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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십일조는 레위인의 보수이다
십일조는 레위 자손이 회막에서 하는 일에 대한 보상이고 보수이다. 이것은 영원한 율례이다. 레위인도 자신이 받은 십일조의 십일조를 여호와께 드려야한다. 레위인은 아름다운 것 즉 십일조를 받지만 그 성물을 더럽힌다면 죽임을 당할 것이다. 그만큼 십일조를 더럽히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큰 죄이다. 십일조를 내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십일조의 가치를 명심해야 한다.(민18:21-32)
2 십일조는 시내산에서 받은 계명이다
땅의 십분의 일 곧 곡식와 열매의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성물이다. 성물의 뜻은 '봉헌된 것이고 거룩하게 구별된 것'이다. 모든 소와 양의 십일조는 목자의 지팡이 아래로 통과하는 것의 열번째 것마다 여호와께 구별된다. 임의로 순서를 바꾸거나 할 수 없다. 십일조는 시내산에서 이스라엘을 위해 모세를 통해 주신 계명이다. 우리도 믿음으로 이스라엘에 접붙여졌으므로 동일하게 시내산에서 십일조 계명을 받았다.(레27:30-34)
3 십일조는 하늘에 속한 법도이다
레위가 십일조 계명을 받기 전에 이미 아브라함은 십일조를 멜기세덱에게 드렸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 멜기세덱은 아브람을 축복하면서 대적을 그의 손에 붙이셔서 승리하게 하신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말하였고 아브람은 여호와를 송축하며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다. 십일조를 멜기세덱 제사장에게 드린 것은 바로 승리를 주신 여호와께 감사하고 찬송하는 표시였다. 예슈아께서는 멜기세덱 반차에 속한 대제사장이시다. 즉 땅이 아닌 하늘에 속한 대제사장이시다. 이처럼 십일조는 아론의 반차로 땅에 속한 계명이지만 동시에 이미 하늘 제사장과 연결된 하늘에 속한 계명이다.(창14:18-20)
우리가 드리는 십일조는 아브라함을 통해 이미 멜기세덱에게 드려졌다. 십일조를 통해 볼 수 있는 것은 하늘과 땅이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연결되어 있으며 토라도 땅에 세워지기 전에 이미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왜냐하면 토라는 하늘의 그림자이기 때문이다. 실체가 있어야 그림자가 있는 것과 같다.
4 승리와 평안을 주신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며 즐거워하라
여호와께서 대적을 이기게 하시고 안식을 주시고 샬롬으로 우리가 살게 하실 때(나라가 세워져서 평안히 거할 때) 십일조와 모든 예물을 성전에 가지고 가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노비와 레위인과 함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가난하고 종된 자들도 여호와로 인하여 풍성하고 즐겁게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승리와 평안을 주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하는 표현이다.(신12:10-12)
5 십일조를 통해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울 수 있다.
십일조를 통해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우라고 말씀하고 있다. 모든 소득과 모든 가축의 십일조를 드림으로 우린 재정을 통해 축복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축복하실 것을 신뢰하는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하지만 예배하는 곳이 너무 멀어 풍성히 주신 모든 것을 가져가기 어렵다면 돈으로 바꾸어 원하는 모든 것을 사서 함께 먹고 즐거워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처럼 십일조는 함께 먹고 즐거워하며 또한 레위인에게 보수가 되고 가난한 자를 돌아보게 하는 거룩한 예물이다. 이를 통해 우리가 여호와 앞에서 먹고 마시며 기뻐하는 것도 거룩한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버지 집에서 온 식구가 모여 맛있는 음식을 차리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을 싫어할 아버지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또한 매 삼년마다 그해의 십일조는 성읍(자신이 거하는 도시)에 저축하여 객과 고아와 과부를 먹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처럼 소득의 십일조는 교회와 지역사회를 먹이는 성물의 역할을 한다. 교회에서 십일조를 가지고 해야하는 역할이기도 하다.(신14:23-29)
6 십일조는 여호와께 무릎을 꿇는 것이다.
