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조선과 한ㆍ일관계사 등 우리 역사를 우선 정립하지 못한 상황아래서 '한ㆍ일 역사 공동연구'라는 것은 위험한 일이며 일본에 끌려다닐 소지가 있다고 본다. 특히 한ㆍ중ㆍ일 3국이 '역사'를 공동으로 연구하게 되면 우리만 고립하게 된다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역사를 정립한 후에는 역사를 공동으로 연구하자고 우리가 적극 나설 필요성도 있다. 우리 '문화'는 흔히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고는 하나 중국과는 크게 구별되는 문화를 가지고 있다. 동양문화권에 속하면서도 독창적 경지를 개척한 것이 우리문화이다. 그러나 왜곡된 '역사' 교육을 받은 우리 국민이나, 특히 전세계인들은 이를 잘 알지 못하고 있다. 광복이 된지 54년이 지나도록 '단군조선'과 '한ㆍ일관계사'를 바로잡지 못한 것은 중국이나 일본에 책임을 돌릴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일제의 '한국사' 왜곡에 참여했던 인사들과 함께 이들에게 부화뇌동하여 스스로 우리 '역사'를 왜곡하고, 우리 '문화'를 비하한 바로 우리 자신들의 책임이다. '사료'부족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제가 '취사선택'하여 남겨 놓은 사료만을 들먹이면서 "사료가 부족하다"는 주장만 되풀이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과거 일본이 가져간 수많은 사료 등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사료들을 모으려는 노력도 미흡했고, 외국 각국의 교과서에서 우리 '역사'가 심각하게 왜곡 서술돼 있거나 잘못 기술되어 있는데도 이런 왜곡실태가 현재까지도 개선되지 않고 그대로 방치된 실정이다. 일본 왕실도서관에는 일제강점기 때 약탈해 간 '단군조선'관련 사서 등 고문서가 많을 것이라고 본다. 2002년 월드컵 한ㆍ일공동개최를 계기로 일본 왕실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하는 우리 민족사 관련 수탈자료를 반환해오기 위한 작업에 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과연 일본은 한국에서 약탈해 간 '단군조선'관련 사서 등에 대한 목록을 작성해 놓았을까. 사단법인 한배달에서 발행한 계간지 ≪한배달≫40호(1998년 겨울호) p.70∼p.74에 보면 일제강점기 때 일본 왕실문고(왕실도서관)에서 도서분류 및 내용분석 업무를 담당했던 박창화(朴昌和; 1889∼1962) 씨와 관련된 글이 실려있다. 충북 청원군 강외면 연제리가 고향인 역사가 박창화 씨는 1900년 초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그 학교에서 교관을 지냈다. 그는 그 뒤 충북 영동(永同) 소학교, 배재고보에서 교사로 근무했다. 일본 궁내청 소료부(書陵部:일명 왕실도서관)에서 1933년부터 12년동안 조선전고(朝鮮典故) 조사사무 촉탁으로 근무했던 그는 이곳에서 일제가 한국에서 약탈해 간 '단군'관련 사서 등을 보았다고 그 뒤 청주사범학교 교장이었던 최기철(崔基哲; 1910∼) 서울대 명예교수(담수생물학연구소장)에게 이를 '증언'했다고 한다. 『본란에서는 (사)한배달 최봉열 원로회 회장, 한애삼 부회장 등이 1998년 10월 최기철 서울대 명예교수를 탐방하고 녹취한 내용을 요약 정리해 본다. |
