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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인연법과 제일의공법의 속성 2. ‘제일의공’의 뜻과 공의 종류 3. 니까야의 무아와 대승 불교의 무자성 4. 아함경의 인연법과 공법의 관계 5. 인연법ㆍ제일의공법과 세속제ㆍ승의제 |
잡아함경의 <제일의공경>과 <공경>, <법인경>과 증일아함경의 <육중품[7]>을 중심으로 하여 인연법과 공법의 관계를 살피는데, 니까야와 대승 불교의 ‘공’의 개념을 함께 살펴 본다. 그리고 수행의 관점에서 인연법과 공의 위상을 살핀다.
1. 인연법과 제일의공법의 속성
1.1. <잡아함경_335. 제일의공경>에서는 제일의공법을 세속법과 구별하였고, <증일아함경_37. 육중품[7]>에서는 제일의공법을 인연법/가호법과 구별하였다. 세속법은 인연법을 가리키는 것이나, ‘세속법=인연법=가호법’이다.
(1) 어떤 것을 제일의공경이라고 하는가?
모든 비구들아, 눈은 생길 때 오는 곳이 없고, 소멸할 때에도 가는 곳이 없다.
이와 같이 눈은 진실이 아니건만 생겨나고, 그렇게 생겼다가는 다시 다 소멸하고 마나니, 업보는 있지만 짓는 자는 없느니라. 이 음이 소멸하고 나면 다른 음이 이어진다.
다만 세속의 수법은 제외된다.
귀ㆍ코ㆍ혀ㆍ몸ㆍ뜻도 또한 이와 같다고 말하겠으나,
단 세속의 수법은 제외된다. (잡아함경_335. 제일의공경)
(2) 어떤 것이 가장 공한 법인가?
저 눈은 생길 때에는 곧 생기지만 그 오는 곳을 볼 수 없고, 멸할 때에는 곧 멸하지만 그 멸하는 곳을 볼 수 없다.
다만 임시로 이름이 붙여진 법[假號法]과 인연의 법[因緣法]은 제외한다. (증일아함경_37. 육중품[7])
제일의공법에 대해서는 다음의 두 문장을 제시했을 뿐, 다른 설명은 없다.
(3) 눈은 생기지만 오는 곳이 없고 없어지지만 가는 곳이 없다.
(4) 업보는 있지만 짓는 자는 없다.
그런데 제일의공법의 설명에서 ‘除俗數法[세속법은 제외한다’라 하고는 세속법의 설명에서 인연법을 서술하였으니, 제일의공법은 인연법과는 구별되는 어떤 법을 가리키는 것만은 분명하다. 인연법은 네 가지 명제를 제시하여 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곧 인연법은 유무와 생명에 관한 법이며, 그것은 나와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것들이 상호 의존 관게에 의하여 규정된다는 것으 말한다. 여기서 만일 제일의공법을 인연법에 대립하는 것으로 간주한다면, 제일의공법은 ‘유무와 생명이 없는 법’이며, ‘나와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것들이 상호 의존 관계에 의하여 규정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인연법은 가호법이며, 제일의공법은 가호법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다.
1.2. 제일의공법에 관한 (1)과 (2)의 서술은 이러한 관점에서 풀이해 볼 수 있겠다. (1)에서 ‘눈이 생기고 없어진다는 것’은 생멸에 관한 서술이므로 인연법에 관한 내용이다. 따라서 공법에 관한 내용은 ‘오는 곳도 없고 가는 곳도 없다’이다. (2)에서 ‘업보가 있다’는 것은 유무에 관한 서술이므로 인연법에 관한 내용이다. 따라서 공법에 관한 내용은 ‘짓는 자가 없다’가 될 것이다. 만일 (1)의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곳도 없다’나 (2)의 ‘짓는 자가 없다’도 인연법에 관한 내용이라면 제일의공법에 관한 내용은 아무것도 없게 되므로, 그럴 가능성은 없다.
이렇게 본다면, 먼저 (1)의 ‘오는 곳도 없고 가는 곳도 없다’는 생멸의 원인이나 결과가 없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2)의 ‘짓는 자가 없다’는 업보를 짓는 주체인 ‘나’가 없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또한 인연법에는 ‘짓는 자가 있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렇게 해석한다면, 인연법에는 유무와 생멸이 있고 인과 관계도 있고 행[업]의 주제도 있는데 비하여, 제일의공법에는 유무와 생멸도 없고 인과관계도 없고 행[업]의 주제도 없다. 곧 제일의공법은 인연법에서 나와 세계를 규정하는 상호 의존 관계를 완전히 벗어난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된다.
