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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올린 최홍준님이 쓴 생생한 체험기록 방송작가 반세기가 방송작가로서의 체험기록이라면 두번째 글은 작가로서, 천주교 신도로서 천주교 평신도사도직 협의회 회장을 지내시기까지 최홍준 선생님의 전반적인 체험기록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기록을 통해서 삶의 반세기를 돌아보는 다큐멘타리 드라마를 보는것 같은 마음으로 이 글을 읽고 여기에 옮깁니다. 이 글은 방송작가 협회지 2010년 6월호눈물과 환호의 여의도광장 방송작가 반세기/ 2010년 7월호혼이 깃든 방송을 위하여 방송작가 반세기/ 월간 '방송작가' 2010년 8월호 방송과 함께 45년, 참으로 감사한 일이라는 제목 으로 올라 있습니다. 첫번째 글은 영문자 주소를 클릭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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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최홍준님이 쓴 생생한 체험기록 방송작가 반세기 두번째 (2)
‘한강 천리를 가다’와 ‘호남의 젖줄 영산강’
지난 3월 12일 한국천주교주교회의(의장 강우일 주교)는 “생명 문제와 ‘4대강 살리기’에 대하여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다 함께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로마 8, 22)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 가운데 이런 내용이 담겨 있었다. “생명을 발전의 수단으로 삼고 파괴 하는 행위는 자연환경에 대해서도 똑같이 드러나 있습니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은 하나의 고리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자연 생명이 파괴되면 그 자연을 호흡하고 섭취하며 살아가는 인간 생명도 운명을 함께 할 수밖에 없습니다. 춘계 총회에 모인 한국 천주교의 모든 주교들은 현재 우리나라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4대강 사업이 이 나라 전역의 자연 환경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힐 것으로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습니다.” 상당히 민감한 부분으로, 정부 정책을 우려한 이 성명은 교회 안팎의 비상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고, 서울과 전국 단위의 ‘평신도사도직협의회’ 책임을 맡고 있는 필자에게도 음으로 양으로 적지 않게 부담을 안겨주었다.
그 즉시 몇몇 일간신문에 큼지막하게 광고를 내서 주교회의의 성명에 찬성할 수 없다는 의사를 밝힌 그룹도 있었는데, 그이들이 ‘뜻있는 평신도 모임’ 이라고 내세웠기 때문이 나에게 우리 단체와의 관계를 물어오는 사례도 많았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창밖 명동성당 들머리에는 속절없이 비가 내리는 가운데서도 ‘사제단’이 단식 농성 기도를 바치고 있다. ‘4대강 살리기’에 대한 찬성과 반대가 엇갈리는 작금의 사회 현상을 보면서, 그냥 남들이 찬성을 하니까, 혹은 반대를 하니까 나도 따라서 한다는 경우가 많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또한 강 이야기에 곁들여서 ‘MBC-TV 특별기획’으로 「겨레의 혈맥 한강 천리를 가다」를 구성, 집필한 1984년 가을의 나날들이 주마등처럼 아른거린다.
MBC의 1984년은 보도기획과 다큐멘터리 분야에서 큰 발자취를 남긴 해로 기록된다고 ‘한국방송60년사’(1987.2, 한국방송공사, 비매품)는 증언하고 있는데, 그해 10월 3일 개천절 특별기획 으로 오전 8시 10분부터 9시 30분까지 80분 동안 ‘한강 천리를 가다’를 내보냈다. 북으로는 금강산, 남으로는 오대산에서 발원한 북한강과 남한강 두 줄기가 양수리(兩水里)에서 만나 수도 서울을 관통하며 서해로 흘러가는 장장 514㎞의 한강 물줄기를 따라 강변 마을의 민속과 전통문화, 역사 등을 다양하게 화면에 담았다. 정국록이 제작 지휘를, 최홍준이 대본을 맡았다.