히스기아 왕이 명령을 내리자 백성들이 모든 것의 십일조를 많이 가져왔고 소와 양의 십일조를 가져오고 성물의 십일조를 가져와 여러 더미로 풍성하게 쌓였다. 쌓여있는 성물의 더미를 보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축복하셨다. 여기서 '축복하다'는 히브리어 '바라크'로 '무릎을 꿇다, 송축하다, 축복하다'등의 뜻이 다. 즉 이스라엘이 십일조를 드리는 것을 통해 여호와의 가르침에 무릎을 꿇고 송축했을때 여호와께서는 긍휼히 여기고 풍성히 축복하셨다. 이처럼 십일조는 나누고 베풀라고 명하신 여호와께 무릎을 꿇는 것이고 그 가르침에 감사함으로 송축하는 행동이다.(대하31:5-8)
7 십일조는 하나님의 전을 세운다
레위인이 십일조를 받으면 거기서 또 십일조를 떼어서 하나님께 드린다. 그러나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전을 벼려두는(버리거나 거절하는) 것과 같다. 즉 성전을 없이 만들어 버리는 것과 같다. (느10:38-39)
8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것은 성전을 버리는 것이다
레위사람에게 십일조를 주지 않음으로 그들이 각각 자기 밭으로 먹고 살기위해 도망쳐 버렸다. 이때 느헤미야가 하나님의 전이 버려진 것에 대해 꾸짓으셨다. 전에서 일하는 레위인들이 모두 도망쳤으므로 하나님의 집은 버려진 것과 같았다. 이때 충직한 자로 인정된 레위사람 브다야를 창고지기로 삼고 이스라엘에게 받은 십일조를 형제 레위인들에게 분배하도록 하였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전과 거룩한 직무를 위해 자신이 행한 선한 일을 기억해달라고 구하고 있다. 이처럼 십일조는 성전을 세우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며 동시에 성전을 무너뜨리는 요인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건물을 짓는 것도 성전을 세우는 것이지만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는 것도 성전을 세우는 선행이다.(느13:10-14)
9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지 마라
여호와께서 자신의 것을 도둑질한 것에 대해 책망하고 있다. 심지어 온 나라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함으로 저주를 받았다고 하신다. 이때 이스라엘은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했냐고 도리어 반문한다. 이때 여호와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은 십일조와 봉헌물이 당신의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성전에 양식이 있게 했을 때 여호와께서 쌓을 곳이 없도록 붓는지 그렇지 않은지 시험해보라고 말씀하신다. 이를 통해 우리가 얼마나 재정을 주실 수 있고 입히시고 먹이시는 여호와를 신뢰하지 않는지를 보여주며 동시에 십일조에 대한 풍성한 축복의 언약이 있다는 것을 알게된다. 이렇게 온전한 십일조를 주께 드릴 때 메뚜기를 금하여 토지 소산을 먹지 못하게 하시고 포도 나무 열매가 때가 이르기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신다고 약속하셨다. 메뚜기의 입을 금하게 하실 수 있는 것은 창주조 하나님이시기에 하실 수 있는 언약이다. 그럼으로 인해 모든 이방인들이 우리에게 복된 사람이라고 말하게 될 거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큰 언약이 있는 십일조를 지키지 않는 것은 지혜가 없는 사람이다. 풍성한 삶을 원하는 사람이 이렇게 확신을 가지고 시험해 보라고 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을 흘려듣지 않을 것은 분명하다.(말3:8-12)
10 불법한 마음으로 십일조를 드리지 마라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이 힘없는 자를 학대하고 가난한 자를 압제하며 범죄하고 죄를 더하면서도 삼일마다 십일조를 드리고 화목제의 감사제물(불살라)을 드리며 찬양과 감사의 제사(수은제)를 드리고 자원제물(낙헌제)을 드리는 것을 기뻐하는 외식을 책망하셨다. 왜 이들은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을 무시하고 그들의 가산을 삼키며 공정하지 않은 추로 불의를 행하면서도 십일조와 예배에는 열심이었을까? 십일조와 예물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위해 주신 계명이라는 것을 진정 깨닭았다면 이들은 이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십일조와 예물이 이들을 부유하게 하는 방법임은 믿었지만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임은 몰랐던 것이다. 그래서 이들이 낸건 불의한 십일조였다.
