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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좌경을 딛고
1961년 11월 미국 방문길에 일본을 찾은 박정희 (朴正熙)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공항에서부터 시위대에 시달려야 했다. 수만명이 공항 입구에서 '살인마 박정희를 타도하자' '군대깡패 두목 물러가라' 를 외치고 있었다. 혁신계 신문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 (趙鏞壽) 씨가 조총련 자금을 지원받은 혐의로 5.16 직후 혁명재판소에서 사형선고를 받은데 대한 조총련의 항의시위대였다. 설명을 들은 박정희는 "돌아가면 빨갱이를 더 잡아넣어야 되겠구먼" 하고는 말문을 닫았다. 76년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당시 박정희는 "미친 개에는 몽둥이가 약" 이라며 대북 (對北) 군사보복 방안을 극비리에 세워 정면 대응하려 했으나 미국의 강한 저지로 결국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박정희가 대통령 재임시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다는 증거는 많다. 국시 (國是) 도 반공이었다. 일부에서는 그를 극우로 분류하기도 한다. 그런 박정희가 한때 좌익에 연루됐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49년 2월초 서울 명동의 구 증권거래소 건물 3층에 위치한 육본 정보국장실. 한 장교가 백선엽 (白善燁.77.예비역 육군대장.현 한국후지쯔 고문) 정보국장 (당시 대령) 과 면담하고 있었다. 작업복 차림을 한 그는 당시 육본 정보국 제1과 (전투정보과) 과장 박정희 소령이었다. 朴소령이 입을 열었다. "나를 한번 도와주실 수 없겠습니까. " 생사의 갈림길에서 지푸라기를 잡으려는 朴소령의 태도는 뜻밖에도 시종 의연했다. 계급은 아래지만 나이로는 세살 위인 朴소령의 인품에 대해 들은 바 있던 白국장은 그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도와드리지요. " (백선엽씨 증언) 白국장의 이 한마디가 朴소령의 목숨을 건지는 출발점이 됐다. 당시 朴소령은 군부내 남로당 거물 세포 (조직원) 로 지목돼 군 수사당국에서 조사받고 있었다. 해방후 미군정은 '불편부당 (不偏不黨)' 을 내세워 공산당 활동을 인정했다. 군 입대자의 신원조회도 금지되고 있어 공산당 조직의 군 침투가 용이했다. 48년 10월19일 여수 14연대의 반란을 계기로 군내 좌익세력에 대한 숙군 (肅軍) 문제가 본격적으로 대두됐다. 숙군작업의 주체는 육본 정보국 제3과 (특무과). 한편 태릉의 1연대에서는 자체 숙군작업이 진행중이었다. 나중에 '스네이크 (뱀)' 란 별명과 함께 숙군작업의 핵심인물이 된 특무부대장 김창룡 (金昌龍.작고) 은 당시 이 부대의 정보주임이었다. 김창룡은 일제 당시 만주에서 일본군 헌병보를 지내면서 사상범을 다뤘던 경력이 있었다. 그는 모든 사람을 일단 공산주의자로 보고 의심나면 족치기부터 했다. 朴소령이 김창룡팀에 체포된 것은 48년 11월11일. 그가 여순사건 반란군 토벌에 참여했다가 서울로 돌아온지 불과 며칠 뒤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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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룡은 남로당 군사총책 이재복 (李在福.