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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외할머니의 캐릭터도 흥미롭다. 우리가 생각하는 전통적인 할머니의 모습이 아니다.
일종의 신경증적인 결벽증 환자 같은 느낌이 든다.
외할머니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진공청소기를 돌리고, 일주일에 네 번 빨래를 하고, 심지어 한밤중에 잠자리에 들기 전에 화장실 청소를 한다. 저녁 먹은 접시를 싱크대에 그냥 담가두는 일은 절대 없고 바로 식기세척기에 넣고 돌린다. 한번은 코너가 밥을 다 먹기도 전에 외할머니가 접시를 치워 버린 적도 있다.
"내 나이의 여자가 혼자 살면서, 스스로 매사에 철저하지 않으면 누가 해 주겠니?" 113~114쪽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명확하게 캐릭터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코너가 처한 고립된 상황을 더욱 고립되게 만드는 할머니의 캐릭터는 여기에서는 이야기에 긴장감을 가져오게 하는 조연의 역할로 아주 성공적이다.
2
코너가 아빠를 만났을 때 꺼내는 나무 정령 이야기는 가슴을 아프게 한다.
아빠는 정령을 믿지 않는다. 믿지 않는다는 표현보다는 정령으로 대신할만한 엄마의 죽음을 두고 어떤 고조된 감정의 액체가 몸에서 흐르지 않는다는 말이다. 무감각하다는 말이다. 공감이 없이, 그저 남대하듯이 한다는 말이다. 이혼을 하였고, 엄마를 투사로 표현하는 아빠와 엄마의 관계가 어땠는지도 상상해 볼 수 있다. 이 작품이 흥미로운 점은 어떻든지 간에 현실의 팩트를 미화시키거나 적당히 얼버무리며 도덕적으로 그럴듯하게 어른스런 말을 쓰거나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엄마 아빠 간의 미묘한 갈등은 갈등대로, 그리고 코너가 바라보는 아빠에 대한 애정과, 엄마의 죽음 뒤에 아빠와 함께 살고 싶어하는 속마음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코너는 이런 현실 상황으로 인한 인격의 전체성을 고려하면서 주목 정령 이야기를 아빠에게 하고 있다. 아빠는 헛것을 본다고 코너를 이상하게 보지만, 코너에게는 절실한 자기 감정의 상징 표현인 것이다.
판타지를 이해하는 사람과, 판타지 세계에 들어가지 못하고 현실의 표층에 머물러 있는 사람 사이에 벌어지는 미묘한 언어의 차이, 존재를 보는 관점의 차이, 사유의 차이, 감각과 감성의 차이, 이 모든 미묘한 지점을 글을 쓰려는 사람들은 감각으로, 논리로 양쪽을 다 넘나들며 느끼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역시 쉽지 않은 일이다.
"나무가 절 찾아와요. 밤에 집으로 찾아와서 이야기를 들려줘요." 122쪽
코너가 얼른 말하며 콜라 병의 종이 라벨을 벗겨 내기 시작했다.
"뭐라고?"
아빠는 당황해하며 눈을 깜박였다.
"처음에는 꿈인 줄 알었어요. 그런데 일어나 보면 나뭇잎이 있고 마룻바닥에서 조그만 나무가 자라 있어요. 아무도 모르게 하느라 계속 숨겼어요."
코너가 엄지손톱으로 라벨을 긁어내며 말했다.
"코너!"
"외할머니 집으로는 아직 찾아오지 않았어요. 너무 멀리 있어서 그런 건가."
"대체 무슨......?"
"하지만 그게 꿈이든 아니든 무슨 상관이에요? 꿈이 거리를 돌아 다니지 못할 이유가 있어요? 땅처럼 오래 되었고, 세상만큼 크다면요."
"코너, 그런 얘기 그만......"
"외할머니랑 같이 살기 싫어요."
코너가 말했다. 목소리가 갑자기 크고 굵게 나왔고 목이 메는 것 같았다. 코너는 콜라 병 종이 라벨에 시선을 단단히 고정하고 엄지손톱으로 젖은 종이를 벗겨냈다. (122쪽)
-아빠에게 코너가 자신의 속내를 말하기 전에, 먼저 나무 정령 이야기를 꺼냈다. 코너는 자신이 나무 정령에 사로잡힌 상태, 인첸티드된 상태, 마법에 걸린 상태, 신화의 공간이 현실에 침입해 들어온 상태.... 이런 상태임을 먼저 말하고, 그 다음에 왜 아빠랑 살면 안되냐, 미국으로 가면 안 되냐고 따진다. 자신의 욕망, 바람을 말하는 것이다.
언제 이렇게 나무 정령에게 사로잡히는가, 이런 절실하고 간절한 바람을 간직할 때, 그 사람에게 정령이 찾아온다는 것 또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욕망이라는 것을 결핍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욕망이 있기 때문에 강한 감정이 고조된 상태에 빠져들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마주치는 존재는 정령으로 한 단계 더 변신을 한다.
3.
