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행 20장 22-35절
설교제목 : 환난이 기다릴지라도
낯선 운전대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한주간 평안하셨습니까? 제법 조석으로 선선해진 날씨에 새로운 계절의 변화를 실감할 수 있습니다. 요즘에 일어나는 폭력사건들은 우리가 분노사회에 있음을 직시하게 합니다. 거절당하고 거부당한 경험은 대상을 향한 공격적인 분노를 표출하여 타인의 생명에 위해를 가합니다. 점점 더 정서적 안정감을 잃어가고 불안한 것이 우리 사회의 자화상인 듯 보입니다.
지난 주 학교 동문회 임원들과 함께 일본을 잠시 다녀왔습니다. 일본은 일찍이 영국의 문화를 수용하여 운전방향이 우리와 반대입니다. 왼쪽으로 주행하고 오른쪽에 운전대가 있습니다. 도로가 작은 탓인지 작은 차들이 많았습니다. 차를 렌트하고 한 선배가 운전을 하였습니다. 우회전 차선을 받기 위해 차선변경을 하던 중에 옆에서 신호를 기다리던 트럭과 살짝 부딪히면서 차량의 사이드 미러의 겉과 거울이 깨지고 말았습니다. 저는 국제면허를 발급하여 운전할 사람을 모집했지만, 낯선 것에 익숙치 않아서 운전을 못한다고 했습니다. 이런 태도와는 달리 그 선배는 경미한 접촉사고이지만 경찰이 와서 아주 세세하게 조사하였습니다. 경미한 사고라도 사고이니 운전을 안할 만도 한데, 계속 운전을 하면서 괜찮다고 했습니다. 낯선 것과 실수에도 꺾이지 않는 당당함과 의연함이 보기 좋았습니다. 인생에 낯선 지대를 지나가야 하고, 때로 실수한다 할지라도 의연함을 잃지 않고 길을 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환난이 기다릴지라도
바울은 드로아에서 이레를 머물고 가급적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위해 밀레도로 가는 길을 택하였습니다. 바울은 밀레도에서 에베소에 사람을 보내어 교회 장로를 불러서 고별설교를 합니다. 바울은 이제 마지막 만남이 될 수 있기에 고별하며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메시지를 남깁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고된 선교의 여정을 고백합니다. 겸손과 많은 눈물로 주님을 섬겼고, 유대인들의 음모로 온갖 시련을 당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음을 피력합니다. 많은 눈물로 주님을 섬겼다는 것은 밤마다 숱한 눈물로 주님 앞에서 기도했음을 시사합니다. 몸의 고통, 비난과 조롱, 매맞음의 고난을 오롯이 견딜 수 있었던 힘은 눈물로 주님 앞에 기도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합니다. 그 길을 가게 한 원동력을 성령이라고 고백합니다.
“보십시오.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입니다. 거기서 무슨 일이 내게 닥칠지, 나는 모릅니다. 다만 내가 아는 것은, 성령이 내게 일러주시는 것뿐인데, 어느 도시에서든, 투옥과 환난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22-23).”
바울은 성령에 매여서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합니다. 바울은 자발적으로 성령에 매인 존재였습니다. 매인다는 것은 어떤 것과 연결되어 묶인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매임이 타자에 의해서 강압적으로 진행되면 이것은 노예처럼 속박당하는 것이고 사로잡히는 상황이 되기도 합니다. 무엇에 매여 있여 있는지 그 대상이 중요하고, 매임에 자아가 자발적인지 비자발적인지가 중요합니다. 우리를 매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요? 우리 안에 뜨거움을 주실 때 자발적으로 매일 수 있는 삶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바울에게 일러주신 일은 투옥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는 것입니다(23). 성령이 가라하신 예루살렘으로의 길은 꽃길이 아닙니다. 넓고 편한 길도 아닙니다. 호위호식하며 대중에게 인정받고 호응받고 선망의 대상이 되는 길도 아닙니다. 바울 앞에 놓인 길은 투옥과 환난입니다. 그런 길은 저 같으면 가고 싶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환난이 기다리고 있는데, 바울은 그 길을 가고자 합니다. 환난이 기다린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가라 하시고, 가야만 하는 길이기에 바울은 자신의 달려갈 길을 간다고 고백합니다. 나에게 달려갈 길이 있다면 이미 그는 복된 자입니다. 환난과 핍박이 있을지라도 그분이 가라하신 길을 묵묵히 당당하게 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바울의 첫 번째 부탁 – 나를 살피기
바울은 이제 떠나면 다시는 그들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그들도 바울의 얼굴을 보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26). 그러나 바울은 후회없이 최선을 다했노라 고백합니다. 바울은 주저하지 않고 하나님의 모든 경륜을 전해 주었기 때문에 자신에게 책임이 없다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에베소 지도자들에게 간절히 부탁합니다.
“여러분은 자기 자신을 잘 살피고 양 떼를 잘 보살피십시오(28a).”
“여러분은 깨어 있어서 내가 삼년 동안 밤낮 쉬지 않고 각 사람을 눈물로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십시오(31).”