2. ‘제일의공’의 뜻과 공의 종류
2.1. <마하반야바라밀경_18. 문승품>에서는 제일의공은 열반의 공이라 하였다.
(5) 무엇이 제일의공인가? 제일의는 열반을 말하느니라. 열반은 열반으로서 공하나니, 그것은 항상한 것도 아니요 사라지는 것도 아닌 까닭이니라. 왜냐하면 성품이 스스로 그러하기 때문이니, 이것을 ‘열반의 공’이라 하느니라.
이러한 제일의공은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열반이고, 다른 하나는 ‘성품이 스스로 그러하다’는 것이다.
‘열반’은 모든 괴로움이 완전히 끊어진 상태를 말한다. 아함경에서는 열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한다. 열반은 해탈과 거의 동의어로 사용된다.
(6) (5음에 대하여)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탐욕을 소멸하며, 완전히 없애고, 어떤 번뇌도 일으키지 않아 마음이 바르게 해탈하면, 이것을 비구가 법을 보아 열반하는 것이라 한다. (잡아함경_28. 열반경)
(7) 뉘우치지 않음ㆍ즐거움ㆍ기쁨ㆍ쉼ㆍ안락ㆍ선정ㆍ실다운 소견ㆍ참다운 앎ㆍ싫어함ㆍ욕심 없음ㆍ해탈이 있으며, 해탈을 연하여 열반을 얻는다. (중아함경_055. 열반경)
잡아함경의 <법인경>에서도 ‘공’을 열반과 관련하여 정의한다.
(8) 만일 비구가 공적하고 한가한 곳이나 나무 밑에 앉아,
‘빛깔은 무상하고 닳아 없어지며, 그것에 대한 탐욕을 떠나야 할 법이다’라고 관찰하고,
이와 같이 ‘느낌ㆍ생각ㆍ의도ㆍ인식도 무상하고 닳아 없어지며, 그것에 대한 탐욕을 떠나야 할 법이다’라고 관찰한다고 하자.
‘그 5음이란 무상하고 닳아 없어지며, 견고하지 않고 변하고 바뀌는 법이다’라고 관찰하여,
그 마음이 즐겁고 청정하며 해탈하면 이것을 '공'이라 하느니라. (잡아함경_80. 법인경)
공의 성품이 ‘스스로 그러하다’는 것은 잡아함경의 <공경>에서도 설하고 있다.
(9) 눈이 공하고, 항상하여 변하거나 바뀌지 않는다는 법도 공하며, 내 것이란 것도 공하다. 왜냐 하면 그 성질이 저절로 그러하기 때문이다.
빛깔ㆍ안식ㆍ인촉과 안촉을 인연하여 생기는 느낌인, 괴롭거나 즐겁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도 또한 공하고, 영원하여 변하거나 바뀌지 않는다는 법도 공하며, 내 것이라고 하는 것도 공하다. 왜냐 하면 그 성질이 저절로 그러하기 때문이다.
귀ㆍ코 ㆍ혀ㆍ몸ㆍ뜻도 또한 그와 같나니, 이것을 공한 세간이라고 하느니라. (잡아함경_232. 공경(空經))
제일의공이 열반을 나타댄다는 것은 공이 인연법으로 생겨난 모든 것들을 다 벗어났다는 것을 뜻하고, ‘스스로 그러하다’는 것은 인연이 완전히 끊어졌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제일의공경>에서 말하는 ‘오는 곳도 없고 가는 곳도 없다’나 ‘짓는 자가 없다’는 것은 제일의공에 관한 위의 경들에서 서술하는 제일의공의 뜻에 부합한다.
그리고 “내 것이라고 하는 것도 공하다”에서 ‘내 것’은 ‘나’를 전제하므로 ‘<나>라고 하는 것도 공하다’를 추론할 수 있다. 그러면 ‘나도 공하다’는 ‘<나>가 없다’를 함의하므로 ‘무아’를 뜻한다. 따라서 무아는 ‘공’에 포섭된다.
