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박한 논리에 中학사들도 경탄‘吾易東矣’로 불려 벼슬 버리고 안동 예안현에 은둔 후학 양성에 힘써 ‘구계서원’봉향후 안동댐 건설로 영남대민속원에 이전
龜溪書院(구계서원) : 1696년‘도동서원’으로 건립하였다가 안동댐 건설로 1975년 현재의 위치에 이건하여 2000년 11월에 복원하였다
역사(歷史)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막대하다.
그것은‘ 역사는 되풀이된다.’라는 말과 무관하지 않으며, 과거의 역사를 반추(反追)해 봄으로써 현재의 일을 해결할 수 있는 해결능력을 역사, 혹은 역사적 사건이 제공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오늘날 우리는 어려운 문제에 직면했을 때, 지난 역사를 되짚어보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이와는 별도로 역사의 시비(是非)를 가리는 일은 그 논점(論點)을 달리 해야 한다.
즉, 시비를 가림에 섣부른견해와 판단이 어쩌면 진실을 가릴 수 있기 때문이며, 더구나 근세의 일을 평가함에 있어서는 각자의 이해가 첨예하게 걸려 있는 문제이므로 역사적 왜곡이 더욱 심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를 되짚어 보는데 꼭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 시대, 혹은 인물에 대한 기록물이다. 즉, 이 기록물은 그 시대를 살지 못했던 후대인들이 어떠한 사건이나 인물을 짚어보고 평가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자료이다.
하지만 시대가 흐를수록 이러한 역사적 기록물이 차츰 인멸(湮滅)되어 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 모른다. 삼국(三國)의 역사를 상세히 알 수 없고, 일제시대(日帝時代)의 역사를 어느 정도나마 알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점을 잘 증명해 주고 있다.
한 해가 바뀔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빠트리지 않고 하는 일 가운데 한 가지는 신년의 운세를 점쳐보는 일일 것이다.
그 가운데 주역(周易)의 괘(卦)를 이용하여 치는 점은 예로부터 널리 이용되던 방법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 언제 주역이 처음들어왔는지, 그것을 누가 어떻게 풀이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앞서의 논의처럼 자료의 인멸로 인해 사실상 상고하여 보기 어렵다.
하지만『尙賢錄(상현록)』을 읽어보면“역동(易東) 선생이 연경(燕京)에 들어가 원주(元主)에게 주 역(周易)을 청하여 한번 읽고 돌아와 옮겨 썼는데, 다만 한 곳의‘而(이)’자가 틀렸을 뿐이었다.”라고기록되어 있으며, 또한 퇴계(退溪) 선생은 그의「易東書院記(역동서원기)」에서“역동(易東) 선생은 경서(經書)와 사기(史記) 등에 통달하였으며, 더욱이 역학(易學)에 조예가 깊어 정자(程子)의 역전(易傳)이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옴에 능히 아는 자가 없었거늘 선생이 문을 닫아걸고 연구하여, 그 뜻을 얻어서 생도(生徒)에게 가르치니 의리(義理)의학문이 비로소 행해졌다.”라고 서술하였다.
이로써본다면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주역을 전한 이는 곧 역동(易東) 우탁(禹倬) 선생이며, 또한 이렇게 전하여진 정자(程子)의 역전(易傳)을 깊이 연구하여 생도들을 길러 낸 이도 곧 역동 우탁 선생임을 알 수 있다.
역동 선생에 대한 생애를 고찰하기란 자료의 인멸로 쉽지 않으나, 한산(韓山) 이상정(李象靖) 선생 이 지은「尙賢錄序(상현록서)」와「遺事(유사)」를 통하여 대략이나마 유추할 수 있다. 선생은 고려조 향공진사(鄕貢進士)로 급제한 천규(天珪)의 아들로 1262년(고려 원종 3)에 단양군(丹陽郡) 적성면(赤城面) 현곡리(玄谷里)에서 태어났다.
선생을 가리켜 역동(易東) 선생이라고 부르는 것은 일찍이 중국 학사(學士)들과 역학(易學)의 난해 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점을 이야기 하였는데, 중국학사들이 선생의 해박한 논리에 경탄하여‘중국의역학(易學)이 선생에 의하여 동방에 전하여 졌다[吾易東矣(오역동의)]’라고 일컬은 데에서 유래한다.
이로써 본다면 선생이 역학에 침잠하여 의리를 깨우친 정도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또한 선생은 어려서부터 올곧은 기질과 영민한 재주, 지혜를 갖추고 있었으며, 지조와 절의가 또한 높고 깨끗하여 세리(勢利)에 흔들리지 않았다라고전한다.