숙군때 사형) 의 비서겸 군사연락책 김영식 (金永植) 을 붙잡아 군내 좌익세포 명단을 통째로 입수했다. 당시 육본 특무과장으로 숙군 실무책임자였던 김안일 (金安一.80.예비역 육군준장.현 목사) 씨의 증언. "김영식을 데리고 전국의 군부대를 돌면서 남로당 세포를 찍으라 했더니 이후 수사는 주워담기만 하면 됐습니다. 그런데 이 명단 속에 바로 박정희 소령의 이름이 포함돼 있었습니다. " 박정희가 처음 잡혀간 곳은 신세계백화점 근처 서울헌병대. 이곳 영창에서 1주일을 보낸 그는 다시 서대문형무소로 옮겨졌다. 여기서 수사관들로부터 모진 고문을 받았는데 이를 두고 박정희는 생전에 "김창룡의 고문에 못이겨…" 라고 언급한 바 있다. 박정희는 명단 속에 군부내 좌익거물로 돼 있었는데 어떻게 목숨을 건질 수 있었을까. 만군인맥과 육사인맥의 구명운동도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김창룡등 수사팀이 구명건의를 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왜 그랬을까. 당시 관계자들의 증언은 한결같다. 朴소령은 수사과정에서 군부내 남로당 세포명단을 자진해 모두 털어놓는등 수사에 적극 협조했다는 것이다. '박정희 리스트' 의 위력은 대단했다. 김창룡팀은 마치 고구마 캐듯 좌익세포들을 줄줄이 잡아들였다. 김안일씨는 "朴소령을 살려주자고 최초로 제의한 사람은 바로 그를 수사한 김창룡대위였다" 고 증언했다. 박정희와 육사 동기생 (2기) 인 김안일씨는 김창룡의 건의를 받아들여 직속상관인 백선엽국장과 朴소령의 면담을 주선했다. 백선엽씨의 증언. "49년초 김안일 특무과장이 찾아와 박정희 소령과 면담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金과장은 朴소령이 군내 침투 좌익조직을 수사하는데 적극 협조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朴소령과 면담했는데 죄과를 솔직히 인정할 뿐더러 그 상황에서도 전혀 비굴하지 않더군요. " 자유당 정권에서 헌병사령관을 지냈던 원용덕 (元容德.만군 대좌출신.작고) 장군도 이 일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그는 박정희의 만주군관학교 생도시절 이 학교 군의관으로 있었는데 박정희를 몹시 아꼈다고 한다. 정일권 (丁一權.작고) 전국무총리 (당시 육군 참모부장) 도 이 대열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반론도 만만찮다. 김점곤 (金點坤.74.예비역 육군소장.현 평화연구원 원장) 씨는 "당시 丁씨는 김창룡으로부터 의심을 받고 있던 상황이어서 朴소령 구명에 나설 입장이 못됐다" 고 밝혔다. 정보국에서 朴소령과 같이 근무했던 유양수 (柳陽洙.74.예비역 소장.전 동자부장관) 씨도 같은 증언을 했다. 박정희 일행의 군사재판에서 재판장을 맡았던 김완룡 (金完龍.74.초대 육본 법무감) 씨는 "당시 나와 약수동 앞뒷집에 살던 송요찬 (宋堯讚) 장군도 朴소령을 살려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다" 고 증언했다. 朴소령은 이 과정에서 좀 무리했던 모양이다. 김재춘 (金在春.70) 씨의 증언. "제가 63년 중앙정보부장 취임 직후 부내 고위직에 민복기 (閔復基.84.전 대법원장) 씨를 임명하기 위해 朴의장의 승낙을 받으러 갔습니다. 그런데 朴의장이 '내가 마음의 빚을 지고 있는 사람이 하나 있는데 金부장이 그 사람을 좀 돌봐줬으면 좋겠다' 며 오히려 내게 부탁하더군요. 그래서 결국 그 자리에 부탁받은 인물을 앉히고 閔씨는 대신 법무장관으로 돌렸습니다. " 박정희가 마음의 빚을 지고 있었다는 인물은 박정희가 자신의 세포라고 불었던 사람이었다. 