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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굿 윌 헌팅(Good Will Hunting, 1997)
감독: 구스 반 산트
출연: 로빈 윌리엄스, 맷 데이먼, 벤 애플렉, 스텔란 스카스가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세상에 여태 굿 윌 헌팅도 안보았느냐고. 그 말을 하면서 완전히 덜 떨어진 사람 취급을 했는데....왜 그랬을까. 나는 이 영화가 사냥하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다룬 디어헌터나 플래툰류의 영화라고 줄곧 생각하고 있었다. 터무니없는 착각이었다.
굿 윌 헌팅은 재능있는 젊은이를 아껴 그를 무에서 이끌어내는 선생들의 영화다. 기실 주인공은 멧 데이먼이 분한 윌 헌팅이 아니다. 윌 헌팅은 재능이 뛰어난 천재일 뿐 그 천재를 아끼고 사랑해서 어쩌면 쓰레기통에 박힐 뻔한 그 삶을 다독여 정상의 궤도위로 올려놓는 선생들이 주인공인 것이다.
프로이트도 융도 도널드 트위디도 모든 심리학자들은 한결같이 어린 시절의 경험을 중시하고 있다. 인격이 형성되는 어린 시절이 그만큼 사람의 한평생에 중요하다는 뜻인데 이 영화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전체 수학자중에 으뜸이라고 할만한 수학 수훈상을 받은 교수가 낸 문제를 단숨에 풀어낼만큼 뛰어난 수학 재능을 가진 윌 헌팅은 대학 청소부로 제대로 된 교육은 받은 적이 없다. 잘난 체 하는 하버드 대학생들을 일거에 기죽일만큼 놀라운 양의 독서와 그 본질을 꿰뚫는 지성으로 빛나는 윌 헌팅이지만 친구들과 노동자구역에서 가난하게 살고 있으며 어쩌면 그 우정이야말로 그를 지탱하는 원천일 것이다.
그러한 그임에도 자신을 억누르지 못하는 성격은 어쩔 수 없어 불만을 폭력으로 배출하는데 자신이 낸 문제를 누군가 풀어낸 것을 본 램보 교수는 그를 찾는다. 램보 교수가 풀지못한 문제 또한 너끈히 풀어버린 윌 헌팅, 전과 5범인 그는 또 다른 폭력사건으로 감옥에 갇힌다. 램보교수는 그의 보호자를 자청하고 그를 감옥에서 꺼낸 다음 헌팅이 닫아버린 마음의 빗장을 풀만한 사람을 찾는다. 워낙 뛰어난 윌은 심리학 전문가들을 농락하고 램보는 마음 고생끝에 한때 자신의 친구였던 숀을 끌어들이는데.
숀은 윌을 환자 대 의사로 보지 않는다. 숀은 윌을 인간으로 보고 자신을 보여주며 어쩌면 자신의 삶도 함께 논한다. 영화가 풀어나가는 것은 이 과정이다. 때로는 보통 사람이 몰입할 수 없는 경우도 있지만 동등한 기반위에 서서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나는 그 느낌이야 말로 가장 절실하게 원하고 있던 것은 아닐까. 각기 다른 길을 걸어온 두 사람이 우월한 눈으로 내려다보지 않고 서로를 한 인간으로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어쩌면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상처받고 싶어하지 않는다. 어린 시절의 상처가 깊은 것은 아무런 힘이 없는 자신을 돌봐주는 이에게 가지는 맹목적인 신뢰와 애정이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애완동물과도 같은 이 신뢰에 대한 배반은 그래서 더 깊은 방어막을 형성한다. 그 상처를 준 이가 나름대로의 이유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 이유를 알 수 없다면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윌이 사랑을 거부하는 것은 그래서이다. 윌이 관심을 농락하는 것은 그래서이다. 육체는 쉽사리 가까워질 수 있지만 정신은 그렇지 않다.
피상적으로 가장 근원적인 수준의 만남을 가졌던 육체 노동자들과의 우정, 그들이 윌의 재능을 모를리 없다. 무척이나 윌을 아끼는 그들은 자신들과 다른 세상으로 가라고 말한다. 매일 아침 깨우러 올때 네가 없으면 제일 행복할 거라는 친구의 말이 보는 이의 심금을 울리는 것은 그 진실한 우정 때문이다. 자신과 같은 세상에 있으면서 도움이 될 수도 있는 친구를 떠나보내기를 원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아낌이 아닐까. 가까운 이에게서 질투심을 느끼는 것은 그 수준이 엇비슷할 정도일 때 뿐이다. 진정한 우정은 거리낌없이 상대의 우월함을 인정하고 찬탄한다.
가끔 병의 원인을 찾아낸 이에게 묻고 싶다. 그래서 그 원인이 이것이라는 것을 알았으니 그래서? 어린 시절의 학대가 원인이라고 찾아냈으니 거기서 끝이라고? 그 다음은 일사천리로, 저절로 잘 풀리는 거라고? 그렇게 반문하고 싶어하는 것은 어쩌면 프로이트를 제대로 읽지 않았기 때문에, 어쩌면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 어쩌면 내 이해력의 정도가 극히 낮은 탓일 것이다. 그러기에 원인을 알면서도 쉽게 벗어나지 못하고 일상을 반복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인간을 향상시키는 것은 자신에 대한 불만이다. 자신의 일상에 대한 불만이요, 자기 삶에 대한 불만이다. 기실 인간의 바뀜은 자기로부터 온다. 지금 이 삶이 좋다고 말하던 윌이 교수들이 올려놓고자 하는 세상으로 올라서는 것은 기실은 내부에 그득한 불만 때문이다. 알고 있지 않은가. 청소부로서나마 MIT에 있고 싶었던 것, 그 청소부 주제에 교수가 낸 문제에 도전했던 것, 그것은 자신의 삶에 대한 불만이 아니고 무엇이었던가.
보다 넓은 세계, 보다 높은 세계에 대한 갈망이 인간을 이끌어올린다. 겪어본 이들은 안다. 오래 살아서가 아니라 많이 알아서가 아니라 상처를 입은 이들, 그 과정을 겪어낸 이들은 무엇이 문제인지를 안다. 굿 윌 헌팅이 아름다운 영화인 것은 윌 헌팅이 천재라서가 아니다. 천재는 드물다. 그럼에도 우리가 천재를 다룬 이 영화를 보고 공감하는 것은 윌이 나 자신일 수도 있는 개연성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우리는 마음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삶에 대해 절망하고 관계에서 상처받을까봐 몸을 움츠린다. 그럼에도 삶은 계속되고 일상은 흘러간다. 그 삶을 계속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투정을 부려대던 윌이 숀의 관심을 받아들이고 그의 충고를 인정하며 스카일라를 찾아 떠나는 것은 결국은 무한한 자기애가 아니고 무엇인가.
영화에서 숀이 하는 역할은 상처보다 깊은 자기애를 향해 방향을 잡아주는 일이다. 인생은 방향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스승을 잘 만난 이가 성공하는 것은 제대로 방향을 잡았기 때문이며 성공한 이들이 하나같이 스승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 스승이 한결같이 자신을 믿어주고 그 방향을 잡아 주었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을 먼저 깨달은 이가 그 아름다움을 제대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윌 헌팅이 굿 촤일드임을 인정한 숀이다.
첫댓글 오래 전에 봤던 영화가 어렴풋이 생각나네요. 이해는 결국 사랑이겠지요. "깨우러 올 때 네가 없으면 제일 행복할 거라는 친구의 그 말" 생각납니다. 주인공이 여자와의 사랑에도 성공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