을 짓고 옮겨 세웠다. 비는 회백색의 화강암으로 귀부에 박혔던 부분
이 떨어져 나간 것으로 보이며, 현재 십 여자의 명문이 남아 있다. 규모는 너비 67cm, 두께 15~18cm, 높이 132cm이며
비신 윗부분 16cm 부분에서 모 죽임 하였다. - 이상은 경순왕능 안내 표지에서 옮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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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신라 마지막 왕이 고향은커녕 生面不知[생면부지]의 地[땅]에 묻힐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런데 경순왕은 왜 이곳
에 묻혔을까? 사람이 태어나서 성장하고 죽듯 한 시대를 풍미했던 국가 또한 어느 순간 그 역사를 다하게 된다. 삼국시대
의 마지막 패자였던 통일신라 역시 예외는 될 수 없었다. 천년의 영광을 누렸던 통일신라는 경순왕 때 멸망의 길을 걷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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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순왕은 통일신라의 56대 임금이다. 신라의 왕능 중에서 유일하게 경주시 밖에 자리 잡고 있다. 왕능이라 하기에는 규모
가 작은데 거기에도 사연이 있다. 현재의 왕능은 1747년에 경순왕의 후손들이 왕능 주변에서 묘지석을 발견하면서 새로
정비한 것이다. 재정비 당시 왕에 대한 예우를 갖추어 조성한 것이 아니라 사대부 묘의 격식을 따라 꾸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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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명등(長明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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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석 전면에는 신라경순왕지능(新羅敬順王之陵)이라는 7자가 표에 기록되어 있고, 후면에는 다음과 같이 5행의 글자
가 새겨져 있다.
王新羅第五十六王後唐天成二年戊子代景哀王
而立清泰乙未遜國于高麗宋太平興國戊寅麗景
宗三年四月四日薨謚敬順以王禮葬干長湍古府
南八里癸坐之原
至行純德英毅烈聖上二十三年丁卯月日改立
왕(경순왕)은 신라 제56대 왕이다. 후당 천성 2년 무자(928년)에 경애왕의 대를 이어 왕이 되었고, 청태 을미(935년)에는
고려에 나라를 넘겼다. 송나라가 태평하고 나라가 번성하던 경종 3년(978년) 4월 4일에 세상을 떠났다. 시호는 경순이며
왕의 예로 장단 남쪽 고부 8리 계좌 언덕에 장사 지냈다. 지행순덕영모의열(영조의 존호) 성상 23년 정묘(1747년) 월일에
다시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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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등으로 실전되었다가 영조 23년(1747)에 후손에 의해 발견되었으나,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을 거치면서
또다시 실전된 것을 1973년 이곳을 방어하던 육군 장교에 의해 발견되어, 수차례의 정비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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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순왕의 시호는 敬順[경순]이다. 이는 '공손하게 敬順[따른]' 왕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그는 천수를 다하며 살았다. 비록
볼모로 끌려가긴 했으나 고려 태조 왕건보다 35년을 더 살았던 경순왕은 서기 978년 개경에서 죽었다. 신라의 왕인 경순
왕능이 왜 연천 지역에 있는지가 궁금했다. 여기에는 슬픈 사연이 있다.
