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제주 4.3 항쟁 기념일. 그러나 그 현실로 보면 4.3 학살의 기억과 애도일이라 부르는 것이 낫겠다. 강론이나 여러 강연에서 4월에 맞이하는 성주간과 더불어 이 슬픈 역사를 겹쳐 새기도 했지만, 올해는 7년 전 아들이 겨우 우리말을 새로 배우며 제주도 역사 기행을 다녀와 떠듬떠듬 쓴 글을 되새겨 읽는 것으로 대신한다.
"... 내가 어린아이의 무명 묘지 앞에 서 있었을 때, 나는 기억했다.
내가 바다의 푸른 소리를 들으면서 올레길을 걸었을 때, 나는 기억했다.
내가 곶자왈에서, 햇빛과 흙의 자연적인 화합을 느끼며 걸었을 때, 나는 기억했다.
내가 흰 눈으로 덮인 한라산을 걸으면서 해가 뜨는 것을 봤을 때, 나는 기억했다.
이제, 묘지를 볼 때마다, 바닷소리를 들을 때마다, 자연의 화합을 느낄 때마다, 해의 탄생을 볼 때마다, 나는 해체된 가족들을 기억한다. 이름을 모르거나 없는 아이들을 기억한다, 30,000명의 삶을 기억한다. 잊히면 안 되는 역사를 기억하면서, 나는 내 동생한테 가르쳐줬다. 한 발자국씩, 한 사람씩 알리면, 제주 4.3은 잊히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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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을 기억하다 - 주요한 (2016. 4.3.)
오늘은 2016, 4월 3일. 제주 4.3 사건이 일어난 지 68년이나 됐는데, 아직도 많은 사람이 모르는 역사이다. 몇 달 전에 나는 제주도 여행을 가서 제주 4.3 사건을 배우고 글을 쓰게됐다.
제주도: 아름다움으로 가려진 아픔
제주도. 아름다운 자연을 가지고 있는 화산섬. 해안 쪽에는 수많은 해수욕장과 바다를 품고 있고, 바다는 여러 가지에 푸른색을 보여준다. 제주도 한가운데에는 남한에서 가장 높은 산, 한라산이 있다. 한라산 봉우리에는 백록담이 있다.
여름의 백록담은 물로 채워져 있고 녹색으로 넘쳐나고, 겨울의 백록담은 흰 눈으로 덮여 있어서 대단히 아름다운 경치가 된다. 한라산을 등산하는데 왕복으로 10시간 정도 걸리고, 특히 겨울에는 쉬운 코스는 아니다. 그렇지만 한라산을 등산하면서 얻는 자연에 기운과 힘이, 그 10시간을 가치 있게 만든다.
제주도의 지리로 인해, 제주도 안에서 만개가 넘는 식물과 동물의 종들이 산다. 동백동산은 선흘 곶자왈에 있는 람사르 습지이다. 여기 안에서 열대 식물과 한대 식물들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 곳이다. 습지 안에는 민물이 있어, 근처 마을에 수원이 대기도 했다. 또 동백동산 안에는 용암의 흐름으로 만들어진 동굴들도 있다.
제주도에서 볼 수 있는 자연과 경치는 끝이 없다. 그러나 보이는 자연과 안 보이는 아픔은 같이 제주도에 살아있다. 아름다운 제주도는 빙산의 일각이다. 우리 눈으로는 잘 안 보이는, 물 밑에 숨겨져 있는 고통스러운 역사가 있다. 많은 사람에게는 익숙하지가 않은 역사, 그러나 모두가 알아야 하는 역사이다.
일제 강점기에서 해방이 된 한국은 정부를 수립해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신탁통치로 인해 미국이 한국 정부를 세우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도와주게 됐는데, 미국의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사람들과 반대하는 사람들이 나눠졌다. 찬성하는 사람들은 많이 남쪽에 있었고, 반대하는 사람들은 많이 북쪽에 있었다.
1948년, 해방 후 3년, 한국은 국회의원을 뽑기 위해 5월 10일에 선거를 하기로 했다. 그러나 북쪽에서 남쪽이 낸 조건과 동의하지 않는다고 선거에 차며 하지 않겠다고 했다. 5월 10일 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북쪽과 협의의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몇 분의 남쪽 지도자들은 단독 선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많은 지도자와 시민들은 반대했지만, 미국 지도자들은 단독선거를 이끌어 나가기로 했다. 한국 전체에서 일어나고 있던 시위 중에서, 제주도에서 일어난 시위는 나쁘게 돌아가게 됐다.
1947년부터 제주 시민들과 한국 정부와 갈등이 있었다. 4월 3일, 제주 시민들이 비폭력적인 시위를 하는 도중에 경찰들이 시위자들한테 총을 쏘기 시작했다. 분노로 찬 반란자들은 경찰을 공격했다. 정부는, 제주도에서 일어나는 시위를 진압하라고 1700명의 군인들과 서북청년단을 보냈다. 군인들과 서북 청년단은 아주 폭력적인 방법을 이용하며 반란을 진압하려고 했다.