朴정권 시절 이 인물은 군 참모총장직까지 올랐다. 억울한 고생을 시킨데 대한 보상 차원이 아니었나 짐작될 뿐이다. 군 상층부에서는 朴소령을 살리기로 결정하면서 그를 배신자로 낙인찍히게 만드는 '묘책' 을 썼다. 전국 각 부대로 끌고다니며 朴소령이 직접 공산당 세포를 찍게 만들었다. "좌익활동을 적극적으로 하지는 않은 것으로 판단되지만 남로당에 가입돼 있다 하더라도 다시는 활동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 는 취지였다. 재판은 석방을 위한 요식행위였다. 그는 구속 1개월여만인 48년 12월말께 서대문형무소에서 풀려났다. 49년 2월8일 구 통위부 (현 코리아헤럴드사 뒤편) 장교식당을 임시법정으로 군사재판이 열렸다. 정복차림에 이발까지 한 단정한 모습으로 입정한 박정희는 재판관의 신문에 순순히 남로당 가입사실을 시인했다. 형량은 파면과 동시에 무기징역.급료몰수. 당시 재판장이었던 김완룡씨는 "朴소령은 잘못을 뉘우치고 전향한데다 그의 명망을 높이 산 군 수뇌부의 선처로 목숨을 건졌다" 고 증언했다.
35.5.16 혁명
박정희 (朴正熙) 는 언제, 어떻게 좌익세력과 연계됐을까. 청와대 비서관을 지낸 김종신 (金鐘信.67.전 부산문화방송 사장) 씨는 69년초 군시절 상관이자 朴대통령의 육사 동기인 정강 (鄭剛.육군 준장 예편.작고) 장군을 만난 적이 있다. 鄭씨는 평소 박정희의 좌익 전력에 의혹을 품어오던중 5.16이 나자 '빨갱이가 나라를 뒤엎는' 줄 알고 진압에 나섰던 인물이다. 돌아와 박정희에게 鄭씨 얘기를 하던중 金비서관은 당돌한 질문을 했다. "정강장군 말로는 각하께서 한때 빨갱이를 했다고 하던데요. " 박정희는 의외로 담담했다. 잠시후 이어진 그의 설명. "해방후 만주에서 구미 친가로 돌아왔더니 형님 (朴相熙) 이 '그동안 어디서 뭘 했느냐' 고 묻더군. '만주에서 광복군에 있었다' 고 했더니 형님이 '그런 데를 왜 갔느냐' 며 못마땅해 하시는 눈치였어. 나는 그때 형님이 좀 불그스름하다고 생각했지" 박정희의 얘기는 계속된다. "내가 육사 교관 (대위) 으로 있을 때야. 하루는 대구에서 형님 친구 (李在福.남로당 군사부 총책.숙군때 처형됨)가 찾아와 '이번 일요일에 향우회가 있는데 같이 가자' 고 하더군. 육사 교관생활이 따분하기도 한데다 그 분이 '자네를 위한 모임이니 꼭 나오라' 고 해서 참석했지. 그런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날 모였던 형님 친구들이 모두 빨갱이였어. 나는 거기서 (입당원서에) 사인하거나 도장을 찍은 적은 없지만 그 모임에 참석한 것이 화근이 된 것같아. 그일로 김창룡 (金昌龍.자유당시절 특무대장) 한테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고 재판도 받았지. " 이 얘기가 사실이라면 박정희는 억울하다. 남로당에 가입한 적도 없는데 모임에 한번 참석한 이유로 고문당하고 재판을 받았다는 얘기다. 과연 박정희는 억울한가. 숙군작업 실무책임자 김안일 (金安一.80.예비역 육군 준장) 특무과장은 조사과정에서 박정희 소령의 자술서를 직접 읽어본 몇 안되는 사람이다. "朴소령은 김창룡에게 붙들리자마자 '이럴 때가 올줄 알았다' 면서 순순히 자술서를 쫙 써내려 갔다고 합니다. 육사 재학시절 형 박상희가 대구 10.1사건에 연루돼 구미에서 경찰의 총에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집에 내려가 보니 형 친구인 이재복이 유족들을 잘 보살펴주고 있더랍니다. 