강의 흐름은 곧 내 나라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MBC-TV는 「겨레의 혈맥 한강 천리를 가다」를 방송한 이래 영산강, 낙동강, 금강 등 5대강의 그 도도한 흐름을 민족사적인 시각에서 재조명하고, 선인들은 이 거대한 강의 흐름과 함께 어떻게 문화를 가꾸어 왔으며, 또 어떻게 살아 왔는가를 알아보는 시리즈를 연중 기획으로 편성, 제작했다. 1985년에는 제2부 「호남의 젖줄 영산강」(6월 2일 오전 9:30-11:00)을 방송했다. 발원지인 추월산을 비롯해 담양호와 장성호, 광주호, 나주호 등 곡창의 젖줄과 전통문화의 향기, 의병의 활동과 저항의 뿌리, 영산강 하구언 공사, 항도 목포의 이모저모 등 영산강 유역에 깃든 역사와 생활관습 등을 헬기와 목선까지 활용하며 종합적으로 취재 구성했다. 취재는 김재철, 촬영은 윤홍섭이 맡았고, 대본은 제1부 ‘한강’에 이어 필자가 썼다. 당시 보도특집부의 김재철 기자는 오늘날 MBC 사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눈물의 바다’ 여의도광장
이제 와서 돌아볼 때, 내가 방송 생활을 하면서 기획서를 만들어 가서 제작팀에 제시하고 충분한 의견을 나눈 끝에 집필에 들어가는 일을 해보지 못한 채 그저 주문생산에만 정신없이 살아온 세월이 아쉽게 느껴진다. 벼르기만 하다가 정말 좋은 것, 해보고 싶은 방송을 하지 못한 데에 따른 안타까움이다. MBC의 특별기획도 전혀 생면부지의 담당자들로부터 전화를 받고 달려가서 일한 결과물이다. 나는 주로 KBS에서만 일을 했는데, TBC 라디오에는 6?25 특집 드라마를 박양원 연출로 방송했고, CBS에서도 1974년 8월 대통령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재일본 조총련계 청년에 의해 비명에 갔을 때 ‘흰 샘물의 미소’라는 제목으로 고인의 일대기를 드라마로 구성해 이광천 연출로 방송한 일이 있다.
육여사 서거 직후 문화공보부가 주관해서 국립극장에서 추모 문화제를 열었을 때 내가 쓴 추모시를 김소희 여사가 작창을 해서 판소리로 열창하기도 했다. 당시로서는 비교적 후한 고료를 받았던 기억이 난다. 이밖에 KBS 영화부에서 주로 이상엽 감독이 편집한 육영수 역사 관련 기록물의 해설을 써주면서 국립영화제작소가 만든 추모영화 대본도 많이 썼다. 영화제작소와 KBS가 경쟁이라도 하듯 기록물을 제작해 청와대로 납품하던 시절이었다.
MBC 보도특집팀에서 나를 부른 것은 KBS의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의 영향을 받았던 때문이 아닌지 모르겠다. 수상기 보급이 늘어나고 특히 컬러 방송이 자리를 잡아가던 1983년 6월 30일 밤 10시 15분에 시작된 KBS-1TV의 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는 선풍적인 인기를 모으면서 방송국 본관 중앙홀 생방송 현장뿐만 아니라, 방송국 앞 여의도광장 일대를 ‘눈물의 바다’로 만들고 말았다. 1951년 1?4후퇴 때 부산에서 헤어진 4촌 남매 8명을 다시 만난 신영숙씨를 첫 상봉자로 해서 헤어졌다가 몇십년 만에 다시 만나는 장면이 계속 이어졌고, 뒤늦게 방송으로 알게 된 이산가족들이 여의도로 몰려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포옹, 통곡, 서로가 서로의 모습을 확인해보고는 다시 얼싸안고 터드리는 통곡, 수십 년 기나긴 이별의 서러움과 한을 단 한 순간에 떨쳐버리는 그 진한 감동의 장면을 보고서는 출연한 가족들뿐만 아니라 제작진도 울었고, 전국의 시청자도 울었다.
같은 해 11월 14일 일요일 새벽 4시를 기해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은 마침내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무려 138일에 걸쳐, 453시간 45분에 이르는 방송을 통해 10만952건의 신청 접수 중 그 절반인 5만3,536건을 출연시켜 소개했고, 이 가운데 1만189건의 상봉을 주선했으며, 거의 20%의 상봉률을 기록했다. 당시 KBS 보도특집부에서는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을 통해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큐멘터리로 재구성해서 독립 프로그램을 방송했는데, 내가 미리 구성한 대본을 바탕으로 담당자들이 편집해서 방송했다. 나중에 KBS 부사장을 지낸 김홍 기자와 대통령 비서실 정무수석 비서관을 지낸 조순용 기자도 이 부서의 일원이었다.
