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절부터 40절까지의 말씀은 야곱에게 복을 빼앗긴 에서에게 이삭이 축복해 주는 내용입니다.
야곱을 향한 이삭의 축복이 마치자마자 에서가 사냥하여 돌아옵니다(30절). 그리고 별미를 만들어 아버지에게로 가지고 가서 잡수시고 마음껏 축복하기를 원하지만(31절) 아버지는 크게 떨며 ‘너는 누구냐’며 묻고서(32절) 이미 야곱, 그를 위하여 축복하였으므로 그가 반드시 복 받을 것이다고 합니다(33절). 아버지의 대답을 들은 에서는 자신에게도 축복하여 달라며 슬피 울며 소리 지르고(34절), 이에 이삭은 ‘네 아우가 와서 속여 네 복을 빼앗았다’며 에서에게 말을 합니다(35절).
에서는 야곱의 이름을 지적하며 그에게 속임을 두 번 당했음을 아버지에게 말하면서 “아버지께서 나를 위하여 빌 복을 남기지 아니하셨나이까”(36절)라고 복을 요구하지만 이삭은 야곱에게 축복한 내용을 에서에게 전하는데, “이삭이 에서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그를 너의 주로 세우고 그의 모든 형제를 내가 그에게 종으로 주었으며 곡식과 포도주를 그에게 주었으니 내 아들아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으랴”(37절)라고 합니다. 이는 앞의 29절 말씀에 대한 반복과 추가적인 복의 내용입니다.
위 본문에서 ‘주로 세우고’라는 말은 유업을 받을 장자로 세웠다는 뜻이고, ‘종으로 주었으며’라는 말은 야곱 이외의 모든 형제들은 야곱을 섬기는 자가 되게 한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이삭의 축복은 후일에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이삭의 대답에 분함을 못이겨 아버지에게 복을 빌어 달라며 소리쳐 간구하지만(38절),
이삭은 에서를 향하여 “네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멀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멀 것이며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버리리라”고 합니다(39,40절). 이는 에서에 대한 저주이며 이는 하늘의 복은 결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 주어지지 않고 오직 믿음의 혈통따라 주어진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위 본문에서 ‘네 주소는 땅의 기름집에서 멀고’라는 말은 에서의 거처가 비옥하지 못하다는 뜻이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멀 것이며’라는 말은 하늘에서 이슬도 내리지 아니하여 땅이 메마르다는 뜻이며,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라는 말은 침략자들과 전쟁을 하며 산다는 뜻이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라는 말은 야곱의 후손을 섬긴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버리리라’라는 말은 에서가 동생에게서 벗어나면 노예의 생활을 벗어난다는 뜻입니다. 정리하면 에서가 거처하는 곳은 비옥하지 못한 건조한 땅이며, 거칠고 사나워서 다른 족속과 싸우며 살게 되고, 그가 야곱을 섬기지만 자주 배반하게 될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이러한 예언은 후대에 에서의 후손에게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아무리 에서를 사랑하는 아버지라 할지라도 자기의 마음대로 열조의 축복을 할 수 없습니다. 일반적인 생각 같으면 이삭이 자기를 속인 야곱을 저주해 버리고 사랑하는 에서에게 축복을 하여 주거나 아니면 에서에게도 똑같은 축복을 하여 주면 되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것은 복의 근원이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목사나 부흥사가 나를 위해 복을 빌어 주면 복을 받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생각은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복을 빌어서 복을 받았고, 이삭이 야곱에게 복을 빌어서 복을 받은 것을 곡해하여 생긴 현상입니다. 열조를 이어가는 아브라함이나 이삭이 빌어 준 복은 그들 마음대로 후손에게 빌어 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열조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세워주신 언약과 믿음에 근거하여 빌어준 것이며 이 또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능력 가운데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명심할 것은, 저들이 복을 빌어서 복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미 그들에게 복을 주시기로 작정하신 것을 언약해 주셨기 때문에 복을 빌어준 것이고 또 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인간적인 윤리나 도덕적 관념으로는 납득하기가 어려울지 모릅니다. 특히 ‘속이는 자’인 야곱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따라서 성경은 일반적인 도덕적 관념으로 해석될 수 있는 내용이 결코 아닙니다.