아동문학은 결국 아이들 생활의 범주가 가족이 중심이다. 가족주의에서 아이들은 벗어나기 힘들다. 엄마 아빠 아이로 이어지는 이 삼각형에 대한 깊은 탐구는 아동문학에서 가장 기본적인 과정이다. 그러나 이 점이 결코 쉽지가 않다. 작품을 쓸 때, 늘 주인공 아이를 기점으로 엄마와 아빠의 관계를 생각해야 하는데, 이 가족관계에서 고립된 아이를 캐스팅하고, 절실한 삶의 과정 속에 아이가 놓여있게 만드는 것 자체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지금 코너만 봐도 그렇다. 이 작품이 성공적인 이유는 일단 가족주의 삼각형에서 엄마는 시한부 인생의 삶을 살게 되었고, 문제의 또 한 축인 아빠와의 관계를 회피하지 않고 제대로 그리기 때문에, 코너란 주인공 인물이 계속 입체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아빠와의 관계를 드러내는 또 하나의 장면도 흥미롭다.
시계를 파괴하고 나서의 장면이다.
제대로 된 파괴로 끝이 나지. 네가 원하는 게 파괴라면 말이다.
코너는 몬스터를 돌아보았다. 몬스터 얼굴이 일그러져 사악한 웃음으로 바뀌었다.
"이것도 속임수야? 이러저러하게 끝날 것 같다가 전혀 다르게 끝나는 거냐고?"
코너가 물었다.
아니. 자기 생각만 했던 남자의 이야기다. 아주아주 끔찍한 벌을 받지.
몬스터가 말했다. 몬스터는 다시 웃었는데 더더욱 사악하게 보였다.
코너는 잠시 숨을 색색 쉬며 서 있었다. 망가진 시계, 마룻널에 날 긁힌 자국, 깨끗한 외할머니의 거실 바닥에 몬스터가 툭툭 떨구고 있는 독이 든 열매를 둘러보았다.
코너는 아빠를 생각했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해 봐." (134쪽)
-코너는 아빠가 끔찍하게 벌을 받는, 파괴되기를 바라는 그런 내면의 욕망 같은 걸 드러내고 있다.
4
목사의 믿음은 이기적이고 비겁했다. 그래서 딸들이 목숨을 잃고 만 것이다. 이기심 때문에 벌을 받은 사람의 이야기.
코너는 아빠를 투사하고 있다. 몬스터는 같이 하자고 하면서 무얼 부술까 묻는다.
몬스터가 물으며 또 다른 몬스터가 있는 자리로 갔다. 눈앞에 끔찍하게 흔들리더니 두 몬스터가 합해져 전보다 엄청나게 큰 몬스터 하나로 바뀌었다.
네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
몬스터가 말했다.
코너는 숨이 다시 거칠어지는 걸 느꼈다.
가슴이 쿵쾅거렸고 열기가 온 몸을 달뜨게 했다. 코너는 조금 더 기다렸다.
그러고 나서 말했다.
"벽난로를 무너뜨려."
곧바로 몬스터의 주먹이 돌로 된 난로를 토대에서부터 후려갈겨 쓰러뜨렸다. (149쪽)
-이제는 몬스터가 코너의 내면 욕망을 그대로 대신 살아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죄책감을 가진 존재는 그 만큼의 분노의 감정 또한 밖으로 쏟아낼 수 있는 존재이다. 내가 나를 벌주려고 하는 에너지만큼, 남을 벌주려고 하는 에너지도 같은 양으로 뻗어나올 수 있는 것이다. 우울증 환자는 그만큼의 에너지를 밖으로 폭발해 낼 수도 있는 존재이다. 에너지의 방향이 어디로 향하느냐만 다를 뿐이다. 심리 에너지의 강도가 한 군데로 쏠려 강하게 집약되어 있는 상태이다. 리듬을 타지 못하고 경직되어 있는 상태이다. 유머를 잃어버린 상태이다.
엄마는 몬스터를 보고 있고, 코너도 몬스터를 보고 있다. 그런데 아빠는 몬스터를 보지 못한다. 할머니도 몬스터를 보지 못한다.
"모조리 다 부서뜨려!"
코너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고 몬스터도 맞장구치듯 고함을 지르며 남아 있는 벽을 쳐서 무너뜨렸다.
코너도 거들러 달려가서는 떨어진 나뭇가지를 들고 아직 남아 있는 창문을 깨뜨렸다.
그러면서 소리를 질러 댔는데, 어찌나 크게 소리를 질렀는지 자기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파괴적 광기에 휩싸여, 미친 듯이 때려 부수고 부수고 부쉈다.
몬스터 말이 맞았다.
정말 통쾌했다.
코너는 목이 쉴 때까지 소리를 지르고, 팔이 쑤실 때까지 부수고, 지쳐서 쓰러질 지경이 될 때까지 난동을 부렸다.
마침내 멈추었을 때, 코너는 몬스터가 폐허 바깥쪽에서 조용히 자기를 지켜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코너는 숨을 헐떡이며 나뭇가지에 기대어 겨우 섰다.
