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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의 뿌리를 찾아서 스크랩 [2] 내 몸속에 흐르는 흉노의 피-2
주임교수 추천 0 조회 48 16.01.26 08:0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2] 내 몸속에 흐르는 흉노의 피-2

 

 

 

흉노-고조선-신라의 연결고리
 
경기도 박물관 이종선(李鍾宣) 관장(56)은 김병모(金秉模) 한양대 인류학과 교수와 함께 『신라 김씨 왕족은 흉노계이다』라고 확실하게 이야기하는 고고학자이다. 그를 만났다.
 
그는 「고신라왕릉연구(古新羅王陵硏究)」란 책에서 경주 황남대총의 주인공이 내물왕과 왕비라고 추정한 고고학자이기도 하다. 서울시립박물관장 출신인 이종선 관장은 서울대학교 고고인류학과를 졸업한 이후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선사원사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그는 1970년대 천마총, 황남대총 등 경주 고분 발굴에 참여했었다.
 
이관장은 부여-고구려-백제의 지배층과 신라의 지배층은 출자(出自)가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부여계통은 퉁구스족이고 신라 김씨 왕족은 좀 더 유목적이고 서방적인 흉노-알타이계통이라고 했다. 물론 김씨족이 경주에 들어왔을 때는 유목민의 성격은 버린 상태였지만(유목은 넓은 초원이 있어야 한다) 기마전법은 갖고 왔을 것이다.
 
이관장은 고조선의 지배층도 흉노계통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서기 전 2세기 한무제(漢武帝)한테 망한 고조선 후기의 지배층이 흉노계통임은 평양 지역 고분에서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또 한무제가 고조선을 무너뜨리고 낙랑군을 세웠지만 한족 지배층은 소수였을 것이고, 귀족 등 다수 구성원은 역시 흉노계였을 것이라고 했다. 
  
이관장은 한국 고대사의 지배민족을, 만주를 원류로 하는 부여-고구려-백제의 남북형과 알타이-몽골초원을 고향으로 하는 고조선-신라-가야의 서북-동남방형으로 가른 셈이다. 이렇게 한반도로 집결했던 유목기마민족 출신들이 우수한 마구(馬具)와 철제 무기를 가지고 일본열도로 건너가 일본 고대 국가를 만들었다고 보면 될 것이다.
 
이는 유럽 각국이 아메리카 신대륙을 개척할 때와 비슷한 전개였을 것이다. 영국계, 프랑스계, 스페인계가 아메리카로 들어갔던 것처럼, 고구려계, 가야계, 백제계, 신라계가 일본열도라는 신천지로 들어가서 정착하고 이합집산하면서 정복왕조를 만드는 과정에서 천황가(天皇家)도 가야 출신, 백제 출신 등으로 명멸하다가 어느 단계 이후에는 백제 출신이 정착하여 지금에 이른 것이 아닌가.
 
이관장은 신라 김씨족을 알타이계로 부르는 것이 정확하다고 했다. 흉노와 겹치기도 하고 흉노라는 이름 안에 포함되기도 하는 개념으로서의 알타이계이다. 몽골고원의 서쪽에 있는 알타이 산맥 부근에 뿌리를 둔 유목민이 동진(東進)하는 과정에서, 북방 초원 지대를 통일하여 거대 제국을 만든 흉노계의 일원이 되었을 것이지만 알타이적인 요소를 잃지 않고 신라지역까지 들어왔다는 것이다. 알타이계 민족은 중앙아시아와 가깝고 중앙아시아는 그리스-로마문화권과 끊임없이 교류해 왔기 때문에 알타이계 신라 김씨 왕족 무덤에서 로마적인 영향이 나타나는 것이다.
 
