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여행21 - 걸어서 에도시대에 만들어진 니혼바시(일본교) 다리를 찾아가다!
11월 8일 도쿄역 동쪽 에 있는 도요코인 호텔에서 일어나 아침을 먹고는 호텔
을 나와 북쪽으로 걸어서 니혼바시(日本橋 일본교) 다리를 찾아 갑니다.
시내지도를 들고 빌딩 숲을 헤치고 북쪽으로 가다가 다시 서쪽으로 10분을 걸어 니혼바시
(日本橋 일본교) 에 도착했는데...... 머릿속에서 상상하던 오래된 일본 전통
양식의 고풍스러운 다리가 아니라 현대적인 철근 콘크리트 다리 인게 좀 실망스럽습니다.
니혼바시(日本橋 일본교) 는 17세기에 건축되어 도쿄도 주오구 니혼바시를 가로
지르는 왕복 5차로의 다리라고 하는데, 현재 이 이 일대는 금융가가 된지라
일본은행 본점과 도쿄증권거래소 가 있을 정도 일본 금융가의 중심지라고 합니다.
1600년에 동서 20만 대군이 격돌한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을 무찌르고 승리해
3년 후인 1603년 에도 막부 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 에 의해 만들어 졌으니
교토로 가는 도카이도(동해도) 등 5개 도로인 고카이도의 기점 으로 삼았습니다.
스페인의 도로원표는 푸에르타 델 솔 Puerta del Sol(태양의 문) 에 있고 우리나라의 도로원표는 광화문
앞에 있듯 도쿄의 국도 도로 원표 가 이 곳에 있으며 아시안 하이웨이 1호선의 기점 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보는 이 니혼바시(日本橋 일본교) 는 옛날 다리가 아니라 1903년에
지어진 콘크리트 및 벽돌 다리로 1603년 이래 무려 20대 째에 이른다고 하는데....
다리에 적힌 글씨는 에도 막부의 마지막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 가 썼다고 합니다.
1964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수도 고속도로 도심환상선을 니혼바시 바로 위에 지으면서 다리 위를 고가도로
가 가리고 있으니 이 고가도로를 지하로 이설하자는 계획이 있지만 공사 비용이 너무 높아 진척이
더디며 니혼바시와 한자 이름이 동일한 장소가 오사카시에도 있지만 발음은 닛폰바시 로 읽는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보는 니혼바시 (日本橋 일본교)는 1603년에 처음 건설된 후 스무번째 다리라는 뜻인데
인터넷에서 “일본교” 를 검색하니..... 이게 뭐야? 먼저 주루룩 뜨는게 도쿄가 아닌
베트남 중부 후에 근처 도시인 호이안의 일본교 다리 들이 나오는지라 그만 쓴웃음을 짓게 합니다?
일본인들은 과거 해적 으로 고려와 조선 그리고 명나라 해안을 약탈한 것으로 악명을 떨쳤는데....
이후에 조선은 부산등 3포를 열어 쌀 을 주고 또 왜인들이 부산 등지에 거주 하면서
무역을 하도록 허가하자 대폭 줄어들었고 이후 에도막부에 통신사가 오고가면서 근절 되었습니다.
중국과는 영파 에 일본 선박에 대해 무역을 허가하면서 해적이 사라졌고, 일본상인들은 임진왜란
이전에 베트남의 호이안, 태국의 야유타야, 말레이시아의 말래카 등 동남아 각지에 일본인
촌을 건설하고 상주하며 무역을 했는데 저 호이안의 일본교 는 그때 일본인촌의 흔적 인가 합니다.
그러니까 베트남 호이안의 일본교 는 1600년경 호이안 시내와 일본인촌을 연결한 다리 로
다리 입구에 개와 원숭이 가 그려져 있으며, 다리 내부 사원은 항해의 안전을 위해
바다와 바람의 신에게 제사 를 드리던 곳으로 다리는 베트남 2만동 화폐에도 새겨져 있습니다.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온 것은 1844년 김대건 신부 때로 보고 일본은 1549년 프란시스 자비에르 가 규슈
가고시마에 상륙한 때로 보면 300년 가까이 늦는데.... 조선은 500년간 쇄국 정책으로 단 한척의
무역선도 바다에 띄우지 못했고, 단 한명의 상인도 개인이 스스로 자유롭게 해외로 나가지 못했습니다.