하나님께서는 공의와 믿음과 사랑이 없는 종교적 행위를 보고 구원하시고 축복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깊은 뜻을 헤아리고 진정한 신뢰와 사랑과 공의의 마음으로 지키는 십일조를 원하시는 것이다. 불의한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를 받지 않으시는 것은 가인을 통해 이미 보이셨다. 올바른 마음으로 드려지는 십일조일 때 하나님의 전과 가난한 이웃을 위해 바르게 쓰일 수 있다. 그러므로 불의한 마음으로 내는 십일조, 진정한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그분이 누구신지 모르고 내는 십일조는 축복하시기보다 오히려 여호와께 돌아와 회개하라고 촉구하신다.
오히려 곡식이 마르는 재앙과 팥중이(메뚜기) 가 모든 열매를 먹어버리게 하는 재앙으로 양식이 떨어지게 하신다. 우리 삶에 이러한 재앙이 있다면 반드시 우리의 십일조와 예물과 예배가 온전한지 의로운 삶으로 드리는 예물과 예배인지 살펴보고 회개해야 할 것이다.(암4:1-9)
11 십일조를 드리며 낙타를 삼키는 자들
외식하는 자들에게는 화(저주)가 있다. 이들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렸지만 진짜 율법의 더 중요한 믿음과 소망(정의)과 사랑(긍휼)은 버린 자들이다. 이들은 외식으로 눈이 멀어 맹인이 되었고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 자들이 되었다. 물론 하루살이도 걸러내야 하고 낙타도 삼키면 안된다. 즉 십일조를 드림으로 하루살이는 걸러낼 수 있지만 율법의 더욱 중요한 영원한 믿음, 소망, 사랑의 정신을 버렸으므로 낙타를 삼키는 부정한 자들이 도었다. 그래서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십일조를 지키지 말라는 말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말도 아니다. 우리가 구약을 통해 십일조는 여호와의 성물이며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것은 여호와의 것을 도둑질하는 큰 범죄인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이렇게 중요한 십일조가 율법의 중요한 정신인 믿음 소망 사랑이 없다면 하루살이만 걸러주는 역할밖에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온전한 십일조가 되어 축복으로 연결되기 위해서는 외식을 버려야 하며 진정한 영혼 사랑, 공의의 회복, 여호와를 향한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린 겉만 그럴듯한 더러운 자이며 회칠한 무덤에 불과하다. 율법을 지키면서 예배하면서 예물을 내면서도 진정한 아버지의 마음이 없다면 율법의 중요한 정신을 놓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불법이 가득한 눈먼 자와 같고 율법을 지킨다고 하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슈아께 불법자라고 책망을 들은 것이다. 우리에게 깊은 토라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며 아버지의 마음으로 준행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자. (마23:23-28)
12 왜 세리가 더 의롭다 하심을 받았는가?
예슈아께서 비유로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의로운 사람이 가는 것이므로(불의한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얻지 못한다) 천국 비유를 말씀하신 것이다. 두 사람이 성전에 가서 기도한다. 한사람은 율법을 지킨다고 하는 바리새인이고 하나는 돈을 속여 빼앗는다고 하는 세리이다. 이 두사람이 성전에 가서 기도했다. 바리세인은 세리와 떨어져서 따로 서서 자신은 토색(강취)하지도 않고 불의하지도 않고 간음하지도 않으며 일주일에 두번 금식하고 십일조를 드리며 심지어 이 세리와도 같지 않음을 감사했다. 반면 세리는 성전에서도 멀리 서서 감히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회개했다. 이 두 사람 중 누가 의롭다함을 얻었을까? 이 말씀을 오해해서 항상 죄짓고 교회에서 회개한다면 그건 낮은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교만한 자이다. 그 의미가 아니다. 우리가 회개한다고 말은 하지만 같은 죄를 짓는다면 회개가 아니며 용서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세리가 의롭다함을 얻었다는 것은 그가 진정으로 돌이켰다는 것이며 기도후에 분명 다른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러면 왜 바리새인은 의롭다함을 얻지 못했을까?