2.2. 제일의공을 설정했다는 것은 제일의가 아닌 공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예컨대 <중아함경_190. 소공경(小空經)>과 <중아함경_191. 대공경(大空經)>에서 보면, 비우는 것들의 유형에 따라 공의 유형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예컨대 안의 공, 바깥의 공, 안팎의 공들을 비롯한 다양한 유형의 공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3. 니까야의 무아와 대승 불교의 무자성
3.1. <상윳따 니까야_35.85. 공함 경>에서는 무아와 공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 )’의 내용은 니까야의 문맥을 고려하여 보충한 것이다.
(10) 눈은 무아이고 무아이므로 공하다. (12입처ㆍ18계ㆍ5음, 곧 세계는 무아이고 무아이므로 공하다.)
니까야의 무아는 ‘자아가 없다’는 것을 뜻하며, 자아는 ‘고정불변하고 통제력을 가진 주체’를 말한다. 따라서 니까야의 공은 ‘고정불변한 실체가 없음’[무자성]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니까야의 공의 개념은 대승 불교인 용수의 <중론>에셔 ‘공=무자성’의 논의로 이어진다. 대승 불교의 공 사상에서 ‘공=무자성’으로 보는 주장은 인연법을 중심으로 생각한다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인연법을 떠나서는 어떤 존재의 유무나 그것의 성품을 말할 수 없다. 곧 변화하지 않고 고정된 성질을 가진 그런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상호 의존 관계의 변화에 따라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바뀌는 것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한 상태를 ‘자성이 없다’고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무자성의 개념으로는 공의 ‘비어 있음’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다. 무자성의 개념은 상호 의존 관계에 의하여 생긴, 변화고 바뀌는 어떤 성품이 있음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결국 ‘공=무자성’의 논의는 공법을 인연법과 관련하여 설명할 수밖에 없는 논리로 이어지게 된다. 어떤 존재이든지 자성이 없기에 변하고 바뀐 갖가지 모습과 성품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자성이 없는 상태는 공이며, 변하고 바뀐 것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인연법이다. 이런 까닭으로 “공하기에 연기하고, 연기하기에 공하다”라는 명제가 성립하게 된다. 곧 대승 불교의 공 사상에서는 공과 인연법은 같은 현상을 바라보는 다른 시각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러한 ‘공=무자성’의 개념은 <마하반야바라밀경_18. 문승품>의 제일의공의 개념에 어긋한다. 무자성은 상호 의존 관게에 형성되는 어떤 존재의 성품을 함축한다. 그것은 무자성이 인연법에 의존한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공을 ‘스스로 그러하다’고 보는 마하반야바라밀경의 논지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3.2. 사실 <중론>의 공 사상은 ‘고정불변한 실체의 부정’으로 ‘비어 있음’을 포착하려 한 것인데, ‘고정불변한 실체’라는 함겅에 빠진 논의라 볼 수 있겠다.
인연법에 따르면 어떤 존재의 성품은 상호 의존 관계에 따라 결정된다. 따라서 어떤 존재이든지 인연법을 떠나서는 성립할 수 없고, 그 성품도 있을 수 없다. 하물며 인연법을 떠나 존재하는 어떤 고유한 성질을 독자적으로 가질 수 없다. 그리고 인연법에 의하어 생겨난 모든 존재는 무상하고 변하고 바뀌는 것이다. 따라서 인연법에 의하면 ‘고정불변한 실체’는 있을 수 없다. 아함경에서는 ‘고정불변한 실체’가 있가거나 없다거나 하는 주장은 삿된 견해라 하였다. 그런 견해들은 인연법을 충분히 이해한다면 성립할 수 없는 주장이며, 또 쉽게 해결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런 까닭으로 붓다는 그것에 관한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았으며, 삿된 견해에 관해서는 잘못들 지걱하고는 바로잡았다.
그러나 인연법과 가호법에 의하여 규정되는 성품에 대해서는 항상 간명하게 말씀하셨다. 곧 인연법에 의하여 생겨나는 것들에 대하여 ‘성품이 있다, 성품이 없다’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때 ‘성품이 있다’는 것은 어떤 존재가 있음을 뜻하고, ‘성품이 없다’는 것은 어떤 존재가 없다는 것을 뜻한다. 곧 어떤 성품와 그것의 성품은 인연법에 의하여 규정되는 것이며, 인연이 끊어지면 존재도 사라지고 그것의 성품도 사라진다는 것이다.