이는 선생의 관계(官界)를 살펴보면 잘 드러나는데, 우선 대략적으로 서술하면 다음과 같다.
선생은 1278년(충열왕 4) 17세에 향공진사(鄕貢進士)에 발탁되어 1290년(충열왕 16) 5월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영해사록(寧海司錄)과 진주목사(晋州牧使)의 지방관을 거쳐 사인(舍人) 감찰규정(監察糾正), 진현관직제학(進賢館直提學)의 내직을 역임했으며, 성균관제주(成均館祭酒)를 마지막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안동(安東) 예안현(禮安縣)에 은둔하였다.
선생이 과거에 급제할 때 지은「殘月(잔월)」이라는 작품을 읽어 보면, 초승달을 비유함에‘낫’, ‘빗’,‘활시위’,‘낚시 바늘’등으로 비유해서, 다시금 선생의 뛰어난 재주를 느낄 수 있다.
그 가운데 일부를 옮겨본다.
印水銀光淺(인수은광천) 물에 비친 달빛은 엷은 은색 드리었고, 籠沙白影微(농사백영미) 모래 위에 비친 빛도 흰 그림자 희미하네. 鎌掛靑天(겸괘청천형) 푸른 하늘 까마득히 낫을 걸어 놓았는가. 梳懸碧峀危(소현벽수위) 푸른 산 높은 절벽에 빗을 걸어 놓았는가.
선생이 안동 예안현에 은둔하자, 충숙왕(忠肅王)은 선생의 충의를 가상히 여겨 세 번 조정으로 불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고, 이학(理學)의 탐구와후진의 양성에 더욱 힘썼다고 하니 선생의 지조를느낄 수 있다.
또한 선생의 강개한 면모는 영해사록으로 있을 때와, 사인 감찰규정으로 있을 때의 두 일 화를 통해 엿볼 수 있다.
선생이 영해군 사록에 부임하였을 때의 일이다. 영해 고을에는 팔영(八鈴)이라는 요망한 신당(神堂)이 있어서 백성들이 미신에 현혹되어 제사를 지내는 등, 하는 일이 몹시 괴이하고 망측하였다.
이에선생이 즉시 그 신당을 부수어 바다에 던져버리고는 다시는 그러한 일을 하지 못하게 하자, 이로부터 음란한 일이 끊어졌다고 전하며, 또한 선생이 감찰규정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충선왕(忠宣王)이 숙창원비(淑昌院妃: 父王의 後妃)와 간음하는 짓을 하자, 선생이 백의(白衣)로 도끼와 거적자리를 메고 대궐로 들어가 소(疏)를 올려 간언하니, 왕의 곁에 선 신하가 그 소를 펴들고도 감히 읽어 내려가지 못하였다.
이에 선생이 큰 소리로“그대는 임금을 가까이서 모시는 신하가 되어, 어찌하여 임금의 잘못을 바로 잡지 못하고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하였는가? 그대는 그대의 죄를 알고 있는가?”라고 말하니 좌우의 신하들이 모두 두려워 벌벌 떨었으며, 왕 또한 부끄러운 기색이 얼굴에 역력하였다고 전한다.
이 두 가지의 일화로써 살펴본다면, 사악한 무리에 의해 고통받는 백성을 굽어 살필 줄 아는 영민한 지혜와 아울러 자신의 목숨을 초개(草芥)와 같이 여기고 신하로써의 본분을 다하고자 하였던 선생의 강개한 지조(志操)를 엿 볼 수 있다.
역동 선생은 예안현으로 내려와서 성리학 및 역학을 공부하며 자연을 벗으로 삼아 생활하였다. 우 리는「題映湖樓(제영호루)」라는 작품에서 선생의삶의 단편을 엿볼 수 있다.
嶺南遊蕩閱年多(영남유탕열년다) 영남 땅에 노닌지 여러 해가 지났는데 最愛湖山景氣加(최애호산경기가) 호산을 사랑하였더니 경치 더욱 좋구려. 芳草渡頭分客路(방초도두분객로) 꽃다운 풀 나루터는 나그네 길 나뉘고, 綠楊堤畔有農家(녹양제반유농가) 푸른 버들 언덕가엔 농가가 서있네. 風恬鏡面橫烟黛(풍념경면횡연대) 바람 잔 수면에는 노을이 비껴있고, 歲久墻頭長土花(세구장두장토화) 해묵은 담장위엔 흙버섯 피어났네. 雨歇四郊歌擊壤(우헐사교가격양) 비 그친 들녘에는 격양가 부르고, 坐看林杪漲寒槎(좌간임초창한사) 앉아서 숲 넘어 바라보니 빈 배만 떠있네.