1980년대 3대 행사와 대본 작성
방송작가 생활을 돌아보면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광주에서 엄청난 사건이 일어난 1980년 5월, 그 삼엄했던 기간에 일본어 뉴스 영상물을 KBS 부조정실에서 지켜보며 안타까움 속에 가슴이 쓰라리기도 했고, 함께 일하던 많은 방송국 식구들이 ‘해직’이란 이름으로 물러앉아야 했던 시기도 있었다. 그 광주의 5월이 있은 지 한 돌이 되던 1981년 5월에는 ‘국풍(國風)81’이란 이름으로 여의도광장에서 ‘축제’를 벌이고, 그 상당 부분을 KBS가 맡아서 준비했던 것을 기억한다.
그리고 같은 해 1981년 10월 18일의 여의도광장 행사를 나는 잊을 수가 없다. 천주교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 신앙대회’가 천주교 서울대교구 (당시 교구장 김수환 추기경) 주최로 열렸는데, 이날 약 60만명이 모여서 행사를 치렀다. 나는 KBS 라디오 김현 선배의 소개로 이날의 행사 대본을 작성했고, 이것이 계기가 돼 3년 후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직접 와서 주재(主宰)한 ‘한국천주교회 200주년과 103위 순교자 시성식’과 1989년 10월 8일 역시 여의도광장에서 교황 주례(主禮)로 거행된 ‘제44차 서울 세계성제대회’ 행사대본을 작성하고 연출까지 맡아서 교황제대(敎皇祭臺) 바로 아래쪽에서 미사해설과 사회를 맡은 사제들을 도와 전체 행사를 진행하는 영광을 입었다. 교황 행사는 그야말로 100만 인파가 운집한 가운데 KBS-TV가 실황을 중계방송했다.
중계반과 행사진행 요원들은 내가 쓴 대본을 아주 요긴하게 활용했고, 이 사실을 일간지가 기사화 하기도 했다. 궁정동 교황대사관에서 출발해 명동성당을 참배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탄 유리 방탄차가 여의도로 향해 마포대교를 건너올 무렵부터 “비바 일 파파!”(교황 만세)를 외치는 신도들의 환호소 리와 움직임은 참으로 장관이었다. 그때 그때 일어나는 상황을 내가 종이에 적어 사회자에게 넘기면 그는 그대로 읽어내려갔고, 아름다운 예식(禮式)의 진행은 미리 준비한 대본을 통해서 시시각각 확인할 수가 있었다. 대본을 작성하기 위해서는 1981년에는 몇 달이 걸렸고, 1984년 교황행사를 위해서는 1981년 12월 한 달을 온통 유럽 여행과 로마 순례에 할애했을 만큼 준비를 철저히 해야만 했다.
방송 통?폐합과 ‘여인백년’, ‘특별수사본부’
1979년 10월 26일 저녁 이른바 ‘안가’(安全家屋)라고 하는 서울 궁정동 어느 집에서 현직 중앙정보부장(1980년 1월부터는 ‘국가안전기획부’로, 1999년 1월부터는 ‘국가정보원’으로 개칭) 김재규에 의해 18년 장기 집권중이던 현직 대통령(박정희)이 시해당하는 ‘10.26사태’가 빚어지고, 같은 해 12월 12일 저녁 ‘12.12사태’가 용산 육군본부 일원에서 일어났다. 그날 밤 여의도 KBS(그때는 본관 하나뿐이었다) 작가실에서 포커 놀이를 즐기고 응암동 집으로 돌아가려고 마포다리에 이르렀을 때 군인들이 삼엄하게 경비를 서면서 도강을 통제하는 눈치였다. 급히 차를 돌려 제2한강교로 향했던 기억이 난다. 이날의 사태로 해서 국군보안사령관으로서 10.26사건 수사 책임을 맡고 있던 전두환 소장이 육군참모총장으로 계엄사령관이던 정승화 대장을 거세하고 신군부 실세로 등장하게 됐다. 이듬해 ‘5.18’을 거쳐 별을 두 개씩이나 더 달고 난 전두환 대장은 8월에 최규하 대통령을 밀어내고 스스로 제11대 대통령에 취임한 다음 겨울에는 ‘방송통폐합’이라는 전대미문의 사태를 연출했다.