일본 상인들은 임진왜란 이전 부터 동남아에 일본인촌 을 건설하고 상주하며 무역했는데..... 저 예수회의
프란시스 자비에르 는 인도 고아에서 말레이시아 말래카로 건너와 일본 사무라이 출신 상인 안지로 와
동생 요한네스및 안토니오를 개종시켜 이들의 안내로 배를 타고 일본 에 와서 기독교를 전도했던 것입니다.
이후 다이묘들까지 기리시탄(크리스챤) 이 되니 고니시 유키나가는 세례명이 아우구스티노 로 아버지는
요나단, 어머니는 막달라, 처는 쥬스타이고 대마도(對馬島) 도주 소 요시토시(宗義智) 의 부인이 된
딸은 마리아였으니..... 임진왜란 선봉으로 십자가 군기 를 앞세우고 조선을 침공할 때, 군대 대부분이
모두 기독교도 로 세스페데스 신부 는 1593년 12월 27일 진해 웅천 왜성(倭城) 에서 미사 를 집전했습니다.
현재 도쿄의 일본교는 철근 콘크리트 다리 인데다가 그 위에 고가도로 마저 지나가니 볼게
없는데.... 에도시대의 니혼바시 에 대해서는 우타가와 히로시게 (歌川広重) 가
그린 "동해도53(東海道五十三) 역참“ 의 첫 번째 그림인 니혼바시 아침풍경 이 있습니다.
히로시게가 그린 "동해도 53(東海道五十三) 역참“ 의 두 번째 그림은 시나가와 일출 이고 세번째는
가와사키 나룻배 이며 12번째가 미시마 아침안개 그리고 35번째가 도요하시 강변 풍경인
”요시다, 토요강 위의 다리” 인데, 옛날에 도요하시에서 1박 하면서 저 다리를 구경한게 떠오릅니다.
우타가와 히로시게가 그린 도카이도(東海道 동해도) 53 역참 그림 을 일본에서는 채색 목판화 우키요에 라고
하는데.... 우키요에(浮世繪(부세회) 란 일본의 무로마치 시대 부터 에도시대 말기(14~19세기) 까지 서민
생활을 기조로 하여 제작된 회화로 주로 목판화(木版畵) 를 뜻하며 내용은 대부분 풍속화인데 고유명사 입니다.
1603년 에도 도쿠가와 막부가 설립되면서 일본이 통일되니 센고쿠(戰國 전국)시대를 지나 평화가 정착되면서
신흥세력인 무사, 벼락부자, 상인, 일반 대중 등을 배경으로 한 왕성한 사회풍속· 인간묘사 등을 주제로
삼았으며 18세기 중엽부터 말기에 성행해 스즈키 하루노부와 우타가와 도요하루 등 천재화가를 배출했습니다.
우키요에의 “우키요” 라는 말은 중세에 서민들이 전란에 휘말려 빈곤이 극에 달하고
생활이 비참했을때 불교의 염세적인 사상의 영향으로 "현세는 우키요(憂き世) 로
무상의 세계" 라 생각되니 내세의 극락정토 로 가는 것이 사람들의 바람이었다고 합니다.
해서 우키요(憂き世) 는 덧없는 세상, 속세 를 뜻하는 말로 미인, 기녀, 광대 등 풍속 을
중심 제재로 하는데.... 목판화 를 주된 형식으로 대량 생산하여 서민의 수요 를
충당했으며 17세기 히시카와 모로노부는 소설 삽화 에 판화 고유의 아름다움을 표현합니다.
우키요에 그림의 최고봉은 본명이 안도 히로시게인 우타가와 히로시게 이지만 그 외에도 "후지산
(富嶽) 36경" 을 그린...... 가쓰시카 호쿠사이 葛飽北齊 도 한국인들이 좋아할만한 화가 입니다.
우키요에 는 점차 삽화에서 목판화로 독립 하면서 붉은색의 간결한 채색과 역동적인
탄에(丹繪), 검정색에 광채의 금속분을 첨가한 우루시에 (漆繪), 그리고 붉은색과
녹색을 주조색 으로 하는 목판 채색의 베니주리에 (紅摺繪) 등으로 발전해 갔습니다.
1765년 스즈키 하루노부 가 다색 목판화인 니시키에(錦繪) 기법을 개발한후 우키요에
의 판화 기법은 정점에 달했으니 목판에 의한 명쾌한 색면 배치와 조각도의
생생한 각선의 표현 은 일본의 미니어처라고 불릴 만한 독특한 미적 형식을 개척합니다.