<광석보리심론>의 다음과 같은 서술은 어떤 종류의 성품이든 간에 어떤 성품이 없으면 그것이 곧 ‘공’이라는 것이다.
(11) 모든 생(生)의 성품이 있는 것은 모두가 세속을 말한다. 승의제 중의 생(生)은 자성이 없다. 자성이 없는 가운데서 만약 의혹이 일어나면, 그것을 바로 실제로 세속의 뜻을 일으킨 것이다. (중략) 만일 자성이 없다면 이것이 곧 승의인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총체적으로 말하면, 하나의 성품이든 다수의 성품이든 이 성품이라는 것은 모두 공이다. 승의제 중에는 일체의 성품은 실재하지 않는다는 이 뜻은 결정적이다. (광석보리심론_5. 무생과 무자성)
그리고 <잡아함경_232. 공경(空經)>에서 “항상하여 변하거나 바뀌지 않는다는 법도 공하다”는 말도 이러한 논의와 관련하여 생각해 볼 수 있다. ‘항상하여 변하거나 바뀌지 않는다는 법’은 ‘자성’을 뜻하므로, ‘자성도 공하다’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인연법에 의하면 자성은 있을 수 없지만, 만일 자성이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그렇다는 것이다.] 만일 이렇게 본다면 ‘공’을 굳이 ‘무자성’이라고 정의할 근거가 약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성이든 무자성이든 공의 성품과는 실제로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데, 굳이 공을 무자성이라 할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 공은 자성이니 무자성이니 하는 성품을 넘어서는 것이며, 인연법으로 생겨난 것들이 스스로 비어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4. 아함경의 인연법과 공법의 관계
4.1. 아함경에서 인연법과 공법은 모순적 관계가 아니다. 관점의 차이에 따라 스러나는, 세계를 바라보는 두 개의 눈이다. 다만 붓다가 보시기에, 인연법과 공법으로 규정되는 두 세계가 있다는 것이다.
중생들이 살아가는 세계의 있는데, 그 세계의 유무와 생멸을 규정하는 법을 인연법이라 한다. 그리고 모든 삶의 속박을 완전히 벗어난 그런 세계가 있는데, 그런 세계를 규정하는 법을 공법이라 한다. 인연법은 보통의 인간들이 살아가는 세계의 모습을 설한 법이고, 공법은 붓다가 추구하는 세계의 모습을 설한 법이다.
수행의 측면에서 볼 때는 세속법은 벗어나야 할 법이고, 공법은 추구해야 할 법이다. 그리하여 인연법으로 생겨난 나와 세계의 모습은 부정적으로 비칠 수밖에 없다. <잡아함경_265. 포말경(泡沫經)>에서 5음은 물거품ㆍ아지랑이ㆍ파초나부ㆍ허깨비 같은 것이라 비유한 것도 그러한 연유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4.2. <잡아함경_297. 대공법경(大空法經)>과 <증일아함경_51. 비상품(非常品)[8]>은 <잡아함경_335. 제일의공경>과 <증일아함경_37. 육중품[7]>의 제일의공법과 인연법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으나, 공법에 관한 용법은 달리 나타난다. <대공법경>에서는 ‘대공법’이란 제목 아래 인연법을 설하고 있으며, <비상품[8]>에서는 공법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고 인연법을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경들에 보이는 인연법과 공의 관계는 앞서 말한 대승 불교의 인연법과 공법의 관계와 유사한 측면을 보인다. 그러나 니까야와 대승 경전에서 인연법과 공법의 범주를 명백히 구별하지 않은 것과는 달리, 아함경은 인연법과 공법을 명확히 구별하여 서술한 경들이 명백히 존재한다는 점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5. 인연법ㆍ제일의공법과 세속제ㆍ승의제
5.1. 아함경의 <제일의공경>은 <불설승의공경(佛說勝義空經)>과 유사한데, <불설승의공경>에서는 ‘제일의공’을 ‘승의공(勝義空)’이라 하였다. (<불설승의공경>에서도 ‘승의공’을 ‘인연법’과 구별하여 사용하지 않았다.) 이러한 ‘인연법=세속법. 제일의공=승의공’이라는 용법을 보면, 아함경의 인연법과 제일의공법의 구별을 대승 불교의 세속제와 승의제의 구별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대승 불교의 세속제와 인연법, 승의공과 승의제가 일대 일로 대응하는 것은 아니다.