한국방송협회와 한국신문협회는 ‘건전 언론 육성과 창달을 위한 결의문’에서 언론기관의 과점화(寡占化) 금지, 특정 개인이나 법인의 신문?방송 공유(共有)현상 배제, 대형 민간 통신사의 신설 등을 골자로 하는 언론기관 통?폐합 원칙을 채택했던 것이다. 이 조치에 따라 동아방송(DBS)과 동양방송(TBC)이 1980년 12월 1일을 기해 한국방송공사 (KBS)로 흡수, 통합돼 국내 방송은 KBS와 MBC 문화방송의 양대 산맥을 이루게 됐다(SBS는 1990년 ‘서울방송’으로 설립돼 2000년 3월 오늘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당시 보도 기능까지 해온 기독교방송(CBS)은 복음 방송만을 하게 됐고, 보도국 요원은 KBS에 흡수됐다.
이와 같은 조처는 새로 제정된 언론기본법에 따른 것으로, 모든 방송의 공공성을 규정함으로써 방송의 본질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그 이념에 따라 운영할 것을 기약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 때문에 고통을 겪은 방송인들이 많았고, TBC 관계자들 중에는 처음 한동안 매년 11월 30일이면 모여 망국(亡局)의 한을 달래기도 했다. 그리고 그때까지 TBC 스튜디오였던 여의도 사옥이 KBS 별관으로 바뀌어 셔틀버스가 매 15분 간격으로 본관을 왕래하게 됐다. 별관 작가실이 2층 모서리에 배치된 것도 이때부터의 일이다.
나는 방송 통폐합 이후 라디오 연속극을 몇 차례 썼다. 드라마를 주관하는 부서의 책임자가 기존 KBS 출신의 유신박 부장이었고 TBC에서 온 극작가 PD 박양원씨와 시인 PD 김선옥씨가 실무를 담당했는데, 나는 ‘여인백년’ 시리즈로 우사 김규식 박사의 부인 김순애(1889-1976) 여사의 일대기를 일일연속극으로 구성해서 한 달 동안 방송했다. 황해도 장연 출신으로 독립운동가요, 교육자였던 그의 파란 만장한 생애를 정리하면서 내가 얻은 것이 많았다.
얼마 후에는 동아방송 프로그램이었던 대공 수사실록 ‘특별수사본부’를 내가 두 달 동안 썼는데, 자료를 구하기 위해 검찰청 책임자를 직접 만나 ‘기록’을 요청하기까지 했으나 협조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연속극 공모 입선작 ‘철도원’의 작가로서 당시 특수기관에 근무하던 박신호 선생의 자문을 받아 거의 픽션으로 특별수사본부를 끌어 갔는데, 무대의 한 축을 프랑스 파리로 설정해놓고, 시떼섬의 노틀담 성당 종탑까지 동원했다. 여기에는 그 직전의 유럽 여행이 크게 도움이 됐다.
유럽 여행과 여행에서 얻은 것
조선에 천주교회가 설립된 것은 1784년이고 북경교구로부터 분리, 독립돼 ‘조선교구’가 설정된 것은 1831년이었다. 그래서 1981년에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행사를 여의도 광장에서 열었던 것이고, 3년 후 1984년에는 ‘한국천주교회 200주년’ 행사를 교황님을 모시고 여의도광장에서 거행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150주년을 치른 다음 200주년을 잘 준비하기 위해서 1981년 12월 1일부터 31일까지 꼭 한 달 동안 바티칸을 포함한 유럽 15개국의 교회와 성지를 돌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12월 첫날 에어프랑스 편으로 김포국제공항을 출발해 다음날 새벽 파 리 드골 공항에 잠시 기착했다가 곧장 런던으로 날아갔고, 런던의 성바오로 성당과 웨스트민스터 성당을 순례했다. 돌아와서 나중에 기록 영상물을 만들었는데, 내레이션을 통해 웨스트민스터 ‘사원’이 아니라 ‘수도원 대성당’이라고 거듭 강 조했던 기억이 새롭다. 사원은 절이고, 번역이 일본의 잔재였던 점을 상기시키기도 했다. 주교(主敎)를 사교(司敎)라고 부르는 것도 일본식이고, 방송에서도 말을 가려 써야 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 사실이었다.