이재복은 박정희에게 '공산당 선언' 등 불온책자를 건네주면서 남로당 가입을 권유했고, 또 형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고 부추기더랍니다. 자술서 내용으로 보면 박정희는 인간관계에다 형님에 대한 복수심 때문에 남로당에 가입한 것같았습니다." 金씨의 증언대로라면 박정희가 남로당에 가입한 것은 사실이다. 다만 박정희는 사상적인 좌익이라기보다 인간관계에 얽힌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박정희는 언제, 어디서 남로당에 가입했는가. 해방 이듬해 5월 만주에서 돌아온 박정희는 그해 9월 조선경비사관학교 (육사 전신) 2기로 입학, 12월14일 소위로 임관했다. 첫 부임지는 춘천 8연대 예하 경비중대. 중대장은 1기 선배인 김점곤 (金點坤.74.예비역 육군 소장.현 평화연구원장) 중위로, 그는 金중위 밑에서 제4경비초소장을 맡았다. 이듬해 (47년) 봄 박정희는 연대 작전주임 (대리) 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9월26일 육사 중대장으로 전보됐다. 임관후 그는 9개월 정도 춘천 8연대에서 근무했다. 그러나 육군본부에 보관돼 있는 그의 '장교자력표' 엔 이때의 기록이 없다. 이 공백을 8연대에서 박정희와 같이 근무했던 3기생 염정태 (廉貞泰.73.육군 대령 예편) 씨가 메워준다. 廉씨의 증언. "사관학교 다닐 때부터 朴전대통령의 명성을 들었습니다. 수재에다 인품도 훌륭하다고 소문이 나 있었죠. 그래서 나는 첫 부임지가 8연대란 얘기를 듣고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가보니 당시 8연대는 빨갱이 소굴이었습니다. 연대내 좌익총책이자 부연대장인 이상진 (李尙鎭.신경 2기.당시 소령).정보주임 김종국 (당시 소위) 등이 주동자였는데 모두 만군 출신으로 朴전대통령과 친했습니다. 朴전대통령도 이들과 어울리는 과정에서 포섭됐다고 봅니다." 김점곤씨는 박정희의 '춘천시절 가입설' 을 확신하고 있다. 그의 증언. "박정희의 춘천 8연대 근무시절 남로당 군사부 총책 이재복이 춘천까지 찾아가 그를 만나곤 했습니다. 그때 박정희는 나에게 이재복을 '숙부' 라고 소개했습니다. 나중에 숙군때 박정희의 조서를 봤더니 그를 통해 입당했다고 돼 있더군요. 당시 박정희는 우수한 자질에다 빈농 출신, 그리고 친형에 대한 원한 등으로 좌익의 포섭대상 1호였다고 봅니다." 육사 3기생중에는 좌익 연루자가 많았다. 동해안 일대의 좌익총책이었던 강문영 (康文榮) , 여순사건의 주모자 김지회 (金智會).홍순석 (洪淳錫) 등이 모두 3기생이었다. 이들은 생도시절 생도대장 오일균 (吳一均.당시 소령) 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조사됐다. 박정희도 오일균과 친했다. 오일균과 관련한 박정희의 일화 한 토막. 60년대 중반 朴대통령이 지방순시차 충북 청원을 지날 때였다. 동승했던 이 지역 출신 신범식 (申範植.작고) 당시 청와대 대변인이 "각하, 저기가 오일균이 살던 동네입니다" 라고 설명하자 갑자기 박정희가 "어디, 어디" 하더니 그 마을을 한참동안 멍하게 쳐다보더라는 것이다. 박정희의 가슴속에 오일균의 그림자가 아직 남아 있는 것같았다고 申씨가 한 후배 언론인에게 털어놓은 적이 있다. 申씨의 부친은 일제때 좌익항일운동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정희의 주변엔 숙군때 좌익활동 혐의로 처형 또는 처벌된 인사들이 많았다. 일본 육사 출신 오일균 (61기).김종석 (金鍾碩.56기).조병건 (趙炳乾.60기).김학림 (金鶴林.60기) , 만군 출신 최남근 (崔楠根.봉천 5기).이상진 (李尙鎭.신경 2기).이병주 (李丙胄.신경 2기) 등이다. 