에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복에서 떨어지고 분리되어 저주가운데 살아가는 자가 됩니다. 이것은 야곱에게 팥죽 한 그릇으로 인한 자신의 실수 또는 무지에서 온 것이 아니라 앞서 하나님께서 언약하신대로 이루어졌으며, 또한 에서는 27장 마지막 부분의 말씀과 같이 저주와 유기된 가운데, 하늘나라의 순리대로가 아니라 세상 순리대로 살아가는 자가 됩니다. 에서는 아버지 이삭에게 애걸해보지만 불가능하다는 응답만 듣게 됩니다. 아버지로부터 단호히 거절을 당합니다.
41절부터 46절까지는 리브가가 야곱에게 형 에서의 복수를 피하라고 하는 내용입니다.
야곱은 형 에서가 생각하는 복을 가로챔으로 말미암아 에서로부터 미움을 받고 죽음에 직면합니다(41절). 그 죽음의 시기는 ‘이삭이 곡할 때’입니다. 이같은 에서의 뜻을 어머니 리브가가 알아채고서 야곱에게 이르되 “네 형 에서가 너를 죽여 그 한을 풀려 하니 내 아들아 내 말을 따라 일어나 하란으로 가서 내 오라버니 라반에게로 피신하여 네 형의 노가 풀리기까지 몇 날 동안 그와 함께 거주하라”(42,44절)고 지시합니다.
리브가는 야곱에게 형 에서의 노가 풀리면 연락하여 집으로 오게 하겠다고 하고서(45절) 이삭에게는 야곱을 라반에게 보낼 명분을, 헷 사람의 딸들로 말미암아 자신의 삶이 싫어지고 삶이 재미없음으로 핑계됩니다(46절). 헷 사람의 딸이란 말은 에서가 헷 족속의 딸들과 결혼을 하여 부모의 근심이 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26:34,35 참조)
43절의 가족 관계는 앞선 22장 후반부의 가족관계를 이어 확인해주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타난 족보나 계보, 가족관계 등은 성경 말씀의 무오성과, 어느 특정 지역을 초월한 세계사를 무대로 하나님께서 계시성을 드러내셨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앞에서도 여러 번 언급했었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칭찬하시는 ‘믿음’과 ‘신앙’이 어떤 것인지 재차 확인하고 넘어갔으면 합니다. 신앙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설교’가 아닙니다. 신앙은 도덕과 윤리가 아닌, 죄인된 나 자신을 그리스도께 나를 맡기는 믿음의 삶입니다. 히브리서11장4절에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려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더 나은’은 무엇보다 더 낫다는 것일까요? 그리고 ‘제사’는 무엇이며 ‘의로운 자’라는 것은 어떠한 자를 말씀하나요?
‘더 나은’은, 단순한 비교가 아닙니다. 같은 물체를 가지고 성질 따라 더 좋아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계시적 차원에서 아닌 것과 맞는 것의 구분입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제사’는 오직 하나를 의미합니다. 바로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제사 자체에 효능이 있거나 제사를 꾸미고 열심을 내고 우리의 마음 자세 따라 실패와 성공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의 제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피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의로운 자’는, 롬3장23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하셨습니다. 즉 의인은 한 명도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한 분 예수만이 의로우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를 의인이라고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순종하며 예수와 함께 동행하는 것이 신앙이요 믿음입니다】
위의 내용 전체를 연결하여 정리해 보겠습니다. 인간의 의를 드러내는 모든 것은 헛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죽으심을 믿음으로 나아갈 때 성경은 ‘온전한 제사’라고 말씀하며 이것을 ‘더 낫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나를 위해 죽으심을 믿는 자들을 ‘의로운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나의 죄를 위해 대신 죽으셨다는 고백과 믿음을 가진 자는, 이제는 나의 몸이 내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것이라 결단하며(갈2장20절)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갑니다.
이것이 ‘참 믿음’이요 ‘성숙한 신앙’의 모습입니다. ‘좋은 믿음’은 내면의 사상과 생각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께서 나와 동행하심을 날마다 확인하며 순종하고(임마누엘) 그분 앞에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말씀을 의지하며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의 길을 갑니다. 신앙의 선진들이 먼저 그 길을 갔습니다. |