박창화와의 만남 본건의 제보자인 최기철 박사는 1945년 청주사범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며 처음 박창화를 만난다. 박창화는 왕실문고에서 우리 상고사 관련 사서를 분류하고 내용을 파악하는 일을 직접 담당하였다. 당시의 박창화는 일본 왕실문고에서 일하던 중 자전거를 타다가 둑에서 넘어져 크게 다쳤고, 요양차 잠시 고향에 돌아왔다가 광복을 맞아 고향에 머물게 되었으며 청주사범학교 교장이던 최기철 박사를 찾아와 자주 이야기를 나누던 터였다. 그는 자신이 원래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교사였으며, 나라가 어려워지자 학교에서 아이들만 가르칠 수 없다는 생각에 만주로 떠나 독립항쟁을 하다 중국 안동에서 일본관헌에게 잡히게 되었다는 것. 거기서 독립항쟁에 대한 자신의 솔직한 신념을 밝히자 그 관헌이 박창화의 뜻을 좋게 여겨 일본 왕실문고에서 일하도록 해 주었다고 한다. 박 씨는 왕실문고 재직 당시(8ㆍ15 광복 전) 왕실문고 내 소장된 사료 대부분이 조선총독부가 조선에서 수탈해간 우리 사서임을 직접 확인했고, 한국에서 수탈해간 중요한 고대사 관련 사서들은 모두 거기에 있다고 할 만큼 많은 분량이었다고 증언했다. 수탈된 사료들을 분류하고 내용을 검토하다 보니 중요한 사료들을 모두 읽을 수밖에 없었는데 사료의 대부분이 '단군(檀君)' 관련 사료였다. 소화(昭和) 일왕의 이름 '소화'를 내각총리의 의뢰로 박창화가 지어주기도 했다는 것. 당시 그곳에서 같이 근무하던 한 일본인은 "조선의 고서는 다 가져왔기 때문에 여기 있는 것들은 조선에는 없는 것들이다"라고 자랑삼아 말하기도 했다. 청주사범학교 국사교사로 새출발 광복 직후 학교로 자주 찾아와 말동무를 하던 박창화는 최기철 박사에게 "이 학교에서 국사를 가르치고 싶다"고 요청하였고, 최기철 박사는 그의 해박한 역사지식을 인정, 청주사범학교의 국사교사로 채용하게 되었다. 박창화는 마땅한 말동무가 없어 자주 최기철 박사를 방문하였고, 자신이 왕실문고에서 보았던 책들과 일하던 내용을 말하곤 하였으나, 역사에 전문지식이 없던 최기철 박사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교사로 재직하던 박창화는 한 학기 동안 '단군'에 대해서만 강의할 정도로 단군에 관련된 많은 사실들을 알고 있었는데, 이는 왕실문고에서 일하면서 습득한 지식 때문이었다고 한다.
|
광복 직전 미국의 B-29의 폭격이 한창이자 일본정부는 '이것만은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오하리(尾張) 공작(또는 백작)집 지하실로 사서들을 옮겼는데 이때 박창화가 직접 왕실문고를 옮기는 일에 참여하였다. 그후 귀국하였기 때문에 정확한 행방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오하리의 집 지하실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거나 왕실도서관으로 다시 복귀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최기철 박사가 청주사범학교 교장(1년 재직)을 그만두고 충주사범으로 잠깐 옮겼다가 다시 서울로 옮긴 후 교수들 사이에서 박창화 문제가 대두된 적이 있었다. 당시 30세 정도의 일본사를 전공하던 김용덕 부교수(현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가 찾아와 "화랑도, 화랑정신을 알린 분이 박창화 씨라는데 그 박창화 씨를 만나보고 싶다"고 하여 박창화를 수소문한 결과 친지가 있는 괴산에서 요양하다가 별세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최기철 박사가 서울대에 재직할 당시 이병도 박사(당시 서울대 사학과 교수)에게도 일본 왕실문고에 소장된, 우리나라에서 수탈해 간 고대사 관련 사료의 존재와 이를 되찾아 와야 한다는 당위성에 대해 알렸으나 아무런 반응도 얻지 못했다. 또 1957년경 문교부 편수국장을 방문하여 박창화의 왕실문고에 관한 내용을 말해주었으나 아무 반응이 없었다고 한다.』 박창화 씨는 1950년까지 충북 괴산 국립여중고에서 근무했다. 청주에 사는 박인규 전 초등학교 교장이 박창화 씨의 손자이다. 1999년 7월 10일(토) 저녁 8시 KBS-1TV [역사스페셜]에서 "일본 왕실도서관에는 일제가 한국에서 약탈해 간 '단군'관련 사서 등이 보관되어 있었다"고 증언한, 그 왕실도서관에서 근무했던 역사가 박창화 관련 기사가 방영됐다. 다음은 박창화 관련 기사 부분이다. 『역사가 박창화는 일제강점기에 12년간 미공개된 우리나라 도서가 많은 것으로 알려진 일본 왕실도서관의 사서를 지냈다. 