내몽골 오르도스 지방에서 살던 흉노족의 일파가 기원 전 3세기경부터 한반도의 서북지방으로 들어와 고조선의 중심세력이 되었다. 이들은 평양 근방에서 수백 년 살다가 고조선이 망하거나(서기 전 2세기), 낙랑이 고구려에 점령되는(서기 1세기) 등 정치변동기에 한반도의 동남쪽으로 이동하여 지금의 경주지역에 정착했다. 그 후 4세기 그들이 신라의 집권세력으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내물왕 이후 신라 김씨 왕족이 바로 북방초원이 고향인 흉노족의 후예라는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박혁거세가 거서간(居西干), 3대 유리왕부터는 니사금(尼斯今), 내물왕 시대부터는 마립간(麻立干)으로 적었다. 今(금), 干(간)이란 호칭은 흉노-알타이 계통의 부족장, 제사장, 또는 왕을 가리킨다. 니사금은 제사장적인 성격이 강한 부족연맹체 시대 신라의 맹주를 이르는 호칭이고, 마립간은 왕권이 강화된 고대 신라의 왕이라는 의미이다.
 
내물왕은 삼국유사에선 마립간, 삼국사기에서는 니사금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김씨왕족의 실질적인 중시조(中始祖)라고 볼 수 있는 내물왕이 이사금 시대에서 마립간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왕이었다는 암시이다.
 

 

신라는 왜 중국문화를 거부 했나
 
이관장은 신라김씨 계통의 이동경로를 알타이 산맥-내몽골(오르도스)-평양 부근-경주의 서북-동남방향으로 설정했다. 
  
『평양도 넓은 들이란 뜻이고 경주의 옛 이름도 서라벌인데 넓은 들이라는 뜻입니다. 서라벌이 나중에는 서울로 바뀌지요. 이는 흉노족이 평양에서 경주로 들어왔다는 뜻입니다』
 
이관장은 신라는 마구와 금공예품은 발달했으나 갑옷 등 무기류는 가야가 더 발전했다고 말했다. 가야 지배층의 종족적 분류에 대해서 기마민족 일본 정복설을 주장했던 일본의 에가미 나미오 교수는 부여족이라는 주장을 했고 국내학자들 가운데서도 동의하는 이들이 있다.
 
이관장은 가야 유물로 볼 때 그 지배층은 신라 김씨와 비슷한 흉노-알타이 계통인 것 같다고 말했다. 고조선-낙랑지역에 거주하던 흉노계가 신라지역보다 먼저 가야지역, 지금의 부산 부근에 들어온 흔적이 부산?김해 등지에서 발견되는 토광목곽분과 무기류, 그리고 동(銅)(동복: 유목민이 쓰는 구리 항아리)이라고 한다. 
  
『무기로 보면 신라는 보병 의존, 가야는 기병 의존형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당시 기마전투는 거의 활로 했을 것입니다. 말을 타고 칼싸움은 하지 않았다고 봐야지요』
 
이관장은 『신라가 중국문화와 차별되는 독자성을 유지하고 있다가 이를 바탕으로 하여 삼국통일을 이룩할 수 있었던 힘은 중국과 멀리 떨어져 있었던 데다가 김씨 왕족들의 자존심이 대단했기 때문일 것이다』고 말했다.
 
흉노계의 김씨족들은 신라의 지배층이 되자 백제, 고구려의 친(親)중국 정책과는 반대로 갔다. 그들은 4~6세기 중국과는 교류를 하지 않는 대신에 북방 초원 루트를 통해서 중앙아시아, 로마지역과 교류했다. 그 증거물들이 적석목곽분에서 나오는 로만 글라스와 보검 등이다. 
  
『아마도 몽골고원의 서쪽인 알타이 출신들인 김씨 왕족들은 중국과는 문화와 습속이 맞지 않아 불편했을 것입니다. 중국인과 교류하고 싶은 마음이 내키지 않았을 거예요』
 
신라 김씨의 이런 주체성과 오기는 흉노-알타이계라는 종족적인 특성에서 유래하는 부분이 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이 기사의 주요 화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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