일본 우키요에 그림이 유럽에 알려져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 들이 열광하게 된 것은 규슈 이마리
에서 도자기를 유럽에 수출 하면서 포장지로 목판화인 우키요에 종이 를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안휘성 징더전(경덕진) 에서 생산된 중국 도자기가 유럽에 수출되던 중 청나라가 침입하여 중국
이 혼란에 빠지자 네델란드는 규슈 사가현 아리타 에서 생산된 도자기를 택하는데.....
이는 임진왜란 때 끌려온 이삼평등 조선도공이 일본화한 채색도자기 생산에 성공했기 때문입니다.
17~18세기에 규슈 아리타 북부 이마리항에서 무려 1,000만개의 도자기 가 유럽 으로 건너가서는
은접시와 나무그릇 밖에 모르던 당대의 유럽인들을 매료 시켰던 것인데...... 유럽인들이
모방하여 유럽 도자기 를 생산할 때 까지 유럽에 일본 예술품의 명성 을 드높였던 것이었습니다!
1865년 프랑스 화가 브라크몽 이 일본에서 보내져온 도자기의 포장지로 사용된 호쿠사이의
민화 한 조각 을 발견하고는 마네, 드가 등 친구에게 돌린게 유럽 인상파 탄생
의 발단 이 되었으니 자포니즘(Japonism: 일본 미술붐) 이 유럽에 빠르게 퍼지기 시작합니다.
또한 1867년 파리 박람회 에 도자기 와 함께 출품 된 이래 높이 평가되기도 했지만 우키요에
는 정작 일본내에서는 고작 회고 취미의 애완물 에 지나지 않았으니 미술사적
으로도 “에도 하층계급의 미술” 로 무시되었다가..... 2차 대전후 뒤늦게 빛을 보게 됩니다!
우키요에 그림 을 본 인상파 화가 들은 신선한 자극을 받았으니 고흐 가 우키요에
작품을 수집하고 따라 그렸다고 하는데..... 무려 477점 이나 된다고
하니 우키요에의 강한 색감 이 인상파 화가들에게는 색다른 느낌 이었나 봅니다.
인상파 화가들이 지향하였던 자연을 있는 그대로 그리겠다는 자세나 빛으로 충만한 화면,
순간의 표정 을 놓치지 않는 방법 등 '우키요에' 로 부터 배운 부분이 적지 않다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우키요에' 는 서양의 예술가들에게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인간상과 자연
에 대한 자유로운 해석 등의 테마를 제시하여 주었고, "일상생활 중에
미" 가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으니...... 일본 미술이 유럽에 끼친 영향을 알만합니다.
인상파 화가 중에 고흐는 자기 방을 우키요에 그림 으로 장식 했으며 귀를 자른후 그린
“자화상에도 배경은 우키요에 그림" 이 덮고 있는등 수백편에 이른다고 하네요?
모네 는 부인 카미유 를 모델로 “일본옷을 입은 여인” 을 그렸으며 또 안도 히로시게
가 그린 우키요에 그림 “오하시 아타케의 소나기” 를 모방해서는
“ Bridge in the Rain" 을 그리는 등...... 그 수가 무려 수십편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외에도 프랑스에서는 드가, 마네, 고갱 등 수십명의 인상파 화가들이 우키요에 그림에 열광 했던 것이니
당시 프랑스는 “일본 도자기와 우키요에 그림으로 자포니즘” 광풍에 휩싸였던 것이니....
마치 오늘날 "한류(韓流)" 가 일본과 중국에 동남아를 넘어 미국과 유럽을 휩쓸고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몇년 전에 파리 생 라자르역에서 기차로 모네를 만나러 서쪽으로 달려서 베르농 지베르니역 에 내리니 기차역
에서 부터 우키요에 그림 이 서너점이나 보이고 강을 건너 지베르니에 가니 끌로드 모네 거리의 모네의집
에서는 무려 100여점을 만났고 근처 인상파화가 미술관 에서도 50여점이 넘는 우키요에 그림 들을 보았습니다.
일본교 를 뒤로 하고 다시 걸어서 호텔로 돌아와서는 체크아웃을 하고 배낭을 메고 나와 걸어서
도쿄역 으로 가는데.... 이제 기차 대신에 리무진 버스를 타고 나리타 공항 으로 가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