박창화의 고향인 충북 청원군. 그는 1889년 이곳 박씨 집성촌의 한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익힌 그는 유달리 똑똑했다고 한다. 이곳 사람들은 아직도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박창화는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 특히 강역고, 영토연구에 애정을 쏟았다. 고려 때까지 '만주'가 우리나라 영토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박창화는 1902년부터 16년까지 자신이 겪은 일들을 이력서 형식으로 남겨 놓았다. 여기에 따르면 그는 1900년에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했다. 소설가 길팔봉의 회고에 따르면 그후 박씨는 충북 영동소학교의 교사를 역임했는데 조선어, 일본어, 체조를 가르쳤다. 그는 배재고보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광복 후 청주사범학교에서 함께 근무했다는 최기철 선생(현 서울대 명예교수)을 만날 수 있었다. 당시 최기철 선생은 36살의 교장이었고 박창화는 '역사'를 가르쳤다고 한다. 최기철 선생은 (박창화 씨로부터) 주목할 만한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중국을 갔는데 국경 넘어서 안동이라는 곳에 갔데요. 그런데 일본 관헌한테 붙잡혔답니다. 독립항쟁을 한다면 야단이 나는데 정중히 대하더래요.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어 역사공부라고 했더니, 그러면 좋은 수가 있소. 우리가 역사공부를 할 수 있는 장소를 안내할테니 오시오 해서 간 곳이 왕실도서관이라고 해요." 박창화와 일본 왕실도서관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구체적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충북교육청을 찾았다. "1950년 퇴임자 이력서 철인데요. 50년도 박창화라고 돼 있네요." 1950년 퇴임자 명단에 박창화의 이름이 있었다. "이거군요. 어떻게 돼 있죠?" "최종적으로 충북 괴산 국립여중고에서 단기 4283년 의원 면직했는데요. 서기로는 1950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박창화가 왕실도서관의 사서로 근무했다는 기록이 있었다. 박창화가 1933년부터 12년 동안 일본 궁내성 즉, 왕실도서관에 있었다는 것이 확인된 것이다. 일본 왕실도서관에서 박창화의 이력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러나 왕실도서관 측에서는 박창화에 대한 기록은 보여줄 수 없다고 했다. 왕실도서관에서 박창화의 근무사실을 확인할 수 없었던 취재팀은 일본국립국회도서관에서 1930년대에서 40년대 사이에 일본 궁내성에서 근무한 직원의 명단을 발견했다. 그중 1935년 직원명부. 박창화의 이름이 보인다. 왕실도서관에서 조선의 '고서적'을 다루는 일을 했던 박창화는 당시 촉탁 즉, 특별계약직으로 월 수입은 85엔이었다. 12년간 일본 왕실도서관에서 근무했던 박창화는 광복직전 귀국했다. 광복 후 그는 정부관계자에게 왕실도서관에 중요한 책이 있는 곳을 알고 있으니 자신이 직접 찾아오겠다는 말을 자주 했다. 하지만 번번히 무시되거나 정부에서 알아서 갈테니 목록을 적어보내라는 답변만 들었을 뿐이었다. 박창화를 가정교사로 모셨던 제자 김준웅 씨는 그때 상황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왕실도서관이 아무나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12년동안 여러 제약을 받으면서 있었는데. 그것은 한국에서 강탈해간 것인데, 자기네 나름대로 책을 잘랐다고 한다. 그런식으로 자기들 책이라고 하고 있는데 가르쳐 주겠느냐, 자기(박창화 씨)는 거기 근무하면서 어느 구석 몇 층에 뭐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정부에서) 간다고 주겠느냐." 