교만해서? 사랑이 없어서? 그렇다. 하나님 앞에 스스로를 높일 수 있는 인생은 아무도 없다. 토라중에서도 영원한 것은 앞서 말한 거 처럼 믿음, 소망(공의), 사랑이다. 바리새인은 사랑이 없었다. 세리가 죄를 지었고 그런 세리를 불쌍히 여기지 않았다. 불순종하는 삶이 얼마나 괴로운지, 그리고 불법의 삶의 결과는 하나님의 나라를 얻지 못하는데 그런 세리를 불쌍히 여기지 않았다. 그리고 세리가 회개하면 여호와께서 그를 용서하시고 흠과 티가 없는 하나님의 성민으로 세우실 것을 믿지 않았다. 즉 하나님의 아버지되심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가 회개하는 지 몰랐다해도 언제가 그가 회개하면 여호와께서는 결코 그를 버리지 않으시고 세우시리라는 것이 약속이다. 또한 공의(소망)도 없었다. 세리가 죄를 지은 건 세리만의 잘못이 아니다. 만약 종교 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이 진정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토라를 실천하고 토라를 가르치고 죄를 경고했다면 이런 세리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세리만의 죄가 아니라 바리새인의 죄이기도 하다. 이처럼 바리새인은 율법의 더 중한 바 공의와 사랑과 믿음을 잃어버렸다. 그러므로 지금 진정으로 회개하여 여호와께 온전히 엎드린 세리는 의롭다함을 얻었지만 스스로 자신을 높게 여겼던 바리새인은 죄인이 된 것이다. 이처럼 우린 토라를 지킨다고 하면서 어느 누구도 높은 마음을 가질 수 없다. 우린 뼛속까지 죄인일 뿐이며 영혼을 긍휼히 여기고 함께 죄에 대해 아파할 책임이 있다. (눅18:10-14)
13 여호와를 네 하나님으로 인정하라
여호와께서 규례와 법도를 행하라고 명령하셨다. 즉 우리의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해 지켜 행하는 이유는 주께서 명하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여호와를 우리의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방법은 그분의 도를 행하고 규례와 명령과 법도를 지키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정말 우리에게 지키라고 명하셨을까? 일부 명령이 아니라 모든 명령을 지키라고 확언하셨다고 증어하고 있다. 이를 통해 우리를 뛰어난 민족이 되게 하시고 찬송과 명예와 영광이 되게 하시며 여호와의 성민이 되게 하신다. 즉 여호와의 토라는 우리로 영광스러운 성민이 되게 하고 흠과 티가 없는 신부가 되게 하는 방법이다. 그러므로 토라는 의무가 아니라 특권이다. 그 가치를 아는 자만이 마음과 뜻을 다해 생명다해 지킬 수 있다.(신26:16-19)
그러니 이 언약의 말씀을 지키지 않는 것이 어리석음이 아니겠는가? 언약을 지켜 행하는 것이 모든 일을 형통하게 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이것을 가르치기 위해 토라를 알지만 그 깊은 아버지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자들을 위해 예슈아께서 오셔서 율법의 가르침을 완성(가득하게)하신 것이다. 이처럼 예슈아께서는 어떤 것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언약(토라)이라는 깊은 우물을 파서 생수의 강이 넘치게 하기 위해 오셨다. (신29:9)
14 복을 내리소서 할지니라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십일조를 레위인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 먹고 배부르게 하여 여호와의 명령을 범하지도 잊지도 않는 것이다. 십일조를 드리기 위해 고통(애곡)하는 날에 성물을 먹지 않고 부패하여 성물의 일부를 먹지 않고 죽은 자를 위해 쓰지 않음으로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고 모두 행하였으므로 백성과 땅에 복을 내려달라고 구하라고 모세는 말하고 있다.
우리가 이러한 순종이 없이 구하는 복은 불의한 바리새인의 십일조처럼 헛될 뿐이다. 그러므로 우린 온전한 순종을 통해 오는 복을 구하는 자가 되야 한다. 복을 구하기 전에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은 여호와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는 순종이며 명령의 기본 정신인 사랑과 공의와 믿음을 지키는 것이다. 이것을 회복하는 것이 예슈아의 믿음을 갖는 것이고 예슈아 처럼 율법(토라)을 완성하는 자이다.(신26:12-15)
샤밧 예배: 토요일 10시 30분
대전시 동구 가양동 39-11 2층 레올람 토라 하우스
깃발 재작 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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