신라의 마지막 왕인 敬順[경순]이 죽자 패망한 국가의 왕이 겪었을 굴종의 삶을 본 신라의 유민들은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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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순왕은 세상을 뜨면서 首丘初心[수구초심]이라 했던가, 과거 살던 경주로 가고자 했다. 신라 유민들은 곡을하며 남쪽으
로 가는 경순왕의 상여를 따라붙었다. 남으로 향한 장례 행렬이 임진강을 건너기 위해 바로 이곳 연천의 고랑포에 이르렀
을 때쯤엔 그 인원수는 수만 명에 이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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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 경순왕 지릉(新羅敬順王之陵) 조감도
1. 곡장 능을 보호하기 위해 능 주위로 동서북 세면을 둘러쌓은 담장
2. 상(上)왕의 무덤으로 봉분, 산소, 분상이라고도 함
3. 호석(石) 능상 주위를 두른 것으로 사대석 또는 병풍석이라고도 하며 봉분 침하와 해충 침입을 막기도 함
4. 장명등(長明燈) 일반적으로 돌아가신 이의 명복을 빌기 위해 무덤 앞에 세움: 이는 주인의 명복을 빌고 귀신이나 잡귀
를 물리치는 벽사의 역할을 함
5. 석양
6.망주석 먼 그곳에서 능을 쉽게 알 수 있도록 하는 표지로서 영혼이 자기의 유택(능)을 찾아오게 하는 안내 역할을 함
7. 혼유석(魂遊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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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역대 임금 중에서는 조선 후기의 영조와 더불어 대단히 장수했다. 비록 신라 국왕으로서의 재위 기간은 8년에 불
과하나 고려 제후로서는 42년 4개월 5일 동안 봉임 되었으며, 897년 태어난 고려 제56대 왕으로 978년 5월 18일 향년
81세로 사망해 천수를 모두 누렸다. [재위 기간 927년 음력 11월 ~ 936년 1월 13일 (8년 2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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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왕족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장례 행렬 인원이 혹시 폭동이라도 일으킬까? 두려웠고 이를 막기 위해 ‘왕족의
시신은 도성 밖 100리를 벗어나면 안 된다’라는 규정을 내세워 이곳 연천 임진강에서 멈추게 하자 결국 임진강을 건너지
못하고 임진강 고랑포 북쪽 면 성거산에 묻을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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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시간이 흘러 조선은 개성에서 임진강을 건너 한양으로 도읍을 옮겼다. 고려 왕건의 후손들이 고려의 왕들을 모신
숭의전도 임진강을 넘지 못하고 북안에 있는 이유이다. 아무튼 오늘날 경순왕능은 고랑포 나루터 뒤편의 남방한계선과 인
접한 나지막한 성거산 정상부 쪽에 단독으로 자리하고 있으며, 왕능의 전체적인 형태는 조선 후기 사대부 묘소의 전형적인
격식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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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능은 신라 임금의 무덤 가운데 경주 지역을 벗어나 경기도에 있는 유일한 신라에 왕능(王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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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불상 관련 설화에선 경순왕의 딸이나 마의태자도 자주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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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순왕은 민간에서 자주 '신'으로 모셔지는 왕 중 한 명이다. 그 이유는 그가 고려의 태조에게 항복한 것이 괜히 저항했
다가 백성들에게 유혈사태가 일어나게 하는 것보다 백성들을 다치지 않게 하려는 자비심에서 우러나왔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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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순왕 능은 높이 3m 지름 7m에 둥글게 흙을 쌓아 올린 원형 封土墳[봉토분]으로 板石[판석]을 이용해 둘레돌을 돌렸으
며, 고려시대 왕능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곡장이 둘려져 있고, 岡[강]이 조성되어 있을 뿐 주변의 석물들은 모두 조선 영조
때 만든 것이라고 한다. 능 앞에 혼유석이 놓여있고 ‘新羅敬順王之陵[신라경순왕지릉]’이라고 새긴 묘비가 세워져 있으며,
뒷면에 있는 비문의 내용에 의하여 경순왕의 무덤임이 확인되었으며 1747년(영조 23년)에 이 비를 세운 것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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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경순왕릉은 조선 후기의 양식으로 재정비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으며, 1975년 6월에 대한민국 사적 제244호 '신
라 경순왕릉'으로 지정되었다가 2011년 7월에 '漣川 敬順王陵[연천경순왕릉]'으로 명칭이 변경되어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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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국의 왕이라는 한을 품고 있다는 그것 자체가 무속적으로, 신으로 섬겨지기 좋은 요소 중 하나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까지도 각지에 경순왕을 모시는 사당이 많이 남아 있었으며, 경상도와 충북 일대, 경기도 일부 지역에 경순왕 사당이 많았
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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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순왕능 찾아가기
*주 소: 경기 연천군 장남면 장남로 288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 산18-2호
*문의처: 031-835-2002(역사 공원)
*주 차: 주차장 있씀
*애 견: 동반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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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 관광은 이곳에서 : https://www.yeoncheon.go.kr/tour/index.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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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전화 : (031) 839 - 2114(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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