일본 왕실도서관에는 일왕의 족보는 물론 수많은 고서적들이 보관돼 있다. 일본이 가져간 조선의 중요한 '고서적'들도 이곳에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는 고서적을 비롯, 도자기, 그림, 비석, 탑, 건물 등 우리 문화재를 마구 파괴하고 약탈해 갔다. 1999년 8월 현재 문화재청 자료에 따르면 해외로 유출된 우리 문화재는 일본, 미국 등 18개국에 6만 8천 5백 20여점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특히 일본에만 3만 3천여점이 있다. 이중 대부분은 약탈품인 것으로 전문가들은 추정한다. 반환은 5%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가 돈을 주고 구입하거나 재일동포 수집가의 기증이 대부분이어서 순수 반환은 미미한 편이다. 일본정부는 진정한 한ㆍ일우호증진을 원한다면 2002년 월드컵 한ㆍ일공동개최를 계기로 일제강점기 때 약탈해간 '단군조선'관련 고서적과 우리 문화재의 목록을 공개하고 이를 반환해야 할 것이다. 정부는 교착상태에 빠져있는「외규장각 고문서」반환협상에도 적극 나서야 한다. 병인양요 때 약탈당한 고문서 3백40여권 중 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에 2백96권이 보존돼 있다고 한다. 그러나 국제법학자인 백충현 서울대 교수가 지적했듯이, 우리 권리를 포기하고 프랑스의 역사적 불법성을 정당화시키는 협상은 피해야 한다고 본다. 프랑스가 외규장각 도서를 한국에 영구임대 형식으로 전시하되 한국도 같은 가치의 우리 문화재를 프랑스에 임대해주는 등가교환은 말도 안 되는 것이다. 이태진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도 말했듯이, 프랑스군(軍)이 1866년 11월 강화도 외규장각에서 도서 340책을 약탈하고 건물과 나머지 고서를 불태운 사실은 프랑스 문서에도 기록되어 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약탈된 외규장각 문화재를 추가로 확인해야 할 것이라고 본다. 이태진, 백충현 두 교수는 1991년 서울대가 우리 정부를 통해 프랑스정부에 대해 외규장각 고문서 반환을 요청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들이다. 2002년 월드컵을 계기로 '한ㆍ일관계사', 특히 '단군조선'을 정립시킨 후 이를 세계에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각국의 교과서는 물론 우리의 '역사'에 대해 잘못된 부분이 어느 한 곳이라도 있다면 우리의 올바른 역사가 적히도록 노력해야 한다. 21세기에 한국이 일본을 추월하려면 먼저 국민의식 수준부터 높여야 하는데 특히 '역사의식'은 중요하다. 우리의 올바른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중심'을 잡지 못한다면 국가적으로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백두산'을 중심으로 동북3성을 비롯한 만주와 연해주 등 한대륙에서 터를 열고, 한대륙과 한반도를 발판으로, 그리고 일본열도에서 천하를 누비며 사자후를 토하던 우리선조의 모습이 담긴 '단군조선'과 '한ㆍ일관계사' 등 올바른 우리 역사를 바로 보게되면 우리의 과거가 그리 답답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동안 왜곡된 '역사' 교육으로 인해 우리 자신을 너무도 잘못 보아왔고, 정치ㆍ경제ㆍ사회의 불안정으로 우리 '국가'를 불신하고, 우리보다는 외국을 선호하며 살아 온 이유로 우리의 '중심'을 잡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이젠 우리 언론매체가 앞장서서 '단군조선'과 '한ㆍ일관계사' 등 올바른 우리 역사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