이들은 해방 전부터 박정희 (신경 2기.일본 육사 57기) 와 선.후배로 연결돼 있었다. 그러나 박정희가 실제 좌익활동을 한 흔적은 없다. 그래서 숙군 태풍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한때의 좌익 연루 혐의는 박정희의 군시절은 물론 대통령이 된 후에까지 그를 괴롭혔다. 한국보다 미국쪽에서 더 심했다. 5.16은 박정희가 '좌익콤플렉스' 의 벼랑에서 탈출구로 시도한 일대모험이었다는 주장이 그래서 나온다. 5.16 직전 박정희는 미군측으로부터 요시찰 인물로 지목돼 감시를 받고 있었다. 김점곤씨의 증언. "5.16전에 미 8군 댄스턴 정보국장이 매그루더 사령관의 친필 메모를 들고 나를 찾아왔더군요. 그는 20여명의 한국군 장교 명단을 하나씩 보여주면서 그들의 좌익 관련 여부를 물었습니다. 그 속에 박정희 장군도 들어 있었습니다. '朴장군은 과거에 공산당을 한 적이 있지만 지금은 아니다. 별을 두 개나 단 사람이 기득권을 버리고 공산당으로 가지 않을 것' 이라고 대답했지요." 한무협 (韓武協.74.육군 소장 예편) 씨의 증언도 같은 맥락이다. "민주당 시절 이종찬 (李鍾贊) 장군이 장면 (張勉) 총리에게 박정희장군의 중용을 건의한 적이 있습니다. 張총리가 이 문제를 매그루더와 논의했습니다. 얼마 후 매그루더가 육본으로 朴장군의 신원조회를 요청했는데 당시 육본 고위 당국자가 '朴장군은 좌익' 이라고 답변했지요. 이에 매그루더가 '그런 사람을 어떻게 그런 요직 (육본 작전참모부장)에 앉혔느냐' 며 육본측에 항의했고 며칠 후 朴장군은 2군 부사령관으로 전보됐습니다." 당시 박정희 밑에서 육본 작전참모부 차장으로 있었던 김안일씨는 "당시 朴장군은 군에서 추방되기 전에 거사해야 한다는 쫓기는 기분에서 거사를 계획한 것같다" 고 증언했다. 5.16 직후에도 미국은 박정희의 사상에 대한 의혹을 버리지 못했다. 군사정권 초기 미국과 일본의 관심사는 이 문제였다. 말년에까지 이어진 박정희와 미국의 갈등은 오랜 연원을 가진 셈이다. 63년 5대 대통령선거 투표일 전날 윤보선 (尹潽善) 후보는 박정희후보의 좌익 연루설을 제기해 파문을 일으켰다. 이 문제는 그러나 선거 직후 尹후보가 朴당선자에게 축하전화를 하면서 유야무야됐다. 박정희가 재임기간중 좌익문제에 유별나게 민감한 반응을 보인 저변에는 좌익 콤플렉스가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지금은 누구도 박정희를 좌익과 연계시키는 이는 없다.
36.로맨스
박정희 (朴正熙) 전대통령은 육영수 (陸英修) 여사와 재혼할 때까지 남몰래 간직한 로맨스가 몇가지 있었다. 오랜 객지 생활및 첫부인과의 행복하지 못했던 결혼생활 때문에 陸여사를 만나 정착할 때까지 여성을 향한 방황은 계속됐다. 그는 술이 취하거나 옛 친구를 만나 기분이 좋을 때 가끔 추억담을 풀어놓곤 했다. 66년 1월27일 오전 경북 예천역 광장. 혹한에도 불구하고 시골역 광장은 장날처럼 북적거렸다. 일제가 소위 '대동아전쟁' 을 치르는 과정에서 철로를 걷어간 경북선 (예천~점촌) 의 재개통식이 열리고 있었다. 정각 10시가 되자 역광장에 마련된 연단 위로 朴대통령이 모습을 나타냈다. 짧은 머리에 검은색 겨울코트를 걸친 朴대통령은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20여분간 기념사를 했다. 朴대통령이 연단 아래로 내려서자 군중 속에서 50대 초반 한복차림의 여인이 다가섰다. 이 여인은 朴대통령의 손목을 잡고는 "정희야…" 하고 부르고는 북받치는 감정을 이기지 못해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누님, 진정하세요. " 朴대통령은 이 여인을 다독거리며 위로했다. 