이처럼 성리학과 역학탐구를 통하여 후진을 양성하며, 자연을 벗삼아 지내던 역동 우탁 선생은 1342년(충혜왕 3)에 예안현 지삼촌(知三村)에서 숨을 거두니 향년 81세이다. 선생의 만년생활이 어떠하였는지 자세한 기록이 없어, 살펴 볼 수 없음이 참으로 한탄스럽다.
하지만 후대의 학자들은 선생에 대하여저마다 고견(高見)을 펼쳐 놓았는데, 고봉(高峯) 기 대승(기대승)은 그의『論思錄(논사록)』에서, “우리 동방의 학문이 기자시대의 사적은 서적이 없어져서 상고하기가 어려워 삼국시대에 비록 좋은 자질을 갖춘 자라도 학문의 공을 이루지는 못하였고, 고려 때는 비록 학문은 하였으나 다만 사장(詞 章)이 화려한 것에만 주로 힘쓰다가, 고려 말의 우탁(禹倬), 정몽주(鄭夢周)에 이르러 비로소 성리의 학문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라고 하여 선생의 업적을 평가하였다.
또한 점필재( 畢齋) 김종직(金宗直)은「過禮安有懷禹諫議(과예안유회우간의: 예안을 지나다가 우간의를회상하며」라는 작품에서“고려조의 오백년간 기운을 쌓은 것이, 말년에야 이런 현인(賢人) 나올줄을 몰랐구려. 임금 앞에서 도끼드니 당개(唐介: 중국 송나라의 강직한 신하)의 곧음이요, 초가집 아래에서 몸소 학문을 탐구하니 정현(鄭玄: 중국 후한의 학자)의 학행일세. 향리의 몇 사 람이 옛 덕을 회상하겠는가.
자손은 오늘도 거친밭 갈고 있네. 아, 내가 어진 사람 되려는 뜻 만년에 저버리고, 홀로 선비 옷 떨치고서 다시 한 번탄식했네.”라고 하여 선생의 곧은 절개와 학문적성취를 뒤따르고자 하였다. 경산시에 위치한 영남대학교 정문을 지나, 교내로 곧장 들어가면 본관건물이 나온다. 이 본관건물 의 우측에는 영남대학교에서 꾸며놓은 민속마을이있는데, 이곳에 바로 고려 말의 유학자이며, 역학(易學)의 선구자인 역동(易東) 우탁(禹倬) 선생을 봉향하고 있는 구계서원(龜溪書院)이 있다.
구계서원은 1696년(숙종 22)에‘도동서원(道東書院)’으로 안동군 월곡면 미질동에 건립하였다가 개칭한 것이다. 이후 1871년(고종 8) 서원훼철령으로 훼철되었던 것을 1896년 유림의 공의로 강당만 다시 지어‘독역재(讀易齋)’라 이름을 붙였다.
하지만 안동군 월곡면이 안동댐 건설로 인한 수몰지역으로 되면서 1975년 현재의 위치인 영남대학교 민속원에 이건하였다. 처음 이건할 때에는 독역재 밖에 없었으나, 2000년 11월에 묘우(廟宇)인 모현사(慕賢祠), 내삼문(內三門), 동(東)·서재(西齋)인 일신재(日新齋)와 시습재(時習齋), 대문인진덕문(進德門)을 복원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서원 입구에 서면 우선 진덕문이 나오고, 이 진덕문을 통하여 안으로 들어가면 넓은 마당을 사이에 두고 맞은편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서원 정당인 독역재가 자리하고 있다. 서원 정당은 또한 좌측으로는 의방재(義方齋)라고 편액 하였으며, 우측은 경의재(敬宜齋)와 독역재(讀易齋)라고 편액 하여 구분을 두고 있다. 또한 서원 정당의 좌우측으로는 동·서재인 일신재와 시습재가 자리하고 있으며, 정당을 뒤로 돌면 역동 우탁 선생을 봉향하고있는 모현사가 나온다.
구계서원을 돌아보노라면 사회적 환경으로 인하여 먼 지방에까지 이건하게 된 서원의 내력이 한편으론 안타깝기도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선현의 뜻을 기리고 본받기 위한 노력으로 새롭게 복원되어 선현의 뜻을 오랫동안 기리고자 하는 정감을느낄 수 있기에 새삼 기쁨을 금치 못한다.
한번쯤 시간을 내어 영남대학교 내에 있는 민속원을 둘러본다면 과거 우리 선조의 삶을 느낄 수 있 는 시간을 가질 수 있을뿐더러, 역동 선생의 뜻을 기릴 수 있는 일석이조(一石二鳥)의 효과를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