바울은 교회 지도자들에게 자신을 살피고 성도들을 보살피라고 부탁합니다. 자신을 살핀다는 것은 객관적 성찰 과정으로 자신의 정신을 관조한다는 뜻으로 새길 수 있습니다. 자기 반성을 하는 자야말로 흐트러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논어》의 학이(學而)편에서 증자는 말합니다.
“나는 날마다 다음 세 가지 점에 대해 나 자신을 반성한다. 남을 위하여 일을 꾀하면서 진심을 다하지 못한 점은 없는가? 벗과 사귀면서 신의를 지키지 못한 일은 없는가? 배운 것을 제대로 익히지 못한 것은 없는가?
[공자 지음, 김형찬 옮김(2015) : 《논어》, 서울, 홍익출판사, p31]
옛 선비들은 진심과 신의와 익힘에 있어서 철저하게 자신을 반성하고자 했습니다. 타인과의 만남에서, 자신이 행하고 있는 일에 있어서 진심이라면 그 사람은 복된 인생을 가고 있는 자일 것입니다. 이런 증자의 말은 외적 삶의 가치에서 우리의 삶을 성찰할 수 있는 길일 것입니다. 이에 더하여 자신을 살피는 일에는 자신의 의식과 무의식 전체에서 자신의 모습을 성찰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한 내담자가 자신은 문제가 없는데 아내가 보내서 왔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현실에서는 인간적으로 대단히 준수하고 유능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꿈은 자신의 내면에서 엄청난 싸움이 있었고, 심리적 갈등 속에서 어려워하고 있음을 제시하였습니다. ....
자신을 성실하게 살필 수 있는 자가 양떼들을 보살필 수 있을 것입니다. 무의식성에 오염된 자는 결코 양떼를 사나운 이리떼에서 구할 수도 없고, 자신을 성찰하지 않으면 양치기가 사나운 이리로 전락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을 살피지 않는 자는 자신의 발전도, 자신에게 부여된 사명을 결코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수신(修身)하지 않으면 그 어떤 것도 실현할 수 없습니다. 바울의 고별설교의 부탁은 몸과 마음을 살피고 닦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에게 부과된 삶의 무게와 과업을 감당하기 위해 나의 정신을 살피고 몸을 닦아 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바울의 두 번째 부탁 : 곁으로의 구심력
바울은 에베소의 교회 지도자들에게 또 한가지 부탁을 하기 전에 하나님과 그의 은혜로운 말씀에 에베소 성도들을 맡깁니다.
”나는 이제 하나님과 그의 은혜로운 말씀에 여러분을 맡깁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여러분을 튼튼히 세울 수 있고, 거룩하게 된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유업을 차지하게 할 수 있습니다(32).“
자신이 떠나고 없을 때 궁극적으로 신도들을 지탱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이시오, 그들의 삶을 세울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모든 일에 본을 보였듯이 그들이 본을 보이라고 마지막 부탁을 합니다.
“나는 모든 일에서 여러분에게 본을 보였습니다. 이렇게 힘써 일해서 약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주 예수께서 친히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이 있다’ 하신 말씀을 반드시 명심해야 합니다(35).”
이 마지막 말로 설교를 마무리합니다. 자신이 손수 일하면서 연약한 지체를 돌보았음을 고백합니다. 힘써 일해서 약한 사람을 도와줄 것을 부탁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가진 재화와 재능을 연약한 자들을 위해 쓸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그것이 진정한 복이기 때문입니다.
현대 사회는 진정한 중심을 잃고 배회하는 자아 중심적 원심력 사회가 된 듯 합니다. 많은 것을 찾아 배회하며 밖으로 밖으로 회전운동을 하지만, 공허함이 가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가치는 중심을 향한 원운동인 구심력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김응교 시인은 말합니다.
“아픔이 있는 진앙지에 찾아가는 ‘곁으로의 구심력’이 있는 사회가 건전한 사회가 아닌가 생각했어요. ‘곁으로의 구심력’으로 서로가 서로를 위했던 순간이 파리 콤뮨이고, 3.1 독립운동때 평양기생들이 치마를 찢어 태극기를 만들던 순간이고요. 광주 민주화항쟁 때 몸을 팔던 여인들이 헌혈하고 시체를 치워주었던 순간이지요. 아픔의 진앙지로 찾아가는 순간들입니다”[김응교(2015) : 《곁으로》, 서울, 새물결플러스. p42.]
어쩌면 바울은 ‘곁으로의 구심력’으로 약한 이를 도와주는 연대를 하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혼돈의 소용돌이를 경험하는 이들의 한복판으로 들어가는 구심력으로 그들과 함께 좋은 것을 나누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의 정신이자 우리의 사회를 보다 신명나게 세워가는 일입니다. 이것은 비단 외부세계에만 적용되지 않습니다. 이는 내면의 법칙에도 그대로 적용될 것입니다. 보잘 것 없고, 보기 싫은 연약한 그림자 곁으로 가려는 구심력은 정신 발전에 필수 요소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곁으로의 구심력으로 연약한 자를 도울 수 있는 복있는 인생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