런던에서 암스텔담으로 날아갔고, 파리에서 3~4일 머물다가 리스본으로 날아가 이때부터 버스투어에 들어갔다. 리스본 북쪽으로 두세 시간 거리에 있는 파티마(Fatima) 성지를 찾아간다는 것이 잘못돼 남쪽 포르티모를 겨냥해 파로를 돌아 다시 북상했던 일도 있었다. 파티마는 1917년 5월 13일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세 어린이들에게 나타난 성모 마리아가 공산주의의 회개를 위해 기도할 것을 당부한 성지인데, 바로 그해 10월 17일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 70여년 간 공산주의가 창궐했던 것을 우리는 기억한다.
에스파냐 땅으로 건너가 이베리아 반도 맨 남쪽 플라멩코의 고장에서부터 세비야, 코르도바를 거쳐 마드리드에 이르고, 다시 북상해서 산세바스찬에서쉬었다가 피레네산맥을 넘어 프랑스 땅 루르드 성지에서 기적수에 목욕까지 한 다음 지중해를 따라 남부 프랑스 바닷길을 버스로 달려본 것은 참으로 값진 경험이었다. 칸느, 니스, 망통으로 가면서 모나코에도 들러 휴식을 취할 수 있었고, 이 일대의 지중해 연안은 ‘코트다쥐르’라고 해서 감벽색 해안을 일컫는다. 바다의 색깔이 어쩌면 그리도 선연하게 내 기억 속에 자리하게 됐을까? 이번 남아공 월드컵 16강 문턱에서 탈락하고 만 이탈리아 축구팀을 ‘아주르 군단’이라고 하는데, 짙은 파랑색 유니폼이 인상적 이듯이, 그 바다의 빛깔도 그랬다.
국경선을 넘어 이탈리아 리구리아 지방으로 갔다가 다시 뮌헨의 설경을 마음껏 호흡한 가슴을 안고 취리히, 루체른, 베른을 거쳐 로잔느에서 레망 호수를 따라 쥬네브에 들어갔다. 레망호는 한운사 선생이 동아방송 라디오에서 방송한 연속극 제목인데, 패티김이 부른 주제가하며, 남과 북의 주인공들을 기억하면서 경관을 돌아볼 수 있었다.
여행은 이탈리아로 넘어서서 베네치아의 곤도라와 물이 넘치는 아침나절의 도시 골목길과 르네상스의 도시 피렌체에서 ‘신곡’의 시인 단테가 세례를 받은 영세당과 그의 영원한 연인 베아트리체를 만난 베키오 다리를 둘러보고 로마로 들어갔고, 로마에서 태양의 도로를 따라 몬테카시노와 나폴리, 폼페이까지 달려가면서 바쁘게 이어졌다. 30대를 마감하면서 시작한 나의 해외 나들이는 이후 로마를 여러 차례 다녀오고,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를 회의 참석차, 또는 김대건 성인의 발자취를 더듬는 취재여행으로 상하이, 홍콩, 마카오로 이어졌으며, ‘솔뫼의 샛별 김대건 신부’ 연극을 가지고 북미주 순회공연에도 함께 했고, 일본의 아키다와 홋카이도, 나가사키를 여러 차례 다녀왔다. 요르단과 이집트 여행에서는 ‘범람’이란 말이 나일강의 범람을 의미하는 거라는 사실을 알아내고 혼자서 무릎을 치기도 했다.
어떤 글을 써야 할까…
잦은 여행에서 느낀 것은 교회 행사를 통해서 배운 것을 확인하는 작업이기도 했다.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행사를 끝내고 평가회를 할 때 김수환 추기경은 내가 쓴 대본을 일컬으면서 “몇 분, 몇 초까지 표시했군!”이라며 정확성을 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고, 당시 서울 대교구 보좌주교였고 지금은 대전교구 원로 사목자인 경갑룡 주교는 “행사를 하되, 혼이 깃든 행사를 해야 해!”라며 주관하는 사람의 정신과 자세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후 나는 방송 일을 하면서도 의미를 생각했고, 의미 있는 일을 해야겠다고 다짐하고는 했다. 글을 써도 혼이 깃든 글을 쓰고 싶어졌다.
