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2월 8일 (수) 한국 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말씀 묵상 (창세 3,9-15.20) (이근상 신부)
사람이 나무 열매를 먹은 뒤, 주 하느님께서 그를 부르시며, “너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가 대답하였다. “동산에서 당신의 소리를 듣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창세기 3,8-10)
지금같은 밤이었다. 2000년이던가.. 괴산 정신부님 거처의 안방은 4평 남짓 되었는데 가구가 없었다. 동창이 아주 도화지 하나 만하게 나있었고 한옥미닫이문으로 들고 났다. 그 방은 낮에 들어가도 밤같이 아늑했는데, 그날은 깊은 밤이었다. 신부님과 나는 부각을 안주로 소주를 마셨다. 정신부님이 정일우가 아니라 John Vincent Daly여겨지는건 아주 드문 일인데, 가끔 술을 마실 때 나는 그가 서양사람이란걸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서양사람들이 위스키를 마시는 것처럼 신부님은 안주를 좀처럼 들지 않으셨다.
짭짤한 부각을 우적거리며 씹는건 나 뿐이었다. 신부님이 갑자기 내게 물었다. '근상, 어디있소?' 나는 갑자기 뜨악했었다. 당황했고, 답을 찾지 못했다. 세 번인가 같은 물음을 하였는데 내 대답이 영신통치 않으니 신부님이 화제를 바꾸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신부님도 돌아가시고, 나도 한참을 걸어온 느낌인데, 갑자기 내일 독서가 길을 막은 느낌이다.
아직도 그 때 그 물음에 답을 하지 못하고 있다. 오늘밤은 그 물음을 간직하며 누워야겠다.
'넌 어디있느냐?'
출처: https://www.facebook.com/simonksyi/posts/2427200174077767
사람이 나무 열매를 먹은 뒤, 주 하느님께서 그를 부르시며, “너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가 대답하였다. “동산에서 당신의 소리를 듣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창세기3,9-10)
답을 찾으려 눈을 감자마자였다. 물음 대신 그의 목소리, 그의 물음만 더 진해졌다. '근상은 어디에 있소?'는 엄밀한 의미에서 질문이 아니었다. 그건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픈 이의 물음이 아니라. 내가 어디있는지 이미 아는 이의 물음이었다. 물음의 형식을 취하여 답해야 하는 내게 시간을 주었고, 물음을 간직해도 좋다는 마음을 주었을 뿐이다. 순례길 위의 후배는 매일 그 위치가 바뀌고 있으니 애초에 어디에 있느냐는 미래를 향한 물음이었다.
나의 위치대신 그의 목소리, 그가 내게 나누어준 아늑하던 방-내게 조명의 그 방의 빛만이 더 또렷한 아침.
근처에 있는 사랑이 선교회 온정의 집에서 서원갱신 미사를 드렸다. 막내 Tricia Rose 수녀님의 서원갱신이었다.
"This may not be a question for God well knows where Adam is. It may be a heart with which He allows us to take a time for perhaps a hiding ourselves....(이건 물음이 아닐지도 몰라요. 하느님은 아담이 어디 있는지 잘 아시는 분이니. 그건 마음같아요. 그가 우리에게 숨을 시간을 허락하는 마음."
나는 어디 있을까? 순례의 길? 그의 마음만이 우리가 있어야 할 바로 그 곳. 그건 우리가 깨닫거나 말거나, 숨거나 말거나 우리를 이미 품고 있는 곳.
황정은의 연년세세 맨 마지막 구절을 좋아한다. 그게 떠올랐다. 우리가 있는 곳이 그에게야 '삶'이겠지만, 내게야 '우리를 담고 있는 그분의 마음'이라 길고 지루하게 표현할 수 밖에 없을거라는...
'...그렇게 하지 않아도 삶은 지나간다 바쁘게. 나탈리는 바쁘게. 울고 실망하고 환멸하고 분노하면서, 다시 말해 사랑하면서. 그것이 나탈리를 향해 다가오니까...'
출처: https://www.facebook.com/simonksyi/posts/2427630784034706
첫댓글 신부님, 혹시 대림특강 계획이 있으신지 여쭙니다.
안녕하세요, 답글 달아주셔서 갑사합니다. 이근상 신부님께 질문하시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출처 링크를 클릭하셔서 이근상 신부님의 페이스북 글에 답글을 남겨놓으시면 이근상 신부님이 직접 보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