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이 우리 부부가 결혼한 지 53년 되는 날이었다.
제천단양뉴스에 '53회 결혼기념일'이란 주제로 글을 한자락 올리겠다고 남편에게 얘기하니,
근사한 이벤트를 해야겠다며, 가고 싶은 여행지를 선택하라는 숙제를 내주었다.
설레는 맘으로 인터넷에 들어가 이곳저곳 검색을 해봤는데,
아무리 찾아도 별로 마땅한 곳이 없다.
거금을 투자해서 여행을 떠나기에는 계절적으로 아니다 싶다.
꽃피는 봄도 아니고 신록이 우거진 여름도 아니고 단풍이 곱게 물든 가을도 아니고
어정쩡한 계절에 산야는 수묵화 같은 나목들과 쓸쓸한 풍경뿐.
어디를 간들 그렇게 좋을 것 같지는 않다.
동해바다도 생각해보고 가까운 평창이나 이천에 가서 스파나 즐기다가올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그것도 별로 내키질 않는다.
아침부터 가족 단톡 방에는 분주하게 알람이 울린다.
딸, 사위들이 분위기 있는 멋진 곳에서 식사하고 데이트 잘하라는 축하 메시지를 보낸다.
여행은 좀 더 날이 풀리면 다녀오기로 하고, 오늘은 그냥 분위기 좋은데 가서,
밥먹고 영화관에 가서 영화 한편 보기로 했다.
메뉴는 우리가 좋아하는 생선회로 선택!
그런데 극장에서 영화 본 게 언제인지.. 오랜만에 영화를 보려고 들뜬 마음에
개봉한 영화가 뭐가 있나 찾아보니, 인기영화가 없다.
끌리는 영화도 없어서, 그럼 회 먹고 멋진 카페에 가서 차나 한 잔 마시자며
결혼 53주년 기념 데이트에 나섰다.
그런데 제천에서 횟집 찾기가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세군데를 갔는데,
영업을 하지않는다. 우리나라 경제 불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피부로 느끼는 순간이었다.
겨우 네 번째 집을 찾아 영업을 한다는 반가운 소식에 달려갔다.
이미 배는 고플데로 고프고, 살짝 짜증도 난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우리를 받아주는 횟집이 있었으니,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기분 전환해,
정식으로 주문했다.
음식은 코스로 여러 가지 음식들이 바닷가에 가서 먹는 것보다 훨씬 푸짐하고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횟집 찾느라 에너지를 모두 소진해서인지 카페고 뭐고 귀찮아지는 걸 보니
우리도 많이 늙긴 늙었나 보다.
문득 서울 살 때 잊지 못할 결혼기념일이 생각났다.
반찬 집에 취직해서 온갖 구박을 받으며 고생하며 일할 때였는데,
결혼 기념일에 남편이 꽃바구니와 와인, 케이크를 보내온 것이다.
시골 살 때는 꽃바구니 하나 받아본 적이 없는데, 이건 완전 감동의 도가니!
꽃바구니속 카드에 이런 글도 있었다.
"가족을 위해 고생하는 당신에게 너무 미안하고 고맙다. 사랑한다."
감격해서 펑펑 울었다.
그 이후 남편은 매년 결혼기념일 때 꽃바구니와 때론 목걸이 선물을 퀵으로 보내왔지만
몇 년을 받고 나니 그것도 식상해졌다.
며칠 보지 못하고 시들어 버리는 꽃이 너무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실용성이 떨어지는 꽃바구니는 이제 절대 하지 말라고 부탁한 뒤
내 인생에 꽃바구니 선물은 끝났다.(이제와서 조금 후회)
그렇게 53번째 결혼기념일이 지났다.
막상 외식 한번 하는 걸로 결혼기념일 이밴트가 끝이나니 또 허전한 마음이 든다.
여자들은 남편이 마음 써주는 소소한 작은 것 하나에도 이렇게 감동하고 눈물짓는다.
살아가면서 아내의 생일과 결혼기념일 이벤트를 남편이 챙기는 것은
가정의 행복을 위해서는 필수라는 생각을 해본다.
우리 나이 정도 되면 결혼기념일은 그냥 잊고 지나치는 부부들도 많다는데,
그래도 53년 동안 (정확하게는 6년 전 남편이 암 선고 받고, 입원하는 바람에 그냥 지나친 결혼기념일을 빼고)
빠짐없이 결혼기념일 행사(?)를 해준 남편이 정말 고맙다. 그리고 사랑한다.
(질투의 화신만 아니면 최고의 남편인데 말이다.ㅎㅎㅎ)
첫댓글 축하합니다.
우리는 새로 시작하는 날을 상당히 깊은 의미로 생각하면서 살고 있지요.
삶을 시작하는 생일이 그렇고, 사랑하는 임을 만난 첫날을 결혼 기념일로 오래 기억하는 것도 그렇고, 학교 입학, 취업 입사 등등........
늘 오늘 같이 날마다 새로운 날이 되시고 좋은 날 되세요.
오랜만에 들어오셔서 많이 반갑습니다.
이슬기님의 축하 고맙습니다.
작사에 정진하시는 이슬기님의
노래가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져 빛을 발하시기를 바랍니다
말이 씨가 된다던데.......
덕은님을 자꾸 질투의 화신 어쩌구 하시면
남들이 진짜 질투의 화신인줄 착각할수도 있습니다~~
물론 웃자고 하시는 말씀인줄 잘알지만요~~
평생을 살아오면서 느낀 건데
질투의 화신 맞아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