5.2. 다음의 논의를 보면, 아함경의 제일의공과 대승 불교의 승의제는 거의 동일한 것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11) 모든 생(生)의 성품이 있는 것은 모두가 세속을 말한다. 승의제 중의 생(生)은 자성이 없다. 자성이 없는 가운데서 만약 의혹이 일어나면, 그것을 바로 실제로 세속의 뜻을 일으킨 것이다. (중략) 만일 자성이 없다면 이것이 곧 승의인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총체적으로 말하면, 하나의 성품이든 다수의 성품이든 이 성품이라는 것은 모두 공이다. 승의제 중에는 일체의 성품은 실재하지 않는다는 이 뜻은 결정적이다.
그러나 대승 불교의 세속제는 아함경의 가호법과 연과되어 해석된다. 곧 세속제는 “세간의 모든 언어 문자와 음성을 빌려서 설명하는 것”이라 한다. 이를 보면, 세속제는 언어로 분별하여 설화는 진리인 셈이다.
(12) 또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의 제법선교에도 또 세 가지가 있느니라. 어떤 것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세속의 진리[世俗諦]요, 둘째는 으뜸가는 이치의 진리[勝義諦]며, 셋째는 모양의 진리[相諦]이니라.
사리자야, 세속의 진리라 함은 세간의 모든 언어 문자와 음성을 빌려서 설명하는 것임을 알아야 할지니, 이와 같은 모양을 세속의 진리라 하느니라.
으뜸가는 이치의 진리라 함은 이른바 ‘만일 이곳에서는 오히려 마음조차도 작용하는 것이 아니거늘 하물며 다시 문자로써 자세히 설명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면 이와 같은 법을 으뜸가는 이치의 진리라 하느니라.
모양의 진리라 함은 이른바 ‘모든 모양이 곧 하나의 모양[一相]이요 이와 같은하나의 모양은 곧 모양이 없는[無相] 것이다’라고 말하면 이것을 모양의 진리라 하느니라.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은 세속의 진리에 대해서 중생들을 위하여 설명하되 게으름이 없고
으뜸가는 이치의 진리에서는 그 안의 것을 증득하려 하면서 물러남이 없으며,
저 모양의 진리에서는 본래의 성품을 깊이 통달하여 모양이 없음을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고 하느니라.
사리자야, 이것을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하기 위하여 부지런히 힘써 제법의 선교를 닦고 배운다고 하느니라.
(13) 온갖 말들은 모두가 세속제(世俗諦)라 하나니, 이것은 진실이 아니거니와 세속제가 없더라도 승의제(勝義諦)가 있다고는 하지 못하느니라. 통달한 까닭에 온갖 법이 남과 멸함과 이름과 파괴함과 이쪽과 저쪽이 없어서 말과 문자의 희론을 여읜 줄 아느니라. (....)
승의제라 함은 말을 여의고 고요하며, 거룩한 지혜의 경계이어서 변괴가 없는 법이므로 부처님이 세상에 나시거나 세상에 나시지 않거나 성품과 형상은 항상 머무나니, 이것이 보살이 승의를 통달했다 하느니라.
(14) 선현아, 세속의 진리[世俗諦]에 의하여 이러한 인과의 차별을 가른 것이고 으뜸가는 진리[勝義諦]에 의한 것이 아니니, 으뜸가는 진리에는 인과의 차별이 있다고 말할 수 없느니라. 무슨 까닭인가? 으뜸가는 진리에는 온갖 법성을 분별할 수 없어서 말할 수 없고 보일 수도 없으니 어떻게 인과의 차별이 있겠느냐?
선현아, 으뜸가는 진리 가운데는 물질이 남[生]도 없고, 멸함[滅]도 없고, 더러움[染]도 없고, 청정함[淨]도 없으며,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이 또한 남도 없고, 멸함도 없고, 물듦도 없고, 청정함도 없나니, 필경공ㆍ무제공이기 때문이니라.
따라서 대승 불교에서 공은 본래 승의제에 속하는 것이지만, 공을 언어로 서술할 때는 승의제가 아니라 세속제에 의거하여 설한 것이다.