바로 이게 제대로 된 파괴라는 거다.
몬스터가 말했다.
그 순간 갑자기, 그들은 코너 외할머니가의 거실에 돌아와 있었다.
코너는 자기가 거실 안에 있는 것들을 깡그리 부서뜨렸다는 걸 깨달았다. (150~151쪽)
-한국에서 책을 만드는 편집자라면 이런 장면을 과연 허용했을까? 아마도 한국에서는 허용하지 않을 것 같다.
이 장면에 대한 해석이 쉽지가 않다. 작가들이 또한 이런 장면을 자기 작품에 연출하고 싶다고 할 때, 과연 할 수 있을까?
아동문학작품을 쓸 때, 알게 모르게 작가에게는 윤리 도덕이라는 검열의 잣대가 작용을 한다. 모든 걸 이렇게 마구 파괴해버리는, 무언가에 씌운 듯한 과격한 캐릭터를 아이들이 보고 배운다면, 답습한다면..... 이런 생각이 작동을 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부모들이나 어린이책 독서 지도를 하는 사람들 또한 한국 작가가 작품에 이런 걸 썼다면, 아마도 너무 과격하고 거칠다고 거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장면은 참으로 해석이 쉽지가 않다.
한 가지 이 장면에서 판타지의 공간에서 작동하는 코너의 행동이 마지막에 현실 공간으로 확 바뀌는 연출을 하고 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코너와 엄마는 몬스터가 보이는 사람들이다. 몬스터는 그래서 이 두사람에게는 그들 감정이 고조된 상태에서의 새롭게 변신하는 일종의 영혼의 친구들이다. 그런데 이들은 이 몬스터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파괴하려 하고 있다. 이들과 적대적인 감정의 골을 만들어내고 있다. 아빠와 외할머니는 몬스터를 보지 못한다. 이 장면에서, 어찌보면 이들의 경직된 정신과 몸의 분리 상태, 타자의 고통에 귀기울줄 모르는 몸의 감각이 결여된 상태, 감정이 고조된 상태에서 만날 수 있는 존재의 어떤 슬픔과 기쁨과 놀라움과 공포와 두려움과 아픔의 상태, 이런 인간 감정의 결에 무감각한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공간의 질서를 한번 부숴버리고 싶은 욕망을 몬스터는 대신 실현하고 있다. 처음에는 대신 실현하는 형태를 취하다가 나중에는 몬스터와 하나가 된 존재로 공간이 통합되어 버린다. 판타지 공간이 현실 공간으로 전환되어 버리는 것이다.
5
파괴와 폭력이란 개념에 대해서 한번 더 생각을 해 보면 좋겠다.
집안을 다 산산히 부숴버리고 나서 코너의 모습이다.
코너는 충격에 휩싸여 서 있었다. 자기 손을 내려다 보았다. 손은 온통 찢겨 피투성이였고, 손톱은 부러지고 갈라져 있었으며, 온몸은 욱신거렸다.
"이럴 수가"
코너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코너는 몬스터를 돌아보았다.
그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155쪽
<파괴> 장의 마지막 장면이다.
시간이 영원만큼 흐른 것 같았다. 결국 코너는 부엌으로 가서 쓰레기봉투 몇 장을 가지고 왔다. 밤이 깊을 때까지 쓰레기를 치웠지만, 정말 너무 많았다. 마침내 코너가 포기했을 때에는 동이 트고 있었다.
코너는 계단으로 올라갔다. 온몸에 뒤집어 쓴 먼지와 말라붙은 피를 닦아 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외할머니 방 앞을 지나는데 외할머니가 아직 깨어있는 지 문 아래에서 빛이 스며 나왔다.
외할머니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162쪽)
<몬스터 콜스>에서 이 파괴의 장면이 가장 어렵다.
무얼 파괴한 걸까? 판타지 동화에서는 늘 상징을 물어야 한다. 겉으로만 보면, 외할머니 집안 살림 모두를 파괴하였다. 이 물리적인 파괴가 의미하는 코너 자신의 내면의 상징적인 의미는 무엇일까? 파괴는 기존의 것과, 파괴된 후 새롭게 창조되는 세계가 늘 존재하게 되어 있다. 코너는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아직까지는 그렇다. 이것도 코너가 갖고 있는 매우 단단한 고정관념과 같다. 이 단단한 고정관념은 늘 견고하게 자리하고 있는 외할머니 집안의 사물들과 같은 유사성으로 묶일 수 있지 않을까?
단단하다는 유사성으로 고정관념과 사물은 하나로 묶일 수가 있다. 받아들이기 싫은 존재로 외할머니와 엄마의 죽음은 또 하나로 묶일 수가 있다. 엄마의 죽음을 거부했는데, 그 거부하던 엄마의 죽음을 다 파괴해버리고 났다면, 그 다음에 오는 현실은 무엇인가? 파괴 후의 현실은 무엇인가? 그것은 수용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파괴 후의 새로운 질서인 것이다. 운명을 받아들이기 위한 파괴적인 과정의 시간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걸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