1991년 1월 1일 0시 10분부터 1시까지 방송한 ‘KBS 원단 기획 - 통일, 통일을 연다 ’(조원석 기획, 최홍준 대본, 어수선 연출)에서 나는 이렇게 썼다. “누가 그랬던가. 금세기에 당한 비극은 금세기가 가기 전에 풀어야 한다고. 우리 손으로 풀어야 한다고. / 이제 20세기의 마지막 10년, 그 첫 한해를 역사 속으로 묻어버리고 대망의 새해 1991 신미 첫날 첫 시간에 이른 우리, 7천만 겨레 우리에게도 소원은 있으니, 저문 해 시월 평양에서 남과 북 음악인들이 분단 이후 처음 만났고, 섣달에는 서울에서 가는 해 아쉬워하고 통일을 염원하며 얼싸안고 한 목소리로 노래했으니, 아! 통일, 통일!” “우리는 보았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광경을. 너무 기뻐서 아무나 끌어안고 울기도 하고, 너무 좋아서 덩실덩실 춤을 추기도 하는 게르만의 그들을 보면서 우리는 부러워했다. 그리고 그해 12월. 브란덴부르크 문이 열리던 날, 환희의 송가를 합창하던 그들.” “그리고 1990년 10월 3일.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냉전구조의 최전선에 섰던 동?서독이 하나로 통일됐다.” --------
늘 마감시간에 쫓기는 글쓰기
‘세살 버릇 여든까지’라는 속담이 거저 생기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늘 마감 시간에 쫓기며 데스크를 애태우게 한 이 악습은 ‘방송작가 반세기’ 마지막 기사를 쓰는 이 시각에까지 버리지 못했으니, 안타까운 노릇이다. 라디오 일일 연속극을 쓸 때는 한 주간에 이틀을 녹음 했는데, 하루 한편씩 쓰면 편안하게 해 낼 수가 있지 않겠느냐는 계산이 나온다. 그러나 말과는 달리 녹음이 있는 날에는 새벽 세시에 일어나서 쓰기 시작하고, 그 전날부터 끙끙대며 고민에 휩싸이는 것은 물론이다.
여섯시 쯤 돼서 차를 몰고 여의도 작가실, 또는 도서실로 나가서 마저 끝내고 나서 육필 원고를 제작진에게 넘기면, 그제야 지하 식당에 내려가서 아침을 들고는 했다.40매 짜리 세편이면 200자 원고지 120매 분량인데, 한꺼번에 써 넘기고 나면 진이 빠지게 마련이고, 쌓인 스트레스를 풀고 싶어진다. 그러나 드라마에만 매달리지 않고 다른 원고도 써야 했으므로 하루 분량의 녹음 대본을 끝냈다고 해서 해방을 맞이할 수도 없었던 나날이 한동안 계속됐다.
TV 창극(唱劇)을 쓸 적에는 PD 백대웅 교수, 연출가 허규 선생과 함께 하는 시간이 잦았는데, 사직동인가 사간동인가, 이사 가기 전 허선생 댁에서 판소리 세종제 ‘춘향가’를 놓고 진지하게 의견을 나누었다. 연출가의 부인 박현령 시인은 방송작가로도 활동하고 있었는데, 시골 누님 같은 인상을 풍겼던 기억이 아련히 되살아 난다. 아무튼 미리 미리 써지지 않은 원고. 미리 미리 쓰는 습관을 길러놓지 않은 나 자신이 원망스러우면서도 최후의 순간까지 떠오른 영감과 정보를 챙겨서 대본에 반영하는 자세를 이제 와서 버리기가 쉽지 않다.