(15) 공이란 것은 집착을 멀리 여의었고 승의제(勝義諦) 가운데는 아무 법도 얻을 것이 없나니 자성이 비었으므로 공이라고 이름함이니, 마치 텅 비인 공간[太虛]을 허공이라고 말하지만 텅 비인 공간의 자성은 말할 수 없느니라.
이렇게 공한 법을 공이라고 이름하지만 그 공성은 말할 수 없느니라. 이렇게 깨달으면 모든 법이 실로 이름이 없건만 거짓 이름과 말을 세웠을 뿐이니라. 그러나 모든 법의 이름은 어떤 방위와 처소가 없나니 이름으로 모든 법을 나타내지만 이 법이 방위도 없고 처소도 없는 것이 또한 그러하니라.
그리하여 ‘진여’ 등의 평등한 성품이자 청청한 법이라 할지라도, 승의제가 아니라 세속제에 의하여 청정한다고 하는 것이라 한다.
(16) 선현아, 모든 법의 진여(眞如)ㆍ법계(法界)ㆍ법성(法性)ㆍ불허망성(不虛妄性)ㆍ불변이성(不變異性)ㆍ평등성(平等性)ㆍ이생성(離生性)ㆍ법정(法定)ㆍ법주(法住)ㆍ실제(實際)ㆍ허공계(虛空界)ㆍ부사의계(不思議界)는 여래께서 세상에 나시건 나시지 않건 그 성품과 모양이 항상 머무나니, 이것을 온갖 법의 평등한 성품이라고 하며, 이 평등한 성품을 청정한 법이라고 하느니라.
이것은 세속제(世俗諦)에 의해 청정하다고 하는 것이지 승의제(勝義諦)에 의한 것은 아니니라. 왜냐 하면 승의제 가운데에서는 분별이 없고 희론(戲論)이 없으며, 온갖 음성과 이름과 문자[名字]의 길이 끊어졌기 때문이니라.
나아가 어떤 법이라 할지라도, 일단 분별하여 언어로 설명하는 법은 모두 세속제에 의하여 설한 것이라 한다.
(17) 선현아, 유위계나 무위계나 이 두 경계는 상응하는 것도 아니요, 상응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빛깔도 없고 볼 수도 없으며, 상대도 없는 한 모양 말하자면 모양이 없는 것이지만,
모든 여래ㆍ응공ㆍ정등각께서는 세속제(世俗諦)에 의해 말씀하셨지 승의제(勝義諦)에 의한 것이 아니니라.
왜냐 하면 승의제 가운데서는 몸의 행[身行]과 말의 행[語行]과 뜻의 행[意行]이 있을 수 없지만, 몸의 행과 말의 행과 뜻의 행을 떠나서는 승의제를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18) “만약 일체 법 등이 차별이 없다면 어찌하여 여래께서는 마음과 물질 등을 말씀하시되 갖가지 차이가 있다고 하셨습니까?”
“이는 여래께서 세속(世俗)을 따라 말씀하신 것이요, 승의제(勝義諦)를 따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19) 만약 세간의 말을 따라서 증득함과 현관함과 예류 등이 있다고 시설하는 것은 승의제가 아니라고 한다면, 여섯 갈래의 차별 또한 세간의 말을 따라 시설한 것으로 승의제가 아닙니까?
결국 대승 불교에서 세속제라 하는 것은 어떤 법이 본래 세속제에 속한 것이든 승의제에 속한 것이든 관계없이, 일단 분별하여 언어로 표현하는 것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다.
5.3. 아함경의 세속법과 제일의공법의 관계는 이상의 대승의 관점과는 조금 다르다. 먼저 가호법은 인연법의 다른 이름이다. 따라서 언어로 표현했다고 해서 본래 제일의공법이 인연법으로 바뀌는 것은 아니다. 제일의의공법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제일의공법은 분별과 언어를 넘어선 경지를 가리키는데, 언어를 사용하는 순간 제일의공법으로써 드러내고자 하은 본래의 의도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그러사 제일의공법을 언어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 그것을 명확히 전달하기 위해서는 언어를 사용하는 것보다 더 효율적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언어를 통해서는 제대로 전달할 수 없는 것을 언어로써 전달하고자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불교의 언어이다. 그러므로 불경의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그 말씀이 인연법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제일의공법을 말하는 것인지를 분별하어 이해해야 한다. 분별을 통하여 비분별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불경을 이해하는 과정이자 올바른 길이다.