두 사람에게는 예천역이 '이별의 플랫폼, 만남의 플랫폼' 이었다. 주위 사람들이 朴대통령의 친누님으로 여긴 이 여인은 주현숙 (朱賢淑.84.재미) 씨. 朴대통령보다 네살 연상이다. 최초로 공개되는 두 사람의 얘기는 朴대통령이 대구사범을 다니던 193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32년 봄 구미보통학교를 졸업 (11회) 한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에 진학했다. 당시 대구사범은 경성사범.평양사범과 더불어 지방의 수재들이나 들어가던 명문. 지방학생들은 전원 기숙사 생활을 했다. 통학열차에는 학생들의 풋사랑 얘기가 깃들여 있다. 박정희가 주현숙씨를 만난 것도 통학열차에서다. 평소 동기생 사이에서도 붙임성이 없어 외톨이였던 박정희. 그는 열차에서 만난 '누나' (당시 대구 간호학교 재학중)에게 특별한 호감을 가졌다. 두 사람은 당시 학생사회에서 유행하던 S - B (Sister - Brother.누나 - 동생) 관계를 맺었다. S - B는 요즘의 애인과는 다른 의미다. 한 전직 언론인의 해묵은 취재수첩에서 두 사람의 로맨스를 되살려보자. 지난 10월 60대 초반의 중년신사가 취재팀을 찾아왔다. 그는 60년대 대구일보에서 기자생활을 한 이종립 (李鍾立.62.세진중기 이사) 씨. 李씨는 경북선 개통식 취재현장에서 우연히 두 사람의 사연을 알게 됐다. "제가 선산 출신이어서 평소 朴대통령 가족에 대해 잘 알고 있는데 아무리 봐도 친누님이 아니었습니다. 행사후 예천경찰서 서장실로 쫓아가 그 여인의 신상명세를 요구했지요. 서장은 '이 내용이 보도되면 내 모가지가 잘린다' 면서 한사코 거절했습니다. 그래서 '각하의 명예에는 문제가 없도록 하겠다' 며 설득했더니 정보계장을 불러 알려주더군요. " 계속되는 李씨의 증언. "朴대통령과 朱여사는 누나 - 동생으로 지냈다고 합니다. 朴대통령이 문경 교사 시절 때도 '집보다 여기가 가깝다' 며 토요일마다 예천의 朱여사댁 (예천) 으로 놀러오곤 했었대요. 그때 두 사람 모두 결혼한 상태였는데 朴대통령은 '마누라가 꼬집어대서 못살겠다' 는 얘기를 자주 했답니다. 언젠가 (1939년말) 朴대통령이 놀러와서는 '군인이 돼 높은 사람이 돼서 오겠다' 며 일본군가.혁명가를 부르더랍니다. 그리고 며칠후 다시 와 '누님, 내일이면 헤이다이상 (군인) 이 되러 갑니다. 술 좀 사주십시오' 해서 술을 사주었고 朴대통령은 다음날 예천역에서 만주로 간다며 떠났대요. 그후 두 사람은 朴대통령이 2군 부사령관으로 있을 때 朱여사가 면회를 가서 22년만에 재회했다고 합니다. 떠날 때 朴대통령이 '내일 나라를 구하기 위해 서울로 갑니다' 하길래 뭔지도 모르고 그냥 '잘 갔다 와라' 하고 헤어졌는데 그로부터 2, 3일후 5.16 소식을 들었답니다. " 박정희가 첫부인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배경에는 결혼 전부터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던 '누님' 이 있었을지 모른다. 아버지가 맺어준 '시골색시' 보다 도시에서 대학을 다니던 누님에게 마음이 쏠렸을 수 있다. 젊은 시절 박정희는 애정에 목말라 있었다. 그런 그에게 3년간 교사로 있었던 문경은 제2의 고향이었다. 그는 만주군관학교 시절 휴가도 이곳에서 보내고 돌아갔다. 당시 문경에는 그가 마음을 쏟고 있던 또 한명의 여성이 있었다. 교사 시절 박정희는 자신의 결혼 사실을 감추고 한동안 '총각선생님' 행세를 했다. 그래서 더러 중매가 들어왔지만 기혼자임을 밝히지 않았다. "朴선생님은 제자 정순옥 (鄭順玉.72.부임당시 5학년) 을 제자 이상으로 좋아했습니다. 