‘바다가 보이는 예술인 아파트’ -안산 시절
결혼한 그해 우리 부부는 신당동에 살다가 녹번동에 처음 집을 샀고, 이듬해 응암동으로 옮겨서 10년 남짓 살았을 때 반월 신도시 바람을 타고 안산에 가서 88서울올림픽을 전후로 꼭 3년을 살았다. ‘바다가 보이는 예술인 아파트’라는 광고 문구가 솔깃해서 이사를 갔는데, 불편한 점이 많았지만, 두세 가지 면에서 잊을 수가 없는 시절이었다. 첫째는 김진욱, 박서림, 이영신, 윤혁민, 오재호, 이기명, 김준일, 김춘수, 홍정표, 전정근, 윤활식 선생 등 방송인들이 대거 모여 살았는데, 상당수가 가톨릭 신자들이었다. 소설 쓰는 박영한, 이원방씨도 이곳에서 만났고, 이씨가 세례받을 때는 내가 대부(代父)를 썼다.
심영식, 윤혁민, 이기명, 최헌 선생은 내 연상의 대자들이고, 나중에 서울 서교동성당에서 필자가 초대 회장을 맡아 한국가톨릭방송작가회 창립미사를 봉헌할 때는 이분들 외에 김진욱, 김태헌, 황희자(재희), 서재순, 윤경미 회원과 이환경 대자도 함께 했던 기억이 난다. 이상화 선생은 상도동성당에서 세례 받을 때 내가 대부로서 증인이 돼주었고, ‘아오지 탄광’과 ‘김삿갓 북한방랑기’의 최풍 선생은 가톨릭 운동단체인 ME(Marage Encounter) 한국대표를 지낸 오재호 선생이 대부를 선 가운데 대세(代洗)를 받고 임종했다. 당시 가톨릭매스컴위원회 총무 김정수 신부 집전으로 최선생을 영결하는 장례미사 때 나는 많이 울었다.
이밖에도 고인이 되신 최요안 선생은 초창기 가톨릭문우회를 이서구 선생과 함께 이끄신 분이고, 방송작가협회 부이사장 때인 1974년 6월에는 월정사의 말사인 등명 낙가사(燈明洛伽寺)를 협회 휴양소로 정해 강원도 명주군 괘방산(掛榜山) 중턱, 동해가 바라 보이는 암자까지 회원들을 데려가 안내해준 일도 있었다. 심영식 선생은 한국천주교회 200주년을 기념하고 103위 한국 순교복자들에 대한 시성식을 거행하기 위해 한국교회를 사목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984년 5월 4일 광주 무등경기장에서 집전한 ‘화해의 날’ 성인 입교예식(成人入敎禮式) 때 교황님으로부터 직접 세례와 견진성사를 받았고, 내가 대부를 섰다. 심 선생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1주기를 기해 2006년 4월 서울 명동성당에서 추모 문화제를 거행했을 때, 세례 받던 당시를 증언해 김수환 추기경과 정진석 추기경, 교황 대사 에밀 폴 체릭 대주교를 비롯한 주한 외교사절들도 많이 참석한 이날 회중(會衆) 에게 진한 감동을 안겨주었다.
‘포콜라레운동’을 만나
안산 시절, 나는 가톨릭 교회운동 단체의 하나인 포콜라레(Focolare)운동을 처음 알게 됐다. 이는 나에게 가톨릭 신자로서 머리로만 알아듣는 신자에 머물지 말고,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실제 생활에서 직접 복음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줬으며, 20여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여기에 깊이 감사하고 있다. 또 한 가지 기억에 남는 일은 88올림픽이 열린 1988년 1월 1일부터 보름 동안 전라북도 김제에 가서 단식을 했는데, 안산에 살던 김준일 형의 누이 김준순 선생이 지도하는 요가의 일환으로 실시한 이 단식은 운동과 목욕을 게을리 하지 않으면서 육신의 건강과 함께 정신건강에도 크나큰 힘이 솟구치게 해주었다.
그 무렵 안산에는 서울신문 편집국장을 지낸 내 아우도 살고 있었다. 서울 올림픽이 열린 그해는 내 선친의 칠순잔치를 벌인 해이기도 했는데, 이를 준비하기 위해 서울의 두 아우와 안산의 형제, 이렇게 4형제가 두어 달 동안 매주 만났는가 하면, 미국 교포사목 중이던 사제(司祭) 아우와 가톨릭 신문 미주지사(美洲支社)에 근무하고 있던 또 한 아우와 함께 「구남매」라는 가족신문을 발행한 것이 화제가 돼 TV ‘아침마당’ 같은 생방송 프로그램에 막내 누이와 함께 출연했다.