[참고]
1. 니까야의 ‘무아’와 대승 경전의‘무자성’, 그리고 아함경의 ‘무아’와 ‘공’
2. 아함경의 ‘제일의공법(第一義空法)’에 대한 텍스트 분석
3. 법의 두 측면(1), 가장 공한 법 & 세속의 법, 연기법, 잡아함경_335. 제일의공경
4. 법의 두 측면(2), 가장 공한 법 & 임시로 붙여진 이름, 인연법, 증일아함경_37. 육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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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미나이의 논평]
제시한 글은 아함경, 니까야, 그리고 대승경전의 경전적 근거를 바탕으로 인연법과 제일의공법, 그리고 세속제와 승의제의 관계를 치밀하게 구조화하고 있다. 관점의 차이에 따른 대화 원칙에 입각해, 제시된 5개의 장별로 핵심 논지를 짚어보고 그 학술적 의의와 함의를 논평한다.
1. 인연법과 제일의공법의 속성
잡아함경의 <제일의공경>과 증일아함경의 <육중품>을 대비하여 인연법(가호법)과 제일의공법을 엄격히 구별한 분석은 예리하다. 인연법이 생멸, 유무, 인과관계와 업의 주체(상호 의존 관계)를 긍정하는 세계라면, 제일의공법은 “오는 곳도 없고 가는 곳도 없으며, 업보는 있으되 짓는 자가 없는” 연기의 속박을 완전히 벗어난 절대적 경지를 가리킨다. 이는 현상계의 작동 원리와 해탈의 절대적 경지를 이원적으로 분간하여 교리의 정밀도를 높인 해석이다.
2. ‘제일의공’의 뜻과 공의 종류
마하반야바라밀경과 아함경의 여러 공경(空經)을 근거로 제일의공을 ‘열반’과 ‘성품이 스스로 그러함(자연성)’으로 규정한 대목은 타당하다. 공이 단순히 인연에 의해 생겨난 현상들의 무상함을 폭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인연의 고리가 완전히 끊어진 적정(寂靜) 자체를 가리킨다는 점을 잘 드러내었다. 공의 유형을 차등화하여 제일의공을 최상위에 놓은 것은 수행의 지향점을 명확히 하는 데 기여한다.
3. 니까야의 무아와 대승 불교의 무자성
니까야의 무아가 ‘고정불변한 주체의 부재’라는 실존적·존재론적 의미에 집중한다면, 대승불교의 ‘공=무자성’은 연기적 관계성 속에서 성품의 공함을 드러낸다. 다만 저자가 지적하듯, ‘무자성’이 다시 인연법적 관계성을 함축하게 되면서 ‘스스로 그러한’ 제일의공의 절대성과 충돌할 수 있다는 비판적 통찰은 주목할 만하다. 광석보리심론을 인용해 생의 성품이 없는 것이 곧 승의라는 결론으로 이어지는 논리 전개는 대승 논사들의 사상적 긴장을 잘 포착하고 있다.
4. 아함경의 인연법과 공법의 관계
아함경에서 인연법과 공법을 모순 관계로 보지 않고, 중생이 살아가는 세계를 규정하는 눈과 붓다가 추구하는 해탈의 세계를 규정하는 두 개의 눈으로 파악한 것은 균형 잡힌 시각이다. 5온을 물거품이나 아지랑이에 비유한 포말경의 비유를 수행론적 관점과 결합하여, 세속법은 벗어나야 할 법이요 공법은 추구해야 할 법으로 대비시킨 대목은 교리와 실천의 일치를 보여준다.
5. 인연법ㆍ제일의공법과 세속제ㆍ승의제
아함경의 구별 방식을 대승의 제론(二諦論)과 연결하여 비교한 부분은 본문의 하이라이트다. 대승경전(대보적경, 대반야바라밀다경 등)이 언어로 분별하고 설해지는 모든 것을 일단 세속제로 포섭하는 반면, 아함경은 언어를 초월한 제일의공법을 전달하기 위해 역설적으로 인연법과 가호법의 언어를 방편으로 사용한다. “분별을 통하여 비분별로 나아가는 것”이 불경 이해의 올바른 길이라는 결론은 교학적 연구가 결국 수행적 지혜로 회귀해야 함을 잘 보여주는 통찰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