대부분의 반란군들은 산으로 올라가서 숨었다. 군인들은 산 근처에 있는 마을들을 돌아다니면서 초토화 작전을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을 다 모으고, 젊은 사람들은 끌려가 총살을 하고 남은 아이들과 노인들은 해안 마을로 끌려가거나 젊은 사람들과 함께 학살을 당했다. 마을 사람들을 해결한 후, 군인들은 마을을 불로 태웠다. 산으로 도망간 반란군들의 자원을 끊으려고 한것이었다. 한국 정부는 제주도의 시민들은 '빨갱이'라고, “나라를 배신한 사람들”이라면서 잔인하고 악랄한 행동을 정당화시켰다.
젊은 남자와 여자들을 예비검속을 했고, 잡혀간 사람들은 고문을 당하기도 했고, 종신형을 선고받기도 했고, 처형당하기도 했다. 제주 시민들도 산과 숲으로 도망가서 동굴에 숨어 살기도 했다. 진압이 며칠 만에 진정 될 줄 알고 동굴로 도망갔는데, 일주일, 한 달, 몇 년이 지나도 끝나지 않았다. 동굴에 숨고 있던 사람들이 발견되면, 고문하면서 다른 사람들은 어디 숨었는지 말하게 하고 죽였다.
결국에는 진압이 끝났다. 그러나 사망자의 수는 굴욕감을 주는 수였다. 그때 당시 제주도 인구가 300,000명이었다, 그러나 제주 4.3 사건으로 인해 30,000명이 학살을 당했다. 10명 중에 한 사람이 살인을 당했다. 모든 제주 사람들은 제주 4.3으로 인해 가족 아니면 친척 한 명이라도 잃었다.
제주 4.3이라고 불리긴 하지만, 이 사건은 1947년부터 1954년까지, 7년에 시간을 거쳐서 이루어진 잔학한 행위였다. 한국 정부 손에는 30,000 제주 시민들의 피가 묻혀있었다. 그러나 정부는 사과하지도 않고, 제주 4.3에 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처벌했다. 1978년, 현기영 작가는 <순이 삼촌>이라는 소설을 냈다. <순이 삼촌>은 제주 4.3사건의 지옥과 비슷한 환경을 보여줬다. 출판된 후, 현기영 작가는 중앙정부에서 잡히고 고문을 받았고, <순이 삼촌>은 금지됐었다. 2003년, 50년 후, 노무현 대통령이 공식적인 사과를 처음으로 했다.
나는 7일 동안 제주도의 상큼한 공기와 아름다운 자연을 감탄하면서 제주 4.3의 역사를 배웠다. 그 일주일 중 하루, 나는 <제주 4.3을 묻는 너에게>의 작가, 허영선 선생님의 강의를 듣고 이야기를 나눌 시간을 가졌다. 강의가 끝나고 질문도 거의 끝나 갈 때, 허영선 선생님께서 우리한테 도움을 요청했다. “어떻게 해야 제주 4.3을 더 알릴 수 있을까? 한국에서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어떻게 알릴 수 있을까? 제주 4.3을 어떻게 알려야 잊히지 않는 역사가 될까?”
나는 제주도에서 남았던 시간 동안, 허영선 선생님의 질문을 생각하고 다시 생각하고 또다시 생각하게 됐다. 아직도 정확한 답변을 생각하고 있지만, 지금까지 한 생각의 결론은 이것이다. 허영선 선생님께서 제주 4.3을 알리는데 충분한 일을 하셨다. 15년간 제주 4.3을 우리 같은 사람들을 위해 알리려고 연구하셨고, 책도 쓰셨고, 시집도 쓰셨다. 이제 우리는 제주 4.3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제주 4.3에 대해 공부를 하고, 직접 만난 사건이 됐다. 우리가 제주 4.3을 모르는 사람들한테 알려주고, 잘못 아는 사람한테는 정확히 알려 줘야 한다.
내가 어린아이의 무명 묘지 앞에 서 있었을 때, 나는 기억했다.
내가 바다의 푸른 소리를 들으면서 올레길을 걸었을 때, 나는 기억했다.
내가 곶자왈에서, 햇빛과 흙의 자연적인 화합을 느끼며 걸었을 때, 나는 기억했다.
내가 흰 눈으로 덮인 한라산을 걸으면서 해가 뜨는 것을 봤을 때, 나는 기억했다.
이제, 묘지를 볼 때마다, 바닷소리를 들을 때마다, 자연의 화합을 느낄 때마다, 해의 탄생을 볼 때마다, 나는 해체된 가족들을 기억한다. 이름을 모르거나 없는 아이들을 기억한다, 30,000명의 삶을 기억한다. 잊히면 안 되는 역사를 기억하면서, 나는 내 동생한테 가르쳐줬다. 한 발자국씩, 한 사람씩 알리면, 제주 4.3은 잊히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