개신교 잡지인 「신앙계」신년호에 화보를 곁들이면서 아내와 아이들까지 우리 집 네 식구의 생활을 소개했고, 경향신문과 KBS 라디오에서도 다루었다. 단식을 하면서도 KBS 라디오 프로그램 원고를 써 보내야 했고,「한국방송60년사」집필위원으로서 나는 상당 분량의 원고를 안산에 살던 이 시기에 집필했다. 그보다 10년 전인 1977년 2월 16일 한국방송공사 (韓國放送公社)가 「한국방송사(韓國放送史)」란 이름으로 ‘50년사’를 펴낸 바 있었다. 책은 여의도로 옮겨 가서 나왔지만, 원고 작업은 아직 남산시절이던 1970년대 중반에 서둘러 했다.
우리 방송작가협회 회원으로서는 김중희, 이영신 선생이 나와 함께 집필위원이었고, 김순복(도영) 선생은 방송 일화들을 취재, 정리하는 작업을 전담했다. ‘60년사’는 고 이용찬 선생과 내가 집필위원이었으며, 1997년에 한국방송협회가 펴낸 「한국방송70년사」는 내가 방송 쪽 원고를 전부 살펴보면서 ‘감수’를 맡았다. 방송작가 선배로서 이제는 고인이 되신 이희복 선생과 정진건 선생, 그리고 아직도 안산에 살고 계신 박서림 선생의 값진 자문을 받은 것이 크게 도움이 됐다. 이렇게 봐서 방송의 역사를 정리하는 방대한 작업에 자그마치 30년을 투자했다는 긍지를 가진다면 지나친 일일까?
내 마음의 고향은 어디인가?
나는 1950년대 후반 고등학교 때 밤 11시대 KBS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클래식 음악에 심취해 새로운 세상을 만나고는 했다. 그래서 ‘포엠 소나타’라는 긴 시(詩)를 지어서 발표한 적도 있었고, 방송국에 들어가서 바로 그 시간대에서 방송하는 ‘고요한 밤에’ ‘마음의 샘터’를 직접 쓰고 제작하는 일을 맡아 클래식 음악을 배경으로 깔 때의 감회는 참으로 컸다. 그 후 그날 그날 일어난 사회 현상을 소재로 에세이를 써나가는 30분짜리 ‘오늘을 생각한다’와 이름 그대로 시와 수필을 프로그램화한 ‘시와 수필과 음악과’를 집필하면서 함께 팀을 이룬 낭독 아나운서 이규항 선배, 이기재 PD를 잊을 수가 없고, 시에 대한 그리움이 꿈틀거리는 것을 주체하지 못했다.
재학시절 ‘모의국회’와 전공분야 토론회, 국제관계 해외 논문을 소개하는 일 외에 ‘문학의 밤’ 행사에 뛰어다니며 자작시를 낭송하고, ‘고대신문’과 ‘고대 사화집’(詞華集)에 시가 실리고, 졸업 후 지방 일간신문에 시를 발표했던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면서 홍윤기 선생이 2009년 봄호로 창간한 「한국현대시문학」과 「독서신문」등에 백제시와 일반시를 꾸준히 발표하고 있다.
방송작가협회와 관련해서는 원고료 인상투쟁을 위해 집필거부에 동참하던 때가 인상에 남고, 협회가 양분됐을 때는 ‘극작가협회’에서 감사를 지냈다. 통합 이후에는 유호 이사장 때 이사를, 심영식 이사장 때 상임이사를 맡아 홍역을 치르기도 했으며, 최근에는 2008년과 2010년 정기총회에서 감사로 선출돼 (2012년 초까지) 한 달에 한 번씩 젊은 이사들과 머리를 맞대고 의견을 나누는 것이 참으로 유익하고 즐거운 일이다.
그런가하면 어느 방송전문대학에서 겸임교수로 오라는 초청을 받고도 직장 일 때문에 머뭇거리다가 기회를 놓친 적이 있지만, 방송과 잡지에 계속 글을 쓰고, 한국천주교 평신도사도직협의회 사무총장을 맡으면서 다른 일로 안목을 넓힐 수가 있었고, 금년에는 회장직을 맡아 평화방송 시청자위원회 당연직 위원으로서 방송과 인연을 계속 맺고 있으니,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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