朴선생님은 정식으로 청혼까지 했는데 순옥씨의 부친이 '저 친구는 잘되면 큰인물, 못되면 역적이 될 사람' 이라며 반대했다고 합니다. 5.16 후에도 朴선생님은 다른 제자를 통해 순옥이의 행방을 수소문했다고 들었습니다. " (제자 Q씨의 증언) 당사자 정순옥씨의 얘기. "저보다 언니와 혼담이 오갔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교사 출신이었던 부친은 朴선생님에게 '장인이라고 불러라' 고 까지 말했는데 나중에 朴선생님의 형님이 오셔서 결혼 사실을 얘기하는 바람에 유야무야됐습니다. 朴선생님이 저에게 잘 해주신 것은 분명합니다. 만주에서 오시면서 분홍 비단손수건을 사다 주신 적도 있고 언젠가 내가 창씨개명한 이름으로 편지를 보냈더니 '나는 순옥이라 부르겠다' 며 본래 이름으로 답장을 보냈더군요. 또 어느해 겨울 아버지 직장이 있던 울산에 다녀왔더니 마침 만주에서 휴가를 나오셨던 朴선생님이 '순옥이가 없어서 서운하다' 는 얘기를 친구들에게 하셨대요. " 당시 이 학교에 재학중이던 鄭씨의 사촌동생 정복영 (鄭復泳.66) 씨는 "누구에겐가 내가 朴선생님의 '연애편지' 를 전달했던 적이 있어요. 내가 손을 못대게 책보 뒤에 편지를 꽂아주면서 아무개한테 갖다주라고 그랬습니다. " 해방후 만주에서 돌아온 박정희는 다시 군인의 길로 나섰다. 그러나 그는 당시 이데올로기 혼돈 속에서 좌익에 연루돼 군에서 파면 (49년) 됐다. 48년 대구 10.1폭동사건 때 형 (상희) 이 피살됐고 그의 파면 석달 뒤에는 모친이 별세했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동거하던 여성마저 잃게 됐다. 당시 박정희는 李모 (작고) 라는 이화여대생과 사랑하는 사이였다. 두 사람은 47년 12월 춘천 8연대에서 경리장교로 있던 박경원 (朴璟遠.74.예비역 육군 중장.전 내무장관) 씨의 결혼식에 들러리로 참석했다가 만난 사이였다. 상대편에 반한 쪽도, 적극성을 보인 쪽도 박정희였다. 며칠 지나지 않아 李여인은 박정희의 서울관사에서 동거에 들어갔다. 육본 전투정보과에서 박정희와 같이 근무했던 한무협 (韓武協.74.예비역 육군 소장) 씨의 증언. "아주머니는 성격이 사근사근한데다 멋쟁이였습니다. 朴대통령이 푹 빠져 지냈죠. 그런데 아주머니 성격이 불같아서 화내면 朴대통령도 쩔쩔 맸습니다. 朴대통령이 재판받고 나온 뒤 어느 여름날일 겁니다. 비가 부슬부슬 오는데 아주머니가 트럭을 불러다 놓고 짐을 싸더군요. 우리 부부가 가서 이러시면 안된다며 트럭을 막고 말렸으나 막무가내였습니다. 그후 다시 못만났습니다. " 李여인은 임신도 몇차례 했는데 입덧과 히스테리가 심해 번번이 유산했다고 한다. 박정희는 가출한 李여인을 몇번이나 찾아 데려올 정도로 정을 쏟았다. "50년 9월 서울수복 직전 부산 범일동에서 朴대통령과 단둘이 술집에 간 적이 있습니다. 한 여자가 들어오다가 갑자기 후닥닥 내빼더군요. 그러자 朴대통령이 '저×이 결국 술집으로 돌았네. 애는 어쨌는지…' 하시더니 '에이, 그냥 가자' 고 해서 술도 못마시고 나온 적이 있습니다. 가출한 둘째 부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 (Z씨 증언) 이 사건 이후로 두 사람의 관계는 끝났다. 그러나 '그를 버린 여인' 에 대한 박정희의 미련은 한동안 남아 있었다. 5.16후 박정희는 최고회의 취재기자로 활동하던 李여인의 동생을 불러 누나의 안부를 묻기도 했다. 李씨가 기자생활을 그만두자 박정희는 그의 일자리도 봐주었다. 사랑을 찾아 헤맨 박정희의 긴 방황은 6.25를 계기로 막을 내렸다. 그는 전화 (戰火) 속에서 새로운 사랑을 꽃피우기 시작했다. 육영수여사와의 만남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